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는 나만 지킨다-195화 (195/221)

제195화. 이별과 재회 (3)

피비린내가 도시를 진동하고, 까마귀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오랜 전쟁 탓에 전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제 도시 내에서 벌어지는 게릴라전은 헌터들의 일방적인 토벌전으로 바뀌었다.

만경은 더 이상 헌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정현수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버티고는 있지만, 이마저도 시간 벌이에 불과했다.

헌터들은 운동장 바깥으로 나온 괴수의 몸을 저격할 수 있는 위치까지 진격했다.

만경의 괴수가 처음으로 적의 공격에 피해를 입기 시작한 것이다.

만경의 기술자들은 괴수 배에 총알을 막기 위해 철판을 뒤덮었지만 소용없었다.

숙련된 사수들은 철판을 피해 괴수를 공격했으니 말이다.

메트로 세력의 최고 전력, 우지혜와 김강석은 안양종합운동장까지 걸어왔다.

두 플레이어를 막을 수 있는 전력은 더 이상 만경에 남아 있지 않았다.

둘의 목적은 어떻게든 만경의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방어 세력을 괴멸시키는 것이었다.

만경의 본대는 오우거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오우거는 아무래도 소총 부대보다 전투력이 더 강하기 때문에, 보병 전력에선 메트로가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종합운동장을 사수하는 오우거들만 해도, 헌터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물론.

우지혜가 그걸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진 않았다.

오우거들이 헌터가 잠입한 건물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있었다.

-쿠어억……. 크우어어…….

우지혜는 골목길에서 살짝 나와 손가락을 교차했다.

그 순간, 하늘에 떠오른 두 개의 거대한 화 검이 오우거의 몸을 관통했다.

푸욱!

우지혜는 교차했던 손가락을 풀고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러자 화염은 오우거의 전신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륵!

-크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

화염에 휩싸인 오우거는 고통스러운 듯 괴성을 내질러 댔다.

그러면서도 헌터를 마구 짓밟아 댔지만, 우지혜는 아군 전력의 피해까지 계산하진 않았다.

어차피 오우거만 처리하면, 만경의 병사는 오합지졸이다.

그것이 우지혜의 판단이었다.

그때, 김강석이 우지혜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강한 힘이 다가오고 있어.”

“……남은 만경의 아티팩트 플레이어겠죠.”

“내가 상대할게. 넌 오우거 토벌에 집중해.”

“그러겠습니다.”

김강석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그곳에 작은 토관을 만들어냈다.

토관은 하늘에 붕 떠올라 흩어졌다.

김강석의 능력은 각각 마법을 부리는 작은 토관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토관들은 시전자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다.

지뢰로 사용할 수도, 드론처럼 상대를 요격할 수도 있었다.

토관들은 하늘에 떠올라 만경의 플레이어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북쪽에서 강한 힘이 느껴지자, 일제히 그곳을 향해 침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토관들에게서 발사된 침에는 일반 사람이 맞으면 반드시 죽게 되는 맹독이 발라져 있었다.

하지만 토관들을 향해 날아드는 정체는 사람이 아닌, 번개였다.

번개가 하늘에 가득 메우더니, 허공에 뿌려져 있는 토관들을 한 번에 부숴 버렸다.

토관의 잔해물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김강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한 방이라고?’

그는 옥상 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곳에서는 번개가 튀고 있었다.

‘정현수.’

김강석은 토관을 다시 불러냈다.

토관이 일정하게 그의 주위를 회전하더니 다시 하늘로 치솟았다.

우지혜가 오우거를 토벌하는 동안 김강석은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솔직히 김강석은 우지혜처럼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적어도 상대를 귀찮게 할 수는 있었다.

‘토관의 모든 능력은 최대한 감춰야 해. 최종 목표는 진재희니까.’

김강석은 건물 내부로 뛰어 들어가 단번에 옥상에 올랐다.

그리고 주변을 바라보며 정현수를 찾았다.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현수는 눈에 튀었다.

전신에 번개를 휘감고 있었으니.

게다가 장엄하고 거대한 정현수의 번개 활은,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정현수는 번개 활의 시위를 놓았다.

피융-. 콰지지지직-!

목표는 김강석이었다.

‘젠장!’

죽음을 직감한 김강석은 자신 앞에 수많은 토관을 만들어 냈다.

번개 화살은 토관과 만나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콰지지지직-!

김강석은 번개 때문에 사방으로 뿌려진 토관에서 거미줄을 쏘아 댔다.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이곳에 거미 덫을 쳐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현수한테는 먹히지 않았다.

