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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는 나만 지킨다-153화 (153/221)

제153화. 돌아온 영웅 (2)

나는 오우거 버스에서 내려 고(古)궁을 올려다보았다.

넓은 도로를 가로막고 있는 방어벽.

건물의 셔터나 방화벽 등을 뜯어와 만들어 놓았지만 나름대로의 구색을 갖춘, 제법 단단하게 건설된 방어벽이었다.

그리고 방어벽 너머로 왕궁, 옛 만안 경찰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만안 경찰서 뒤쪽으로는 피라미드를 연상케 하는 계단식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계단식 구조물의 벽면은 벽화로 가득했다.

“이야, 형님. 전부 형님의 업적들인데요?”

최명준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혹한을 이겨 낸 보일러.

폭군을 처형한 처형대.

오우거.

그리고 동안과의 전쟁.

그 밖에도 내가 지나왔던 기록들이 거대한 벽화로 남아 있었다.

이런 벽화들을 보고 있자니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이 덕에 지난 5년간 만경이 유지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벽화에는 내 얼굴도 새겨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억을 더듬어 그려서인지 그렇게 닮진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창 구경하던 때, 방어벽에서 백발의 경비병 한 명이 다가왔다.

“정지.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이곳은 출입 금지 구역이다.”

병사는 날 향해 창을 겨누며 위협했다.

그러자 최명준이 열불이 올라 앞으로 나섰다.

“아이, X바 것이……. 이분이 누군지 알고.”

“하지 마.”

“예. 형님.”

나는 최명준이 병사들을 향해 일갈을 토해 내는 것을 제지했다.

그가 나를 위해 열을 올리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소란을 일으키는 일은 피해야 했다.

지금의 목적은 왕으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방랑자로서 만경을 둘러보는 것.

하윤하를 만나기 전까지는 변화된 만경을 조용히 확인하고 싶었다.

백발의 경비병은 또다시 말했다.

“이곳은 영웅을 기리는 신성한 장소다. 너희 같은 떠돌이들이 기웃거릴 곳이 아니지. 꺼져라.”

“아오! 너 얼굴 외웠어. 나중에 봐라! 어?!”

“꺼져라. 세 번 말하지 않는다. 불응 시 체포하겠다.”

사실 칙령의 힘을 사용한다면 너무나 간편하게 돌파할 수 있겠지만, 굳이 필요가 있는가.

차라리 아무도 모른 채로 도시를 걸어 다니는 것이 마음도 편할 테니.

나는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또 다른 만경의 병사가 날 막아섰다.

그는 원정대의 오른팔을 살피며 말했다.

“너희. 방랑자인가. 어째서 명찰을 달지 않았지? 그리고. 방랑자는 18시 전까지는 조합소로 이동해야 한다.”

“…….”

내가 가만히 병사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젠 진재희가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선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난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렸다.

“괜찮아.”

그들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괜히 열을 낼 필요는 없었다.

저들은 저들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저들이 이런 식으로 나서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책무를 온전히 수행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문제가 있었겠지만.

‘이건 하윤하가 그간 세력 관리를 잘했다는 거겠지.’

이곳에선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 옳았다.

게다가 현재 우리가 세력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건, 별로 좋지 못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시민들의 지지율이 어떻든, 날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있을 수 있으니.

* * *

만경, 방랑자 조합소.

도시 속에 철창을 두른 도시 속의 마을이었다.

꽤나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옛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쳐 놓아 울타리를 쳐 놓은 형태.

이곳의 방랑자들은 만경 내부에 모여 살며 퀘스트를 수주하거나 의뢰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만경 시민들도 퀘스트를 부여하기도 했으며, 이곳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종족 생명체도 있었다.

학교를 개조해 만든 숙소 건물은 생각보다 안락하게 꾸며져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몇몇 주민들과 방랑자들이 좌판을 깔아 놓고 야바위판을 벌였다.

방수포를 이용해 만든 커다란 천막을 설치해 놓아 어딘가 시장바닥 같은 인상도 주었다.

“우, 우와……. 방랑자들이 이렇게 한곳에 모이다니…….”

그 광경을 가장 신기하게 여긴 것은 방랑자 출신인 최현지였다.

방랑자들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잘 믿지 않았다.

거친 황무지를 떠돌며 개인전으로 리그를 헤쳐 나가는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곳 방랑자 숙소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그런 것들은 기억에서 지워졌다.

이곳은 그야말로 길드였다.

“강남으로 가는 일행 구합니다! 저는 만경에서 길잡이 인증을 받은 플레이어입니다! 50라이터에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 드립니다!”

“만경에서 신분 보증 도와드립니다! 단돈 10라이터!”

“인천연합 소식통 구합니다! 섭섭지 않게 사례하겠습니다!”

“지도 삽니다, 지도. 경기 남부요.”

