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알 (1)
“지구의 명작 중, 한 문장을 인용하고 싶군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속 문장입니다. 알은 세계입니다. 생명의 근간이고, 무너뜨려야 할 존재지요. 새는 그 알을 깨뜨리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합니다. 태어나면서 하나의 큰 시련을 맞이하는 거죠. 알은 깨지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고, 그 알 속의 생명체는 어디론가 날아가는 새가 될 수도. 아님 정체하는 무언가가 될 수도, 혹은 창조주가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 알 속의 생명체는, 국가의 근본이며 상징이 될 것입니다. 2.5라운드는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세력을 유지하던 모든 노동력을 동원해야만 할 것입니다. 자신을 제외한 타국의 알 속 생명체가 둘 이상 죽게 되면 승리합니다.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어이어이! 프라이 해 처먹어도 된다고! 뒈-에지고 싶다면 말이야! 깔깔깔!”
F가 동왕 앞에서 알짱거리며 조롱하자, 동왕은 허공에 발차기를 하며 F를 쫓아냈다.
A는 다시 한번 왕들을 둘러보았다.
“이번 라운드를 통해 살아남는 세력은 단 두 곳이고, 이로써 여러분들은 좀 더 수월하게 3라운드를 클리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최선을 다해 키워 주시길 바랍니다. 나가시는 분은 들어오신 방향대로 이동해 주시면 되고, 더 할 말이 남은 왕들께서는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붸에에에에-!!!! 벌레 놈들! 잘해 보라고오-!!!”
샤라락.
두 관리자는 자연스럽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시온은 알을 조심히 쥐고 있다가, 윤하에게 건넸다.
“잘 간직하고 있어.”
“네.”
윤하는 시온에게서 알을 받아 조심스럽게 두 손을 포개었다.
서왕이 그런 하윤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경의 황제여. 당신은 그 능력을 인정받고도, 모든 이의 존경을 받는 몸인데도, 단 한 남자에게 운명이 좌우되는 꼴이 참으로 딱하구나. 5년 동안 도망쳤던 자가 과연 국정을 운영하는 실무를 알까? 만경이 자멸하는 꼴이 훤히 보이는군. 여태껏 메트로가 만경을 토벌하지 않은 건, 오로지 당신의 중립 정책 때문이었거늘. 그 중립도 오늘로써 끝이다. 만경의 도망자이자 영웅이여. 당신은 어떨지, 기대가 되는군.”
서왕의 말에 하윤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뭐……?!”
시온은 그녀를 말리며 말했다.
“기대해도 좋아. 난 아직 5년 전, 너희들의 선발대가 우리 측 방어대를 죽인 사건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 대가는 네놈이 톡톡히 치러야 할 거다.”
강시온의 위협에 서왕은 작게 웃었다.
“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안양 통일 전쟁과 오우거, 보일러까지 말이지. 참으로 뛰어난 인재야. 하지만 네놈의 그 운은 결국 여기까지다. 메트로는 너흴 정복할 것이다. 네놈이 쌓아 놓았던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리고 네놈이 세뇌한 노동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날을 진심으로 고대하지.”
서왕은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 포탈 속으로 걸어갔다.
그가 포탈을 타자, 북왕 역시 뒤로 물러나 나갔다.
이곳에는 이제 동왕과 남왕만이 남았다.
동왕은 시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야! 강시온이랬나? 빠른 시일 내에 정상회담을 가지는 게 어때? 어쨌거나 너랑 나는 동맹 관계이고, 지도층이 바뀌었어도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해야 하잖아? 그러니까 강남으로 와라. 섭섭하지 않게 환대해 주지.”
동왕의 눈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러자 시온은 반박했다.
“어째서지?”
“어째서냐니! 이 X만 한 알에 대해서 논의해보자고! 저 개미 새끼들한테 전부 뒤질 순 없잖아. 네가 아무리 지난 5년간의 실무를 모른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한 세력의 지도자라면 개미 새끼들의 군사력이 어떤진 알잖아? 그리고! 진짜 소문대로 싸가지가 없구만?!”
동왕은 바닥을 발로 뻥뻥 구르며 열을 내었다.
동왕이 말하는 ‘개미’는 메트로 세력을 비하하는 표현이었다.
시온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각 세력 간의 격차를 보면, 제아무리 동맹이라도 확실한 상하 관계가 있다. 네가 만경으로 와라. 그땐 너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
“동맹 사이에 상하 관계가 어딨는데!”
“넌 세력 간에 완전한 평등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게 동맹 아냐? 친구! 이 자식아!”
“헛소리 그만해. 강남의 지도자가 이렇게 생각이 어릴 줄이야.”
시온은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 나갔다.
하윤하는 시온을 따라가려다, 동왕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고선 후다닥 시온을 따라갔다.
