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타락한 자들의 숲 (1)
“내가 해 볼게.”
나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내밀며 말했다.
“괜찮겠어? 네가 괜히 힘 빼지 않아도 돼.”
진재희는 염려를 표했다.
하지만 이젠 그녀의 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때가 되었다.
난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괜찮아.”
나는 구체들을 소환했다.
은빛의 구체들은 나의 의지에 따라 주위를 공전했다.
두억시니는 맹렬하게 돌진해 온 것이 무색할 정도로 섣불리 공격해 오지 않았다.
아마 놈도 진재희의 힘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난 천천히 놈을 살펴보았다.
관찰.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섣불리 공격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지능을 가졌어. 높은 지능과 수많은 촉수…….’
외관의 생김새.
촉수의 이동.
촉수의 개수.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았다.
생각을 마치고 나는 천천히 움직였다.
놈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놈 주위를 둥글게 돌면서.
놈의 옆면도 마찬가지로 동그란 형태였다.
시체가 덕지덕지 붙어 겉면을 감싸고 있었다.
인간의 것도 보이고, 들짐승의 것도 보였다.
몇몇은 완전히 썩지 않아, 얼굴의 형태를 그대로 가진 것도 있었다.
정말 끔찍한 형상이었다.
나는 수풀 사이를 헤쳐 반대 방향으로 빠져나왔다.
놈은 몸을 틀거나 이동하지 않았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제 난 놈의 등 뒤로 향했다.
놈에게 눈이라 할 것이 있나?
아니,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시각을 감지할 눈이 없다면 다른 감각 기관이 있을까?
그게 바로 저 촉수일까.
수백 개의 촉수로 주변 사물을 인지한다면, 눈이 없어도 월등한 근접전 능력을 갖췄을 것이다.
그렇다면 근접 전투는 피해야 한다.
물론 무력으로도 해결 가능한 진재희나 최현지라면 직접 맞붙어도 괜찮겠지만.
애초에 내가 싸워야 할 방식은 무력이 아니다.
무력으로 상대할 거면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관찰.
모든 것은 관찰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제 수풀을 지나 놈의 반대편까지 돌았다.
그런데 그 순간.
스사사삭-.
촉수가 나무를 휘감아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나는 빠르게 구체를 내보내 인근 수풀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놈들의 촉수가 먹잇감을 물어뜯는 피라미처럼 수풀에 몰아쳤다.
퐈사사사사사삭-!
‘역시…….’
나는 천천히 촉수를 피해서 걸었다.
놈은 지금까지 작은 보폭에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구체 정도 되는 강한 물체가 지면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반응했다.
‘원거리에서는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건가.’
나는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같은 타이밍에 구체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놈의 관심은 온통 구체 쪽으로 쏠렸다.
그 틈을 타 놈의 근처에 다다르자, 마침내 놈의 항문으로 보이는 작은 구멍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려,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겉면은 단단한 뼈 갑이 둘려 있어서 뚫기는 어려워. 정교하게 저 구멍으로 구체를 넣는다.’
계획은 잡혔다.
내폭을 유발하는 것이다.
구체로 주의를 끌면서 동시에 나머지 구체들을 체내로 침투시킨다.
나는 다시 놈의 주위를 돌아 원래 있던 곳으로 왔다.
진재희는 여전히 날 주시하고 있었다.
난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두억시니를 살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구체를 조종했다.
휘릭-.
구체는 시전한 구역을 중심으로 사방에 산개했다.
마치 밤하늘에 일정한 간격으로 떠올라 있는 별들처럼.
나의 구체들은 이 일대에 가득 퍼져 나갔다.
우선 나무들을 건드려 강한 진동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정신력을 집중시켜 구체들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파다다다다다다닥!
구체가 나무를 때리면서 나뭇잎들이 눈처럼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놈은 발악하기 시작했다.
촉수들은 사방으로 휘날리며 들려오는 진동에 반응했다.
구체들이 발생시킨 진동에 나의 발소리는 자연스럽게 묻혔다.
나는 더 강하게 구체들을 진동시켰다.
