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공작 (1)
최명준에게 패배한 문신 오크는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손을 내주었다.
결투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든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
오크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내리쳤다.
터엉-!
문신 오크는 허리춤에서 칼을 빼내더니 땅에 박았다.
그리고 넙죽 고개 숙이며 말했다.
“……졌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패배자의 팔을 자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오크 족들의 결투에선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한다.
그랬기에 패배한 오크도 순순히 자신의 팔을 내어 주었던 것.
하지만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어차피 이건 단순한 유희에 불과했고, 더 나아가선 저들은 세력의 귀중한 전투력 자원일 테니까.
하지만 최명준의 생각은 달랐다.
한동안 패배자로 살아왔던 최명준이 승리를 거머쥔 뒤에는, 그는 다시 야수처럼 맹렬한 조폭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승리자의 감정.
터억-. 휘릭-!!!
최명준은 피를 흘리면서도 단검을 쥔 채, 놈의 팔을 겨누었다.
그리고 그는 중얼거렸다.
“X발 놈이. 내가 X으로 보였지.”
휘릭-. 푸욱!
오크의 손등에 찍힌 단검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솟구쳐 최명준의 얼굴에 묻었다.
그리곤 검날을 비틀어 확실히 마무리 지었다.
그는 무자비했다.
뭣도 모르고 대든 상대는 확실하게 짓밟는다.
그게 최명준이었다.
“크으으윽…….”
문신 오크는 이를 물며 참아 냈다.
* * *
다음 날.
흩어진 원정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만경을 돌아다녔다.
오전 내 무너진 도심 속을 돌아다니다 보니, 꽤 익숙한 쇼핑몰이 진재희의 눈에 들어왔다.
진재희에게도 꽤 의미가 있던 장소였다.
이 쇼핑몰이 바로 강시온과 함께 1라운드를 치렀던 곳이었으니까.
전쟁 이후 새롭게 건축되어 이제 자유 시장의 핵심 건물이 되어 있었다.
많은 주민이 오가며 갖은 물품들을 사고 있었다.
1라운드로부터 7년이 지났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원래 영화를 틀어 주던 공간은 오페라 하우스처럼, 연극이 상영 중이었다.
시체로 가득했던 매장 내부는 이제 여러 먹거리를 파는 매장으로 뒤바뀌었다.
그뿐만 아니라 쇼핑몰 곳곳에 강시온의 흔적들이 있었다.
시체를 보관했던 엘리베이터 내부는 관광지가 되었다.
또한 고블린을 막은 강시온의 바리케이드 역시 그대로 있었다.
이곳은 이제 만경의 주민들에게도 의미가 깊은 곳이 되어 있었다.
“원래 옷 어떻게 입었었어?”
“적당히.”
“바지 좀 사야겠다. 아니, 색깔이 잘 어울려야 해.”
“…….”
“동생님은 어떤 게 어울리려나? 캐주얼? 청순하게?”
“찢어진 옷만 사. 바지나, 신발 같은 거.”
진재희는 무더기로 쌓인 옷 더미 속에서 대충 튼튼해 보이는 옷들을 주워 담았다.
그녀는 외관보다도 실용성을 중시했다.
주머니가 많고, 방수도 되고, 잘 찢어지지도 않은 옷.
재희는 군복을 집어 들었다.
‘장학선’이라는 명찰이 바늘로 새겨진 군복 상의였다.
전역할 때 입었던 군복인지, 검은색의 명찰이었다.
그녀는 명찰을 손으로 떼 버렸다.
뜨득-!
그때 최현지가 엉뚱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 옆에서 물었다.
“……군복? 진심이야?”
“응. 너도 하나?”
“난 됐어…….”
최현지는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렸다.
재희는 또 옷 무더기를 살피다가 자신이 입고 있는 바지와 비슷했던 조거 팬츠를 집어 들었다.
마지막으로는 신발.
어떻게 보면 신발이 가장 중요했다.
거친 도시를 종일 돌아다니다 보면 가장 먼저 해지는 것이 신발이었으니까.
그녀가 멸망을 대비하기 위해 준비했던 건 워커 부츠였다.
튼튼하고 잘 풀어지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워커 부츠의 상위 호환이 사실 공교롭게도 군화였다.
진재희는 또다시 군화 두 켤레를 집어 들었다.
새로 쇼핑한 옷을 입은 진재희는 화장실에서 나오며 옷깃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최현지의 한쪽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이내 입을 가리고는 키득거렸다.
“큭큭. 와. 패션 봐. 세상이 멸망했다고 해도, 누가 옷을 그렇게 입어.”
물론 그건 최현지만의 생각이었다.
세상이 멸망한 뒤로 군복은 사람들 사이에서 꽤 비싸게 팔려 나간 아이템이었다.
