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타락한 자들의 숲 (2)
최현지는 수십 개에 이르는 상자들 앞에서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서 있었다.
상자들은 깨끗했다.
마치 하루 이틀 사이에 이 모든 상자를 쌓아 둔 것처럼.
오염도 일절 없었고, 흠집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왜 이렇게 많이…….”
최현지는 조심스럽게 상자들을 확인했다.
손에 잡히는 아무 상자 하나를 뜯어본 최현지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
52주 차, 정기 보고.
종이에는 만경의 현 상황에 대한 보고가 쓰여 있었다.
-현재 만경의 식량 현황은…….
-서울 메트로 세력 보고 사항…… 적들의 움직임 주시 중.
-만경에 새로 이주를 희망하는 방랑자 집단…….
-2등 시민들의 사상 교화는 성공적…….
보고서에는 만경의 간단한 현황부터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새로운 정보들까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보고를 읽어 내려가던 최현지는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에서 멈추었다.
-26년, 03월 21일. 이상 보고 사항 끝.
“26년? 아니……?”
리그가 시작된 지는 3년째.
즉, 현재는 2025년이어야 했다.
그런데 마지막 보고서의 날짜는 26년으로 적혀 있었다.
그녀는 방랑자로 생활해 오면서 기상천외한 일이라면 수도 없이 겪어 봤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일만큼 이해하기 힘든 일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설명할래?”
최현지는 챙을 노려보았다.
“아님, 뒤질래?”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두 번 말 하게 만들지 마.”
덥석-!
그 순간, 최현지는 단번에 챙의 목을 낚아챘다.
그러자 목을 낚아챈 최현지의 손목에서 검은 물체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천천히 챙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챙은 제대로 숨을 쉬기도 곤란했는지 바둥거리며 캑캑 댔다.
최현지는 챙을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네가 하는 말에 따라 네 목숨이 오갈 수도 있어.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최현지는 쓰러져 있는 챙을 발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때, 챙의 눈동자가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톱도, 발톱도, 이빨도 점점 길게 자라나고 있었다.
“마녀님……. 그 여자를 바쳐야 해……!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외치면서 챙은 최현지에게 달려들었다.
화악-!
* * *
“그래서. 이게 그 상자들이란 소리야?”
나는 최현지에게 손짓하며 물었다.
최현지는 자신의 겉옷에 코를 대고 킁킁대며 답했다.
“응, 그거. 아-. 미친 변태 사이코 새끼가. 갑자기 달려드는 바람에……. 온몸에 시체 썩은 내가 나. 으……! 빨리 씻고 싶어!”
-갸아아아악!!! 갹! 갸아아아아악!!!!
구울로 변한 챙은 검은 물체에 포박된 채, 마구잡이로 소리를 질러댔다.
난 최현지에게 다시 물었다.
“내 말에 집중해. 이게 만경에서 온 거야? 지난 1년간?”
“어. 그렇지. 너희들이 오기 전부터 확인하고 있었는데, 일주일 단위로 보급품 상자가 쌓여 있어. 전부 만경에서 온 거야. 아까 세어 봤었는데. 몇 박스였더라?”
“52박스.”
“맞아 52박스!”
수십 개의 박스들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게다가 보통 종이 박스도 아니고, 이삿짐 옮길 때나 쓰는 PP박스였으니.
최명준이 짧은 머리를 쥐어 뜯어 댔다.
“아니! 난 이해가 안 되는데? 뭔 소리야? 만경에서의 보급품은 일주일 단위로 오기로 했으니까. 지금 여기에 52박스나 있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우린 여기 온 지 이제 일주일밖에 안 됐다고!”
이곳에 온 지는 일주일째, 그간 바깥에선 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단편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곳의 1주는 바깥에서 1년이라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당장은 그것 말고 이 현상의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검은 물체에 포박된 챙을 바라보았다.
챙은 괴물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갸아아아아악!!!! 갸아아아아아아악!!!!!!
챙은 한 인물에게 시선이 꽂힌 채, 이빨을 부딪쳐 대고 있었다.
진재희.
그녀는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내놔!!!!!!!!! 당장 저년을 내놔!!!!!!!!!”
챙이 무어라 떠들든, 난 보고서를 살폈다.
확실히 하윤하의 글씨체였다.
게다가 보고서에 적힌 지난 1년간의 기록은 일부러 지어내기도 힘든 내용이었다.
물론 지어낼 이유도 없었고.
아무래도 이 보고서들은 진짜인 것 같았다.
특히 내가 돌아오지 않자 왕을 교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슬슬 나온다는 내용, 그리고 메트로와 강남 등 외부 세력의 움직임을 기록한 내용.
꽤 현실적인 내용뿐이었다.
그 외에도 하윤하가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가 수십 통씩 와 있었다.
도저히 나를 찾을 수 없다는 둥, 그간 보급품과 함께 수색대를 보냈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둥, 분명 살아 계실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보급품은 계속 보내고 있다는 둥.
