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검투사 (1)
어두컴컴한 방 속에서 철갑이 맞부딪히는 소리만이 울렸다.
숨 막힐 듯한 긴장감으로 웃음기 하나 없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시합에 앞서 검투사들은 평상복을 벗고, 갑주와 무기로 무장했다.
대부분의 검투사는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이번 시합에 참가하는 검투사는 일반 죄수들에 불과하였다.
시합은 확실한 스타플레이어가 있어야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런 스타플레이어조차 진재희가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으니, 3사동의 시합 결과는 좋은 쪽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던 교도관은 결국 진재희를 투입시켰다.
슥-. 슥-.
진재희는 붕대로 전신을 꽁꽁 묶기 시작했다.
격동적인 움직임을 구사해야 할 때는 몸에 붙어 있는 살집이 굉장한 걸림돌이 되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거의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가슴 붕대를 꽉꽉 묶어야만 했다.
그 곁에 있던 이호승은 단단한 갑주를 입고서는 근처에 있던 작은 망치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진재희는 다시 호승의 갑주를 벗겨 냈다.
“입지 마.”
“……왜?”
“말 들어. 내가 더 잘 아니까. 오히려 방해가 돼. 방패랑 검만 들어. 방패랑 검도 최대한 가벼운 것만 들고.”
철크덩-! 철컹!
호승의 몸에 붙어 있던 갑주들이 땅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갑옷은 인간을 상대할 때나 쓸모 있지.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
“왜, 왜? 다른 사람들은 다 갑옷을 입는데?”
“전부 뒤지려고 환장한 거지.”
“…….”
호승은 재희의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다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둘은 딱히 화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서로 이빨을 들이밀며 날카로운 관계도 아니었지만.
뭔가 감정이 누그러진 상태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를 새도 없이 곧바로 시합이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말없이 다시 옷을 점검하는 재희를 바라보며 호승은 말했다.
“너 좀 많이 변한 것 같다.”
그 말에 진재희는 이빨로 붕대를 뜯으며 대답했다.
“난 원래 똑같았어.”
“아니. 원래는 웃음이 많았어.”
“네 착각이겠지.”
스응-!
진재희는 날카로운 검날을 쥐고선 이리저리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펜싱 검처럼 날렵하지만, 탄성이 있는 검을 찾고 있었다.
진재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얇고 가느다란 검을 발견하곤 그것을 집어 들었다.
“동료……. 가 있어? 아니. 여기에 갇혔다는 건 그 동료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건가?”
“잘못되지도 않았고, 딱히 동료들 걱정은 안 돼. 걔네는 안 죽거든.”
“누군데?”
“지금 알아서 뭐 하게. 나중에 소개해 줄 테니까. 지금은 전투에만 집중해.”
진재희는 적당히 검을 휘둘러보고는 다시 허리춤에 찼다.
호승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망치 하나만 들고 있었다.
재희는 그의 등을 밀치며 반대편으로 향했다.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우선 나가면 내 옆에만 붙어있어. 절대 나서지 마.”
“나도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어.”
“퍽이나. 네 멸치 같은 몸으로.”
“멸치……?”
둘이 대화하는 사이, 준비실에 또다시 교도관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검투사들에게 소리쳤다.
“이제 곧 시합이다! 모두 준비하고 바깥으로 나와.”
교도관은 그 말을 하고선 진재희를 바라보았다.
진재희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별다르게 행동하진 않았다.
준비를 마친 검투사들이 비장한 표정을 하고선 하나둘 방을 나섰다.
진재희 역시 호승을 이끌고서는 빛이 흘러나오는 복도를 향해 걸어갔다.
* * *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더 커지기 시작했다.
만경과 강남의 시민들로 이루어진 관중들은 저마다 응원하는 선수의 구호를 외치며 소리쳤다.
진재희가 받은 번호는 3번, 이호승이 받은 번호는 15번이었다.
관리인들이 검은 페인트로 그들의 등에 숫자를 그려주었다.
콜로세움의 승리 조건은 간단했다.
살아남거나 승리만 하면 됐다.
하지만 콜로세움의 경기 내용은 검투사들이 직접 경기장에 들어서지 않는 한, 알 수가 없었다.
어떨 때는 몬스터와 싸우기도 하고, 어떨 때는 다른 사동의 검투사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3사동의 검투사들은 오랜만에 내리쬐는 태양 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
하지만 곧, 시야가 돌아왔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거대한 쓰레기 더미였다.
온갖 잡다한 쓰레기들로 이루어진 더미였지만, 그 정상에는 하얀 깃발이 꽂혀 있었다.
검투사들은 그 깃발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설명을 듣지 않아도, 저 깃발을 사수해야 된다는 것쯤은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쿠광-! 드르르릉!
그와 동시에 반대편 쇠창살이 열리며 1사동의 검투사들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
“…….”
