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돌아온 영웅 (1)
만경, 남쪽 군포 방면 국경 초소.
“하 씨……! 안 보여. 잠깐만. 잠깐……! 저기요. 잠깐만요.”
하윤하는 인파 사이에 껴서는 까치 발을 올려 앞쪽을 바라보려고 했다.
하지만 보이는 건 무수히 많은 시민들의 뒤통수뿐이었다.
지금껏 죽은 줄만 알았던 왕이 돌아왔다는 소식이다.
그건 현(現) 만경의 왕조차 맨발로 뛰어나올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안 보여……. 안 보여……!’
하윤하는 시민들의 어깨를 짚으며 앞으로 겨우겨우 나갔다.
마침내 인파의 제일 앞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네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었다.
“만경과 영웅과 노동을 위해! 왕을 위해! 푸하하하하하!”
남자는 만경의 4계명을 소리치며 호탕하게 웃어 댔다.
그는 남쪽 방면 울창한 숲 근처의 코볼트 던전을 토벌하고 돌아온 사냥꾼 무리의 대장이었다.
그때,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지고 있던 남자가 하윤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아……! 왕께서 직접 비천한 저를 마중 나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콧수염과 턱수염이 옛 조선 장수를 연상케 했다.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가 하윤하 앞에 냉큼 무릎을 꿇었다.
“만경의 왕을 뵙습니다.”
그제야 몰려 있었던 인파도 하윤하를 알아보고는 냉큼 몸을 숙여 그녀에게 절했다.
“왕을 뵙습니다!”
“왕을 뵙습니다!”
이건 왕에 대한 예법이었다.
이곳에 몰려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향해 절했다.
하윤하는 그들을 둘러보다 곤란하다는 듯 식은땀을 흘렸다.
‘이게…… 아닌데. 소식통이 거짓말할 리가 없고. 영웅의 얼굴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소식통의 이야기면 확실하니까.’
이 도시의 사람들은 강시온이라는 초대 왕의 존재를 벽화나 이야기를 통해 전해 들었지 실제로 영접한 적은 없었다.
실제로 강시온의 얼굴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동안 박지수와의 전쟁을 치뤘던 각 간부 계층 소수의 2세대 시민들.
그리고 1세대, 즉 만안 경찰서에 있었던 자들 뿐이었다.
원래 동안 시민들이나, 지난 5년간 유입된 시민들은 3세대 시민들이었다.
물론 이 ‘세대’의 차이는 신분의 차이이기도 했다.
만안 경찰서부터 함께한 1세대 시민들은 세력의 핵심을 이루었고.
2세대는 그 중간 계층, 즉 중간직 관리인이나 건물주들이다.
3세대는 대부분 노동과 군대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시민들이었다.
이곳 만경 시민의 비율이 대부분 이종족과 3세대 시민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강시온이 시장 한복판을 돌아다닌다 한들 알아볼 일은 적었다.
하윤하는 주변을 힐끗거렸다.
모두 자신에게 엎드린 시민들뿐, 5년 만에 돌아온 영웅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비켜라-! 비켜라-!”
“길을 비켜라-!”
“비켜라!”
왕궁 호위대가 그제야 인파를 뚫고 나와 하윤하를 지키기 위해 인파를 물리기 시작했다.
하윤하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신 거지.’
설마 헤매고 계시진 않겠지?
그녀는 걱정이 앞섰다.
* * *
나는 이상한 빨간 가루가 팍팍 뿌려진 닭꼬치를 집어 들고는 양껏 물어뜯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에 맴돌았다.
빨간 가루는 고춧가루는 아니었지만, 살짝 매운맛과 함께 단맛도 났다.
꽃잎을 갈아 만든 새로운 향신료인가?
‘역시 미각이 더 예민해진 느낌이야.’
이 닭꼬치.
영락없는 닭고기 향과 식감이 느껴졌다.
사실 내가 만경의 군주로 있을 때도 닭과 돼지에 대한 가축화를 시도하긴 했었다.
기존의 동물들이 완전히 멸종해 버린 건 아니었기에, 닭과 돼지를 가축화할 수 있다면 세력 구성원들에게 좋은 단백질원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윤하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시장 거리에서 대놓고 팔고 있을 정도이니.
얼마나 가축화가 되었을지는 상상조차 안 갔다.
게다가 맛있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는 너무 비싸서 사 먹을 엄두도 안 났었는데…….’
난 엉뚱한 생각을 하며 마지막 남은 고기를 입에 털어 넣었다.
“사장님. 얼마예요?”
나이가 있어 보이는 아줌마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아고! 그래요. 그래. 몇 개 드셨어요?”
