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왕의 귀환 (1)
“저들이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거야. 그들은 실제로 그를 마주친 적이 없었으니. 한 번이라도 그를 겪은 적이 있다면 이런 얄팍한 공작을 벌이진 않았겠지. 그를 마주한 순간, 자신들이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지 깨닫게 될 테니까.”
진재희의 말을 듣고 있던 이호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 사람이 도깨비라도 돼? 악마라든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 말이 더 안 돼. 지금 넌 이곳에 갇혀 있는데도,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잖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네가 직접 그를 보면 알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람이 귀신도 아니고, 신도 아닌데.
마주한 순간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진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너도 분명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될 거야. 일어나. 훈련하자.”
“뭐? 싫어.”
이호승은 여전히 앉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진재희는 이호승이 앉고 있던 나무 상자를 발로 밀어 빼 버렸다.
쿠당-!
덕분에 이호승은 뒤로 넘어졌다.
이호승은 잔뜩 열을 내며 그녀를 보며 외쳤다.
“무슨 짓이야!”
“넌 스스로를 지킬 만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해. 언제까지 그렇게 처맞고만 다닐래? 학생 때부터.”
“……그건 선천적인 거고.”
“선천적이라고 핑계 대지 마.”
“난 팔 굽혀 펴기 한 개도 못 해.”
“그럼 한 개가 되게 만들어. 무릎 대고.”
“…….”
진재희는 이호승을 바라보며 한심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얘가 왜 이렇게 한심해졌지.’
적어도 그녀가 가르칠 당시의 강시온의 실력은 이호승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잘나진 않았었다.
강시온도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건 마찬가지였으니.
하지만 그는 오히려 진재희보다 더한 독기를 품고 훈련했다.
매일같이 진재희에게 죽자고 덤벼들었고, 조금 쉬어야 할 때도 그는 쉬지 않았다.
강해지기 위해, 또 동생을 만나기 위해 필사적이었으니까.
그런 강시온과 비교하자니, 눈앞의 이호승이 한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지킬 힘이 없다면 언젠가는 허무하게 죽고 말 거야. 닥치고 따라와.”
“…….”
이호승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진재희는 넓게 트인 공간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3사동의 죄수들이 양쪽으로 길을 터 주었다.
처음 그녀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 다쳤던 검투사들이 이젠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상태가 호전되어 다시 힘을 되찾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진재희에게 덤벼드는 일은 없었다.
이미 힘의 차이를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검투사들이 다시 일어나면서, 상황은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얼마 전부터 검투사들이 다시 시합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진재희의 시합 일정이 뒤로 밀렸다.
진재희가 교도관과 약속했던 건, 3회의 승리를 한다면 꺼내 주겠다고 한 것.
하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시합이 없었으니, 남은 2회를 빠르게 채울 방법이 없었다.
교도관의 말로는 한 번 출전한 검투사는 2회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상부에서 결정된 지침이라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어쨌거나 지금 진재희에게 중요한 건, 강시온의 행방이었다.
헤어진 지 이제 일주일이 다 되어 갔다.
이젠 분명 그가 움직이기 시작할 터.
‘어떻게든 경기를 뛰겠어.’
조금 과격한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진재희는 3번의 경기를 뛰어야만 했다.
그녀는 출전 준비 중이던 검투사를 불렀다.
검투사는 그녀의 부름에 후다닥 달려왔다.
“왜 그러십니까?”
진재희는 단단한 의자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발 한 쪽 여기 올려.”
“발 말씀이십니까?”
검투사는 의심하면서도 자신의 한쪽 발을 그 의자 위에 올렸다.
자신이 속한 사동 대장의 명령을 어길 순 없었기에.
그때.
휘릭-. 우득!!!
“아아아아아악!!!!!!”
진재희는 검투사의 발을 부러뜨려버렸다.
검투사의 관절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는 땅바닥에 쓰려져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진재희는 개의치 않고 다음 검투사를 불렀다.
“다음, 너. 다리 올려.”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하나였다.
바로 3사동에 자신 이외의 모든 검투사를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것.
검투사들은 사색이 되어선 몸을 주춤거렸다.
“아, 아무리 그래도……!”
“젠장. 이건 아닌 것 같아!”
“너무한 거 아니오!!!”
“에이. X바! 이 개 같은 년이!”
그중, 제일 어리고 혈기왕성한 검투사 한 명이 그녀의 명령에 반발해 달려들었다.
“죽여 줄게……!”
부웅!
검투사는 진재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진재희는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는 안쪽으로 파고들어 능숙하게 그의 왼쪽 팔을 반대편으로 꺾어 버렸다.
우드득-!
“끄아아아아악!!!!”
