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새로운 힘
정오가 살짝 지난 시간.
오전 업무를 마친 시민들은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고, 도시는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시장에는 인간들뿐만 아니라 드워프, 오크, 수인족 등 많은 이종족들이 뒤엉켜 붐비고 있었다.
만경은 이제 모든 종족들이 한데 어우러진 다문화 도시가 되었다.
더불어 서울과 경기를 포괄하는 ‘제1구역’에선 가장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도시 국가라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만경의 군주 자리에 앉은 인물이 하윤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간 다른 인물이 만경을 다스리고 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윤하는 만경에서 세 번째로 군주의 자리에 앉은 인물이었다.
도시 국가를 세우고 세력의 기본적인 틀을 만들었던 영웅이 죽었다고 판단되자, 아직 어렸던 하윤하를 대신하여 그의 가장 중요한 심복이었던 질서부장이 자리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녀 역시 얼마 안 되어 지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두 번째 군주가 죽은 이후, 만경은 폭풍을 만난 작은 어선처럼 마구잡이로 휘청거렸다.
3라운드에 돌입하면서 각 세력 간의 판도는 빠르게 변화했지만, 내부가 불안했던 만경은 이에 적응하지 못했고, 당연히 대비하지도 못했다.
거기에다 정복 전쟁을 벌이는 다른 세력들과는 다르게, 만경은 특별히 외부로 영토를 확장하지 않았다.
만경의 중심 시내였던 안양시를 지키는 것만이 당장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만경의 각 세력은 서로를 향해 칼과 창을 겨누며 경계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이라면 보통의 군주들이 취할 방식은 전쟁이었다.
내부의 결집을 다지는 데에는, 새로운 공동의 적을 만드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으니까.
안 그래도 격동하는 흐름 속에서, 외부의 세력들이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미 만경의 내부에서도 하루빨리 군비를 증강하여 정복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하윤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전쟁은 언제나, 제3의 국가가 이득을 취하는 구조이다.
당장 세계 2차대전만 보더라도 가장 이득을 챙긴 것은 전 세계의 전쟁 물자를 팔아넘겼던 미국이었고, 한국 전쟁에서는 옆 나라였던 일본이 그것을 기반으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지금 같은 시대에 공동의 적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만경의 시민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수단은 바로 돈이었다.
하윤하는 그 점에 착안해 전쟁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중립국을 자처했다.
이후 만경의 세력들을 하나하나 설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만경은 단순히 무력으로 하는 전쟁이 아닌, 곧 다가올 경제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고.
지금 우리가 단결해야만 이 위기를 기회 삼아 초강대국으로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의회장에서 있었던 하윤하의 강력한 연설은 자리에 있던 모두를 사로잡았고, 각 세력으로 나뉘었던 만경의 고위층들은 다시 합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쟁 준비가 아닌 산업 발전이라는 목표로 만경을 단결시켰다.
만경은 그 즉시 무기 공장과 방어구 공장, 식품 생산의 확장 사업을 시작했고, 생산량 또한 대폭으로 늘렸다.
그 결과, 한창 전쟁 중이었던 북부세력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만경으로 몰려들어 거래를 이어 갔다.
강시온의 〈오우거 부대〉와, 과거 최명준이 키워 냈고 지금은 정현수가 이끄는 〈정예대〉를 용병단으로 꾸려 외화를 대량으로 벌어들였다.
하윤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격동하는 전쟁터를 피해 도망쳐 온 각 세력의 피난민들을 아무 제한 없이 포용하였고, 또다시 그들을 노동력으로 사용해 전쟁 물자의 생산력을 올렸다.
또, 당시 전쟁으로 평화로운 거처를 찾기 어려워진 방랑자들을 적극 수용하여 경기 최대 규모의 시장을 형성해 냈다.
그리고 이는 후에 10만 명 가까이 되는 만경의 인구 성장의 첫 발판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하윤하의 선택은 백번 옳았다.
