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정리 (1)
황제의 계엄령이 떨어진 만경에선, 밤새 피바람이 불었다.
하윤하는 국경을 봉쇄하고, 내부의 배신자를 색출하기 시작했다.
사로잡은 배신자들은 수도 없이 많아 거리를 가득 메울 정도였다.
이는 지난 5년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외부 세력이 보았을 땐 정치, 문화적으로 안정적인 만경이, 사실은 부패로 찌들어 병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 사건으로 인해 공공연히 드러난 셈이었다.
처음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시민들도, 곧 그들의 죄목을 들은 순간 돌변했다.
“감히 어디서!”
“영웅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얼어 죽었을 놈들이!”
“X신 같은 새끼들!”
돌과 깡통들이 하늘에 떠올랐다.
가담자의 대부분은 토지부에 연관되거나, 진보정당의 의원들이었다.
한 사람만 잡아도 연관된 사람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나왔기 때문에, 체포 작전은 밤새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연관된 자는 이유 불문하고 구타를 당하고, 속박되어 거리로 매몰차게 던져졌다.
“X같은 새끼들! 꺼져!!!”
휘릭-! 퍼억!
한 군중이 던진 돌멩이에 가담자 중 한 명이 머리에 맞아 쓰러졌다.
헌병이 통제를 하고 있었지만, 분개한 시민들을 막을 순 없었다.
그들은 돌을 던지거나, 가담자를 밀치며 응징에 나섰다.
심지어는 어린 꼬마조차도 나뭇가지를 던져 대며 분노를 표현했다.
밤새 불었던 피바람은, 결국 아침이 되어서야 잠잠해졌다.
한편.
종을 울린 뒤, 수리산 정상에 있었던 강시온은,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오우거가 정중히 내민 손바닥에 앉아, 야밤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횃불을 든 군중들과 그들에 둘러싸여 체포당하는 가담자들.
청소 작업은 순조로웠다.
그때, 오우거 발밑에 엎드린 대신들이 오들오들 떨며 그를 떠받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투와 억양은 상당히 거슬렸지만, 강시온은 내색하지 않았다.
“노여움을 푸시고, 내려와 주시옵소서……!”
한 명의 수뇌부가 그렇게 소리치면, 다 같이 복창했다.
강시온은 펜션에서 꺼내 온 아몬드를 씹으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말투가 왜 저래. 하윤하가 지시했을 리는 없고.’
삼류 사극 드라마를 따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말투는 상당히 거슬렸다.
하지만 이 또한 변화된 만경의 모습이라는 것이겠지.
그때 불빛으로 가득한 만경의 상공에 하나의 빛이 떠올랐다.
빛은 찬란하게 어두운 도시를 밝게 비추다가 이내 수백 개의 검으로 나뉘어 사방으로 퍼지더니 강시온이 있던 곳으로 모여들었다.
빛은 차츰 여자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녀는 진재희였다.
“……안녕.”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넨, 진재희는 오우거의 손바닥에 내려왔다.
은빛으로 빛나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다시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진재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친 데는 없어?”
“멀쩡해.”
“놈들이 이상한 일을 벌이진 않았고?”
“이상한 일은 내가 벌였지.”
강시온은 아몬드를 씹으면서도 목을 옆으로 꺾으며 가볍게 근육을 풀었다.
그 상태로 자연스럽게 진재희를 살폈다.
그녀의 추레한 몰골을 보더니, 시온은 피식 웃었다.
“고생 좀 했나 보네.”
“……별거 아냐. 넌? 아.”
진재희는 강시온의 외관에 대해 걱정하려고 했지만.
“아냐. 아무것도.”
진재희는 서둘러 부정했다.
그의 상태는 아주 양호했다.
사실 시온이 이곳에 와서 한 것이라고는 푹 쉰 것밖에 없었으니.
그래도 진재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온이 생각보다 안전하게 지내고 있었으니.
진재희는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아, 그래. 윤하 만났어. 이곳으로 온다고 하더라고. 근데 네가 막았다며. 오지 말라고.”
“오지 말라고 해.”
“혹시 화났어?”
진재희는 그의 곁에 앉아, 그와 같이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시온은 쥐고 있던 아몬드를 그녀에게 건넸지만, 재희는 거절했다.
“화나긴, 딱히 아무 감정 없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어.”
“세력 말이지?”
“응. 계획은 세워 두었지만.”
시온은 아몬드 하나를 다시 씹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솔직히 대박이긴 해. 내 입장에선 몇 년간 고생해야 얻을 수 있는 걸 단 5주 만에 얻었으니까.”
강시온은 하윤하를 칭찬했다.
그녀가 지난 5년간 이룬 세력의 발전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하윤하는 군주의 상태 창도 없이 세력을 키워 냈다.