진재희는 고통스러워하는 검투사를 뒤에서 껴안아 제압하고는, 또다시 그의 오른팔을 잡아 반대편으로 꺾어 버렸다.
우드득-!
검투사의 양팔이 빠져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녀는 쉬지 않고 쓰러진 검투사의 왼쪽 발목, 차례로 오른쪽 발목도 있는 힘껏 반대쪽으로 비틀었다.
우득! 우드드득-!
“아아…… 아아……!!! 아아아!”
순식간에 사지(四肢)를 모두 꺾인 검투사들은 기절해 쓰러졌다.
진재희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이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 뒤, 그녀는 검투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부 부러질래? 아님, 한쪽 다리만 부러질래.”
그녀의 압도적인 살기에 검투사들은 자진해서 줄을 서, 하나씩 의자에 다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스스로 부러뜨리기도 했다.
* * *
“아니, 그렇다고 3사동의 검투사 전원을 저렇게 만들어? 지금 나랑 장난해!!!”
선배 교도관은 철창 한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윽박질렀다.
그곳에는 검투사들이 한데 모여, 아직까지도 끙끙 앓고 있었다.
다행히 3사동 안에는 의사 출신의 죄수도 있었기에, 그들의 치료는 곧바로 이뤄졌다.
진재희는 교도관의 윽박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그러니까 날 내보내. 이제 달리 방법이 더 없잖아.”
“젠장! 미친 사이코 년이!”
콰앙-!
선배 교도관은 철창을 주먹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일이 이상하게 꼬여 버렸다.
첫 번째는 진재희가 3사동의 모든 검투사를 제압하고 사동 대장 자리를 거머쥐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재희가 이렇게 과격한 방식을 내세울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이제 꼼짝없이 저 여자를 다시 경기장에 보내야 할 참이었다.
‘원래 같으면 계속 미루면서 상부의 처분을 기다릴 텐데……!’
꼬였다, 꼬였어.
무엇하나 제 자신이 뜻하는 대로 되질 않았다.
‘이제 와서 돈을 토해낼 수도 없고. 하아아……!!!!’
“……X발!”
뻥!
교도관은 바닥에 있던 물건을 땅을 발로 차 대며 성질을 있는 대로 부려댔다.
그때, 진재희는 철창을 천천히 붙잡고서는 매우 고혹적인 눈빛으로 철창 밖의 교도관을 바라보았다.
“……?”
진재희는 상당히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런 여자가 요염한 자세로 철창을 잡고 있으니, 눈이 갈 수밖에.
그녀의 모습에 선배 교도관은 잠시 넋이 나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진재희는 선배 교도관의 위아래로 훑고는 말했다.
“너. 내가 밖으로 못 나갈 거라고 생각해?”
“뭐라고?”
“그게 네가 원하는 거잖아. 내가 여기 안에서 처리되는 게 가장 이상적이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았어?”
“…….”
“그럼 이런 생각은 안 해 봤어? 왜 상부에서 기껏 사람 한 명을 이렇게 처분하지 못해서 안달 났는지.”
“…….”
그건 맞는 말이었다.
도대체 이 여자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3사동에 처박으면서까지 처리하려고 했는지 교도관도 궁금했다.
이곳 3사동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정적을 완전히 처리하기 위해 만든 인간 쓰레기통이었다.
이곳에 들어가면, 정신이 온전한 자들도 순식간에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마침 선배 교도관은 그녀의 이름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았다.
진재희라는 이 여자의 이름은, 과거 영웅과 함께 당시를 호령했던 그자의 이름과 똑같았다.
근데 그 영웅의 동료인 진재희를 누군가는 남자라고 하고, 누군가는 여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말하는 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것.
선배 교도관은 고개를 저었다.
“있을 수 없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들은 5년 전에 사라졌고,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았어. 아니, 게다가. 그런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게 말이 안되잖아? 아하하하!”
그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날 기만하려고 드는구나? 만약 영웅께서 도시로 돌아오셨다면, 환대를 했겠지. 이런 감옥에 처넣는 것이 아니라.”
영웅이 사라진 뒤로, 수많은 기만행위들이 있었다.
자신이 강시온이라며, 자신이 진재희라며 세력에 들어와 이 감옥에 처박힌 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강시온이 된다면, 진재희가 된다면 이 만경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건 가히 신과 필적한 혜택들이었으니.
당연했다.
언제나 사칭범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선배 교도관은 이미 수도 없이 많은 사칭범들이 이곳에서 죽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물론 이번만큼은 뭔가가 이상했지만.
진재희는 힘을 다해 그를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될 테니. 지금 것은 한번 던져보는 것에 불과했다.
