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만경 방어전
몬스터를 길들인 것은 만경뿐만이 아니었다.
메트로에도 메트로만의 길들인 몬스터가 있었다.
괴물 두두.
초식성이지만 포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뭐든 들이박고 보는 종족이다.
과거 트리케라톱스처럼 단단한 피부층과 네 개의 큰 뿔을 가진 외관이 특징이었다.
원래 전기를 대신해 철로에서 카트를 끌기 위해 길들어진 몬스터였다.
물론 두두는 만경의 오우거만큼 지능적이지 못했다.
오우거를 길들인 강시온이 대단한 이유는, 오우거를 다방면에 이용할 정도로 ‘완벽’하게 길들였다는 점이다.
그에 비해 두두들은 멍청하다.
그저 직선으로 돌격하는 행위밖에 못 하며, 그마저도 제어가 잘되지 않아 다시 포획할 때에는 처음에 포획했을 때처럼 큰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그럼에도 메트로 세력이 두두들을 이번 전쟁에 동원한 이유는 단순했다.
놈들은 무엇이든 뚫어 버리는 생명체다.
현대의 천공기처럼, 지하에 추가적인 터널을 만들 때도 용이했다.
두두의 이런 습성 때문에, 메트로 세력은 기존에 뚫려 있던 지하철로뿐만 아니라, 지하에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메트로의 진격이 늦어진 이유도, 두두로 뚫은 지하 이동 통로를 통해 만경 내부로 잠입했기 때문이었다.
두두로 만경 깊숙한 곳까지 지하 통로를 뚫고, 단번에 괴수를 죽인다.
그것이 메트로 세력의 전략이었다.
강시온이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만경의 본대가 다리 공격에 시간과 병력을 투자하게 되면 전략대로 시작하려고 했지만.
강시온은 몇 주째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 있어 실행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통로가 완성되었기에 메트로의 지휘관들은 작전을 감행했다.
그렇게 놈들의 작전이 실행되면서 본격적인 만경 방어전이 시작되었다.
며칠 동안 이어지는 빗줄기.
그 억센 빗줄기 속에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투- 쾅! 콰과과광!!!
만경 한복판에 거대한 싱크홀이 생기기 시작했다.
싱크홀에서 기어 나온 건, 오우거 못지않게 흉악한 인상을 가진 두두들이었다.
두두들은 주변을 둘러보다, 들이박을 만한 것을 찾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들었다.
콰과광-!!!
놈들의 돌격에 작은 건물 하나는 폭삭 무너졌다.
“꺄악-!”
“녀석들이 왔어!”
“도망쳐!”
깜짝 놀란 만경의 시민들은 여기저기 도망치기 시작했다.
두두들이 파 놓은 구멍을 통해 나타났고, 방독면을 쓴 헌터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은 천천히 구덩이를 빠져나와 날카로운 눈매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몇 만경의 시민들을 보면,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
헌터들은 교전 시, 무조건 단발 조준 사격을 했다.
총알의 낭비를 최소로 낮추려는 의도였다.
그렇게 발사된 총알이 만경 시민들을 무참히 뚫고 지나갔다.
“악-!”
“억……!”
시민들은 하나같이 비명을 내지르며 속수무책으로 쓰러져나갔다.
그들은 군인 민간인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쏘아 댔다.
교주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처리하는 헌터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만경 초토화’였다.
메트로 세력은 만경에서 학살을 자행하며, 그들의 전투 의지를 꺾는 것을 최종 목표로 잡았다.
물론 강시온으로 단결된 만경 시민들의 전투 의지를 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건물 위층에 매복해 있던 만경의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쏴-! 모두 죽여!”
뚫린 싱크홀을 향해 무차별적인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휘릭- 팅-!
하지만 화살은 방탄모에 맞아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붉은 방탄모를 쓴 헌터는 고개를 들어 만경의 사수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전문적인 특수부대 훈련을 받은, 메트로 세력의 해결사들이었다.
1인당 보급 탄알만 120발.
소대 규모 전원 소총으로 무장.
그들의 사격 능력은 가히 대한민국 최고였다.
붉은 방탄모는 서서 쏴 자세로 만경의 궁수들을 조준했다.
탕! 탕!
그는 단 두 발로, 만경의 궁수들을 무력화시켰다.
이어서 붉은 방탄모는 뒤따라오던 헌터들을 지휘하여, 만경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씩 낮은 자세로 달리며 도시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연기가 솟구쳤고, 총알이 난무했다.
