제198화. 이별과 재회 (6)
두 여자의 난타전은 주변 모든 것을 파괴할 정도로 치열했다.
진재희는 괴수를 지키기 위해, 우지혜는 괴수를 죽이기 위해.
진재희의 성검은 우지혜에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지면이 베어지고 공간은 휘었다.
엄청난 파공음은 연이어 터져나갔고, 우지혜는 처절하게 막아 냈다.
지금 진재희의 성검은 리그에서 가장 파괴력이 높았다.
그 사실을 우지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방식이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진재희를 유인하여 자신이 유리한 상태가 될 때까지 방어만 하는 것이다.
물론 진재희는 우지혜의 전투 스타일에 따라갈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우지혜가 비틀거릴 때 완전히 밀어붙여야만 했다.
성검을 비틀어 공간을 베었다.
우지혜의 불기둥이 성검에 달라붙어 끝없이 불탔지만, 진재희는 성검을 캔슬하곤 또 다른 성검을 불러왔다.
진재희의 손에 또다른 성검이 쥐어지고, 이번에는 유효타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휘릭- 서걱!
성검은 우지혜의 오른 다리를 베었다.
다리가 절단될 만큼 깊숙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대미지는 있었다.
‘……아파. 아…… 파.’
우지혜는 진재희의 파상 공세에 밀려 점차 힘을 잃어갔다.
진재희의 오른손 주먹 한 방이 우지혜를 향해 뻗어졌다.
퍼- 억!
우지혜는 가드를 올려 막았지만, 온몸이 흔들렸다.
그녀의 등 뒤로 뻗은 진재희의 잽에서, 공기가 찢겨 나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우지혜는 주위에 불기둥을 만들며 생각했다.
정말 미친 여자라고.
사실 쇼핑몰에 봤을 때부터 들었던 생각이기도 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람을 베어 나가는 모습에, 우지혜는 진재희를 보며 혐오감이 들었다.
분명 팔 하나를 사용할 수 없을 텐데, 진재희는 전투력의 차이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강해진 느낌이었다.
우지혜는 진재희와 일대일로 붙었을 때, 비등하게 싸울 순 있겠지만 그녀를 이길 수 없다.
진재희를 죽이기 위해선 김강석이 필요했다.
김강석은 진재희의 활발하고 다양한, 그리고 창의적인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진재희 죽이기에 핵심은, 우지혜가 아닌 김강석이었다.
우지혜는 반대편 거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저씨는…… 아직인가.’
하지만 그때, 불기둥을 빠져나온 진재희가 긴 다리를 뻗으며 우지혜의 뺨을 노렸다.
부웅-!
총알이 공기를 가르며 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진재희의 발차기는 빠르고 강력했다.
우지혜는 손만을 들어 그 다리를 막아냈다.
터억-! 쾅!
하지만 강력한 한방에는 몸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진재희는 한 방으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허리를 비틀어 반대 발로 우지혜의 정수리를 노렸다.
우지혜는 재빠르게 몸을 뒤로 빼며 내려찍기를 피했다.
그 순간 허공에 휘둘러진 진재희의 발은 지면에 닿지도 않았지만, 지면을 붕괴하기 시작했다.
콰과광-!
만약 정면으로 저 발차기를 맞았다면 우지혜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우지혜는 다시 손가락을 교차했다.
‘치잇.’
하지만 진재희는 틈을 주지 않았다.
타악-!
“……?!”
진재희는 교차한 우지혜의 손목을 오른손으로 때려, 스킬 시전을 방해했다.
우지혜는 다시 손가락을 교차했고, 진재희는 다시 손을 때렸다.
작은 손가락의 움직임일 뿐이었는데도, 진재희는 그 세심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전략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우지혜는, 맞불 작전을 펼쳤다.
두 여자의 개싸움이 시작되었다.
일반인의 눈으로는 따라갈 수조차 없는 잽과 킥이 서로를 향해 오갔다.
우지혜는 중간중간에도 아티팩트를 사용하려 움직임을 취했지만, 그럴 때마다 진재희에게 저지당했다.
우지혜는 작게 중얼거렸다.
“짜증 나게.”
지금껏 진재희의 공격을 막고만 있었던 우지혜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
진재희는 피를 토해 내며 뒤로 날아갔다.
조금의 시간을 번 우지혜는 곧장 아티팩트를 시전했다.
다시 우지혜에게 수많은 화 검이 소환되었다.
진재희는 아직까지 등을 수그린 채, 기침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러다 입가의 침을 손등으로 쓸며 우지혜를 바라보았다.
우지혜의 방독면이 반쯤 벗겨져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진재희는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고는 말했다.
“어디서 봤다 했더니. 생각났어. 1라운드 때 그 꼬맹이네. 용케 살아있었어.”