“각종 몬스터……, 부산물…… 삽니다……. 각종 몬스터……, 부산물…… 삽니다…….”

저마다 서로의 자산을 가지고 거래를 벌이고 있는 방랑자들.

거리 곳곳에 있는 퀘스트 수주 게시판에는 흥미로운 정보들이 가득했다.

금일 주요 의뢰목록

제6 광산구, 광맥 탐색 의뢰. 의뢰인: 제6 광산구역장

변경 몬스터 생태조사. 의뢰인: 국경관리국장

인천연합으로의 배달…….

경기권 일대의 수많은 방랑자들은, 모조리 만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울창한 숲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고, 북쪽으로는 온통 전쟁터다.

따라서 방랑자들이 거점으로 삼을 만한 최선의 선택지는 만경이었다.

만경에서 직접 관리하는 상업지구 즉, 방랑자 조합소에서는 사기와 밀거래가 빈번한 타 지역에 비해 안전한 거래가 가능했다.

그 외에도 숙박업소나 의뢰 게시판 등 방랑자들을 위한 인프라가 잘 꾸려져 있어서 방랑자들의 사이에서는 최고의 거점이라며 입소문이 나 있었다.

그렇게 전국에서 모여든 방랑자들은 서로 정보와 물자를 교환했고.

만경은 이렇게 모여든 방랑자들에게 자체적인 해결이 곤란한 의뢰를 맡겼다.

여타 소설이나 만화 등에서 등장하던 ‘길드’와 비슷한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었다.

그렇게 점점 더 많은 방랑자가 몰릴수록 만경도 더 많은 부를 쌓고 있었다.

방랑자들이 먹고 자는 시설에서 생기는 수입은 물론이고, 방랑자들에게 의뢰를 맡기면서 얻는 중계 수수료 또한 상당했다.

만경은 일대의 모든 세력의 시장을 집어삼켰다.

시장을 집어삼켰다는 건, 곧 모든 돈이 만경으로 흘러들어 온다는 의미였다.

만경의 화폐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가장 적은 단위, 코인.

종류에 상관없이 기존의 500원 정도의 가치를 가진다.

그다음 지폐의 역할을 하는 라이터.

이 또한 만경 고유의 문양이 박혀 있는 라이터만을 화폐로써 인정했고, 대략 5,000원의 가치를 가졌다.

그다음이 담배 한 까치였다.

담배는 기존 세계의 황금을 대신한 물품이었다.

담배의 보관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보편화된 방법은 철제 케이스에 보관하는 것이었다.

정식적인 화폐는 아니었지만, 그 가치는 한 까치에 20라이터 정도.

거기다 소모품의 특성상 그 가치는 점점 더 오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지난 5년이라는 세월 동안 담배는 거의 3배 가까이 가치가 더 올라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흡연자가 아니더라도 담배를 모았고, 흡연자인 이들은 오히려 담배가 아까워 필 수가 없는 진풍경이 벌어진 지 오래였다.

만경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모두가 초대 군주이자 영웅이었던 강시온이 토대를 잘 다져 놓은 탓이었다.

물론 모든 것이 백옥처럼 아름다운 것만 있을 순 없었다.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반드시 악한 존재도 있기 마련이었다.

만경, 범계의 한 건물.

“…….”

복도에 시체가 겹겹이 쓰러져 있었다.

그곳에 한 남자가 걸어 올라갔다.

칼을 든 여자는 그에게 고개를 픽 숙이며 말했다.

“다. 처리했습니다.”

“…….”

남자는 담배를 태우며, 시체를 피해 좁은 복도를 걸었다.

어두운 복도의 끝에는 반쯤 열려있는 나무 문이 있었고, 그곳에서 희미한 빛이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시체를 피해 걷다, 걸리적거리자 짜증을 냈다.

“야. 이런 것 좀. 빨리빨리 치우고 그래라.”

“죄송합니다. 부장님.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뒤따라오던 여자는 그 뒤에 있던 두 부하에게 시체를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부장이라고 불린 남자는 담배 쥔 손으로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흰 정장에 소가죽 신발을 신고 있었다.

손목에는 고급 시계가, 머리카락은 완전히 올려 넘겨 얼굴이 훤했다.

그런 부장에게 의자에 묶여 있던 남자가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이- 이- 부장!!! 내가 미안해. 내가-. 내가 미안해.”

이 부장은 의자에 묶여 있던 남자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쇠못이 박혀 있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줘. 사실 난 이 부장이 아직까지-. 뒤, 뒤를 봐주고 있는 줄 몰랐어.”

“뒤? 아니, 무슨 소리세요. 형님.”

이 부장은 쪼그리고 앉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뒤가 아니라요……. 형님. 그 X발 없는 얘기를 꺼내 왕께 보고하니까, 문제가 있는 거죠.”