그렇게 그들은 일방적인 학살극을 벌였다.
하지만 메트로 세력의 계략은 이미 사전에 강시온이 간파했다.
때문에 만경 역시도 놈들의 공격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터억-.
웬 남자가 건물 옥상에 살포시 안착하곤 헌터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붉은 악마랬나?”
헌터들은 곧장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총을 쏘았지만, 총알은 남자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총알이 통과한 공간은 구멍이 났고, 그 안에선 번개가 튀고 있었다.
남자는 정현수였다.
정현수는 붉은 방탄모를 쓴, 통칭 ‘붉은 악마’에게 물었다.
“너 뒤진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네?”
붉은 악마는 금천, 구로 일대에서 무자비하게 방랑자를 살해하기로 소문난 플레이어 헌터였다.
또한 정현수와 지난 2년간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치열한 공방을 벌인 라이벌이기도 했다.
쓸데없는 총알 낭비를 막고자, 붉은 악마는 주먹을 쥐며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붉은 악마는 총구를 내리고는 정현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 역시 만경을 지키고 있었군.”
붉은 악마는 방독면을 벗어들었다.
그의 행동에 주변 부하들은 놀랐지만, 붉은 악마는 태연했다.
사실상 그들도 알고 있었다.
지상에서 방독면을 착용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걸.
실제로 메트로 세력의 주민들 중 대다수가 지상에서 온 자들이고, 붉은 악마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았다.
얼굴은 피부가 흘러내렸고, 전기에 지져진 상처 자국들이 가득했으며, 한쪽 눈동자는 실명되어 흰자만 있을 뿐이었다.
모두 정현수에게 당하며 생긴 상처들이었다.
정현수는 낄낄거리며 비아냥거렸다.
“북돼지처럼 땀 뻘뻘 흘려가며, 땅굴로 오면 뭐 해. 무덤 속에 제 발로 기어들어 온 꼴인데.”
정현수의 도발에 붉은 악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 2개월 동안 만경이 준비한 덫은 간단했다.
예비군과 노동자들은 만경을 재정비했다.
도시를 하나의 미로처럼 만든 것이다.
적들이 어느 곳에서 튀어나오던,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도록 모든 도로와 건물을 막아 놓았던 것이다.
도시를 건축하려면 꽤 많은 비용이 드는데, 강시온은 그 건설 비용을 골드로 사들인 담배와 술로 충당했다.
암시장과 인천을 이용했던 것이다.
강시온은 사전에 둥지를 방문하는 각 플레이어의 자산 규모와, 암 시장의 규모를 확인했었다.
그들을 통해 건축 비용을 마련하고, 건축에 필요한 노동력은 오우거와 플레이어로 충당했다.
만경이 왜 경제적으로 1위인지,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돈으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런 도시 하나를 미로처럼 개발하는 데는, 2개월이면 충분했다.
이 모든 건 강시온의 재력 덕분이었다.
헌터들이 두두를 이용하여 도시 내부로 침투한다 한들, 그들이 마주하는 건 촘촘하게 세워진 만경의 방어 진지였다.
그 진지들을 둘러보며 붉은 악마는 짧게 감상을 말했다.
“덫을 쳐 놓았군…….”
“쥐덫이지. 쥐새끼처럼 칙칙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지하 속에 살아가는 네놈들을 위한 덫. 어때? 환영 인사라도 해줘? 이번엔 네 왼쪽 눈을 멀게 해 줄까?”
콰직-.
정현수의 손가락에 번개가 튀었다.
붉은 악마는 정현수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재밌네. 확실히 재밌어. 내가 네놈과 싸우기 좋아하는 이유는……. 너의 그 자신감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태도 때문이지. 난 네가 마음에 들어. 젊으면서 패기도 넘치고. 요즘 애들이랑은 다르다고 해야 하나? 하하하……. 근데 그거 아나? 네놈들이 얼마나 방어벽을 만들어 놓는다 한들…….”
그때, 메트로 세력의 본대가 싱크홀을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메트로 본대, 총원 6만 5천 명.
지금 지상에서 만경의 본대를 막는 병력은 기껏해야 2만 명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이곳으로 들어왔다.
메트로는 지금 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대군을 이끌고 만경의 중심부로 쳐들어온 것이다.
개미 떼처럼 머릿수가 많은 그들의 군단을 확인한 정현수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붉은 악마는 말을 마무리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군. 피X츄 새끼야.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 주지.”
타다다다다당-!