“…….”
“그때, 널 죽였어야 하는 건데.”
“…….”
우지혜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아티팩트를 전개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빠르게 교차했다.
휘릭- 휘릭-.
화 검이 사선을 이루며 올곧게 진재희에게 쏟아졌다.
파바바바바바박!
화염이 솟구치고 연기에 휩싸인 진재희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우지혜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확실하게 죽였다.
지금껏 수많은 플레이어를 죽인 우지혜는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우지혜는 불타오르는 그녀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마무리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우지혜는 좀 더 일찍 강시온을 제거했어야만 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강시온이 없었더라면, 메트로는 손쉽게 서울을 집어삼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많은 죽음을 봐왔다.
그리고 많은 죽임을 봐왔다.
1라운드 때, 강시온과 같은 게임을 치르며 그녀가 느낀 감정은 하나였다.
결국 사람은 욕심 때문에, 모든 것이 꼬이게 된다고.
강한 자의 밑에 들어가 사는 것이, 죽음을 막는 유일한 길이었다.
메트로는 강하다.
만경에 이렇게까지 군대를 보냈어도, 살아남을 만큼 강력하다.
하지만 만경은 메트로에 굴복하지 않았다.
만경이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죽음과 죽임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더 강력한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 구조이다.
우지혜는 강자의 편에 서서, 약자를 보듬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지혜는 만경에 적대감을 가졌다.
만경을 이루는 모든 이들이, 만경을 지키려 드는 병사들이 한없이 멍청해 보였다.
반항하면 죽게 될 텐데.
결국 인간은 자존심 때문에 죽는 거다. 저 생살이 불타는 여자처럼 처참하게.
우지혜는 시전했던 불꽃을 캔슬했다.
불꽃이 사그라들다 하늘에 흩어졌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다.
하지만 화염 연기가 걷히고 드러난 진재희의 모습은, 우지혜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
그녀의 주위에는 쇳빛의 구체들과 빛나는 선들이 휘감겨 있었다.
끝없이 불타는 불꽃들은 구체 하나하나에 달라붙어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구체와 선에 달라붙은 불꽃들은 대상이 소멸할 때까지 영원히 꺼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안 강시온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네.”
강시온은 아티팩트를 쏘아 우지혜를 노렸다.
우지혜는 곧장 불기둥을 세워, 그의 아티팩트를 막았다.
강시온의 아티팩트는 진재희처럼 파괴력이 있지 않아, 불기둥을 뚫을 순 없었다.
심지어 강시온의 구체에 붙어 있는 건 애초에 우지혜의 불꽃이기 때문에 타격해도 별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우지혜를 물리칠 순 있었다.
이미 이 거리에 강시온의 구체가 가득 차올라 있었으니.
‘강시온? 설마 아저씨가…….’
그녀는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다 이내 도망갔다.
* * *
우지혜가 도망치는 걸 확인한 강시온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왜 무리한 거야!”
그는 그 말 뒤로, 고개를 돌려 쓰러져 있던 진재희를 바라보았다.
진재희는 쭈그려 자신의 왼 팔뚝을 붙잡곤 신음하고 있었다.
그녀의 팔에선 피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녀가 나약해진 모습에 강시온은 더욱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으며 어깨는 파르르 떨렸다.
“너가 다치면…… 어쩌자는 거야. 너가 다치면…….”
강시온은 지금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진재희는 처음부터 함께해 온 그의 몇 안 되는,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원래 강시온은 친구 따윈 만들지 않았다.
강시온에게 타인이라는 건, 믿을 수 없는 족속뿐이니까. 적어도 그의 인생에선 그랬다.
하지만 진재희는 달랐다.
둘은 같은 꿈을 꾸었고.
둘은 잠을 자는 시간만 빼면 항상 붙어 다녔으니까.
둘은 서로를 가족보다 더 소중한 존재로 여겼으니까.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떨어져 가는 세상에서, 둘은 서로에게 의지했다.
하지만 위로의 말이라는 건 언제나 100% 타인에게 전해지지 못하는 법이다.
듣는 사람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었다.
특히 둘 사이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었다.
강시온은 여전히 이마를 짚고선 슬픔에 마음을 주저하고 있었다. 진재희는 숨죽이다 말했다.
“……네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진재희의 목소리 뒤로,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뭐……?”
강시온은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수그린 탓에, 옆머리가 자연스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진재희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눈망울에는 굵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내가 네 계획을 망쳐서……. 다쳐서 그래? 이제 나는 네 전력이 될 수…… 없으니까……?”
“……너.”
강시온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진재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여전히 강시온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일어났다.