이번 대전쟁을 통해 타 세력들이 얻은 이득은 지극히 미비했고, 커다란 이득을 챙긴 것은 오직 만경뿐이니 말이다.
대전쟁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4개의 중심 세력.
서쪽에 〈대한 인천〉.
동쪽에 〈강남〉.
북쪽에 〈강북〉.
남쪽에 〈만경〉.
강시온이 사라진 지 2년째 되었을 때 일어난 일이다.
몇 개월 동안이나 이어졌던 구역 간 전쟁은, 만경-동안의 통일 전쟁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남겼다.
전쟁이 남긴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대한민국의 근본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대한 인천〉이 〈강북〉을 식민지화했고.
〈강남〉 또한 〈대한 인천〉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그들에게 적룡의 둥지가 있던 잠실을 일부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씁쓸한 패배를 경험한 〈강남〉은 전력의 차이를 인정하고, 전쟁의 파도에서 중립국을 자처했던 〈만경〉과 손을 잡았다.
이로써 제1구역에서는 2개의 연합 세력이 하나의 ‘잠실’을 두고 대립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대한 인천-강북, 서북 연합.
만경-강남, 남동 연합.
잠실은 3라운드 적룡이 서식하고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북부 연합은 잠실을 사수하며 적룡을 잡는 것이 목표였고,
남부 연합은 잠실을 탈환하여 적룡을 잡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이제 3라운드는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패배한 세력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며, 승리한 세력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만경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다.
바로 지금.
지난 5년간 사라졌던 영웅이 돌아왔던 것이다.
* * *
“후우-.”
난 숨을 고르게 내쉬며 마지막 뿌리를 넘었다.
화사한 햇살이 나무 기둥 사이로 원정대를 비추고 있었다.
숲 중심부에서 외곽으로 빠져나오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난 5년간 쌓인 만경의 지원품을 그대로 버릴 순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진귀한 사치품들은 만경으로 도로 가져가기만 해도 상당한 가치가 있을 터.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형님.”
최명준이 마지막 나무에 단검으로 표식을 새겨 넣으며 말했다.
그러자 최명준의 뒤에서 최현지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좀 쉬어야 하지 않겠어? 후우우우우……. 여기서부터 만경까지도 몇 시간은 걸릴 텐데.”
원래 군포에서 안양(만경)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이면 충분했겠지만, 세상이 무너진 뒤로는 길이 고르지 않았다.
무너진 아스팔트들이 치솟고, 건물들이 무너져 내리며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물론 휴식은 필요했다.
“좋아. 숲을 완전히 빠져나가면 조금 휴식하도록 하자.”
“와아아……. 나이스…….”
최현지가 김빠진 목소리로 환호했다.
원정대는 다시 걸었다.
그렇게 우리는 곧 울창한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드디어 만경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울창한 숲을 빠져나온 뒤, 가장 눈에 띄었던 건 이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 엄청난 길이의 철책들이었다.
철책에는 [절대 출입금지: 출입한 자는 이유 불문 처벌]이라는 푯말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고 문구 따윈 우리에게 큰 위협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최현지는 손쉽게 철책을 넘을 수 있도록 검은 물체를 이용해 다리를 만들었다.
“이제 이 앞으로 쭈욱- 가면 만경이 나오겠네. 아니, 호계였던가?”
“호계. 맞아.”
난 최현지의 말에 대답해 주며 검은 다리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검은 다리는 최현지의 몸에 스며들었다.
철책을 넘어오자 사람의 흔적이 여럿 보였다.
산처럼 쌓여 있는 보급품 상자들과 허름한 간이 오두막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곧 그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나무 테이블과 의자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각종 철제 무기들.
출입 대장이라고 쓰여 있는 보고서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먹다 남은 음식 잔해.
전투 복장을 한 채로 쓰러져 있는 몇몇 시체까지.
정황상으로 볼 때, 이곳은 아마 국경 초소로 쓰였던 곳 같았다.
그리고 어떤 습격을 받은 것만 같았다.