붉은 악마가 선제공격을 하며, 정현수와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 * *
축구장에 괴기스러운 코 고는 소리가 울렸다.
-드르러어어어엉! 쿠우우……. 드르러어어어어엉! 쿠우우…….
하윤하는 축구장을 가득 채운 괴수를 바라보았다.
괴수의 배가 일정한 리듬으로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온갖 악취가 축구장에 가득 찼다.
괴수의 아가리나 변에서 나오는 악취는, 아무리 시체 냄새에 익숙해진 만경의 시민일지라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주변에 있던 보좌관들은 저들끼리도 인상을 찌푸리며 악취에 고통스러워했지만, 정작 하윤하는 태연했다.
꿋꿋하게 표정을 유지하며 괴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기장 바깥으로 사람들의 함성과 비명 소리가 가득했다.
본격적인 만경 방어전이 시작된 것이다.
하윤하는 문득, 영웅이 만경을 떠나기 전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방어전은 아마 패배할 거야. 적들의 본대가 들이닥치면, 방어벽을 아무리 견고하게 세워도 뚫리겠지.
강시온은 이미 만경 방어를 포기하고 있었다.
사실 메트로의 군대가 제아무리 질적으로 만경에게 밀린다고 하더라도, 그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옛 고대 시대 왕국과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세밀한 군사 체계와 부대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니 만경은 질 것이다.
그것이 강시온의 판단이었다.
강시온이 생각한 이번 2.5라운드의 유일한 돌파구는 바로, 아군의 괴수가 죽기 전에 적들의 괴수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강시온은 주둔군만으로 만경을 사수하고, 남은 본대는 모두 서울 점령에 나섰던 것이다.
간간이 들려오는 정보에 따르면,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문제는 이쪽이었다.
한 보좌관이 코를 막으며 하윤하 에게 다가갔다.
보좌관은 하윤하의 손등에 자신의 손가락을 올려놓으며 보고했다.
하윤하는 순식간에 보조관이 알고 있는 정보를 전달받았다.
-03부대 전멸, 051부대 전멸. 형세는 많이 밀리고 있음.
보좌관은 그렇게 보고만 하고, 물러났다.
그러자 몇 분 뒤 또 다른 보조관이 그녀에게 다가와 똑같이 손등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05부대 전멸, 06부대 전멸. 정현수 대장이 선전. 몇 번의 승리. 수십 번의 후퇴.
종일 들리는 보고의 내용은 비슷했다.
지금까지 들은 보고만 집계하더라도 만경 측의 희생자는 500명이 넘었다.
침공 하루 만에 500명이 죽었다.
어마 무시한 수치였다.
지금 축구장에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적들의 것이 아닌 아군의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하윤하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손등에 핏줄이 일도록 꼭 말아쥐었다.
하지만 버텨야만 했다.
그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강시온이 그녀에게 내린 명령은 단순명료했다.
메트로 세력의 공세가 시작하고, 일주일.
일주일만 버텨라.
그 뒤론, 내가 해결하겠다.
하윤하는 설령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그의 명령을 수행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 * *
며칠째, 비가 억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만경 내부에서 치열한 공방이 펼쳐졌다.
시체가 산을 이루다.
그건 옛 고대 전쟁에서 나온 비유 표현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에 딱 들어맞았다.
3일간, 만경의 병사들은 2,000명 가까이 죽었다.
거리에는 시체들이 갈기갈기 찢긴 채, 죽어 있었다.
건물이며, 옥상이며 도시를 이루는 그 모든 공간에 사람들의 시체가 뒤엉켜 있기도 했다.
총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게다가 한 발만 맞아도 반드시 죽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살상 무기였기 때문에.
제아무리 훈련을 잘 받은 만경의 수비대일지라도 적지 않은 희생자를 남겨야 했다.
만경의 괴수를 수비하는 핵심 지역을 제외하고, 도시는 그야말로 정글이었다.
전선도, 전략도, 군세도 없는 죽음의 정글.
만경의 병사든, 메트로의 헌터든, 소수로 모여 다니며, 적과 조우하면 서로를 죽이기 바빴다.
밤이 되더라도 아군 진형과 적 진형이 나뉘어 있지 않아, 어디론가 숨어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 전투의 형태는 강시온이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만약 전선, 전략, 군세로 헌터들과 대립한다면, 만경은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정말 미로처럼, 어디에서 어떻게 적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전장 속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적어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만경 전력은 엄청난 피해를 감내해야만 했다.
헌터들은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다.
만경은 최선을 다해, 적들의 세력을 막고는 있지만 한계가 있었다.
