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초월자 (2)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여긴 어디지?
눈을 떴을 때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새하얀 구름이 줄지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졌다.
서서히 상체를 들어 올렸고, 곧 내가 비현실적인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에메랄드 빛깔의 바다 한가운데였고, 난 신이라도 된 것처럼 바다 위에 앉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손으로 바다를 짚을 때마다 일어나는 작은 파문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일어나 걸었다.
하염없이 수평선을 향해 걸어갔다.
목적도 없이 걸어가다 보면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잊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걸었다.
구름이 줄지어 가는 방향을 따라, 배고픔도 목마름도 느끼지 못하는 공허한 상태에서.
난 내가 죽은 줄 알았다.
이곳은 지옥이고, 내 영혼은 이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배회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죽음, 그건 안락이다.
얼마간 걷고 있으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120,491년의 지구.”
난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나와 똑같은 생김새를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똑같았지만, 남자의 머리카락은 발목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사자의 갈퀴처럼 아름다운 갈색 머리카락.
남자는 내게 말했다.
“이곳은 12만 년이 지난 지구의 모습이야.”
그 남자는 나보다 키가 컸다.
“모든 대지가 물에 잠기고, 살아남은 생명체는 몇 없어.”
남자는 내 곁을 다가오더니 말했다.
“어때, 아름답지 않아?”
남자는 내게 감상을 묻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질문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넌 누구지.”
“난 너. 너는 나.”
“…….”
“난 리그를 우승하고 초월한 존재. 굳이 네 우주로부터 계산을 하자면……. 10-1,919,729,428-79,123,539,071번 정도인가?”
“무슨 뜻이지.”
“대충, 10년에 1,919,729,428월, 79,123,539,071일에 태초의 강시온으로부터 분열된 자.”
난 남자가 그 말을 한순간,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다중 우주.
우주의 확산은, 개개인의 끝없는 선택에 의한 것이고 어디선가 또 다른 선택을 한 자신이 살고 있다는 개념이다.
그에 따라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남자는 나와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또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라고 봐야겠지.
난 금세 흥미를 잃었다.
전방을 다시 보고 걸었다.
남자는 날 따라오며 말을 이었다.
“이 세계가 어떻게 되어 버렸는지,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궁금하지 않아?”
“…….”
“초월적인 존재는 무엇인지, 그리고 넌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난 대답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두 걸음 뒤에서 따라오며 말을 이어갔다.
“이곳은 무의식의 영역, 우주의 저편이라고 소개할 수 있어. 너도 리그에서 우승해 어떤 특정 ‘조건’을 이룬다면 이곳에 올 수 있겠지. 눈치챘겠지만, 난 리그에서 우승했어. 지금은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고.”
남자는 나와 자신 사이를 번갈아 가리켰다.
“어쨌든, 네가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건 어떤 멍청한 관리자가 네 자아를 빼앗으려고 했기 때문이야. 자아가 몸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넌 이곳으로 오게 된 거고.”
남자는 내 앞으로 걸어 나왔지만 다시 뒤에 섰다.
“중요한 건, 네가 지금 이 우주에서 가장 주목받는 존재라는 거지.”
남자의 말에 난 뒤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실실 웃고 있었다.
“왜지?”
“그야, 열쇠에 다가간 사람이니까.”
“무슨 열쇠.”
“만물의 열쇠. 모든 걸 해방시킬 수 있는.”
남자는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우주의 해답이랄까?”
“이해할 수 없어. 난 우주의 해답을 원하지 않아. 난 그저 평범한 나날로 되돌아가고 싶을 뿐이야.”
“이해할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강준호라는 인물 때문에 네가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겠어. 이런 진부한 목적을 가진 너를 왜 온 우주가 집중할까? 왜일까. 왜냐. 누구냐, 넌.”
“함부로 지껄이지 마.”
“그렇게 동생을 원해?”
그렇게 질문한 다음, 남자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그럼 가져.”
그는 손을 마주쳤다.
짝-!
그리고 우리 둘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강준호였다.
갓난아기의 강준호부터, 백발노인의 강준호까지.
“네가 원하던 동생. 깔려 죽을 때까지 줄게.”
강준호들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날 바라만 보았다.
이질감이 들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혐오감도 들었다.
분명 날 둘러싼 이들은, 이제까지 내가 절실히 원하고 원했던 내 동생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뭔가가 달랐다.