콰과광-!

정현수는 흩어져 있는 토관 사이를 빠져나와 김강석을 향해 발을 휘둘렀다.

“……?!”

김강석은 놀라 뒷걸음질 쳤다.

거미줄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토관이 뿌려 대는 거미줄은 한 번만 붙어도 절대 떼어지지 않는 강력한 흡착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정현수의 전신에는 거미줄이 감겨 있었지만, 그런 행동의 제약을 받고도 그의 발차기는 올곧고 힘차게 김강석의 얼굴을 노렸다.

부웅-! 콰지지지지직!!!

순간 먹구름이 차오를 정도로, 정현수의 발은 강력한 번개를 일으켰다.

발차기를 맞은 김강석은 눈이 뒤집어져선 뒤로 쓰러졌다.

정현수가 물었다.

“네가 최현지를 죽였냐?”

하지만 이미 일격에 기절한 김강석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정현수는 김강석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의 멱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정현수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김강석의 눈앞에서 소리쳤다.

“됐어……. 지하가 그렇게 좋으면. 내가 보내 주지. 벌레 새끼들……!”

그리고 멱살을 쥔 채로, 허공에서 한 바퀴 돌리더니 그대로 지면에 처박아버렸다.

콰앙-!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지면이 붕괴되었다.

정현수의 말대로, 김강석은 지면에 처박혔다.

하지만 그때, 정현수를 노리는 두 개의 화 검이 하늘에 떠올랐다.

정현수는 몸을 가까스로 비틀어 날아드는 화 검을 피해 냈다.

그는 힘이 느껴지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메트로의 압도적인 불 능력자.

그녀에 대한 소문은 정예대 내에서도 무성했다.

놈은 메트로의 일반적인 학살전에는 참가하지 않아 실제로 정현수와 마주친 적은 없었다.

서울 북부 세력을 토벌할 때, 지대한 공을 세운 놈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었다.

정현수는 고개를 치켜들곤, 먼지연기가 걷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우지혜가 서 있었다.

그녀를 본 정현수의 이마에 핏대가 올라왔다.

“놈이 아니라, 년이었네……? X발년.”

정현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최현지를 죽일 수 있는 플레이어는, 바로 저년밖에 없을 것이라고.

정현수는 복수심에 주먹을 말아쥐었다.

* * *

만경 본대, 그곳에는 하수구를 개조해서 만든 지하 감옥이 있었다.

그곳에는 많게는 두세 명씩, 전쟁 포로들이 갇혀있었다.

채채연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에 붉은 원석이 박힌 수갑을 찬 채, 하염없이 맨홀 구멍 위 하늘을 바라보았다.

만경 본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그들의 함성과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도시에 근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본대의 움직임은 밤새 이어졌다.

채채연은 맨홀을 지키고 있던 병사에게 말했다.

“저기요-. 저기-.”

이 하수구 안에는 채채연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맘 놓고 병사를 부를 수 있었다.

병사는 몇 번이나 못 들은 척 무시하다, 이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채채연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여기…… 진짜 너무 더워요. 그리고……. 냄새나고. 좀 좋은 곳으로 옮겨 주면 안 돼요?”

“……닥쳐라.”

젊은 병사는 짜증이 났는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이곳 서울대학교 전진 기지 내부에는 이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병력이 모두 만경 도시 내부로 돌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3시간 전, 서초와 금천의 적 방어세력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강시온의 의도대로 3일이 지나기 전, 본대는 만경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 남은 건 병들거나 다친 병사들, 그리고 전쟁 포로뿐이었다.

“저기요…….”

“…….”

“아, 제바알…….”

채채연의 목소리는 종일 하수구 아래에서 울려 댔다.

젊은 만경의 병사는 꿋꿋하게 그녀의 말을 무시했지만, 이내 이상한 소리 때문에 그는 다시 하수구 내부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초록 등불 빛을 쏘아 하수구 내부를 비추었다.

그곳에는 벗은 채채연이 있었다.

그녀는 입고 있던 옷도 모두 벗은 채, 병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봤네……. 좋은 거 보여 준다니까…….”

“……!!”

누가 보더라도, 채채연은 정말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랬기에 젊은 병사라고 할지라도, 심장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몸에 온갖 오물이 묻어 있다고 한들, 채채연의 아름다움을 감출 순 없었다.

하수구 내부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본대 출발했죠?”

“…….”

“아무도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

“……여긴 그럼 우리 둘밖에 없네.”

“…….”