“걱정 마……. 난 네 계획에 목숨을 바치겠어. 그게 내 선택이기도 했고. 후회하지 않아. 후회한 적 없어. 네가 날 도구처럼 사용한다고 해도,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으니까. 내가 죽더라도. 네가 이 리그를 끝낼 수 있게 도울 거야. 설령 네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더라도, 네가 날 버린다고 해도. 난 내 방식대로……. 죽을 때까지. 널 도울 거야. 저 여잔. 네 계획에 방해가 되는 존재야. 그러니까 여기서 내가 끝내겠어.”
진재희는 힘없이 앞으로 걸었다.
강시온 역시 힘없이 말했다.
“하지 말라니까.”
“네가 너는 이성적이라며.”
진재희는 그렇게 말하곤 고개 숙여 걸어가다 성검을 불러 냈다.
그녀의 오른손에 성검이 쥐어졌다.
“이게 내 이성적인 판단이야. 플레이어는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적의 플레이어는 꽤 많은 피해를 입었어. ……그래서 지금 잡아야 해. 만약 회복이 끝난 뒤 다시 만난다면 난 이기지 못해. 확신해.”
진재희는 강시온을 지나쳤다.
하지만 강시온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덥석-.
진재희의 손목을 휘감은 강시온의 손에 강한 힘이 실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진재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강시온은 경고했다.
“그대로 가면 너 죽어.”
진재희는 이제야 고개만 살짝 돌려 강시온을 바라보았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강시온이 그녀의 손목을 잡은 건, 꽤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 서로의 머릿속에 교차했다.
먼저 꼬리를 내린 건 진재희였다.
강시온은 주먹에 힘을 천천히 풀었고, 진재희의 손은 그의 손길에서 자연스레 빠져나왔다.
스르륵-.
“……잡아 올게.”
진재희는 몇 걸음 더 천천히 걸어가다, 단숨에 사라졌다.
탓-.
구체가 작게 진동하는 음성만이 이곳을 채웠다.
강시온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표정은 일그러지지도, 슬픔에 차올라 있지도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강시온에게 타인은 도구였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철저하게 이용당하다 버려질 존재.
그건 처음 진재희를 만났을 때도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그리고 진재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감정만 가지고 지금껏 살아왔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여기서 우지혜를 진재희가 잡아 주면 그것이야말로 강시온에게는 큰 이득이었으니까.
하지만 강시온은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고, 무언가가 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강시온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날아갔다.
* * *
채채연은 도시 외곽에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이주연을 만났다.
이주연은 정말 대책 없이 이 넓은 도시에서 혼자서 동생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믿고 있었다.
그렇게 똑똑하고 강했던 동생이 쉽게 죽을 리가 없다고.
그리고 만약 살아 있다면 만경의 일원이 되어 전쟁을 치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강시온은 동안 세력을 토벌하고, 그 세력 구성원을 흡수했으니까.
1라운드 쇼핑몰에서 그녀의 동생이 했던 말은, 강시온을 절대 믿지 말라, 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라운드를 같이 치른 동생을 어떻게 했을 거란 생각은 못 했다.
그러니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주연이 채채연과 만났던 건 도시 외각에서의 일이었다.
채채연은 거대한 오우거에 쫓기고 있었고, 이주연은 가볍게 화살을 쏘아 오우거를 토막 내었다.
후두두둑-.
오우거의 사체가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채채연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부들거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강시온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감히 나한테……. 감히 나한테!”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이 이해할 수 없었다.
수원에 있을 때, 채채연은 여왕벌이었다.
강준호의 곁에 있으면 모든 걸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오우거 따위한테 자신이 쫓기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주연은 쓰러진 채채연에게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워줬다.
그러자 채채연은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다.
“놔-! X발. 진짜!”
채채연은 미친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어 댔다.
이주연은 그녀에게서 한걸음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았다.
채채연은 이주연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수원에 갈 거야. 그리고 여기로 준호를 데리고 올 거야. 날 이딴 식으로 대우했다 이거지……? 철저하게 복수하겠어.”
“……지금 당장 수원에 돌아간다고?”
“그래! 넌 그냥 내 말만 따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난 지금 힘이 봉인 당했으니까. 언니 너가 가야만 해. 아, 아니! 그 전에 날 어디론가 숨겨 주고 가! 난 더 못 가.”
“…….”
이주연이 망설이자 채채연은 버럭 성을 내었다.
“내 말 안 들으면, 언니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준호가 날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그러니까 빨리 가라고. 가서 상황을 알려. 준호한테.”
채채연의 협박은 결코 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채채연이 거슬린다고 하는 인물이 있으면 강준호는 친히 죽여 주었다.
강준호가 채채연을 아끼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이주연은 조금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숨을 만한 장소가 어디 있는지 알아. 따라와.”
이주연은 앞장섰고, 채채연은 그 뒤를 따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