물론 그녀의 능력이 회계, 정치에 잘 어울리는 것도 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하윤하는 상당히 세력을 잘 키웠다.
진재희는 그런 말을 하는 시온에게 말했다.
“그럼 빨리 가서 달래 줘. 울고불고 난리 났던데.”
“애냐?”
“애지.”
“그런가.”
시온에게 ‘아이’는 준호의 나이가 기준이었다.
시온은 준호와 동갑이거나 준호보다 어리면 아이로 분류했다.
그런 의미에서 하윤하는 강준호와 나이가 같았으니, 애일 수밖에.
“그간 엄청 크긴 했어. 나랑 키가 비슷하던데?”
“준호도 그만큼 컸으려나. 남자애니까 훨씬 컸을 수도 있겠어.”
“아.”
강시온의 그런 말에, 진재희는 자기가 못 할 말이라도 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미안.”
“신경 쓰지 마.”
시온의 대답 뒤로는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진재희는 앉은 상태에서 다리를 당겨 팔로 감쌌다.
저녁이 되면 꽤 쌀쌀했다.
꽃이 피는 것에 지금이 봄이라고 어림짐작할 뿐, 정확히 어떤 계절인지도 모를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진재희는 그 태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친구 만났어. 호승이.”
“친구?”
그녀의 말에 시온은 고개를 돌렸다.
“응. 원래 내 친구. 나랑 같이 리그를 치러야 했던 친구.”
“잘됐네.”
“잘된 거지.”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친구를 만난 것이 과연 잘된 일인지.
이제까지 그녀는 모든 걸 저버리고 올라와, 빨리 리그를 깨 버리는 것만 생각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모습에,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었다.
“앞으로 몇 년일까.”
진재희는 물었고.
“글쎄.”
강시온은 확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온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무엇이 되었건, 그의 ‘계획’은 이 리그를 ‘비정상적’으로 끝내는 것이고.
또한 관리자들과 이 리그를 보고 즐기는 존재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이다.
어떤 식이든 리그는 끝이 나게 되어 있다. 그 끝에 그들은 되돌아 갈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길목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냥 이젠 직진이다.
강시온은 그렇게 다짐했기에, 무슨 결말이 들이닥치든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한편, 진재희는 펼쳐진 만경의 전경 속에서 어느 빌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은 사랑 빌라.
시온의 원래 집, 그리고 동생이 있던 장소. 그와 처음 약속을 했던 곳이기도 했다.
-동생만 찾게 해 줘.
그건 일종의 계약이었다.
강시온은 진재희가 리그에서 우승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진재희는 강시온이 동생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지금껏 강시온은 리그에서 우승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실제로 그는 전생에 그녀가 처음 보았을 때보다 몇 배는 성장했고, 만약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우승은 손쉽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전생에서의 강시온은 이보다 작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최종 라운드에 올랐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 자신은 무얼까.
진재희는 고개만 돌려 강시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볼이 일정하게 움직이며 아몬드를 씹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네 계획에서 솔직히 나는 필요 없었지?”
“무슨 의미야?”
강시온은 아몬드를 씹다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자, 그녀는 순간 고개를 돌렸지만, 다시 용기를 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내 얘기를 들어 줘.”
“……듣고 있잖아.”
“응. 아니. 그러니까.”
진재희는 다시 시선을 피해 전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승이 처음 만났을 때, 솔직히 기뻤어. 기쁘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네 생각이 났어.”
“…….”
“지금까지 난 네 동생을 찾는 걸 도와준다고 했지만, 우린 실제로 가까워진 적이 없었어. 난 뭐 하는 걸까. 도움도 안 되고. 그냥 자책 아닌 자책이 들더라고.”
“…….”
강시온은 느리게 아몬드를 입 안에 넣으며, 그녀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하나야. 내가. 내가 말이지…….”
그 말 뒤로, 그녀는 아랫입술을 한번 깨물고는, 다시 말했다.
“……강준호를 데리고 올게.”
“뭐?”
“1년 안에 반드시 데리고 올 거라고 약속할게.”
“…….”
그 말을 들은 강시온은 조금 생각하다가 물었다.
“네가 말했지. 세력을 벗어나는 순간, 거의 죽음밖에 없는 무법지대가 이어질 거라고. 그건 아무리 너라도 위험하다고. 근데 이제 와서 너 혼자 가겠다는 건.”
“목숨을 걸겠어.”
그때, 진재희의 눈이 날카롭게 찢어졌다.
“네가 리그에 목숨 거는 것처럼. 나도 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거야.”
그녀의 결의에 맥이 빠진 강시온은 허탈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난 이제 신경 안 쓴…….”
“아니.”
처음으로 재희는 시온의 말을 끊었다.
“데리고 올 거야. 강준호가 어디서 무얼 하든, 어떤 세력에, 어떤 군주이든. 만약 군주라면 그 세력을 모조리 깨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노예로 잡혀 있다면, 적들을 도륙내서라도 데리고 올 거야.”
