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3일 (1)
만경.
최현지와 정현수, 하윤하의 선방에도 헌터들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만경의 플레이어들이 뛰어난 활약을 벌였지만, 그들이 도시 전체를 방어할 수는 없었다.
거리에는 오우거의 시체가 하나둘 늘어 가기 시작했고, 만경은 위기에 봉착했다.
오랜 전쟁과 점령전 때문에 만경의 보급로는 대부분 끊겼기에 만경은 남은 비축 식량으로 처절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제 남은 만경의 영토는 괴수가 숨겨져 있는 안양종합운동장을 포함해서 15%에 불과했다.
간호사의 목소리가 운동장 한가운데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비키세요! 비켜요!”
드르르르르륵-!
운동장 안쪽으로 황제 하윤하를 태운 침상 카트가 빠르게 이동했다.
그녀는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고, 의사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황제를 챙기던 간호사는 복도에 즐비한 환자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비켜요! 부탁드립니다!”
이미 복도에는 방치된 수많은 환자들이 있었다.
의료진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윤하를 태운 카트는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을 무시한 채, 곧장 의사에게 향했다.
의사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로 하윤하를 맞이했다.
“총상입니까?”
“예. 선생님.”
허벅지를 관통한 총알이 정맥을 건드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의사도 리그를 치르면서 지금껏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진찰해 왔다.
플레이어는 기본적으로 자가치유 능력이 일반인에 비해 월등히 높다.
그래서 보통의 총상은 대부분 일주일이면 완치가 가능했다.
하지만 하윤하는 만경의 황제다.
그녀가 하루라도 더 빨리 치유되어야만 지휘부가 활성화될 것이다.
게다가 플레이어는 수술을 받으면 더 빨리 완치할 수 있었다.
의사는 숨을 허덕이고 있는 하윤하에게 말했다.
“바로 수술 들어가겠습니다, 폐하. 아프시더라도 참으십시오.”
수술에 마취는 없었다.
생살을 베어, 총알 파편을 핀셋으로 하나하나 꺼내고 깨끗한 실로 봉합해야만 했다.
그건 만경의 황제도 예외는 없었다.
의사는 그대로 수술을 집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침상 카트에 누워 있던 하윤하가 의사의 손목을 붙잡았다.
덥석!
의사는 깜짝 놀라 황제를 돌아보았다.
황제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말했다.
“전……. 괜찮…… 으니까. 플레이어라서. 금방…… 나아요.”
“플레이어라고 무적은 아닙니다. 폐하……!”
“다른 환자 돌봐 주…… 세요. 부탁드립니다…….”
하윤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상 끝에 걸터앉았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녀를 말렸지만, 하윤하는 고집스럽게 일어났다.
“황제 폐하……!”
“폐하……! 치료받으셔야 합니다!”
하윤하는 그들의 권유를 무시한 채, 유리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하염없이 의사를 기다리는 복도 안에 있는 환자들을 바라보았다.
다리에선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다른 환자들을 바라보자 연민과 동정심이 들었다.
그녀는 절뚝거리며 환자들 사이사이를 걸었다.
이곳은 원래 경기장 푸드 코트와 기념품 상점, 화장실이 있는 복도였지만, 지금은 여러 군량미와 무기들이 쌓여 있었다.
하윤하는 그것들을 바라보다 웃었다.
“하하.”
이유 없는 실소.
그녀는 그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은 채, 경기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실 이곳에 모인 그 누구도 황제의 수발을 들 정도로 한가하진 않았다.
그렇게 경기장으로 들어가자 탁 트인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선 괴수가 아직까지도 식량을 아가리에 처넣고 있었다.
괴수의 식량을 담당하는 오우거만 5마리였다.
게다가 괴수는 날이 갈수록 더 강해지고 거대해졌다.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강시온과 하윤하의 계산이 잘못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괴수는 몸집이 커지면 커질수록 일정한 수치로 식사량도 늘어났고, 이는 오랜 관찰을 통해 알아 낸 공식과 일치했으니까.
그러니 계산상으로는 괴수가 아무리 커진다 한들 식량이 부족하진 않았다.
하윤하는 적어도 두세 달간은 버틸 수 있게 식량을 준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헌터들의 공세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였기에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보급로가 끊긴 것이고.
두 번째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부터 괴수가 먹어 치우는 식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만경이 버틸 수 있는 날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윤하가 대신에게 보고받은 만경의 멸망까지의 남은 기간은 단 3일.
