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죽은 자들의 도시 (2)
죽지 않는 존재, 좀비.
이곳에는 원래 두 개의 도시가 있었다.
의왕시와 군포시.
지난 세 개의 라운드가 진행되는 동안 이곳의 필드 보스 ‘마녀’는 서서히 시체를 수집해 또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어 냈다.
사실 ‘마녀’는 관리자에 의해 선발된 외계의 생명체였다.
마녀는 죽은 자를 양분 삼아 행성의 허파가 되어 줄 식물을 만드는 존재.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행성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이곳에 퍼진 거대하고 울창한 숲의 나무들은, 모두 ‘의왕시’, ‘군포시’의 주민들로 만든 것이었다.
그 외계의 식물들이 일정 시간 이상 자라면 하나의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것이 녹룡의 알이다.
인간들은 녹룡을 키워 내기 위한 재료들이었다.
하지만 녹룡이 죽자, 마녀는 다시 인간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녹룡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그런 와중에 그가 숲에 발을 들였다.
영혼이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자.
강시온.
‘반드시……. 녹룡의 재료로 사용할 자다. 그러면 우주조차 불태울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녹룡이 탄생하게 될 거야. 무조건. 무조건 먹어야 한다. 저 남자.’
마녀는 원정대를 몰아붙였다.
마녀의 흑마법은 죽은 자들을 식물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 일시적으로 영혼을 주입시켜 다시 일으키는 것도 가능했다.
그것이 좀비였다.
죽었지만, 죽지 않는, 죽자고 달려들지만, 결코 죽일 수 없는 불사(不死)의 존재.
촤좌좌좌좍-! 서걱-!
진재희의 성검이 횡으로 그어지며, 달려드는 모든 좀비를 베었다.
원래 생명체라면 단번에 불타 없어졌어야 할 막강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죽지 않았다.
찢겨 나간 살점들이 다시 달라붙은 좀비들은 또다시 진재희에게 달려들었다.
박지수의 세포들과는 달랐다.
박지수의 세포들은 한 번 베면 없어졌지만, 이놈들은 베어도 죽지 않았다.
원정대는 지쳐 있었다.
무려 이틀째 이어진 전투였다.
온 숲이 불타고, 수백 그루의 나무가 꺾이고 넘어졌다.
좀비들이 흘린 피만 해도 줄기를 이뤄 강을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진재희는 결코 강시온 주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끝까지 강시온을 지켜 냈다.
여기서 그를 잃는 건, 상상하기조차 싫었기 때문이다.
진재희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다른 원정대원들은 상황이 달랐다.
“졸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최현지가 꾸벅 고개를 떨궜다.
최명준은 필사의 정신으로 최현지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끌었다.
“빌어먹을! 참아!”
“벌써 이틀 동안……. 물도 못 먹고……. 싸우기만…….”
진재희는 가쁜 숨을 내쉬며 누워 있는 강시온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주위로는 빛의 보호막이 휘둘러져 있었다.
물론 도망칠 생각도 했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불사의 존재에 대항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
하지만 마녀를 죽이기 전까지 숲은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이 퀘스트의 함정이었다.
마녀는 원정대의 브레인이었던 강시온을 먼저 현혹시키고, 천천히 남은 인원까지 잡아먹으려고 했다.
‘시온이 싸우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몰리다니.’
진재희는 다시금 강시온이 자신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
-갸아아아아……!
-구야야야아아악!
-갸갸갸갸갹! 갸아아아악!
원정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다가온 수많은 구울 좀비들이 에워쌌다.
“아이야, 꽤 대단하구나.”
핏빛 강을 건너오는 마녀의 목소리는 매혹적이었다.
진재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놈을 노려보았다.
마녀는 실체가 없는 자.
지금껏 수십 번, 그녀를 베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과연 관리자가 설정한 필드 보스다웠다.
놈을 쓰러뜨리면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보상이 있겠지만.
쓰러뜨리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정도다.
진재희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쓸고는 다시 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여기까지인가. 유희를 즐길 만한 정도는 되었다.”
마녀는 승리를 확신하고 웃음 지었다.
“도망칠 수 없다.”
그때, 최현지가 비틀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고 마녀는 말을 이었다.
“날 이길 수도 없을 것이다.”
다른 한쪽에 서 있는 최명준을 바라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는 강한 척하지만 한계였다.
이들을 모두 확인한 마녀는 미소 지었다.
“너흰 이곳에서 죽는다.”
진재희는 회복력이 빨랐지만, 그래도 마녀를 혼자서 상대하는 건 역부족이었다.
마녀는 진재희의 눈을 마주 보며 다시 선언했다.