그제야 재희는 시온을 바라보았다.
“……데리고 올게. 반드시.”
둘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건 진재희도 강시온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강시온이 그녀를 속박할 권리 같은 건 없었다.
진재희는 누구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대로 그의 곁에 남아 있었을 뿐이다.
몇 년 전에 했던 약속 때문일지라도, 그녀는 항상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고마웠지만, 시온은 거절해야만 했다.
아직까지 시온에게는 그녀의 힘이 필요했다.
“그럼 계획을 거의 완성했을 때, 그때 가도록 해. 물론 그땐 나도 같이 가겠지만.”
“하지만.”
“네가 가는 곳엔 나도 갈 거야. 그러니까. 내가 가는 곳에도 네가 있었으면 해.”
둘은 리그가 시작되면서, 하나의 결말을 꿈꾸었다.
그건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단 하나의 목적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 힘들더라도. 우린 함께 결말을 맞이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강시온은 진재희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그 의미를 생각하다, 조금 고개를 숙이며 그의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부딪쳤다.
툭.
이제 해는 완전히 떠올랐고, 도시는 얼추 정리가 되었다.
그가 다시 권좌의 자리에 오를 때였다.
* * *
서울 서부.
이곳은 서울 메트로 세력이 점령한 지역으로, 지하철역을 영토로 삼아 살아가는 세력이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1라운드 때부터 지하철에서 시작한 서울 메트로 세력은 일대의 그 어느 세력보다 강대하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 메트로 세력에는 독특한 칙령이 있었다.
그건 성직자, 시민, 군인, 신분을 막론하고 절대 ‘지상’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상에는 몬스터들이 활보하고 있었고, 메트로 세력의 시민들은 지상이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론은 메트로 세력의 신흥 종교, 지하교에 의해 지하철역 전역에 퍼졌으며, 이젠 칙령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서울 서부 지상에도 사람은 존재했다.
성직자의 명령으로 총을 든 군인들.
그들은 메트로 세력에서 ‘헌터’라고 불리며, 지상에 돌아다니는 모든 생명체를 죽이는 자들이다.
오염된 자는 없어져야 한다.
즉, 지상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는 모조리 죽여라.
그것이 교단에서 헌터들에게 내린 지침이었다.
이러한 헌터 세력은 주변 세력에선 꽤나 골칫거리였다.
헌터에게 주입된 명령은 지상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체를 죽이라는 것이었으니, 서울 서부와 직접적으로 영토가 맞닿아 있는 만경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골칫거리가 아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경에서 파견한 것이 전(前) 정예대대장, 현(現) 헌터사냥꾼이었다.
“…….”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송정탑 꼭대기.
그 위에선 한 남자가 앉아 질겅질겅 나뭇가지를 씹고 있었다.
그 남자를 바라보던 하급 정예대원은 목청껏 소리쳤다.
“대장-! 이제 출발하시죠! 대원들 집결 완료했습니다.”
정예대원의 소리에, 남자는 퉤하고 나뭇가지를 뱉었다.
“벌써? 아-. 좀 늦게 출발하자니까.”
헌터사냥꾼은 정현수였다.
그는 송전탑에서 단숨에 내려와, 피와 시체로 가득한 도심을 걸었다.
하나같이 군복을 입은 서울 메트로 세력 헌터들의 시체였다.
그곳에는 무기를 든 만경의 정예대원들이 가득 있었다.
“근데 대장. 본부에서 요즘 소식이 너무 없는 것 같지 않아?”
“아이 씨-.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황제가 우리 버린 거 아냐?”
부하들의 말에 정현수는 하윤하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고는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냐. 뭔 일 있나 보지.”
“대장……. 황제를 너무 믿는 거 아냐?”
“하기야. 대장이랑 황제는 X만 한 시절부터 영웅 곁에서 함께 자랐으니.”
“처음에 하윤하가 황제가 되었다고 했을 때, 대장이 박장대소했잖아?”
“근데 좀 웃기긴 해! 우하하! 최명준 총대장이 본다면 눈깔 뒤집어지겠네.”
“그러게나 말이다.”
정예대원들이 낄낄대며 정현수를 따라갔다.
떠들어 대는 부하들을 진정시키며 정현수는 앞을 바라보았다.
갈라진 아스팔트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폐자동차들.
널브러진 시체는 이제 익숙한 광경이었고, 반대편 거리에서는 방독면과 소총을 쥔 헌터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정현수는 뒷머리를 긁으며 조용히 말했다.
“일이나 하자.”
콰직-!
정현수의 손가락에서 전기가 튀었다.
잠시 동안의 총성과 비명 소리가 난 뒤에는, 메트로 헌터들의 시체가 아스팔트에 늘어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