특히나 실제 만경의 군인들은 질 좋은 군복을 사기 위해 방랑자들과 거래를 할 정도였다.
진재희가 평가했던 대로 군복은 잘 찢어지지도 않고, 튼튼하고 방수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현지는 세상이 멸망한 뒤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멋을 포기할 수 없었던 여자였기에, 그녀의 눈에는 진재희가 너무 엉뚱하게 보였다.
물론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했던가.
진재희의 미모는 그런 옷들을 입었다 한들, 더욱 돋보이고 있었다.
주변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힐끗거릴 정도로.
철컥-. 철컥-.
진재희는 벨트를 조이며 최현지에게 말했다.
“전부 다 샀으면 가자. 시간 아까워.”
“응? 아- 뭐래! 이제 한 바퀴 돌았는데. 몇 개 점 찍은 곳이 있으니까. 거기 중심으로만 조금만 더 보자.”
“더 보자고?”
“아- 알았어. 원래 기본 7바퀴는 돌아야 하는데. 앞으로 3바퀴만 더.”
“싫어.”
“거부는 거부한다.”
최현지는 쫄랑쫄랑 달려가 진재희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알았어. 내가 걸어갈 테니까. 놔줘.”
재희는 슬그머니 최현지의 팔짱을 풀며 말했다.
최현지는 진재희를 이끌고 다시 인파가 몰린 복도를 걸었다.
그때.
진재희의 눈동자가 전방에서 천천히 왼쪽으로 움직였다.
“……호승?”
이호승, 그녀의 친구이자 전생에 강시온을 지키라고 부탁했던 남자.
원래라면 이 리그를 지금껏 같이 치르고 있어야 할 동료.
그의 실루엣이 잠시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가 금세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
진재희는 우두커니 인파 속에 서서 그의 실루엣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호승은 없었다.
애초에 이호승이 만경에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었다.
이호승은 부산 일대에서 시작해서 지금쯤 경북 원정에 나설 시기였으니.
진재희는 그곳에 멈춰 서서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잘못 봤겠지.’
그리고 한창 옷 구경 중인 최현지에게 다가갔다.
“…….”
이호승은 숨을 살짝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얼굴에는 검은 두건이, 목과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중심 거리를 따라 죄수들이 끌려가며 순식간에 이목을 끌었지만, 애석하게도 재희와 만나는 일은 없었다.
이호승은 끌려가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죽여 줘, 누가.”
* * *
최현지는 양손 가득 가방을 걸고 방문을 세차게 열었다.
덜컹!
“짜-잔! 내가 왔습니다! 여기 진짜 대박이야. 온갖 명품 옷들이 잔뜩 있다고! 명품 백이 3라이터밖에 안 해. 대애-박.”
“…….”
호기롭게 방 안으로 들어간 최현지와 달리 진재희는 느긋하게 들어갔다.
최현지가 한껏 분위기를 끌어올리며 인사했지만, 예상대로 두 남자의 방은 고요했다.
온몸에 붕대와 거즈를 칭칭 두른 최명준은 주먹을 불끈 쥐며 위협했다.
“조용히 해라. 형님 독서 중이시다.”
최명준의 말에 최현지는 창가에 앉아 책을 보는 강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최명준을 보며 물었다.
“넌 도대체 뭐 하고 다니면 그 상태인 거냐?”
“알 게 뭐야. 나가서 술이나 좀 사 와라.”
“X까.”
최현지는 그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곤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팔락-.
강시온은 두 여자가 방에 들어오든 말든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최명준은 온몸에 붕대를 감싼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진재희는 품에서 작은 과자 상자를 꺼내 강시온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별일 없었어?”
그녀는 그가 보던 책의 제목을 살폈다.
‘노인과 바다’라는 제목의 소설책이었다.
팔락-.
강시온은 다시 책장을 넘기며 대답했다.
“별일이야, 뭐가 있겠어. 종일 방에만 있었지. 덕분에 푹 쉬었어.”
“잘됐네. 소설을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1층 로비에 진열된 책을 빌려 왔을 뿐이야. 근데 생각보다 재밌네.”
진재희는 작은 상자를 열곤 시장에서 사 온 과자를 포장지째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이 과자 때문에 만경에 오는 방랑자들도 많다네. 어떤 할아버지가 만드는 건데, 줄이 엄청나더라.”
“사 온 거야?”
“응. 나도 먹어 봤는데, 맛있어서.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
“잘 먹을게.”
강시온은 과자를 집어 한입 베어 먹었다.
사람들이 줄지어 왜 사 먹는지 단번에 이해할 정도로 과자는 달고 맛있었다.