나는 조용히 나무 테이블 위에 있었던 철검을 들어 살폈다.
상당한 퀄리티였다.
만경은 이제 철제 무기를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된 대장간을 보유하고 있는 듯했다.
중세 시대에나 쓰였던 철제 무기들이었지만, 동안과의 전쟁 당시 사용했던 조잡한 무기들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만하면 만경의 발전은 상당히 빠른 속도라고 할 수 있었다.
만경이 어떻게 변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내가 국경 초소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자, 진재희가 넌지시 다가와 물었다.
“스킬에 관련해선 뭐 알아본 거 있어? 그래도 필드 보스의 스킬인데?”
그녀는 필드 보스 마녀를 잡은 직후, 내게 새로 생긴 스킬에 대해 묻는 듯했다.
난 곧바로 상태 창을 열어 해당 스킬을 살피며 대답했다.
“아직. 스킬의 상세 내용을 한번 살펴보긴 했는데. 숲을 빠져나오느라 사용해 보진 않았지.”
[죽은 자들의 군단][S급] [내용: 마녀가 평생의 노력을 기울여 만든 능력. 죽은 자들에게 피를 주입해 일정 시간 되살려, 자신이 선택한 목표물을 공격하게 만든다. 시전자가 취소하거나 마나가 고갈되지 않는 한, 좀비는 영원히 살아간다. ※현재 사용 가능한 좀비: 50]
그런데 상태 창을 연 상태로 곳곳에 쓰러져 있던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 시체 주위에 빨간색 원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시체를 좀비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신력과 더불어 일정한 양의 피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때 진재희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을 꺼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마녀랑 같은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 아냐?”
“그렇겠지. 그 좀비들.”
“상당히 거슬렸어. 물론 파괴적이진 않지만, 충분히 도움이 될만한 스킬이야. 스킬명처럼 높은 정신력을 보유하고 있으면, 마녀처럼 군단을 만들 수도 있겠고.”
“압도적이네.”
“압도적인 스킬이지.”
진재희는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자를 되살려 나만을 위한 꼭두각시로 이용한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이점일지 아직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단순한 수 싸움에서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진재희가 말한 대로, 이것이 개인 대 개인 전투에서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건 아니겠지만.
반대로 다수 대 다수의 전투라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그때 진재희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근데 그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 말이지.”
“어.”
“그걸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적대 세력을 완전히 무력화시켜야 하잖아?”
“그래.”
난 내가 생각한 그 방법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믿었기에.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 이야기의 결말일 테니.
앞으로 다가올 3라운드는.
반드시 그것을 위한 라운드가 되어야 했다.
“솔직히 전적으로 네 의견에는 동의를 하고 싶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왔을 때 관리자 측의 개입이 없을까?”
“개입을 유도하는 일인데, 어째서?”
난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개입을 유도하는 일이라고?”
“그래. 이번 원정에서 깨달았어. 관리자들이 개입하게 되는 원리에 대해 말이야.”
결국 관리자는 플레이어가 무슨 일을 하든 직접 개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에겐 판을 깔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플레이어에게 판을 까는 형태로 간접적으로만 개입이 가능했다.
그 간접 개입에 도달하는 모든 일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 리그는 이제 내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전제 조건은 단순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자원이고.
두 번째는 지역이며.
세 번째는 세력과 각 개인의 압도적인 전투력이다.
이 세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면.
장담컨대 놈들은 리그에 간접적으로 개입하게 될 것이다. 나를 견제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 간접 개입을 모두 막는다면.
‘……끝이겠지. 모든 게.’
그게 이 리그의 결말이다.
그건 내가 정하고 만들어낸 결말.
지금껏 수동적으로 관리자들이 정해 놓은 길을 걸어왔다면, 이젠 다를 것이다.
난 진재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애초에 네가 말한 최종 라운드.”
그녀가 겪었던, 나와 그녀의 필연적 죽음.
“그것도 결국 내 방식대로 흘러가게 될 거야.”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