두 검투사 집단 사이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때, 경기장 위에 있던 사회자는 관중들을 향해 소리쳤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만경 그리고 강남 시민 여러분! 둥지에 오신 여러분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번 콜로세움의 주제는 깃발 뽑기입니다. 위대한 만경의 초대 영웅, 강시온께서 1라운드를 버텨 낸 영웅적 신화에서 따온 게임이지요. 지금 보이는 각 사동의 검투사들은 이 정상에 보이는 깃발을 뽑기 위해 서로의 목숨을 노릴 것입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만경의 유능한 궁수들이 검투사들의 목숨을 노릴 테니.”
그때, 경기장 외곽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로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재희는 궁수들을 바라보다, 이내 반대편 1사동의 검투사들을 바라보았다.
1사동뿐만 아니라, 3사동의 검투사들 역시 상기된 표정을 하고선 무기를 꼭 쥐었다.
‘깃발을 뽑기 위해서는 산을 올라야 하지만, 무방비로 올랐다가는 궁수에게 저격당하는 구조인가.’
참으로 지독한 방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진재희는 하윤하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녀가 이런 일을 벌였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만경은 무언가가 썩었다.
강시온이 세력을 나오기 전보다 국력이 강해진 것은 분명했지만, 서서히 권력과 탐욕, 쾌락 등이 시민들을 좀먹는 듯 보였다.
진재희는 이호승의 손목을 쥐고선 앞으로 나왔다.
하회탈을 쓴 진재희.
그녀와 교도관 사이에 오간 거래는, 그녀가 콜로세움에 나서는 동안 절대로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원래라면 7번의 승리를 거머쥐어야만 하겠지만, 만약 그녀가 단 3번의 경기만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다면 그녀를 감옥에서 빼 주겠다는 거래였다.
진재희 입장에서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거래였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으니.
진재희는 전방을 주시하며 호승에게 말했다.
“잘 들어. 경기가 시작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가, 저 쓰레기 더미 사이로 들어가 숨어.”
“저길……?”
“그래. 왜, 라는 질문 말고, 쓰레기 더미에 파고들어서 숨도 쉬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하지만 넌……?!”
“왜냐고 묻지 마.”
진재희는 찌릿, 이호승을 노려보았고, 그는 금세 의기소침해져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해 볼게.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해.”
“응?”
진재희는 다시 소리쳤다.
“한다고 해!”
“아, 알겠어! 할게.”
호승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거면 됐어.”
진재희는 다시 집중하기 위해 전방을 바라보았다.
이제 관중들이 더욱 소리치기 시작했고, 사회자의 말과 함께 경기는 시작되었다.
“우야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
검투사들은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동시에 이호승은 진재희의 말대로 쓰레기 더미를 향해 달려 나갔다.
슉!
화살이 날아들어 이호승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만경의 궁수들이었다.
그들은 활시위를 당겨 쉬지 않고 검투사들을 향해 쏘고 있었다.
이호승은 중간에 한 번 넘어졌지만, 다시 꿋꿋하게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원래라면 진즉에 포기하곤 그 자리에 주저앉았겠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진재희가 있었다.
진재희가 다시 삶의 의미를 알려 준 덕분이었다.
살고 싶다.
그 감정 하나만으로 이호승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진재희의 말대로 갑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빠르게 뛰어나갈 수 있었다.
그때, 1사동의 검투사 한 명이 이호승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이호승은 위험을 감지할 새도 없이, 앞으로만 달려 나갔다.
1사동의 검투사는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쥐고 있던 창을 이호승의 심장을 향해 찔렀다.
“?!”
이호승은 그제야 자신이 공격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늦었다.
하지만 진재희가 먼저였다.
휘릭-. 서걱!!!
그녀의 검날이 검투사의 창을 베어버렸다.
뒤이어 진재희는 오른발을 들어 검투사의 관자놀이를 발꿈치로 찍어 버렸다.
퍼억!
순간 검투사는 정신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고,
검투사가 쓰러지기 직전, 진재희는 쥐고 있던 검으로 목을 베 마무리를 지었다.
서-걱!
새빨간 핏물이 위로 솟구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호승은 차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바닥에 착지한 진재희는 쉬지 않았다.
쓰레기 더미를 기어오르는 1사동 검투사들을 향해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그녀의 화려한 검술에 관객들은 환호했다.
“와아-!!!!!”
“저 3번 봐!”
“하회탈? 처음 보는 검투사 같은데?”
“굉장하잖아!”
환호하건 말건 진재희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그녀의 검날에 베어진 검투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쓰러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른 3사동의 검투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을 단신으로 쓰러뜨린, 그녀의 용맹함에 모두가 떡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3사동의 연쇄 살인마는 소리쳤다.
“대장을 따르는 거야!”
“모조리 죽여 버려!!!”
“우랴아!”
진재희를 필두로 3사동은 승기를 잡았다.
휘몰아치는 검날은 지칠 줄 모르고, 죽은 이들 몸에서 뿜어져 나온 핏물이 한데 모여 강물을 이뤘다.