그리고 놈의 내구도를 파악하기 위해, 구체 몇몇으로 놈을 직접 타격했다.
역시 관찰한 대로 놈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잡아먹은 생명체들의 뼈들을 피부에 덕지덕지 붙여 놓았기 때문에 웬만한 타격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방금 확인했었던 놈의 항문.
큰 덩치에 비해선 좁쌀만큼 작긴 했지만, 걱정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재희에게 배운 아티팩트 제어법을 시험해 볼 기회였다.
나는 구체들을 모아 일렬로 줄 세우고는 바로 쏘았다.
정확히 놈의 약점을 노려서.
구체들은 줄줄이 놈의 신체 내부에 들어갔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두억시니는 고통스러운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아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아아악!
두억시니는 이제 몸을 비틀며 일대의 모든 물체를 부숴 버리기 시작했다.
이제 놈의 촉수보다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나뭇가지와 기둥들을 피하는 게 더 힘들 지경이었다.
나는 그런 와중에도 놈을 주시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티팩트는 집중력의 영역이다.
잠깐이라도 흐트러지는 순간, 아티팩트는 캔슬 될 것이다.
파다다다다다다닥-!
수백 개에 이르는 구체들이 놈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동시에 놈의 몸집은 점점 부풀었다.
원래 크기보다 1.5배, 2배까지.
그리고 지금.
타악-!
난 두 손을 깍지 끼며 구체를 모았다.
놈의 몸을 헤집고 다니던 구체들이, 놈의 몸 안 어느 한곳에 응집되었다.
“후우…….”
옅은 숨을 한번 내뱉고.
집중력에, 집중력을 더해.
파괴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놈의 몸이 폭발하는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린 순간.
퍼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벙-!!!!!!!!!
* * *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강시온을 바라보고 있었던 진재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시온의 능력은 굉장한 파괴력을 가진 것도, 버프 같은 특장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강시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효율을 발휘해 두억시니를 소탕했다.
‘……역시 넌.’
진재희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지금 전투로, 시온이 왜 마지막 라운드까지 진출했던 유일한 군주였는지.
그는 스스로 증명했다.
후두두두두둑-!
두억시니의 살점이 사방으로 흩뿌려졌고, 놈의 피가 빗물과 섞여 쏟아져 내렸다.
전투가 끝나자 숲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고요함을 되찾았다.
“형님-!!! 대단하십니다!”
최명준이 냅다 달려 나가 강시온을 치켜세웠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믿음이 명준의 가슴 속에 차올랐다.
강시온은 머리가 지끈지끈 울려오는 것을 느끼며 구체들을 거두었다.
수백에 이르는 구체들을 동시에 운용했기 때문에 정신력의 소모가 상당했다.
하지만 강시온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최명준과 진재희를 향해 다가갔다.
“형님! 여기 수건 있습니다. 제가 몸을 좀 닦아드리겠습니다!”
최명준은 황급히 달려들어 시온의 몸을 닦아주었다.
핏물은 천천히 비에 씻겨 내리고 있었지만, 몸에 붙은 살덩어리들은 남아 있었다.
명준은 성심성의껏 강시온의 몸에 붙은 이물질들을 떼어 내고 닦아 냈다.
강시온은 최명준의 호의를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본래라면 이런 종류의 호들갑은 당장에 거부했겠지만, 최명준보다 신경 쓰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챙과 최현지는?”
강시온의 물음에 진재희가 앞에 나섰다.
“챙이 사라졌어. 최현지가 지금 놈을 쫓는 중이야.”
“아따-! 형님. 그 의리도 없는 새끼가 아까 그 괴물 자식을 보고 튄 것 같습니다. 제가 아주 잡아다가 묵사발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강시온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최명준은 바짝 군기가 든 동작으로 수건을 들고 뒤로 물러섰다.
“도망갔다고? 챙은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는데.”
강시온은 그동안 챙이 보여 왔던 수상한 행동들에 대해 떠올렸다.
그동안 그가 보여준 호의는 진실이었다.
어떤 꿍꿍이가 있든 간에 시온과 일행에게 피해 준 것은 없었고, 호의 자체에 거짓은 없었다.