“꺼윽-.”
최명준이 트림을 하며 마지막 꼬치를 내려놓았다.
난 원정대가 먹은 음식들을 훑었다.
최명준이 24개, 진재희가 3개, 최현지가 1개, 내가 2개.
하지만 포장마차에 명시된 가격표에는 ‘라이터’가 나와 있지 않았다.
[닭꼬치 1개 / 1코인.]
이 코인은 아마 하윤하가 새로 정한 화폐일 것이다.
우선 라이터 10개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러자 포장마차 주인이 화들짝 놀랐다.
“아고! 뭔 돈을 그렇게 많이 준데요! 어디 보자, 꼬치 30개니까 라이터 3개면 되겠네요.”
‘대충 코인 하나에 500원 정도인가.’
코인은 기존 대한민국 화폐를 재사용하고 있었다.
코인의 종류는 상관없이 모두 500원 가치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라이터 하나의 가격이 5,000원이니, 라이터는 이제 지폐처럼 사용되는 듯 보였다.
“안녕히 가세요~”
원정대는 포장마차에서 걸어 나와 시장 거리를 걸었다.
이곳은 정말 세상이 멸망한 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한편, 식사를 마친 최명준이 배부른 듯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와-. 씨. 배부르다.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보네. 형님. 이제 어쩌십니까? 일단 이 도시의 왕부터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디 감히 형님을 놔두고 왕 행세를 하고 있는지.”
“혹시 윤하가 하고 있는 거 아냐?! 오오~ 미띠이인. 잠깐만! 윤하 그럼 지금 몇 살인 거지? 스무 살이네……??? 헐.”
“뭐?! 그 꼬맹이?! 어딜 감히.”
나는 둘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걸었다.
자연스럽게 만경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만경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자연스러워’졌다.
이제는 몰락하고 멸망해 버린 도시의 풍경과 제법 거리가 있어 보였다.
만경에는 멸망 이후에 다시 싹트기 시작한 문명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보강되어 있는 건물들.
대부분 철제 강판이나, 철골 등이긴 했어도, 제법 구색을 갖춘 모습.
어느 정도 보수가 된 상가 건물들의 1층에는 나름대로 간판도 달려 있었다.
대부분 나무판자에다 그림이나, 글씨를 칠해 대강 달아 놓은 간판이었지만, 그래도 그곳이 무얼 하는 곳인지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만경의 거리 바닥은 깨진 아스팔트들이 정리되어, 어느새 깔끔히 정돈된 흙길로 정비되어 있었다.
나는 고르게 닦인 흙길을 지나가다, 문득 돌이 발에 차여 바닥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납작하고 평평한 직사각형의 돌들이 일렬로 흙길에 박혀서 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건 설마 횡단보도 표시인가? 이런 장치까지 있을 정도라면…….’
그때.
쿠웅! 드르르르륵!
무언가가 바닥에 끌리며 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오우거가 있었다.
버스와 차량들을 얼기설기 엮어 둔 모양새를 한 탈것을 잡아끌고 있는 오우거.
오우거의 가슴팍에는 빨간 글씨로 큼직하게 ‘3’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오우거가 끌고 다니는 1톤 덤프트럭에는 만경의 주민들이 탑승해 있었다.
트럭 안에 양옆으로 설치된 기다란 의자에는 주민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예전 같으면 군부대 훈련소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이제는 마치 대중적인 교통수단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뭐야! 버스야?”
최현지의 어이가 없을 정도로 놀랍다는 듯 말했다.
나 또한 조금 감탄했다.
눈앞의 광경은 곧 이런 용도로까지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오우거의 개체 수가 넘쳐 난다는 의미였으니.
아무래도 하윤하가 만경을 제대로 성장시켜 놓은 듯했다.
‘기특하네.’
만경의 모습을 보니 그동안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
나와 일행은 그런 걱정들을 내려놓은 채,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 쪽으로 향했다.
정류장은 오우거가 버스를 끄는 그림이 그려진 표지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사람들 몇몇이 일렬로 서 있는 대기열이 있었다.
그곳은 표를 파는 가판대였다.
나와 일행은 곧바로 가판대로 이어진 줄을 따라 섰다.
가판대에서 표를 팔고 있는 소년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고, 다행히 대기열은 금방금방 줄어들었다.
“자, 출발합니다!”
딸랑!
버스 기사로 보이는 남자는 운전석에 앉아 방울을 흔들며 오우거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우거는 홀린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버스가 움직이자, 일행들은 저마다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뒤바뀐 만경의 풍경을 감상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나 또한 기꺼운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버스는 제법 빨랐지만, 주변의 풍경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없는 정도까진 아니었다.