“내가 미안해……. 내가 미안하니까. 다 잘못했어.”

“뭐라고 보고 하셨더라?”

쭙. 푸우-.

이 부장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곤, 남자를 향해 연기를 뿜어냈다.

피를 흘리는 남자는 벌벌 떨며 대답했다.

“여, 영, 영웅께서 돌아오셨다고……. 여, 영웅! 그, 근데! 이 부장! 내 말을 좀 들어 봐. 내 말이 뭐냐면……! 영웅은……. 정말 돌아왔다는 거야. 근데 미안해! 내, 내, 내가 미안해. 내가 이 부장을 생각 못 했어……!”

남자는 앞니가 없어, 말할 때마다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 부장은 영웅이 싫잖아? 강시온? 그자 말이지. 그, 그, 그렇지? 그 죽어 버린 자!!!”

“…….”

이 부장은 말없이 담배를 피우며 남자의 변명을 들었다.

“내가 도와줄게! 이 부장. 이 부장은 강시온의 담배를 노리는 거지? 그, 그렇지?! 고궁에 있는, 그 엄청난 양의 담배를 말이야!!! 내가 알아. 그 방으로 가는 길!”

강시온의 재산.

그건 하윤하가 지난 5년 동안 목숨 걸고 지킨 영웅의 유산이었다.

하윤하는 강시온의 재산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만경의 간부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 재산.

황금보다 귀하다는 그 담배들.

방에 가득 쌓여있는 영웅의 재산, 그리고 만경의 보물.

그것만 있으면 이 세계의 신(神)이 될 수 있었다.

이석진 부장, 현 만경의 토지부장은 하윤하가 눈엣가시였다.

하윤하는 고궁에 처박혀 있는 그 엄청난 양의 재산을 지키고 있으니.

이석진 부장은 영웅의 귀환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그 고궁에 남겨져 있는 재산은?

모두 원주인이었던 강시온에게 돌아가겠지.

이 부장은 속주머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들었다.

“형님. 형님은 참……. 사람을 난감하게 해요. 제가 언제 영웅이 싫다고 했습니까……? 강시온. 영웅이자 초대 왕. 그는 이 아름다운 도시를 건축한 시조입니다. 제가 여기서 먹고 사는 것도……. 그리고 형님이 제 덕에 만경에서 한 자리 해 먹고 있는 것도……. 모오오두.”

턱.

이 부장은 남자의 사타구니 쪽으로 단도를 겨누며 이어 말했다.

“……모두 영웅 덕이잖아요? 전 영웅을 존경합니다. 근데. 그 사람이 뭘 했는데요. 지난 5년. 역동의 전쟁 통에서……. 뭘 했죠? 도망가지 않았나?”

“그래, 그래……! 맞아. 이 부장 말이 다 맞아. 난 전적으로 동의해!!! 그러니까 이 부장 제발……!”

이 부장은 단도로 남자의 사타구니를 살짝 찔렀다.

“아-! 그러니까! 내 말은 말입니다?! 예?! 형님. 아니, 5년 동안 도망치다가 다시 만경에 왔으면서……. 왕과 같은 위치에 있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네? 아니, 그러니까. X발 같은 형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겠어요?”

이 부장은 도끼눈을 한 채, 남자를 노려보았다.

실로 탐욕스러운 눈동자였다.

“……그 돈. 그 담배. 아깝잖아. 우리 만경을 위해 쓰면 더 좋을 텐데.”

이 부장의 말에 남자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 부장은 말을 맺었다.

“……형님은 선을 넘은 거야. 사람은 원래 혓바닥 때문에 죽어.”

“자, 잠깐! 이 부장! 내 말을 좀……!”

휘릭-. 푸우우우욱!!!!!!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커헉…… 카하아……. 아…….”

남자는 기절했다.

이 부장은 남자의 사타구니에 꽂아 넣은 단도를 바라보았다.

진물과 핏물이 가랑이 사이를 적시고 있었다.

이 부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비서에게 지시했다.

“이 새끼 오우거 농장에 던져 놔. 그리고. 강시온에 대한 정보는 알아봤나?”

“예. 부장님. 현재 방랑자 거주구역에 거주 중이라고 합니다.”

“감시역을 붙여. 일거수일투족. 하나도 빠짐없이 나한테 보고해. 그리고.”

툭-.

이 부장은 피고 있던 담배를 기절한 남자에게 던졌다.

담배꽁초는 남자의 볼을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황제는 보호 명분으로 감시 병력을 두 배 이상 늘리고, 한동안 궁 밖으로 못 나오게 해. 강시온, 우리의 영웅은. 우리가 죽인다.”

이 부장은 그 말만을 남기고 다시 시체가 가득한 복도를 통해 빠져나갔다.

남겨진 비서는 그에게 고개 숙였다.

“예. 부장님.”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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