3사동의 검투사가 깃발을 거머쥐는 그 순간까지. 날아드는 사수들의 화살도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무자비했다.
모든 1사동 검투사들의 시체 위에 선 진재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승리를 거머 쥔 캐릭터.
관객들은 그 캐릭터에 열광했다.
스포츠든 정치든 그 어떤 분야든 매력적인 캐릭터를 마주하면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피 묻은 검은 머리카락, 쥐고 있던 장검과 단검, 맹수처럼 날카로운 눈동자.
3사동이 깃발을 뽑고 승리하자, 관객들은 일제히 진재희를 향해 환호와 갈채를 쏟아부었다.
“우와아아아아아-!!!!!”
“3번! 3번! 3번! 3번!”
“대단해! 대단한 퍼포먼스였어!”
“정말이지, 최고야! 내 인생 최고의 경기였어!”
모든 환호와 갈채 속에, 이호승은 쓰레기 더미에서 기어 나왔다.
그리고 진재희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지난 7년간, 그녀는 성장해 있었다.
자신이 정체되어 있었을 뿐.
진재희는 역시 진재희였다.
* * *
그날 밤, 승리한 사동에는 특식이 주어졌다.
기름진 고기와 약간의 술이 교도관들에 의해 전해졌다.
3사동의 죄수들은 술잔을 들기 전, 진재희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대단하십니다! 대장!”
“정말이지, 엄청났습니다.”
“역시 대장!”
“전부 꺼져.”
“옙.”
“넵.”
“옙.”
재희는 몰아치는 관심을 모조리 묵살하고는 감옥 한편에 있던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곳은 감옥 안이었지만, 옷감과 이불 등으로 간이 칸막이를 만들어놓은 대장실이었다.
펄럭-.
진재희는 이불을 걷어 올리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죄수들에게 지급되는 이불들을 겹겹이 쌓아 만든 간이침대.
그 옆에는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한기가 올라오지 않게 박스들을 깔아 놓은 상태였다.
2라운드, 만안경찰서보다 더 끔찍한 생활 환경이었지만, 진재희는 어느 공간이든 적응했다.
그녀는 들어가자마자 압박 붕대부터 벗어 버렸다.
“후우-.”
그제야 그녀는 숨을 고르게 내쉴 수 있었다.
격한 동작을 할 때면, 이놈의 가슴부터 떼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이호승이 쭈뼛거리며 뒤를 따라 들어왔지만, 곧 그녀의 벗은 모습에 후다닥 고개부터 돌렸다.
진재희는 그의 시선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옷을 입고 한구석에 주저앉았다.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이호승이 다시 천천히 들어왔다.
“왜……. 왜 오라고 한 거야?”
“왜냐니. 안 추워? 바깥에서 자면.”
진재희는 나무 상자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전용 컵을 들어 목을 적셨다.
이호승은 고개를 저었다.
“안 추워. 익숙해.”
“2라운드도 버텼다 이거지.”
“2라운드는 지옥이었어.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아니, 사실 지금도 죽고 싶긴 마찬가지야.”
“너 이제부터 내 앞에서 죽고 싶다는 얘기 또 하면, 그땐 진짜 죽도록 패 줄 거야.”
그 말에 호승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진재희를 바라보았다.
진재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너, 좀. 과격해졌다? 변한 것 같아.”
“누가 봐도 변한 건 너지.”
“됐다, 됐어.”
이호승은 그녀의 가까운 곳에 앉지 않고, 꽤 떨어진 바닥에 주저앉았다.
진재희는 나무 상자 안에서 살짝 딱딱하게 굳은 빵 하나를 꺼내 이호승에게 던졌다.
호승은 공중에 떠오른 빵을 받아내려고 했지만, 놓치고 말았다.
“같이 나가자. 내가 부탁하면, 동료도 널 받아 줄 테니까.”
“네 동료? 뭐 하는 사람인데?”
호승은 빵에 묻은 흙을 손으로 털어내며 되물었다.
진재희는 잠시 강시온에 대해 어떻게 소개할지 고민하다 이내 대답했다.
“이 리그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리그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이호승은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이상했다.
어떻게 한 사람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지가.
어릴 적부터 진재희는 남을 잘 믿지 않았다.
뭔가 속으로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열에 아홉은 그녀의 생각이 옳았다.
그런 진재희가 누군가를 강하게 신뢰한다는 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리그에서 우승하려면 적어도 라운드를 클리어해야 할 텐데, 그 사람의 동료인 네가 여기 갇혀 있는 걸 보면 그렇게 순항하고 있는 건 아닌가 보네?”
“리그에서 우승하려는 게 아니야. 리그를 끝낼 생각을 하고 있지.”
“뭐?”
이호승은 깜짝 놀라 진재희를 바라보았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재희는 확신하고 있었다.
강시온만이 이 리그를 끝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강시온이라는 존재는 그녀가 부산 친구들을 떠나 안양으로 올라온 단 하나의 이유였다.
“난 믿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