포탈 속으로 들어가는 시온을 두고 동왕은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아-! 그래! 조금 잘났다고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멍청아! 말미잘아! 똥개놈아! 어우! 뭐가 그렇게 잘 났는데!!! 그래! 찾아간다! 찾아간다고 했다! 어! 타국 지도자에 대한 환영식은 해 놓을 거지! 간다?! 어??!”
시온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포탈 속으로 들어갔다.
3명의 왕이 모두 빠져나간 뒤, 이곳에는 이제 동왕과 그의 부하만이 남겨졌다.
“…….”
이곳에 있던 모두가 빠져나가자, 동왕의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여태 활기찼던 그녀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예정대로 진행해. 어떤 라운드든, 작전대로 갈 거다. 우리의 목표는 2.5라운드 따위가 아니야. 3라운드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만경도……. 메트로도……. 모두 내 손으로 짓밟을 거다. 만경의 영웅이 돌아온다 한들, 메트로가 본격적으로 정복 전쟁을 벌인다 한들, 상관없어. 우린 목표를 이룬다. 그때까진 숨죽여 참는 수밖에. 강남의 승리를 위해…… 내 모든 걸 바치겠어.”
동왕은 그 말을 나지막이 남기고 뒤돌아가 포탈을 탔다.
그녀는 다 저물어가는 강남의 유일한 희망.
강남이 아직까지 망하지 않은 이유는 압도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뛰어난 전략을 세우는 그녀의 존재 때문이었다.
4명의 왕, 4개의 세력.
살아남는 세력은 단 둘 뿐.
하지만 4개 세력의 왕은 모두 목적이 달랐다.
치열한 서브 라운드.
승리자는 그 누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들은 ‘각자의 힘’을 착실하게 기르고 있었다.
* * *
알.
정말 알이다.
일반 달걀과 비교해도 전혀 차이가 없는 알.
빛을 비추어 안을 들여다보니, 일반 달걀처럼 핏대가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최현지는 달걀을 눈동자 앞까지 가져와 살피더니 빈정댔다.
“그러니까……. 이걸 키우라고? 아니, 이게 무슨 목장 타이쿤이야? 장난?”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달걀을 쥐고 있자 진재희가 주의를 주었다.
“내려놔.”
“안 깨져. 동생님-! 내가 애도 아니고. 하하.”
최현지가 또 장난식으로 나오자, 진재희는 두 눈동자를 부릅뜨곤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내려놔.”
“네…….”
최현지는 조심스럽게 쿠션 위에 달걀을 놓았다.
옥상에는 핵심 인력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만경은 이제 2개의 정치 체계가 수립되었다.
실질적인 만경의 모든 사항을 결정하는 ‘핵심 지도부 회의.’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강시온, 진재희, 최명준, 최현지, 하윤하뿐이었다.
그 핵심 지도부 회의 산하에 있는 것이 의회.
만경의 실질적인 모든 업무는 황제가 주관하는 ‘의회’에서 처리했다.
하지만 대내외적으로 국가적으로 결정할 사항, 즉 강시온이 결정해야만 하는 일은 핵심 지도부 회의에 올려 안건을 살피는 구조다.
오늘은 핵심 지도부 회의의 첫 번째 날이었다.
안건은 당연히 알.
최명준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닭이 품도록 시키면 안 되냐? 시장 보니까 닭도 키우던데.”
최명준의 철없는 말에, 진재희는 물었다.
“닭이 키우다가 깨뜨리면?”
“닭이 달걀을 왜 깨뜨려? 닭이 달걀을? 왜? 엉?”
“닭이 달걀을 안 깨뜨린다는 보장이 있어? 애초에 이건…….”
“……세력의 인공부화 능력을 보는 거야. 즉, 과학력을 테스트하는 거지.”
진재희의 말을 강시온이 마무리했다.
강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알을 살폈다.
인공부화. 어떻게 보면 정말 단순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공부화야말로, 세력이 가지고 있는 과학력을 테스트하기에 적합했다.
알을 인공적으로 부화시키기 위해서는 3가지가 가능해야 한다.
온도, 안정, 유지.
알이 부화하기 위한 적절한 온도.
알이 외부의 충격에도 깨지지 않을 안정성.
그리고 그 적절한 온도와 안정성을 생명체가 깨어날 때까지 유지할 수 있는 유지력.
부화기는 온도, 안정, 유지를 한 기기 안에서 모두 충족할 수 있는 과학적 유산이라고 볼 수 있었다.
사실 모든 문명이 멸망해 버린 지금, 과거 인류 역사에서 선보인 여러 발명품은 그야말로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단순하지 않다.
부화기를 하나 만드는 데에도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공장, 전기, 설비, 설계는 기본이고, 내부를 이루는 솜과 플라스틱을 만들기 위해선 재료 공학이 필요하다. 작은 물건 하나에 모든 과학적 정수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건 과학의 연결작용이다. 개별 과학 분야의 발명품들을 서로 잇고 조합하여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강시온이 생각하기에 이번 라운드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었다.