“잘 선택해. 평생 후회하지 말고.”
그 말만을 남기고 진재희는 철창에서부터 멀어져, 이호승에게 다가갔다.
선배 교도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도대체 뭐가.’
선배 교도관은 진재희가 자신에게 무얼 선택하라고 하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깨닫고 말았다. 자신이 터무니없는 사건에 휘말렸다는 것을.
선배 교도관은 상기된 표정을 하고선 천천히 진재희에게 다가갔다.
“날 네가 꾸미는 일에서 완전히 배제해 줘.”
“하는 걸 봐서 생각해 볼게. 근데.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이 있어.”
“뭐, 뭐지?”
“날 여기서 어떻게 ‘3번의 승리’만에 빼준다는 거지? 넌 그래봐야 일개 교도관일 뿐일 텐데.”
진재희의 물음에 교도관은 침을 삼키고선 대답했다.
“둥지에서 여자를 빼내는 건 어렵지 않아. 특히 너 같은 여자는 비싸게 팔리지. 매주 둥지에서 여자를 사가는 손님들이 있다. 거기에 붙여 보내면 그만이야. 그 뒤로는 알아서 하는 거고. 사실 네가 경기에 나선 이후부터 하회탈에 대한 주가도 폭등하고 있어. 넌 비싸게 팔릴 거야.”
‘미친 새끼들.’
진재희는 불쾌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곳은 사회의 밑바닥 중에 밑바닥.
악질들만 모인 공간이었다.
“나 포함해서 세 명 더. 세 명 더 나가야만 해.”
“뭐? 세 명 더? 이봐. 무리한 부탁하지 말라고. 첫 거래는 너 혼자였잖아.”
“거래를 변경하겠어. 네놈도 어차피 날 팔아먹은 돈으로 한탕 할 것 아냐?”
“……그건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야.”
“아니. 날 비싸게 팔려면 내가 나가야만 하겠지. 하지만 나머지 셋도 같이 나가지 않는다면, 난 이곳에서 나가지 않겠어.”
진재희의 폭탄선언에 교도관은 인상을 팍 구겼다.
어차피 이곳에 오는 손님은 강남의 갑부들이 대부분이고, 교도관은 진재희를 비싼 값에 팔아넘기려고 했었다.
익명의 누군가에게 전달받은 사안은 진재희가 만경 내부에 있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니 명령에 위반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푸욱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누군데. 누가 됐든 남자는 안 된다.”
“남자는 둘이다.”
“절대 안 돼!”
교도관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고, 다른 검투사들이 시선이 몰리자 그는 금세 소리를 죽였다.
“남자는 절대 안 돼. 불가능해. 둥지가 존재한 이후로 3년간, 그런 일은 거의 없었어.”
“거의?”
“아, 아니. 그게.”
“방법을 찾아. 교도관. 이건 제안이 아니야. 내가 정한 조건이지.”
“X발.”
남자가 아예 안 팔리는 건 아니었다.
강남의 갑부 중에서는 동성애자도 있었으니.
하지만 그런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특히 그는 강남에서 크게 부동산 사업을 하는 공식적으로는 10대 부자 안에 들 정도로 갑부였다.
“가능은 하겠지만, 여린 남자여야만 해. 깡마르고, 머리카락도 좀 길고. 안경을 쓴 남자. 그게 내가 아는 전부야. 그 강남 갑부는 그런 자들만 골라 사 간다고 하더라고.”
‘그거 완전 이호승이잖아.’
진재희는 꿀꺽 침을 삼켰다.
교도관은 곤봉을 꺼내 철창 가까이 대며 말했다.
“어차피 나갈 사람은 정해져 있겠지? 너와 함께 들어온 나머지 두 명. 그리고 한 명은 모르겠지만. 남자는 100% 빼낸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 이건 참고해. 하지만 여자는 가능해. 내 조건은 하나야. 날 이 사건에서 완전히 배제시켜 줘. 원래 없던 사람처럼. 그럼 내가 널 그곳에서 꺼내주겠다.”
진재희는 자신의 목에 차져 있는 붉은 원석이 박힌 목줄을 건드리며 말했다.
“이건. 어떻게 풀지?”
“노예로 팔리면 영원히 못 풀지.”
“이것도 방법을 찾아내.”
“적당히 해야지. 양아치도 아니고.”
“키를 구해 와. 반드시. 이 목줄의 열쇠. 그리고 넷 모두 이 감옥을 빠져나가는 것.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지켜지지 않는다면, 오늘 나눈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겠어.”
진재희는 그 말만을 남기고 뒤돌아 걸어갔다.
“아, 자, 잠깐!”
교도관이 한차례 불렀지만 멀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