전쟁은 아무리 전략과 전술, 보급으로 좌우된다고 해도, 대규모 물량으로 밀어붙인다면 승기는 기울기 마련이다.
여기저기서 만경 의료진들이 원성을 내질러 댔다.
“부상자가 너무 많아!”
“의료 기구는 아직인 거야?”
“여기 압박할 사람이 더 필요해!”
진료소를 설치해 놓았지만, 사전에 준비했던 의료진과 침상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루에도 100명에 달하는 환자가 전장을 이탈해 후방 진료대로 이동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인력에, 그들은 허덕이고 있었다.
총상은 칼에 베인 상처보다 더 위험했다.
총알에 의한 상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총알이 사람의 살만을 파고들어 그대로 관통하면 오히려 다행이다.
하지만 만약 뼈나 장기를 건드리면 현대 의술로도 되살리기 불가능한 수준으로 사람의 몸은 망가진다.
특히나 의료 기구와 의료 체계도 완벽하지 않았다.
침상에 누운 대부분이 죽겠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온몸은 물론이고 얼굴이 피로 얼룩진 의사가 간호사를 찾았다.
“간호사는 없는 거야? 간호사!”
하지만 방금 전까지 사람들을 치료하던 간호사는 아스팔트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적들이 옥상에서 쏘아 대는 화살 때문에, 이곳도 완전히 안전하진 않았다.
만경의 의료진의 목적은 하나였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려 낸다.
이미 가망이 없는 사람은 명복을 빌 뿐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인력과 장비 부족으로 살리지 못한다면 그건 의사로서 실격이었다.
그때, 누군가 맨발로 뛰어가 의사에게 다가가 상처에 손을 대었다.
의사는 여자의 정체를 보곤 깜짝 놀랐다.
“황제 폐하!”
“봉합부터 해요. 어서요!”
하윤하는 되레 의사에게 소리쳤다.
의사는 2초간 눈동자를 깜빡이며 상황을 정리했고, 곧 그녀의 결의에 찬 눈동자를 본 순간 망설이지 않고 실행했다.
“예!”
의사는 봉합술을 시작했다. 총알이 스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하윤하의 성실한 간호 덕에 환자는 살 수 있었다.
하윤하는 지체하지 않고 또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몸소 전장을 누비며 보탬이 되고자 했다.
이번에는 보급품을 나르던 병사 한 명이 쓰러지니, 단숨에 그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은, 모든 만경 시민의 귀감이 되었다.
하루 만에 무너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경 방어전은 벌써 삼 일째를 맞이했다.
메트로 세력은 파죽지세로 밀고 오지만, 그때마다 만경의 시민들은 합심하여 황제를 따라 도시를 사수했다.
그때 하윤하의 귀에 노인의 비명이 들려왔다.
“커허억……!”
쿠웅-!
노인은 심장을 움켜쥐며 앞으로 쓰러졌다.
노인은 진흙탕에 파묻혀 숨을 쉬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바쁘게 각자의 일에 몰두할 뿐, 그 누구도 노인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윤하는 진흙탕을 헤치고 나가, 그 노인에게 다가갔다.
하윤하는 의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해야만 했다.
그녀는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을 이어 나갔다.
필사적으로 그를 살리려고 애썼다.
시민들은 사방팔방으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황제가 노인에게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뛰어다니는 시민들이 그녀에게 부딪혀, 그녀는 그만 노인에게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꺄- 악!”
철푸덕-!
온 바닥이 축축했다.
며칠째 이어지는 폭우 때문이었다.
하윤하는 진흙탕 속에 쓰러져 죽은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망이 없었다.
또다시 죽고 말았다.
“…….”
하윤하는 그 노인을 바라보며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군화를 신은 누군가가 노인의 몸을 밟으며 전진했다.
그들은 방독면 속에서 눈을 게슴츠레 떠 주저앉아 있는 하윤하를 노려보았다.
“만경의 황제다.”
헌터는 그 말만을 남기고, 주저 없이 소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하윤하는 두 눈동자를 질끈 감았지만,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깨닫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최현지가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데자뷔인가? 이 상황 분명 경험해 봤는데.”
하윤하에게 방아쇠를 당긴 헌터들은 어느새 촉수에 꿰뚫려 죽어 있었다.
최현지는 하윤하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나 왔어.”
최현지는 강시온의 명령을 받고, 만경 사수를 위해 복귀했다.
그녀의 증원군이 지금 막 만경에 도착한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