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집결 (1)
만경의 허공을 가득 채운 종들은 일정하게 울리고 있었다.
-집결하라.
그건 강시온이 세력에 속하는 모든 오우거에게 전달한 명령이었다.
수리산 최정상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한 그의 ‘종’은, 이제 모든 거리 곳곳에 퍼져 있었다.
시장도, 궁도, 국경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종을 마주한 시민들은 신기한 듯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이내 신비로운 일이 벌어졌다.
띠링-. 띠링-.
맑고 청량한 종소리.
그 소리는 모든 시민의 이목을 끌었다.
세력 곳곳에서 벌어진 이 신비롭고 이상한 일은, 모든 것이 변화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거리를 오가던 오우거.
성벽을 쌓던 오우거.
시체 처리장에서 식사 중인 오우거.
일대에 방목 중인 오우거.
궁전을 지키고 있던 오우거.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퍼져 있던 오우거들이 하나같이 모두 고개를 쳐들어 한곳만을 응시했다.
수리산.
주인의 부름에, 오우거는 그대로 따랐다.
가장 강력한 권력과, 가장 강력한 위엄을 지닌 한 남자만을 따르는 거대한 몬스터 부대.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발걸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오우거들은 집결하기 시작했다.
수리산 펜션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주인을 모시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 어떤 종소리나 회초리도 집결하는 오우거를 막을 순 없었다.
오우거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시민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오우거들은 천천히 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모든 시민은 이내 깨달았다.
오우거들이 움직이는 이유를.
진정한 영웅이 돌아왔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 * *
수리산 최정상, 펜션.
쿵……. 쿵……. 쿵.
건물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강한 진동이 울려왔다.
진동은 불규칙하게 점점 커지면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펜션에서 영웅을 감시하던 요원들은 무장을 하고서 로비 층에 모였다.
요리사와 마사지사, 비서들 모두가 칼을 든 채였다.
“무슨 일입니까? 보고 올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도 모르겠다. 영웅은. 영웅은 어딨지?”
“방 안에 있습니다. 어젯밤부터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죠.”
“확실해?”
“예.”
“다시 가서 확인해.”
마사지사의 명령에 비서는 칼을 들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여전히 진동은 더 크고 웅장하게 울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확실하게 펜션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그 정체가 드러나면서.
진동의 폭이 더욱 증폭된 순간, 햇빛이 쨍쨍한 한낮이었음에도 로비 한편에는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실내에 있던 요원들은 깜짝 놀라 어둠이 드리운 창문을 바라보았다.
-…….
-…….
-…….
그곳에는 거대하고 웅장한 오우거들이 정렬하여 펜션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것을 올려다보던 요원들은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입을 벌렸다.
그때, 계단에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느리고 위엄있는 발걸음.
오우거와는 다른 의미로 공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2층으로 뛰어 올라갔던 비서는 피를 흘리며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를 제압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강시온이었다.
그는 낮은 어조로 명령했다.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 목소리에 요원들은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의 이어지는 다음 말을 듣고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일 거다. 한 놈도 빠짐없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바로 무기를 버리고 엎드렸다.
압도적인 모습에 스스로 고개 숙여 복종한 것이다.
강시온이 그들을 제압하는 데 필요한 건 단 두 마디뿐이었다.
그렇게 시온은 그들에게 깨우쳐 주었다.
진정한 만경의 왕이, 누구인지.
* * *
종소리가 울리자, 최현지는 감격에 겨워하며 외쳤다.
“와, 와, 왕! 왕왕! 왕! 흐어어어……! 드디어 왔어어……!”
최현지는 눈시울을 붉히며 허공에 떠오른 종들을 감격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올려 종을 바라보던 진재희 역시도 희미하게 웃었다.
‘굉장해. 역시.’
진재희는 그의 방식에 대해 감탄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아티팩트 구체를 도시에 퍼뜨려 권력을 다시 잡은 것도 훌륭한 전략이다.
칙령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강시온은 자신의 힘을 전 시민에게 보여 주었고,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것 때문에 놀랐다.
그건 바로 구체의 형태였다.
종 모양의 형태.
종의 형태는 세밀한 장인이 만든 것처럼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곡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놀라운 발전이었다.
투박한 구체를 섬세하게 조형해 소리를 낼 수 있는 종으로 만들어 낸다는 건, 아티팩트를 다루는 기술이 몇 단계나 상승했다는 의미였다.
“역시 형님이야! 우하하……!”
경기장 안의 모두는 넋을 잃은 듯 그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경기장 외곽에 있던 오우거 한 마리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주위에 있던 조련사가 자신이 가진 종을 흔들어 댔지만, 오우거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에 홀린 듯 전진할 뿐이었다.