3일뿐이었다.
사실은 오늘은 영웅이 돌아오기로 예정한 날보다 4일이나 지나 있었다.
하윤하는 자신의 무력함 앞에 절망했다.
괴수를 배경 삼아, 그녀는 주저앉았다.
밀려든 슬픔에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일어났고, 경기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리그는 무자비하다.
나약한 존재는 가차 없이 패망하게 될 것이고, 강인한 존재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던가.
그런 것치고는 이 경기장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이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적응할 순 없었다.
하윤하는 강시온을 조심스레 불렀다.
“영웅님…….”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병사들의 신음 소리와 괴수의 울음소리뿐이었다.
* * *
이세범의 누나이자 강시온과 함께 1라운드 리그를 치렀던 이주연은, 총성이 울리는 도심 속으로 걸어갔다.
다시 돌아온 고향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도로가 안 보일 정도로 시체가 겹겹이 쌓여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이주연은 눈동자를 돌리며 시체 속에서 동생의 얼굴을 찾았다.
사실 그녀는 만약 이세범이 살아 있다면 강시온 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세범은 이주연에게 말했었다.
강시온을 절대 믿지 말라고.
그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살아가며, 만약 우리 남매가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릴 남자라고 말했다.
사실 그런 점은 이주연이 강시온의 동생, 강준호를 보며 많이 느꼈다.
둘은 많이 닮아 있었다.
같이 오랫동안 있었던 건 강준호였지만, 1라운드 쇼핑몰 안에서 느꼈던 강시온의 이미지는 바로 어제의 일처럼 또렷이 기억이 났다.
하지만 이주연은 자신의 마음속에 남은 아주 작은 감정을 믿고 싶었다.
사람에게 정이 있다는 것, 사람의 심성은 착하다는 것. 상황이 사람을 변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실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것을 믿고 있었다.
그때 총성이 울렸다.
탕-! 타앙-!
총구가 불을 뿜었다. 거리에 있던 헌터들이 한 남자를 향해 총을 쏘아댔다.
남자는 피로 얼룩진 거리를 달려가다 결국 등에 총알을 맞아 쓰러졌다.
남자는 총에 맞았음에도, 삶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는 끙끙대며 포복해 기어 갔다.
헌터들은 더 이상 총알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는지, 제압된 남자에게 다가가 목에 칼을 꽂아 넣으며 마무리했다.
그러다 이주연과 눈을 마주쳤다.
헌터들의 눈에 이주연은 미친 여자처럼 보였다.
온몸이 피로 얼룩져 있었고, 감정 없는 눈동자는 오로지 전방만을 응시하며 걷고 있었으니 말이다.
또다시 헌터가 총구를 들자, 한 명이 막아 세웠다.
“총알 아껴야 해. 대통령의 특명이다.”
“……알겠습니다.”
헌터는 전투 조끼에 매어져 있던 군용 단검을 뽑아 내며 이주연에게 다가갔다.
이주연이 의도하진 않았지만 둘은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때, 하늘이 번쩍거리며 천둥 번개가 치더니, 반대편 하늘로 누군가가 날아갔다.
그 누군가는 그대로 건물에 처박혀, 엄청난 굉음을 내었다.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일주일이 넘게 이뤄지고 있는 플레이어 간의 전투였다.
헌터는 이주연과 가까워지자, 군용 단검을 거꾸로 잡고 단번에 내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주연은 몸을 틀어, 헌터의 검을 피했다.
“?!”
헌터는 그녀가 바로 반격해 올 것을 대비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냈다.
하지만 이주연은 반격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헌터는 권총 슬라이드를 당기곤, 그녀를 겨눠 소리쳤다.
“멈춰! 죽기 싫으면.”
그 목소리에 이주연은 고개만 천천히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정말 죽어 있었다.
죽은 시체에서나 볼 법한 일말의 요동조차 없는 눈동자였다.
분명 권총을 겨누고 있는 건 헌터였지만, 두려움에 떠는 것도 헌터였다.
이주연은 말했다.
“그냥 가. 불필요한 살상은 피하고 싶으니까.”
그녀의 말에 헌터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주연의 말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헌터는 방아쇠를 살짝 당기며 비웃었다.
“허세는.”
타앙-!
헌터는 방아쇠를 고민하지 않고 당겼고, 총알은 이주연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방아쇠를 당긴 헌터도,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헌터도.
푹, 푹, 푹, 푹, 푹-!
하나같이 관자놀이에 초록 화살이 박히며 옆으로 쓰러졌다.