도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대부분은 짐을 메고 걸어 다녔지만, 간간이 동안의 기술로 길들인 사슴이 이끄는 마차들도 눈에 들어왔다.
기본적인 물류 시스템은 갖춰진 듯한 모양새였다.
만경의 초입을 지나자, 본격적인 상업 지대가 펼쳐졌다.
“자! 골라! 골라! 거기 어머니! 이리 와서 골리앗 열매 좀 봐 봐. 오늘 물 진짜 좋아.”
“쌉니다! 싸요! 100% 자연산 네펜데스 줄기에서 뽑은 섬유! 언제까지 다 해진 옷만 입을 겁니까! 옷감 새로 장만하세요!”
시장은 활기차고 분주했다.
차량을 개조해 만든 부품들로 세워진 가건물들이 시장에 가득했다.
이전까지는 건물들의 폐허를 있는 그대로 사용했다면, 이제는 나름대로 신시대의 건축 노하우가 생긴 듯했다.
시장의 사람들은 대부분 멸망 이전의 복식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옷의 재질이나, 액세서리, 가지고 있는 소품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악어 거북의 가죽으로 만든 가방, 토끼 몬스터의 모피로 만든 듯 보이는 머플러, 네펜데스의 봉우리 부분으로 만든 브로치 등등.
아무래도 이제는 몬스터의 가죽, 신종 식물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만경에 많은 시간이 흘러갔음을 실감하는 사이, 막 버스에 올라탄 한 여자아이가 두루마리들을 흔들며 외쳐 댔다.
“여러분! 이번 주 만경 소식지 팝니다! 한 장에 1라이터! 홍보부에서 직접 발행한, 믿을 수 있는 소식지입니다!”
이제 막 사춘기가 지나고 있는 듯,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소녀였다.
소녀는 이름 모를 식물의 섬유를 엮어 만든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가방에는 소식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
몇몇 승객들은 소녀에게 라이터를 건네고 소식지를 받아오기 시작했다.
나 역시 흥미가 생겨 최명준에게 손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최명준은 금방 튀어 나가 소식지를 한 장 사 왔다.
“여기 있습니다. 형님.”
나는 최명준이 건넨 소식지를 받아 들고, 1면에 실린 소식을 읽어 보았다.
활자 기술을 어떻게 구현한 건지, 어설프지만 제대로 규격화된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나 금속을 가공해 활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은 기술이니만큼 만경에는 널리 퍼져 있는 기술인 듯했다.
나는 활자로 가지런히 인쇄된 소식지를 펼쳐 보았다.
소식지에는 만경의 최신 소식들로 빼곡했다.
예술부 중앙극단의 연극 ‘만경의 왕: 파미안 아파트의 전설’ 개막. 예상 관람객을 아득히 넘어서…….
노동부 장관의 정례 작업 할당 발표. 지난달보다 시민들의 의무 작업 동원량 20% 감소해…….
새 특공대장 취임식 이후, 특공대 지원율 급상승 중…….
국왕 대행님의 만경 보육원 방문. “보육원 설비 아직 열악한 듯, 보완할 것…….”
특집. ‘세기의 로맨스’. 국방부 산하, 2등 시민 관리국장의 열애설 밀착 취재. 상대는 2등 시민? …….
리빙 포인트. 레드 하운드의 가죽으로 만든 옷감, 차가운 물에 세탁하면 쪼그라들어…….
만경 중앙의 발표사항부터 흥미 위주의 가십까지.
소식지의 가장 상단에는 ‘홍보부’라는 발행처가 적혀져 있었다.
‘홍보부라……. 행정 계통이 많이 바뀌었네.’
새로운 만경은 행정 시스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직책과 부처들도 언급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코 어설프게 개설된 것이 아니라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소식지의 쓰인 내용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각 부서들마다 조금씩 이슈는 있어도, 어떤 일을 맡고 있는지는 확실히 나와 있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한참이나 소식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시선이 느껴진 반대편 좌석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백발의 노인이 앉은 채로 고개를 쭉 내밀고 있었다.
노인은 내 얼굴을 노려봤다.
그러다가도 무언가 의문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한번 기웃거리고는 다시 유심히 지켜보기를 반복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소식지로 얼굴을 가렸다.
한편, 오우거 버스의 속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만안 경찰서 고궁입니다!”
버스 기사의 외침을 듣고 나서야, 나는 소식지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이곳은 만안 경찰서.
완전히 변화한 만안 경찰서를 마주한 순간, 감회가 새로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