과학의 연결작용.
달걀을 바라보는 하윤하는 무언가 기발한 생각이 났는지, 손을 마주 모으며 말했다.
“궁전의 내부 보일러실을 사용하면 좋겠네요. 그곳은 1년 내내 따뜻하거든요. 경비도 삼엄하고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지만, 솔직히 적당하진 않아. 그곳에는 노동자들이 수없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애초에 알을 안전하게 부화시킬 만큼의 공간이 확보되어있지 않아. 무엇보다 보일러실은 단순히 따뜻한 수준이 아니라, 뜨겁지. 자칫하면 달걀이 익고 말 거야.”
진재희가 예리하게 지적하자, 하윤하는 금세 풀이 죽어버렸다.
“왜 애, 기를 죽이고 그래?”
그런 하윤하를 최현지가 감싸고 돌았고, 그런 그녀에게 진재희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조용히 해. 넌.”
“왜 내, 기를 죽이고 그래?!”
그때 강시온은 모두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이건 국가 중대 사안이야. 새로 증설하는 게 좋겠어. 이 알에서 어떤 생명체가 태어날지는 몰라도, 그 생명체를 키우기 위한 우리도 같이 만들어야겠지. 윤하야. 가능하겠어?”
“아, 네……! 세력에 속해 있는 모든 전문가를 모아다가 밤새 연구시키겠습니다!”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관련된 서적들을 참고하고, 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 봐. 우리를 만들기 위한 적당한 토지를 선정하고, 알을 부화하기 위한 부화장, 그리고 알을 관리하기 위한 믿을 수 있는 관리인도 새로 선발해.”
“알겠습니다. 의회를 소집해서 안건을 해결하겠습니다.”
하윤하는 명령을 하달받고, 수행하기 위해 옥상을 나섰다.
남은 건 최명준과 최현지 그리고 진재희.
강시온이 말했다.
“최명준.”
“예. 형님.”
“정예대나 부대 정리는 아직 안 했지?”
“예……. 현재 정예대의 대부분이 메트로에 파견된 상태라고 합니다.”
강시온은 이번 라운드에서, 군대가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구수가 늘어난 만큼, 가용 병력도 늘어났다.
기존에 편성된 부대를 재정비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정현수를 데리고 와. 그리고 총사령관과 의회에서 잘 논의한 다음 부대를 재정비해.”
정현수를 복귀시켜, 군대를 재정비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앞으로의 계획에서도 군대의 역할은 가장 컸다.
처음 최명준을 강시온이 데리고 있을 때는, 단순히 짐꾼에 불과했지만.
이제 그가 군대를 휘어잡는 능력이나, 새로 각성한 아티팩트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그제, 최명준이 신나선 강시온에게 자신의 능력에 대해 알렸을 땐. 그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재희의 설명을 들은 뒤, 시온은 속으로 기뻐했다.
어쨌거나 이건 명백히 전력 강화를 의미했고, 빛남에서의 5년은 여러 의미로 득이 많았다.
최명준은 이제 완전히 핵심 인력이 되었다.
최명준은 시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안으로 데려오겠습니다.”
명령을 하달받은 최명준도 옥상을 나섰다.
강시온은 다시 최현지를 바라보았다.
최현지.
그녀는 이번 계획에 있어서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자신의 계획이 성립되기 위해선, 최현지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녀는 뛰어난 방랑자이자, 높은 전투력을 가진 인물이다.
또한 정보를 처리하고 취합하는 기술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생존율이 압도적이다.
최현지도 강시온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뒷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아, 알겠어. 그거 말이지? 그거. 그거 하라고.”
“콜라라면 얼마든지 챙겨.”
“오-? 설마 우리 영웅님께서 먼저 말씀하실 줄이야. 좋지~ 좋아~.”
“……약속이잖아. 원정에 나설 계획부터 짜.”
“네~ 네.”
최현지는 콜라의 노예다.
콜라만 가득하다면, 그녀는 언제든지 강시온의 명령에 따라 줄 것이다.
그녀가 이제부터 하는 일은, 단순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강시온은 최현지가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세력의 힘을 동원해 도와줄 것이다.
강시온은 최현지에게 ‘지도’를 만들 것을 명령했다.
과거 김정호가 만든 조선의 대동여지도처럼.
완전히 뒤바뀐 한반도의 지도를.
그건 이 리그 내 그 어떠한 플레이어도 성공하지 못한 업적이었고, 강시온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최현지라면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뛰어난 방랑자였으니.
최현지가 옥상을 빠져나가자, 이제 이곳에는 강시온과 진재희 둘밖에 남지 않았다.
강시온은 알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었다.
혼자 남은 진재희는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물었다.
“나는?”
시온은 여전히 알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넌 내 옆에만 있으면 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