그동안 강시온이 한눈에 보아도 수상한 챙에게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챙은 강시온 일행의 강함을 알고 있었고, 두억시니를 정도는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 인지하고 있었을 터였다.
“선을 넘었네.”
꿍꿍이를 숨기는 것은 봐줄 수 있었다.
격변해 버린 세상에는 모두가 각자의 속셈을 품고 서로를 대하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속셈이 결국 행동으로 드러나면 그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챙의 수상쩍었던 모습들은, 두억시니와 일행을 조우시키기 위한 수작질이었던 듯했다.
눈감아 주는 것은 이제 끝이었다.
강시온은 뒤탈을 남겨 두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 * *
챙은 달리고 있었다.
챙은 숲의 지리를 마치 손바닥 보든 꿰고 있었기에, 두억시니와 강시온 일행에게서 순식간에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챙은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휴우! 두억시니가 거기서 나타날 줄이야. 두억시니의 둥지 앞에까지 데려다 두고 슬쩍 사라질 생각이었는데.”
챙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아냈다.
“갑자기 목적지 코앞에서 쉬겠다고 주저앉았을 때는 진짜 다 틀린 줄 알았어.”
챙은 문득, 진재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사람의 모습으로 빚어 놓은 듯한 인간 여자.
“그 인간은 강해 보였으니 두억시니에게 당하진 않았겠지. 적당히 힘이 빠지면……. 어이쿠.”
챙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내린 침을 보고 얼른 소매로 닦아냈다.
그때 챙의 귓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으아아악!”
최현지.
그녀가 플레이어다운 엄청난 속도로 챙을 추적해 온 것이었다.
현지는 놀라서 고꾸라진 챙을 향해 허리에 손을 짚고는 말했다.
“야, 이 자식아. 그래도 같이 지낸 정이 있는데 우릴 버리고 토껴? 너 일루와. 이 누나가 손을 좀 봐줘야겠어.”
최현지가 어깨를 잡고 팔을 돌리며 챙에게 다가갔다.
누가 봐도 흠씬 두들겨 패겠다는 모양새였다.
“자, 잠시만요! 아, 아닙니다! 도망친 게 아니라…….”
“도망친 게 아니라?”
“그, 그, 마을에 지원을 요청하러 온 겁니다. 이 길로 쭉 가면 마을이 있거든요. 그런데 다리가 풀려 버려서 아주 자암깐 앉아 있었습니다.”
챙이 허둥대며 소리치자, 최현지는 챙을 패려던 것을 멈추고 그를 노려봤다.
“진짜야? 이대로 쭉 가면 빛남이 나온다고?”
“예, 예. 그렇고 말고요.”
챙이 양손을 비벼가며 설명하자, 최현지는 미심쩍다는 얼굴로 팔을 내렸다.
챙을 추적해서 찾아오긴 했지만, 숲의 지리를 모르기에 챙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우릴 뭘로 보고. 그딴 몬스터 정도는 그냥 죽여 버릴 수 있는데.”
“아, 아하하. 그래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고요. 귀한 손님들이신데. 아하하. 아무튼, 일단 일행에게로 돌아가시죠.”
“뭐? 마을로 간다며.”
“예? 예. 아. 손님들께서 두억시니를 쉽게 이길 수 있다고 하시기에…….”
챙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X.’
두억시니가 쉽게 격파당할 정도라면 저들을 상대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마을의 사냥꾼들이 모두 달려든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을까.
챙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챙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하던 그때.
“어……. 어……?”
“왜, 왜 그러십니까?”
챙은 고개를 들어 최현지를 쳐다보았다.
최현지는 멍한 표정으로 숲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챙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최현지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저거. 만경에서 다음 주에 가져다주기로 한 보급품인데……? 아니, 그런데 왜 저렇게 많이…….”
현지가 바라보는 곳에는 보급품 상자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한 주에 한 상자씩.
숲을 수색하고 다닐 강시온 일행을 위해 준비된 보급품들.
이제야 겨우 첫 보급품이 도착해야 할 시기였지만, 그곳에 있는 보급품들은 어림잡아도 수백 개는 되어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