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드러나는 실체 (2)
나와 원정대는 챙의 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촌장의 집 앞으로 갔다.
그곳에는 촌장과 주민 몇몇이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허허, 간밤에는 푹 쉬셨습니까. 이거 제대로 대접도 못 해 드려 마음이 무겁습니다.”
촌장은 안타깝다는 듯이 자신의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최현지가 손사래를 쳤다.
“아녜요. 정말로 잘 쉬었다가 가요.”
그건 사실이었다.
수상한 점이 많긴 했어도 이곳 주민들이 보여 준 환대는 과분할 정도였다.
최명준의 코골이만 없었다면 더욱 만족스러웠겠지만, 그건 마을의 문제가 아니었다.
“챙이 여러분들을 안내해 드릴 겁니다. 강준호라는 분이 지나쳤던 길로 그대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나도 모르는 사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진재희가 부드럽게 내 팔에 손을 올리고 나서야, 난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숲을 벗어날 때까지 이들에 대한 의심을 풀 수는 없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동생에 대한 정보는 간절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오는 한 어린 꼬마가 보였다.
하나였다.
“이거 가져간다! 냄새! 비 냄새! 비가 온다!”
하나는 손에 우산처럼 널찍한 나무줄기를 들고 있었다.
하나는 우릴 향해 도도도 달려오더니 그 나무줄기를 불쑥 재희에게 내밀었다.
“나한테?”
“준다! 비 맞는다! 감기 싫다! 물! 춥다!”
진재희는 여전히 하나의 순수함이 불편하다는 듯, 어색하게 나무줄기를 받아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명준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꼬마야. 사람 차별하는 거야? 우리 거는?”
“싫다! 너 못생겼다!”
“뭐야? 이 쥐방울만 한 자식이!”
최명준이 열을 내자 다시금 챙이 나서서 하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녀석! 하나야! 손님들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우우웁!”
작은 소란을 뒤로하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의 풍경에는 변함이 없었다.
마을 주민들은 푸근한 미소로 우릴 배웅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여전히 밝게 웃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인심 좋은 시골 마을의 풍경이었다.
지금까지 경계했던 일이 바보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원래 세상이었다면 말이지.’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이제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사람을 믿는 건, 단순히 바보 같은 일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생명이 달린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런 오지에서도 여지없이 통용되는 법칙.
나는 풀어지려는 의심을 다시 단단히 잡아 두었다.
그때 하늘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꾸르릉.
먼 하늘에서 번개가 꿈틀대는 소리였다.
“어랍쇼? 진짜 비가 오려나 본데. 짜식아. 우리 우산도 달라니까!”
“이익……. 안 된다! 저거 귀하다! 찾는다! 어렵다!”
“아오! 좀 그냥 대충 가자! 비 맞는다고 죽냐? 덩치는 산만 해 가지고.”
최현지의 핀잔과 최명준의 투덜거림, 그리고 진재희의 어색한 삐걱거림.
이제는 모두 익숙한 광경이었다.
“자, 여러분. 제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해 드릴 테니 저를 천천히 따라오시면 됩니다.”
앞으로 나선 챙이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나와 일행은 그를 따라 숲을 향해 나아갔다.
마을 입구에서 뒤를 돌아보자 마을 주민들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정말 끝까지 알 수가 없는 마을이네.’
나는 숲길에 들어서자마자 긴장하면서 만일의 상황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었다.
* * *
숲은 그야말로 방대했다.
나와 일행은 꼬박 며칠 동안을 걸었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가늠하긴 힘들지만, 적어도 나와 일행들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방대한 녹음에 질려 버릴 정도는 되었다.
그래도 숲의 풍경이 계속 똑같지는 않았다.
숲의 짙은 녹색 빛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고, 빛남에서 보았던 숲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져 갔다.
“잠시만요. 모두 잠시만 멈춰서 주세요.”
챙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일행들은 잠깐 멈춰서 나를 바라보았다.
“왜죠?”
나는 가는 길을 멈추고 챙에게 질문했다.