그건 오우거에 대한 강시온의 절대명령 때문이었다.
이른바 절대명령권.
길대헌 역시 종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사람에게 가능한 일인가……?’
예상을 벗어나는 압도적인 강시온의 능력에, 길대헌은 지금까지 자신이 가졌던 감정도 잊은 채 감탄을 터트렸다.
하늘 가득 종소리가 울리자, 경기장에 있던 한 시민이 소리쳤다.
“영웅이 돌아오셨다!”
그는 1세대 만경의 자유 시민이었다. 그의 외침은 곧 주변 모든 시민을 동요시켰다.
“영웅이라고……?”
“설마 강시온?”
“정말 그가 왔다고? 그런 거짓 소문은 종종 있었잖아?”
“이번엔 진짜야.”
“이 정도 스케일의 능력은…… 확실히 그분밖에 하지 못해.”
모든 관심이 강시온에게 쏠렸다.
강시온은 아직 수리산 펜션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의도대로 세력 내의 모든 이들은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세력의 모든 이들이 강시온에게 집중하고, 지금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는 것.
그것이 그의 목적이었으니까.
길대헌은 식은땀을 흘렸다.
‘안 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길대헌은 경기장 안에 있던 자신의 부하들과 진재희를 번갈아 보았다.
‘빨리 정리하고, 궁으로 돌아가야 해. 이 건은 부장님이 알아서 해 줄 거야.’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만큼, 그는 최대한 빨리 주변을 정리하고 토지부장에게 돌아가야 했다.
길대헌은 품에서 회칼을 꺼냈다. 그러고는 손목에 감겨 있던 붉은 원석이 박힌 팔찌를 풀고 아티팩트 능력을 발동시켰다.
한편, 강력한 아티팩트의 능력을 감지한 진재희는 관객석 위의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로 길대헌.
길대헌을 확인한 진재희는, 단번에 그가 이번 일의 주동자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진재희는 곁에 있던 최명준을 바라보았다. 마침 그는 한 검투사를 죽도록 패고 있었다.
“야, 최명준. 여기 남은 잔챙이들 전부 해치울 수 있어?”
우직-!
최명준은 검투사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으며 대답했다.
“얘네? 껌이지.”
“그럼, 너한테 맡길게.”
이제 진재희는 최명준에게 무슨 일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고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갔다.
달려드는 검투사는 단칼에 베고, 걸리적거리는 건 모조리 뛰어넘으며, 이 일의 주동자를 처단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녀의 살기가 주변에 깔렸다.
그 숨 막힐 듯한 살기에, 그들은 쭈뼛거리며 길을 터 줄 정도였다.
마침내 길대헌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고, 그 역시 진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길대헌의 회칼이 흐물거리며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네가 아무리 과거에 이름 좀 날렸다 한들…… 능력이 봉인된 지금 날 이길 수 있을까? 응?! 난 플레이어라고.”
그때 길대헌의 회칼이 채찍처럼 곡선을 그리며 그녀를 공격했다.
그는 손에 닿는 모든 물체를 탄성이 있게 만 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쥔 회칼은 마치 고무처럼 휘어져 진재희를 베었다.
휘릭-. 서걱!
진재희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벌하게 다가오는 회칼에 자신의 검을 맞부딪쳤다.
챙!
강렬한 마찰음과 함께, 회칼이 다시 휘감기며 진재희를 위협했다.
하지만 이는 진재희가 의도한 것이었다.
슉-.
“?!”
진재희는 쥐고 있던 검을 놓고선,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회칼은 검을 휘감았고, 그렇게 시간을 번 진재희는 또 다른 검을 집어 들었다.
이곳은 검투사들의 전장.
바닥에는 수많은 무기가 깔려 있었다.
길대헌은 순간 당황했지만, 어차피 상황은 변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플레이어.
그렇기에 능력이 봉인된 진재희 정도는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었다.
“그래서 어쩔 건데!!!”
휘릭-. 휘릭-!
길대헌은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회칼을 휘둘렀다.
그리고 진재희는 아까보다 압도적이고,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그 공격을 피해 냈다.
타고난 검사의 화려한 움직임.
진재희는 그의 회칼을 받아치고 검을 놓치면 또 다른 검을 잡았다.
공격이 반복될 때마다 그녀는 검을 잡고 놓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착실하게 길대헌에게 다가갔다.
둘의 경합 덕분에 주위에 있다가 휘말린 검투사들은 칼에 베여 죽었다.
진재희와 길대헌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진재희는 놀라운 움직임으로 더 빠르게 길대헌에게 다가갔다.