최현지는 편지 봉투를 팔랑거리며 내게 보여 주었다.
“나에 대한 편지도 있네~. 짜식, 귀엽네. 근데 편지 통수 차이 실환가. 왕님한테는 20통……. 나한테는 15통……. 우리 동생님도 2통은 왔는데……. 건달은 빵. 풉!”
“뭐가 웃기다는 거야?”
“아니~ 너한테는 한 통도 안 와서 말이지.”
“있겠냐고. 어?! 애초에 친하지도 않은데.”
“풉. 서운해하긴? 그러니까. 그 X 같은 성격 좀 고쳐 봐. 그럼 친구가 생길 거다.”
“야이 씹……!”
나는 시끌벅적한 주위를 무시한 채 보고서에만 집중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만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았다.
어차피 지금으로선 독 지대를 지나갈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 동생이 이곳을 지났다는 사실도 알아냈으므로 이미 소정의 목표는 이룬 셈이었으니.
아쉽지만 이제는 만경으로 돌아가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기 위해선 되돌아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길잡이가 있다면 편하겠지.
저놈이 적당할 것 같았다.
챙은 여전히 부들거리며 진재희만을 바라봤다.
내가 다가가자, 놈은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차라리!!!!!! 차라리!!!!!! 죽여 줘어……. 저년을 데려가지 못하면 우리는……. 아, 아니. 아니지! 어차피 죽을 거라면 피 한 방울만이라도……!”
그동안 몬스터가 인간의 말을 구사하고 있었다는 걸 문득 깨닫자 그 모습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난 놈에게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내가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도, 챙의 눈동자는 오로지 한곳.
진재희에게만 꽂혀 있었다.
난 놈의 광기 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이 숲을 빠져나갈 방법을 알고 있어?”
-카아아아아…….
시체 썩은 내가 진동했다.
이건 맡아본 적이 있는 냄새였다.
오우거의 변에서나 날 법한 냄새.
인간을 먹고 소화할 때 나는 그런 냄새였다.
“최명준. 단검.”
“예, 형님.”
“여자……! 저 여자를 내놔……!”
난 최명준에게서 단검을 건네받자마자 놈의 이마에 바로 꽂아 버렸다.
푸욱-!
검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몬스터니까, 이 정도로 죽진 않겠지.”
“한 방울만 마시게 해 준다면……!”
챙은 아픈 내색 하나 없었다.
“더 해 줘?”
이마에 꽂힌 단검을 뽑아내, 이번에는 목을 찔렀다.
다시 한번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번에도 놈은 아픈 내색 하나 없었다.
‘고통을 모르는 건가. 아님, 광기에 휩싸여서 고통을 못 느끼고 있는 건가.’
나는 찌르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마치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해적 통 아저씨 장난감처럼.
통 아저씨의 머리가 튀어나오듯이, 그놈 목에서 튀어나올 비명 소리를 기다리며.
하지만 놈은 지겹도록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핏물로 샤워를 한 것처럼 놈의 온몸이 검붉은 피로 뒤덮였을 때쯤, 난 고문하기를 그만두었다.
가쁜 숨이 몰아 나왔다.
“형님. 교대하실까요? 조금 지쳐 보이십니다.”
최명준이 물병을 건네며 물었다.
난 그에게서 물병을 건네받아 한 모금 마셨다.
“됐어. 그냥 죽여.”
고문이 통하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고문이 통할 상대는 많다.
이놈이 몬스터가 맞다면, 빛남의 주민들 역시 전부 몬스터일 확률이 매우 크다.
따라서 그 어떠한 고문도 통하지 않는다면, 이 일대를 모조리 불태워…….
“그 피 한 모금…….”
챙은 여전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온몸에 칼자국이 난 채인데도, 계속해서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야……. 그러니까……. 그전에 그 피……. 한 모금만 마시게 해 줘.”
챙의 온몸이 추욱 늘어졌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일관되게 한곳만을 향했다.
“이곳에서 나가는 법…….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원한다면 네 동생까지……!”
처음으로 놈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날 돌아보았다.
“알려 줄게. 모든 걸. 그러니 딱 한 모금이야. 입 안 가득 찰 정도로, 한 모금의 피만 먹게 해준다면……!”
그 순간, 진재희는 단도를 꺼내 자신의 손가락을 베었다.
주르르륵-.
그녀의 손가락에서 새빨간 핏물이 조금씩 흘렀다.
“그렇게 원한다면 줄게. 피.”
-갸아아아아아아악!!!!!!!!!!!!!!!!!!!!!!!!!!! 갸아아아아아아아악!!!!!!!!!!!!!!!!! 줘!!!!!! 줘!!!!!!! 줘!!!!!!!!!
다 죽어 가던 모습의 챙은 진재희의 피를 보자마자 다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난 챙에게 다가가는 진재희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렇게 너를 희생할 필요 없어. 다른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니까.”