“이게 진짜가 아니라고? 가짜 강준호들이라고? 아니, 이건. ‘진짜’ 강준호들이야.”
진짜 강준호.
“네가 그렇게 바라고 바랐던 네 동생 강준호.”
정말 바라고 바랐던…….
“혹시 다중 우주 속 강준호는 네 동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좋아. 그러면 네 우주에 속해 있는 강준호를 보여 주지.”
남자는 다시 손뼉을 쳤다.
그러자 수만에 이르는 강준호들이 사라지고, 오로지 서른 명 정도의 강준호만이 남았다.
“한 살부터. 지금 네가 마주할 수 있는 강준호까지.”
난 그 강준호들 사이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강준호가 있었다.
열세 살의 강준호.
헤어질 무렵 그 모습과 판박이던 그 꼬마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에 쫓고 쫓았던 동생은 바로 저 꼬마의 모습이었다.
순간 감정이 흔들렸다.
분명 눈앞에 있는 꼬마는 오랜 기억 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그 아이가 맞았다.
하지만 저것은 가짜다.
다른 차원의 ‘나’가 만들어 낸 신기루일 뿐이다.
“아직도 저게 가짜라고 생각하는가 본데. 만약 정말 가짜라고 생각한다면, 저 애를 죽여도 되겠지?”
남자의 손톱이 검날처럼 길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열세 살의 준호에게 다가갔다.
난 그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저건 신기루일 뿐이니까.
신기루는 없어지면 그만이니까.
“자- 이리 온. 이 가짜야.”
남자는 낄낄대며 신기루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 신기루가 동생의 모습과 목소리를 낸다면, 난 본능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형아…….”
* * *
덥석! 화악!
강시온은 남자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고서는 뒤로 잡아당겼다.
“어엇? 오오?!”
남자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일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새파랗던 하늘에 어둠이 찾아오고, 파도가 몰아쳤다.
이 일대에 억센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솨아아아아아아아아-!
떨어지는 빗줄기를 맞기만 해도, 아플 정도로 억세고 슬픈 빗방울이었다.
뒤로 넘어진 남자는 그 빗줄기를 그대로 맞았다.
그러면서 실성한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행성이. 그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어. 아하하……. 역시……. 넌 역시……. 드디어 인 거야.’
강시온은 억센 빗줄기를 맞으며 말없이 서 있었다.
그의 곱슬머리가 곱게 펴져, 미역 줄기처럼 얼굴에 달라붙었다.
열세 살의 강준호는 조금 울먹거리고 있었다.
강시온은 손을 들어 강준호의 정수리에 얹었다.
턱-.
빗물이 억세게 쏟아지는 와중에.
강시온은 아무 말 없이 동생의 정수리에 손을 올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언젠가 꼭 보자는 의미.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쓰러졌던 남자는 눈치 없이 소리쳤다.
“대단-해!!! 와하하하하! 역시. 감정을 건드린 순간, 넌 초월적인 존재와 마주할 수 있게 되었네. 자-. 자-. 이럴 때가 아니야. 드디어 ‘우리’들의 염원이 이뤄질 수 있게 되었어!!! 넌 마지막 퍼즐. 사실 널 찾기 위해 이 리그가 시작된 거라고 말하면. 넌 믿겠어? 아하하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시온에게 다가갔다.
“진재희를 멀리해라. 그 여자는 네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야. 그리고 앞으로 내 말대로만 움직여. 그러면 넌 이 리그에서 손쉽게 우승을 거머쥘 수 있을 거야. 이제 내가 너의 길잡이를 하겠어.”
강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아랑곳 않고 자신이 할 말을 쏟아냈다.
“리그에서 우승할 확률은 굉장히 희박해. 하지만 방금 넌 네 힘을 보여 주며 그 확률을 극적으로 끌어올렸어. 이곳은 리그에서 우승한 다중 우주 속 네 존재들이 모이는 공간이야. 그러니까 만약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짝-!
남자는 다시 박수를 쳤다.
그 순간.
쿠구구구구구구, 촤아아아아아악-!
바다가 둘로 갈라졌다.
강시온의 손 밑에 있던 강준호도 그 바다로 빨려 들어갔다.
오직 강시온과 남자만이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모세의 기적을 눈앞에 목도한다면 이런 광경일까.
거대했던 바다가 심연을 드러내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두 개의 폭포에서 뿜어내는 엄청난 양의 수증기는 이 일대를 뿌옇게 만들었다.