길대헌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이…… X발!’
분명 아티팩트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건 길대헌 본인이었는데도, 진재희에게 밀리고 있었다.
진재희는 자신의 공격을 허리를 비틀어 피하기도 하고, 발목을 이용해 미끄러져 나가기도 했다.
게다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회칼을 피해 냈다.
반복해서 회칼을 피하는 그녀의 동작에는 우아함이 묻어 있었다.
그렇게 수십 번의 공격을 피해 낸 끝에, 진재희는 작은 검을 들고 길대헌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눈앞까지 온 그녀를 마주한 길대헌은 사색이 되어 비명을 내질렀다.
“으으…… 꺄아아아아아악!”
비명은 잠시뿐.
진재희는 검을 휘둘렀고, 길대헌의 목엔 사선으로 칼자국이 그려졌다.
휘릭-. 서걱!!!!
“커헉……?!”
길대헌은 아티팩트 능력자.
이 정도론 죽지 않을 것을 진재희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베었던 곳을 또 베었다.
서걱-!
두 번으로도 부족하다.
서걱-! 서걱-!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같은 곳을 베고, 베고, 또 베고.
각성한 인간의 단단한 목뼈가 부러질 때까지 그녀는 베고 또 베었다.
서걱-!
서늘한 소리와 함께 마침내 그의 목이 떨어졌다.
“…….”
길대헌은 무참하게 패배했고, 뒤로 쓰러졌다.
그들은 나름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강시온 일행을 묶어 두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오만이었다.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건 두 가지였다.
강시온은 예상을 한참 넘도록 똑똑했고.
진재희도 예상을 한참 넘도록 강했다.
진재희는 쓰러진 길대헌의 배를 향해 검을 꽂아 넣은 후,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선 최명준이 마지막 남은 잔당의 목을 비틀고 있었다.
그걸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 * *
만경의 궁.
불규칙한 땅울림에, 대신들은 곧장 일어나 어수선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뭡니까? 지진인가요?”
“한반도에서 지진이라니. 설마 보스 몬스터는 아니겠지?”
갑작스러운 땅울림에 당황했던 건, 강남의 대신들뿐만이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 상황을 지켜보던 이석진도 마찬가지였다.
‘뭐지.’
예상하지 못했던 땅울림에, 그는 우선 하윤하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 역시도 상당히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드륵-!
이석진은 의자를 끌며 일어나 회의장을 나섰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강남 대신들은 소리쳤다.
“어디 가십니까?! 아직 회의가.”
“닥쳐.”
“아, 아닛?”
지금껏 그들의 비위를 맞춰 고개를 굽신거리던 이석진이 갑자기 돌변했다.
그는 회의장을 나가 만경 일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두 부하가 다급하게 이석진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세력에 속한 모든 오우거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마 수리산으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수리산의 저희 측 요원들과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
이석진은 양복바지에 두 손을 꽂아 넣고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옥상으로 올라갔다.
부하들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일이 뭔가 잘못된 것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었다고, 잘못된 채로 내버려 둘 이석진이 아니었다.
지금껏 세력은 그의 뜻대로 잘 흘러왔고, 영웅이 돌아온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석진은 이번 위기를 잘 넘겨, 자신이 원하는 만경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벌컥-!
옥상문이 열리면서 차가운 바람이 이석진의 얼굴에 부딪혔다.
그리고 이석진은 순간 넋을 잃고 만경의 전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수리산 정상에 있는 자신의 펜션.
그곳을 중심으로 수백 마리의 오우거가 집결하여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오우거는 인간에 비해 덩치가 수십 배에 이르기에, 제아무리 먼 거리일지라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했다.
마치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처럼 오우거들이 수리산 일대를 에워싸고 있는 광경은 실로 장엄했다.
이석진은 잠시 넋을 잃고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석진의 뒤를 따라왔다.
수리산의 장엄한 광경에 그들 모두가 놀란 눈치였지만, 그중 제일 놀란 것은 하윤하였다.
그녀의 눈시울은 붉어졌고, 곧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
하윤하는 다리가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울컥거리며 울음을 삼켰다.
“…….”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껏 감정을 다스리며, 지난날의 역경을 헤쳐 왔던 하윤하는.
자신이 그토록 고대하던 영웅의 귀환에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돌아오셨다, 영웅이……!”
“영웅이여. 영웅이!”
어느새 옥상에 가득 채운 만경의 대신들은 수리산 정상을 향해 엎드려 절했다.
그들 모두는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옥상에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유일하게 서 있는 사람은 이석진뿐이었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읊조렸다.
“X 됐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