“어차피 죽을 거……. 남자 몸이나 한번 만져 보고 싶어서…….”

채채연은 가녀린 눈빛을 하고선 다시 만경 병사를 올려다보았다.

“안 돼요……?”

“…….”

만경 병사도 바보는 아니었다.

뻔한 미인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 중, 어차피 죽을 것이라는 말이 너무나 공감되었을 뿐이다.

만경 병사는 총을 맞고 전선에서 이탈한 자였다.

하지만 그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모든 사람들은 전장에서 죽었다.

사실 그가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 역시도 깨닫고 있었다.

어차피 죽게 될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이리 죽나, 저리 죽나.

강시온한테 처형당하나, 메트로 세력의 총에 맞고 죽나.

그리고 저 여자를 안고 죽나, 아니면 그냥 죽어 버리나.

“……어.”

젊은 병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 어떻게 해줄 건데.”

그 목소리에 채채연은 웃었다.

이 공간에서 만경 병사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사실상 이 맨홀 속에 가둬 놓는 건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강시온은 전쟁 포로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기에 그들을 버렸다.

이 사실을 만경 병사도, 갇혀있는 채채연도 잘 알고 있었다.

채채연은 야릇하게 말했다.

“뭐든.”

* * *

“카하하하학……. 커허허허헉……!”

채채연 허벅지 밑에 깔린 젊은 병사는 오물에 코와 입이 파묻혀 질식해 갔다.

채채연은 허벅지로 더욱더 병사의 목을 눌러 댔다.

“X추가 뇌를 지배했나 보네?”

“카하악. 하아아악!”

부들거리는 남자의 얼굴을 향해 채채연은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채채연은 죽어 가는 남자의 귓속에 속삭였다.

“어때? 숨 막히는 기분은? 응?”

“부흐으으……. 부르릅……. 부릅.”

“좋아? 짜릿해?”

“푸ㅡ 흐흐흐……. 으…….”

“저승 가서 XX이나 쳐. 친구.”

“……으. ……. …….”

부들거리던 병사의 떨림이 차츰 사그라들었다.

채채연은 그가 죽자, 맨홀에서 내려와 있는 사다리를 바라보았다.

두 손과 두 발이 묶인 상태였지만 사다리를 오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끙끙거리며 사다리를 기어 올라갔다.

마침 비가 오는 바람에 맨홀이며, 땅이며 축축했다.

철퍽-!

채채연은 지면에 손을 대고 기어이 탈출했다.

그리고 맨바닥에 대자로 누워 세찬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빗물은 그녀의 온몸에 묻은 오물을 씻어 냈고, 그녀는 목을 축였다.

하지만 맨홀 아래 갇혀 있는 수감자들의 상황은 달랐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이 울렸다.

“살려 줘……! 살려 줘……!”

“누구 없어……!”

“여기 물이 차오르고 있어! 젠장! 제발!”

채채연과 마찬가지로 맨홀에 갇힌 사람들의 비명이었다.

아직 비 묻은 진흙탕에 누워 있던 채채연은 푸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맨홀 속 비명들은 뒤로한 채, 주위에 있던 쇠붙이에 자신의 수갑을 부딪쳐 댔다.

챙-! 깡-! 깡-!

하지만 몇 번을 휘두르든 수갑은 깨지지 않았다.

“……안 되나. 안 될 줄 알았지만.”

채채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 오는 서울대학교 전경.

자신이 수원으로 돌아갈 방법은 많지 않았다.

지금은 아티팩트 능력도 봉인 당해, 울창한 숲을 돌파할 수도 없었다.

역시 만경으로 간 이주연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이주연을 만나기 위해서는 관악산을 넘어야 했고, 그뿐만 아니라 만경의 병사들에게 발각되어서도 안 되었다.

“하아……. 진짜 죽여 버릴 거야. 강시온. 감히 날 이렇게 대해?”

채채연은 이주연을 만나 바로 수원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강준호를 만경으로 데리고 올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당했으니, 강준호는 제아무리 형이라고 할지라도 보복해 줄 것이다.

그것이 채채연의 생각이었다.

“……준호는 내가 없으면 안 되니까. 준호한테 필요한 건 강시온이 아니라, 나 하나뿐이니깐.”

철퍽-. 철퍽-. 철퍽-.

채채연은 맨발로 진흙탕을 달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내리는 소리.

빗방울이 폐차 보닛에 부딪히는 소리.

맨홀 내부에 물이 차올라 익사해 가는 사람들의 비명.

그 모든 소리를 뒤로한 채, 채채연은 관악산을 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