“여기부터는 더 나아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나는 챙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초록빛으로 우거졌던 숲은 이제 연한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미약한 보랏빛이었지만, 빛남의 숲에서는 볼 수 없던 색깔이었다.
“독…….”
진재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가만히 숨을 들이쉬어 보았다.
아주 조금.
알아채기 힘들 정도의 알싸한 향이 풀 내음에 섞여 있었다.
“이런. 예상치 못했습니다.”
챙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앞으로 나서며 챙에게 질문했다.
“뭐가 말입니까?”
“예. 강준호 씨는 이 길을 지나 녹룡의 둥지로 향했습니다. 아마도, 이 독 지대는 강준호 씨와 그 동료들이 녹룡과 전투를 벌이면서 생긴 것 같아요.”
동생의 동료.
그리고 녹룡.
나는 진재희와 눈빛을 교환했다.
의왕역에서 본 녹룡의 시체가 준호의 작품이었다니.
준호도 방랑자로 활동하며 제대로 리그에 참여하고 있었구나.
게다가 녹룡.
작고 여리기만 하던 동생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성장한 듯했다.
그런 사실은 나를 더욱 고무시켰다.
동생이 아직 살아 있을 확률이 더욱 높다는 의미이니까.
챙이 독성 지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사이.
진재희가 무언갈 발견하고 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진재희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자, 그곳엔 정체 모를 검은 덩어리가 보였다.
‘뭐지?’
처음에는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옷가지 등으로 덮여 있는 진흙더미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나는 곧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만경의 병사야.”
진재희가 나에게 속삭였다.
진흙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병사의 살과 뼈가 썩고 남은 잔해였다.
뒤늦게 자신이 독 지대에 들어선 것을 알고 도망치려다가 죽은 자세였다.
‘저 복장은 분명 우리 만경의 복장인데.’
썩어 문드러진 살점과는 다르게 옷가지나 무기 등은 비교적 멀쩡했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닌 무기물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듯이.
“만경의 병사가 어째서 이런 곳에서 죽어 있는 거지?”
“모르겠어. 만경에서 올 만한 사람들은 6일 뒤에 출발할 지원대뿐인데.”
실종된 병사인가?
혹은 그저 만경 병사의 복장을 훔쳐 입은 방랑자인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챙은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쪽으로 다가왔다.
“무얼 보고 계십니까? 아……. 시체군요. 그런데 아시는 분입니까?”
“제 부하입니다.”
나의 대답에 챙은 작게 눈썹을 꿈틀댔다.
나는 그런 챙의 사소한 행동까지 하나하나 기억에 담아 두었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우회할 길은 없습니까?”
나의 질문에 챙은 자신 없다는 듯 입꼬리를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우회할 길이 있긴 합니다만, 이 근방은 저희 주민들도 제대로 길을 아는 이가 드뭅니다. 저는 숲에 익숙하니까 찾아보면 길을 찾아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찾아야 합니다.”
나는 챙의 우려를 한 마디로 일축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K를 이용해 절대자들과 거래를 해 온 것이었다.
왕의 권한.
동생에게 동료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왕의 권한이 있었다.
당장에 독 지대를 지나갈 방법은 없지만,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서 수색작업을 펼칠 수 있는 권력이 내겐 있었다.
“그럼 만경으로 돌아가는 길은 알고 있습니까?”
“만경이요? 아. 예.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떠나온 만큼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챙겨온 물자는 충분합니다.”
챙의 긍정적인 대답에 나는 만족했다.
“형님. 만경으로 돌아가십니까?”
“그래. 이번 여정은 어차피 1차 수색이었으니까. 만경에 복귀해 수색대를 꾸려 다시 온다.”
수색대라는 말에 챙의 눈썹이 다시금 꿈틀댔다.
빙긋 웃는 포커페이스는 여전했지만, 나는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분명 챙은 수색대를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우르릉.
그때.
하늘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
빛남에서 출발하던 날부터 꿈틀대던 하늘은 어느새 먹구름으로 가득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센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솨아아-!