강시온은 자신의 손에서 또다시 벗어난 강준호를 마지막까지 바라보았다.
바다가 갈라지며 드러난 심연.
그곳에는…….
그 수가 족히 수십억은 되어 보이는 저마다 다른 차원의 강시온이 뒤엉켜 죽어 있었다.
“모두 리그에서 탈락한 너다. 더 높은 차원에 도착하지 못하고, 죽어 버린 너와 나의 형제들이지.”
남자는 강시온과 같이 그 시체 더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 속에 처박히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렇지? 시온아. 난 너야. 넌 나고. 우린 감정을 공유해. 그리고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어. 하지만 그 끝은 조금 다를지 몰라. 난 우리가 고차원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봐. 하지만 너의 지금 그 감정은 모든 걸 되돌려 놓고 싶은 쪽으로 기울었어. 그건 곁에 있는 그 여자 때문이겠지. 그 여자가 곁에 있으니까, 점점 너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거야.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꿈은 단순한 인간의 꿈이야. 네가 가지고 있는 꿈도 인간의 꿈이지. 고작 인간으로 남지 말자, 우리. 우린 인간일 수 없는 능력을 가졌어. 세상은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데다 우릴 배척했어. 자, 이젠 우리 차례야. 세계를 무너뜨리고, 인간 종족의 단 하나의 신이 되는 거야. 나머지 모든 퍼즐은 맞춰졌다. 너만 있으면 돼. 네가 우리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남자는 시온에게 손을 건넸다.
자신의 손을 어서 잡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지금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제아무리 또 다른 ‘나’일지라도.
설령 또 다른 ‘내’가 제안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일지라도.
강시온은 그에 따르지 않기로 정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너무 단순하네.”
남자의 목표는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리그에서 우승해서 유일신이 되는 흔하디흔한 생각.
강시온은 유일신이 되자는 남자의 말보다 더 높은 차원의 무언가를 생각해 냈다.
그 짧은 순간에.
“겨우 그것 가지고 되겠어?”
“……뭐?”
굳은 표정으로 되묻는 남자에게 강시온은 말하기 시작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던 파도가 점차 잠잠해지고, 쏟아지는 빗줄기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제 이곳에는 시온의 목소리만이 울리기 시작했다.
“난 질서를 어지럽히겠어.”
* * *
내 이야기가 끝나자, 남자의 얼굴이 환희에 가득 휩싸여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하하하하하-!!!”
남자는 끅끅대고 웃으며 기어이 다시 폭소를 터트렸다.
다른 차원의 내가 맞나, 의문이 들 정도로 남자는 웃음이 많았다.
“아-. 좋아, 너무 좋아. 아, 왜 이런 생각을. 아니, 아니지. 솔직히 우리가 이곳에 수천 년이나 있었는데, 그런 얘기가 나오기도 했지. 하지만 네가 말하니까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아-. 좋아. 좋다 이거야.”
남자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끅끅댔다.
뒤이어선 어깨를 토닥거렸다.
“좋아. 우린 네 뜻을 따르마. 넌 특별한 존재다. 하지만 말뿐인 건 별로야. 증명해야겠지. 그래서 내가 도와줄 건 없나? 가능한 선에서는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닥치고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다.”
“푸흐흐흐-. 자신감 좋아. 다시 말하지만, 우린 네 뜻을 따르마. 한 번 보여 주도록 해. 근데 여기서 더 노닥거릴 시간이 없을 것 같다.”
난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되물었다.
“무슨 뜻이지?”
“그야, 네 소중한 것을 네 스스로 죽여버리기 전에 어서 돌아가라는 소리다.”
“내 소중한……?”
남자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쿡, 손가락으로 내 육체를 밀쳤고 난 자연스럽게 뒤로 쓰러졌다.
몸을 감싸는 모든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웃고 있었다.
남자는 내게 말했다.
“오만한 자여. 그 끝이 결코 오만으로 끝나지 않길 빌지어다.”
끝이 결코 오만으로 끝나지 않길.
그 문장의 의미를 곱씹었다.
하지만 그 전에 난 이미 이공간에 휩싸여 또다시 눈을 떴다.
내 손아귀에 그녀의 목이 움켜쥐어져 있었다.
피로 얼룩진, 죽어 가는 진재희가.
난 정신이 돌아왔음에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군가 내 육체를 조종해 그녀를 죽이려고 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