총알은 이주연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허공으로 날아갔을 뿐이다.
이주연은 쓰러진 헌터를 한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지금 강시온을 찾기 위해, 다시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만경의 병사 텐트는 좁다.
성인 두 명이 나란히 누우면 끼일 정도였다.
게다가 이호승은 룸메이트인 선배의 신경질적인 코골이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었다.
또 병사들의 텐트는 열을 맞춰 이곳저곳에 세워져 있었는데, 밤이 되면 숨을 참는 허덕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실제로 선배와 이호승은 동성끼리 같은 텐트를 썼지만, 대다수는 성별에 관련 없이 룸메이트가 정해진 탓이었다.
사람은 극한의 상황으로 몰렸을 때, 성욕이 더욱 폭발하는 것 같다고. 이호승은 스스로 생각했다.
이호승은 침낭을 머리끝까지 치켜올리며 겨우겨우 잠을 청했다.
종일 간병하고 보초를 서느라 지친 몸은 금세 잠들었다.
하지만 겨우 잠들었던 이호승을 깨운 건, 079부대장의 꽹과리 소리였다.
꾕- 꾕- 꾕- 꾕-!
꽹과리 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굉장히 짜증 나는 소리다.
이호승은 시끄럽다며 X발, X발 욕설을 입 밖으로 내뱉었지만, 부대장의 꽹과리는 멈출 줄 몰랐다.
079부대장은 소리쳤다.
“영웅의 긴급 출격 명령이다! 모두 일어나서 10분 안으로 집합해!”
긴급 출격 명령에 이호승은 깜짝 놀라 덮었던 침낭을 벗겨 냈다.
이호승은 주변을 더듬거리며 안경을 찾아 쓰고는 선배를 흔들어 깨웠다.
“선배님. 선배님! 긴급 출격 명령이랍니다! 빨리 일어나십시오!”
“어…… 뭐……? 아…….”
선배는 짜증 나는 와중에도 겨우겨우 일어나 벗어 놓았던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이호승은 그보다 더 빠르게 환복하곤 텐트 밖으로 나왔다.
이른 새벽이었다.
지평선 너머에 해가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079부대의 동료들이 하나둘 텐트를 빠져나와 집합하기 시작했다.
꽹과리를 치던 부대장은 제일 앞 열에 서서 쩔쩔매고 있었다.
곧 부대 앞에 나타난 건 강시온이었다.
그는 무어라 079부대장에게 말하고 있었고, 079부대장은 연신 고개를 숙여 대며 경청하고 있었다.
이호승은 부대원들과 함께 서 있었고,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선배가 바지 지퍼를 올리며 다가와 물었다.
“으- 씨. 손에 오줌 다 묻었네. 다 묻었어. 부싼. 무슨 일이야?”
“아직 모르겠습니다.”
079부대장은 강시온에게 무언가를 전달받더니 곧장 부대원들의 정렬 태도를 고치기 시작했다.
한 병사가 나무 상자를 가지고 오더니 앞에 내려놓았고, 강시온은 그 상자 위에 섰다.
강시온은 079부대 전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만경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강시온은 그저 작은 나무 상자 위에 서 있었을 뿐이지만, 그의 손짓과 언사는 이곳에 모인 모든 부대원들을 사로잡았다.
강시온은 그저 평범하게 행동했지만, 위엄이 느껴졌다.
이호승은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저런 사람한테 혼났으니까, 재희가 풀이 죽어 있을 만했지.’
이호승은 강시온을 바라보며 스스로 납득하고 말았다.
강시온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임무의 내용은 결코 나긋나긋하진 않았다.
“3일 안에 우리 주력부대는 적의 방어를 뚫고 만경으로 진입해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 전에 적의 이동 경로에 침투해야만 합니다.”
그 말은 즉, 적의 한복판에 079부대가 보내질 예정이라는 말이었다.
원래 이런 임무에는 최명준의 정예대가 제격이겠지만, 지금 만경 본대에 정예대 전력은 없었다.
강시온은 급한 대로 각 부대장 중에 지원 부대를 뽑아 침투할 것을 명령했다.
079부대장은 출세에 나름 욕심이 있는 자였고, 보란 듯이 이번 작전에 자원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부대원들은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많이 위험한 작전임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여러분들의 무운을 빕니다.”
강시온은 그 말만을 남기고 나무 상자에서 내려왔다.
이호승은 그가 사라질 때까지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아 두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