“내가 바로, 너희들의 죽음이니라.”
……하지만 진재희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킬 것이다.
강시온을.
다시 꿋꿋하게 성검을 들었다.
그녀를 향해 좀비 구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눈을 멀게 할 만큼 강한 빛을 뿜어내던 그녀는 검을 휘둘렀다.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쥐어짜듯.
그리고 그 순간.
후두두두두두두두두둑-!
원정대에 달려들던 모든 좀비 구울이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
진재희는 깜짝 놀라 동작을 멈추었다.
그녀의 검이 놈들에게 닿기도 전이었다.
지금 놈들을 쓰러뜨린 건, 진재희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때, 절대 강도를 자랑하던 진재희의 보호막이 깨졌다.
쩌적-. 바사사사삭!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보았고.
그곳에는 강시온이 서 있었다.
“……시온?”
하지만 왠지 강시온이 아닌 듯했다.
* * *
베이런.
천상의 존재들이 머무는 곳.
그곳에 모인 자들의 외관엔 공통점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눈앞에 떠오른 영상을 보며 열광적인 함성을 토해 내고 있었다.
“대단해! 정신을 지배하는 몬스터라니! 서로 죽고 죽이게끔 하려는 건가?”
“진재희 저자는 강시온에게 집착하고 있던데, 이렇게 비극적인 쇼라니……. 아, 재밌어! 너무 재밌어!”
“K! K는 경기권의 관리자였지. 이런 판을 짜놓다니. 정말 엄청난 쇼야!”
존재들은 K의 기발함에 온갖 감탄사를 뱉어 댔다.
K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좋아.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판이야.’
K는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에 대해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처음에 K는 강시온을 박지수의 밑에서 소모될 인물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나 강시온이 그동안 보여 준 재치와 계략들은 자신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했다.
관리자란 쇼를 진행하는 연출자들.
자신이 담당하는 구역에 무대 장치를 마련하고, 그 안에서 리그의 참가자들로 쇼를 만들어 내는 예술가들이었다.
K는 자신의 잘못을 무마하는 동시에, 관리자의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강시온이라는 변수.
강시온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때.
한 존재가 K를 향해 다가왔다.
“K! 어떻게 된 거야? 저번에는 분명 강시온에게 큰 기대까지는 걸지 않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셀 수도 없이 많은 팔을 지니고 있는 존재.
그 존재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상기된 표정으로 K에게 물었다.
K가 잘 알고 있는 존재였다.
전투 장면을 특히 좋아하며, 씀씀이도 굉장한 베이런의 큰손 중 하나였다.
K는 곧장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글쎄요. 앞으로의 재미를 위해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앞으로의 전개를 기대해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K의 말에 존재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좋아! K의 쇼는 언제나 최고였지! 나는 강시온이 이 숲에서 탈락한다는 데 걸겠어!”
존재는 다른 이들이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존재의 외침에, 다른 존재들 또한 질 수 없다는 듯 왁자하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럼 강시온이 살아서 숲을 빠져나가는 데에 걸지!”
판돈이 올라갈수록, K는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어갔다.
존재들이 떠들어 대는 것을 지켜보던 K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안배해 놓은 것들에 대해서 돌이켜 보았다.
‘아직까진 너무나 순조로워.’
K의 계획 자체는 간결했다.
강시온을 탈락시키기 위한 가장 큰 걸림돌인 진재희.
그녀를 강시온에게서 분리시킨다.
그리고 둘을 적으로 만든다.
진재희는 대한민국 리그를 전부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한 강자였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거의 집착에 가까운 수준으로 강시온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진재희로 하여금 강시온을 지키지 않게끔 하거나, 역으로 죽이게끔 유도하면 그만이었다.
마녀는 그것을 위한 수단이었다.
시간과 정신을 다루는 마녀.
마녀는 강시온의 굳건한 정신 속에 있던 아주 작은 틈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차원에서 준보스급의 몬스터인 마녀에게도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결론적으로, 마녀는 강시온의 정신을 속박해 냈다.
이제는 서로를 죽이게 되리라.
‘거기에 보험까지 들어 놨으니 완벽해.’
K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마녀는 시간의 마법에 능통한 몬스터였기에, 숲의 시간을 바깥과는 다르게 흘러가도록 만들었다.
강시온 일행이 만에 하나 마녀를 격파하고 숲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이미 바깥의 시간은 몇 년이나 훌쩍 지나 있을 것이었다.
하루 한 시간이 소중한 리그에서 몇 년의 시간을 허송세월하는 것은 치명적인 손해.
어찌저찌 만경으로 돌아가 봤자, 이미 강성하게 성장한 여타 세력이 만경을 부술 것이다.