우리의 여정에는 그리 좋지 않은 요소였다.
“여기 우산.”
재희가 나에게 다가와 하나에게 받은 나무줄기를 내밀었다.
나는 재희의 손에 들린 그 나무줄기를 조용히 거절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 옆으로 와 나무줄기 우산을 들어 올렸다.
일행이 다시 출발하고 또 얼마나 지났을까.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 쏟아졌고, 일행은 점점 지쳐 가기 시작했다.
먹구름 때문에 제대로 시간을 어림잡을 수 없었지만, 얼추 대여섯 시간은 걸은 것 같았다.
“잠깐 휴식하죠.”
나는 챙을 멈춰 세웠다.
앞서서 길을 뚫고 가던 챙은 우리를 돌아보더니,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여러분들을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숲길에 익숙하다 보니……. 하지만 조금만 더 가면 앞에 쉴 만한 곳이 있습니다.”
챙은 일행을 당장 멈춰 세우는 것에 회의적인 모양이었다.
“에엑. 그냥 여기서 잠깐 쉬자. 아무 데나 걸터앉으면 그게 휴식이지 뭐.”
이번에도 가장 체력이 떨어지는 최현지가 먼저 볼멘소리를 했다.
며칠째 험한 숲길을 다녔으니, 어쩌면 체력이 바닥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챙은 묘하게 완강한 태도로 일관했다.
“아, 아닙니다. 정말 조금만 더 가면 정말 쉬기에 적당한 곳이 나오니…….”
“쯧. 거 말 흐리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하소.”
챙의 미지근한 태도에 먼저 발끈한 것은 최명준이었다.
명준 또한 괜찮은 척했지만, 그동안 쌓인 피로는 무시하지 못했다.
명준은 연신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최명준은 허세 때문에 차마 힘드니까 쉬자는 말은 못 꺼내고 가만히 내 눈치만을 살폈다.
“그냥 여기서 쉬어 가시죠. 체력을 보존하고 싶습니다.”
나의 완강한 태도에 챙은 슬쩍 일행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도…….”
진재희는 여전히 챙을 경계하고 있는 듯 아티팩트를 사용할 준비 자세를 취했다.
일행의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하하! 알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여기서 쉬시죠. 제가 좀 더 쾌적하게 안내해 드리고 싶어서 주제넘게 굴었나 봅니다. 용서해 주세요.”
챙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빙긋 웃으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제야 일행들은 잠시 짐을 내려놓고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진재희 또한 날카로운 기세를 약간 누그러뜨리고 자세를 풀었다.
* * *
고된 여정 탓이었을까.
그 체력 좋던 최명준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길 수 시간.
바닥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하던 진재희가 문득 눈을 떴다.
“진동.”
진재희의 목소리에서는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모두가 느낄 수 있을 만한 진동음이 땅을 흔들었다.
꾸구궁-!
무언가 거대한 것이 땅에 끌리는 소리.
우지직-!
물을 머금은 나무가 으깨어져 쓰러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진동음은 점점 가까워져만 왔다.
끄드드드득!
곧 우리를 둘러싼 나무들이 모두 쓰러졌다.
그리고 으스러진 나무들 사이로 진동음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을 으깨어 경단처럼 빚어 놓는다면 아마 저렇게 생겼을까.
놈은 긴 촉수로 자신의 둥근 몸을 질질 끌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가운데에 벌어진 커다란 입으로는 피인지, 침인지 모를 끈적한 검붉은 액체를 뿜어 대고 있었다.
“끄어어어어어억!”
놈은 울부짖었고, 이를 본 챙이 외쳤다.
“으아악! 두, 두억시니! 다들 도망쳐요!”
챙은 후다닥 일어나서는 바로 일행의 뒤편으로 달려가 숨어 버렸다.
진재희가 앞으로 나섰다.
언제나처럼 사전에 위험을 감지했던 그녀는 곧장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때 강시온이 재희의 어깨를 잡으면서 말했다.
“내가 해 볼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