진재희는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던 나의 손을 자연스럽게 풀어냈다.
그녀는 확고했다.
“난 괜찮아. 그리고 이 방법이 제일 빠르잖아.”
마구 몸부림치고 있는 챙.
최현지는 검은 물체를 조작해, 챙의 육체를 전부 뒤덮기 시작했다.
입만 남긴 채로.
그리고 검은 물체는 챙의 아가리를 벌려 혓바닥을 끄집어냈다.
진재희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손가락을 챙의 혓바닥 위로 갖다 댔다.
-카하하아아……. 카하아아아…….
뚝.
피 한 방울이 챙의 혓바닥에 떨어졌다.
이어서 핏물 몇 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더니 이내 주르륵 흘렀다.
뚝. 뚝.
조르르르르-.
챙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진재희의 피를 섭취했다.
한 모금의 양은 꽤 많았다.
거의 헌혈을 통해 뽑아내는 양 정도였다.
진재희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경멸에 찬 눈빛으로 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3분 정도 지났을까.
진재희는 손가락을 거두었다.
“말 안 하면, 천천히 죽일 거야. 죽어 가는 걸 느끼도록.”
그녀는 독설을 내뱉고는 뒤로 물러섰다.
챙은 한동안 가만히 혀를 굴리며 피를 음미했다.
그다음엔 조금이라도 맛을 더 느끼려 연신 입을 쩝쩝거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툭 하고 지면을 향해 떨어뜨렸다.
챙의 전신을 휘감은 검은 물체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제야 챙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물이 고여 있는 챙의 하얀 눈동자가.
“다 말해 줄게……. 다…….”
챙은 훌쩍거리며 입을 열었다.
* * *
엘프.
영원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종족.
그들은 마법의 숲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어느 엘프는 동족상잔을 저질렀다.
저도 모르게 동족 엘프의 피를 맛본 엘프는, 자신의 육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세월은 생명체를 나약하게 만들고, 쇠퇴시킨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핏물과 살점을 취하면 더 이상 늙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후.
엘프족들은 비극을 맞이했다.
서로를 잡아먹고.
영원한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자신의 가족까지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름다움은 성욕의 매개체다.
아름다움에 자극된 성욕이 먹고 싶다라는 엘프의 식욕을 증폭시켰고, 이성과 욕구를 집어삼키고 서로를 잡아먹는 짐승으로 만들었다.
뾰족했어야 할 귀는 아래로 추욱 쳐졌고, 단 하루라도 아름다운 것을 먹지 않으면 피부가 퍽퍽해지고 회색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이 구울의 실체였다.
그런데 어느 날, 흑마법을 다루는 마녀가 찾아와 그들에게 속삭였다.
아름다운 존재를 자신에게 제물로 바친다면, 영원한 젊음을 주겠다고.
이제 더 이상 서로를 잡아먹지 않아도 된다고.
매주 할당량만 채운다면, 너희들의 젊음과 외모를 유지시켜 줄 물약을 제공하겠다고.
자신들의 아름다운 외모를 지키고 싶었던 엘프들은 그 말에 혹해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을 마녀에게 바치기 시작했다.
챙은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우리도……. 평화롭게 살고 싶었어……. 너희가…… 잘못이야. 너희가 이 숲에 발을 들이니까. 사람들이 점점……. 인간 고기의 맛을 알게 되었고. 그러니까……. 너흴 사냥하고. 아, 아니! 생각해 봐. 우린 서로 먹고 먹히는 존재잖아? 애초에 너희가 이 숲에 발을 들이지만 않았어도!”
챙은 울먹이며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올 거야……. 제발……. 제발 마을 사람들은 건들지 말아 줘. 이제는 한계야. 곧 모두가 이성을 잃을 거라고…….”
몬스터 주제에, 마치 인간처럼 떼를 쓰고 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다 착해. 알잖아? 응? 제발……. 제발……. 그러니까 제발…….”
진재희는 베어진 손가락을 입으로 쪽 빨았다.
각성자는 회복이 빠르기에 따로 후속 조치가 필요 없었다.
강시온은 가만히 챙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때, 무엇인가 다가오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고 있었다.
챙은 불안에 떨며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이야……! 제발! 그들을 살려 줘! 아직 어린 애도 있어. 너희는 우릴 몬스터라고 부르겠지만……. 우린 너희가 몬스터거든? 잘 생각해줘. 제발 그들을 살려 줘! 너. 너! 네가 최종 결정권자지? 그치? 갈색 머리. 곱슬머리!”
챙은 강시온에게 소리쳤다.
강시온은 여전히 챙을 노려보고 있었다.
“현명한 선택을 해 줘. 현명한…….”
빛남 주민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더욱 커져 왔다.
이제 정말 근접했다.
가만히 고민하던 시온은 마음을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