진재희는 자연스럽게 그의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아, 그래. 시장 거리에서 병사들이 대규모로 움직이는 걸 봤어. 아무래도 널 찾고 있는 것 같던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책장이 반대쪽으로 넘어갔다.
팔락-.
‘날 찾고 있다…… 라.’
시온은 생각했다.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라고.
첫 번째는 자신을 체포하기 위한 것.
어쨌거나 5년 동안이나 사라져 있었고, 자신이 사라진 동안 만경에는 어떤 법들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을지는 모를 일.
만약 첫 번째 이유라면, 세력 내부에서 강시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일 것이다.
두 번째는 하윤하가 직접 지시를 내린 것.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만 했다.
하윤하는 군주의 ‘칙령’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도시 국가의 왕이다.
이로 인해 당연히 시민과 관리 통치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민족이나 국가든 정부에 반감을 지니는 세력이 있으니 말이다.
‘우선 상황을 봐야겠지.’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자신을 체포한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칙령의 힘이 남아 있었다.
남은 건, 그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관찰하고 대응하는 것.
햇살이 창살을 뚫고 그의 책을 비추고 있었다.
노인이 탄 배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삽화가 눈에 띄었다.
진재희는 소설이라면 끔찍하게 싫어했다.
학생 시절부터 글 몇 줄만 읽어도 졸음이 오는 스타일이었기에.
다시 강시온은 그 소설 속 내용에 푹 빠져들었다.
‘…….’
진재희는 더 이상 말하기를 그만두었다.
그저 말없이 등받이에 편히 기대 그를 관찰했다.
그가 정신을 잃은 이후, 그는 정신적 변화가 있었다.
원래는 단 하루라도 쉼 없이 동생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강박증에 빠져 있었다면, 이젠 여유롭게 삶을 즐기는 듯싶었다.
혹시 이 행동 자체도, 그가 말했던 그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모르겠어.’
진재희는 쿠키를 집어 들어 반쯤 베어 먹곤 생각에 빠졌다.
솔직히 처음 강시온의 계획을 들었을 땐, 반신반의했다.
그건 전생에도 들어보지 못했던 계획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재희는 그를 이미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고, 그 강한 믿음 속에서 이젠 그의 모든 행동을 납득할 수 있었다.
리그는 이제 중반부에 접어들었다.
주축 세력들이 등장하고 이미 4라운드에 접어든 플레이어도 적지 않을 것이다.
만약 리그를 기준으로 한다면 강시온의 일행은 뒤떨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장의 강준호조차 3라운드를 클리어하고 4라운드에 접어들었으니.
진재희는 강시온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이젠 라운드에 집중하지 마. 의미 없으니까. 날 믿기로 했으면, 나만 따라오도록 해. 걱정 마. 내가 너희 모두를 원래 세계로 보내 줄 테니까.
강시온의 계획에는 크게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다.
앞으로의 원정은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길이 될 것이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자원.
전국에 퍼져 있는 자원 분포가 기록된 전국 지도를 완성하는 것.
그건 강시온이 최현지에게 명령한 것이었다.
이제 최현지는 전국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과거 조선 시대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던 것처럼 전국을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그렇게 강시온은 지리 정보에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며, 남은 두 가지 조건을 보다 쉽게 달성할 수 있을 터.
진재희는 쥐고 있던 500원 코인을 돌렸다.
코인이 빙글빙글 돌다가 바닥에 엎어졌다.
툭- 투르르르르…….
어쨌거나 두 번째 조건과 세 번째 조건까지 모두 달성하면 이제 강시온의 불가능한 목적이 완성된다.
그건.
이 리그를 ‘파괴’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것이지만……. 그저 플레이어인 시온이 관리자들을 굴복시키고 이 리그를 파괴하겠다니. 능력의 한계가 있을 텐데. 그래도 뭔가 생각이 있겠지.’
진재희는 다시 동전을 집어 들었다.
그때,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강시온은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계획은 다 세워 두었으니까.”
“…….”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그제야 시온은 책을 덮고는 진재희를 바라보았다.
“내 목적 달성을 위해, 넌 날 지켜주기만 하면 돼.”
진재희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그때, 어떤 무리가 묵직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방 안에 있었던 일동은 일제히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밖에서는 몇 차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우악스러운 남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꺄-악!”
“비켜! 야! 너 저기 407호 확인해!”
“예!”
“건물 밖으로는 나가지 못했을 거야. 샅샅이 뒤져서 사로잡아!”
“예!!!”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들의 발걸음은 점점 강시온의 방문을 향해 다가왔다.
곧 그들은 문고리를 망치로 부수고는 내부로 들이닥쳤다.
쾅-!!!
시온은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결국 자신을 체포하러 온다는 것이 정답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