K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다시 검토해 봐도 자신의 계획에 빈틈은 없었다.
K는 베테랑 관리자.
수많은 리그와 수많은 라운드를 진행시켜 온 닳고 닳은 관리자였다.
지금껏 그녀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은 교란종은 없었고, K는 이번에도 자신 있었다.
‘나 정도 되는 관리자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통제 불능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어.’
관리자는 리그에 직접 개입이 금지되어 있다.
직접 플레이어들의 신변에 위협을 가하는 경우가 그것이었다.
관리자의 영역은 오직 ‘판을 까는 것’.
라운드가 시작될 무렵, 새롭게 추가될 몬스터, 지형, 자원 등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
그것이 이 무대의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이었다.
만약 설계자가 함부로 쇼에 직접 개입해 버린다면.
그건 정말 재미없는 쇼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재미없는 쇼를 설계한 관리자에게 정해진 운명은 불멸성을 반납하는 것뿐.
1라운드에서는 교란종들의 리그 참여를 독려하고 원활하게 쇼를 진행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허용되긴 하지만, 그 이후에는 직접적인 개입은 단호하게 금지된다.
K 또한 2라운드 이후, 퀘스트와 지형지물.
그 외의 자잘한 요소들을 배치했을 뿐, 직접적으로 개입해서 플레이어들의 행동을 제약한 적은 없었다.
결국, 강시온을 탈락시키기 위해서는 3라운드라는 무대를 강시온을 죽이기 위한 살인극으로 미리 꾸며 놓는 수밖에 없었다.
예상된 경로에 강시온의 극상성인 몬스터를 배치한 것도.
주변의 세력들이 만경을 눈여겨보게끔, 그들의 퀘스트들을 미리 안배해 놓은 것도.
모두 관리자 K가 이번 라운드에서 강시온을 탈락시키기 위해 설치한 무대 장치였다.
한편 K가 자신의 계획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존재들의 관심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아쉽긴 하네. 강시온, 저 플레이어는 마음에 들었는데.”
“경기권의 담당자는 K였지? 나는 예전부터 K가 연출한 쇼의 팬이었는데, K는 절대로 재미없는 쇼를 만들지 않아! 앞으로 더 흥미로운 인물들이 등장할 거야.”
기분 좋은 칭찬에 K는 대화를 나누던 존재들에게 다가갔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여러분들이 흥미로운 쇼를 관람하실 수 있도록 제 본분을 다할 뿐입니다.”
“이런, 능력에 걸맞지 않게 겸손하기까지. 방금까지 경상권 리그를 보다 왔는데, 영 재미가 없었어.”
“그래? 나는 미국 쪽 리그를 보고 왔는데 거긴 그래도 나름 볼 만하더라고. 그런데 이 친구가 K가 기획한 쇼가 제일 재미있다고 하도 떠들어 대기에 여기에 왔지. 듣던 대로 엄청난 쇼야!”
K는 깊이 고개를 숙여 존재들을 향해 예를 표했다.
존재들은 그런 K를 보고는 기꺼워하며 막대한 양의 게런을 베팅했다.
“좋아! K. 앞으로도 기대함세.”
“K. 실력 좋은 관리자인데, 어째서 이런 작은 곳만 관리하고 있는 거야? 너라면 좀 더 큰물에서 더 엄청난 쇼를 연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과찬이십니다. 저야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하지만 더 많은 권한을 가지게 되어, 여러분께 더욱 즐거운 쇼를 보여 드릴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쇼에 몰입한 존재들의 칭찬에, K의 콧대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질수록 상위문자의 이름을 가질 확률이 높아진다.
만약 자신이 상위문자의 이름을 가질 수만 있다면.
‘아아……. 절대자시여. 이제야 당신의 뜻을 알겠습니다.’
절대자는 K에게 이번 라운드에 강시온을 탈락시킨다면, 상위문자로 된 이름을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지키지 못한다면 불멸을 거두겠다는 말도 들었지만, K는 거기까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특출나게 영특하기는 하나, 고작 플레이어 하나를 탈락시키는 일이었으니.
‘저를 승격시키기 전에 간단하게 제 능력을 시험하신 것이었군요. 깊으신 뜻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아아! 사려 깊으신 분……. 그렇다면, 이 K. 압도적인 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K는 당당한 걸음으로 존재들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고는 정중한 태도로 멈춰 섰다.
이곳은 하나의 연주회.
자신은 지휘자.
자신의 쇼로 감탄과 환호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K가 자신들의 앞에 서서 잠시 뜸을 들이자, 존재들은 모두 K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자신들에게 이렇게 재미있는 쇼를 보여 준 K가 다음에는 또 어떤 즐거움을 선사해 줄 것인지.
연주자들은 일제히 지휘자를 바라보았다.
K는 조용히 팔을 들어 올렸다.
합주의 기본은 가장 첫 박자를 서로 맞추는 일.
K는 들어 올린 팔을 강하게 허공에 휘두르며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하지 않겠습니다! 저 K! 앞으로도 여러분께 즐거운 쇼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K!, K!, K!!”
존재들은 일제히 K의 이름을 연호했다.
K의 정확한 지휘 아래에, 일정한 박자를 따라서.
K는 그런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아아, 이거야. 더. 더 열광해라! 이 함성이 절대자님께 닿을 때까지!’
K는 알고 있었다.
곧, 마녀의 마법이 효과를 나타내리라.
K의 등 뒤에 있던 영상에 검붉은색의 커튼이 드리워졌다.
고풍스러운 금색 테두리로 장식된 고풍스러운 커튼.
자신들이 몰입하던 영상이 가려졌어도, 존재들은 불평 따위 하지 않았다.
그저, 저 커튼이 다시 열렸을 때.
다음 지휘가 들어왔을 때.
다시금 큰 소리로 환성을 연주하리라.
존재들은 모두 자신들의 지휘자에게 주목했다.
“여러분! 강시온은 과연 어떤 운명을 맞이할까요. 그의 곁에는 최강의 플레이어들 중 하나가 상주하고 있었지만, 과연 그녀가 끝까지 강시온을 지켜 줄 수 있을까요? 강시온이 자신을 잃고 폭주한다면, 그녀는 강시온을 죽일까요? 이 쇼의 장르를 드라마. 혹은 액션. 혹은 로맨스. 무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존재들은 열띤 함성을 내뱉었다.
K의 얼굴에 존재들의 열기가 훅, 끼쳐왔다.
K는 기묘한 웃음을 입에 걸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K! 이 쇼의 장르는 K라고! 저는 자신 있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즐겨주십시오! 그리고 기억해 주십시오. K가 만들어 낸 환상적인 쇼를! 제 이름은 K. 이번 리그에서 경기권의 관리자입니다!”
K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커튼이 열렸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클라이맥스.
K는 존재들의 우레와 같은 갈채를 지휘했다.
‘갈채해라! 위대한 쇼 앞에서!’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명백한 불협화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어? 뭐, 뭐야! 저게 어떻게 된 거야!”
“이봐 K! 뭔가 이상하잖아! 방금 우리가 중요한 부분을 놓친 것 같은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K는 존재들의 아우성에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그게 무슨…….’
K는 황급히 자신의 등 뒤에서 상영되는 영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강시온이 있었다.
그는 분명 마녀에게 정신을 지배당한 채, 동료들을 공격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강시온은.아니, ‘그’는 더 이상 강시온이 아니었다.
* * *
베이런.
VVIP실.
절대자의 방 안 깊숙한 곳.
절대자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땅도, 벽도, 천장도 없는 드넓은 공간이 그곳에 있었다.
우주처럼 고요한 암흑의 세계.
이곳은 관리자도, 존재들도 들어오지 못할 절대자만의 공간이었다.
먼 곳에서는 형형색색의 별들이 빛나고, 공포스러울 정도로 광대한 크기의 천체들이 지나는 곳.
절대자는 그 가운데에 서 있었다.
절대자는 바로 앞에 있는 거대한 진열대를 마주 보았다.
그곳에는 어떤 모형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다.
절대자는 그 모형 중 하나에 다가갔다.
[127-42번 우주]
[127-42-08번 리그 우승자. ■■■■]
회색 피부에 작은 몸집.
커다란 머리와 얇은 목, 가느다란 팔을 가진 그 모형은, 지구에서 흔히 ‘외계인’이라 부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절대자가 좋아하는 모형 중 하나였다.
흥미진진한 리그였고, 리그 중에 유의미한 데이터들 또한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절대자는 흡족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린 채 그 모형을 지나쳤다.
그리고, 자신이 특별히 아끼는 다른 모형의 앞에 서서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127-9710번 우주]
[127-9710-12번 리그 우승자 강시온]
강시온을 본떠 만들어 놓은 듯 생긴 모형.
인간종의 성인 남성 정도 되는 키에 덥수룩한 머리칼.
냉정하게 정면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빛까지.
절대자는 여전히 모형이 실물을 잘 반영했다고 생각하며 흡족하게 웃었다.
127번 우주.
절대자는 127번 우주가 아닌 다른 우주에서도 모형과 똑같은 이가 우승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었다.
머지않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目睹)할 수 있게 될 테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