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흔적 (2)
“강준호……. 정말 작은 아이였는데. 그 아이가 수원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네.”
그 순간, 시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 수원이란 곳으로 간다고…….”
“그 전에요. 누가 수원으로 간다고 했냐고요.”
“예? 아, 예……. 강준호라는 어린 방랑자였습니다. 동료들도 함께였죠.”
강준호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촌장은 내심 헛바람을 삼켰다.
‘허어, 젊은 놈이 무시무시한 기세로고…….’
강시온의 분위기가 급변하자, 진재희가 가장 먼저 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박지수의 기억 안에서조차 일말의 흔들림이 없던 그였다.
하지만 동생에 대한 이야기라면 말이 달랐다.
진재희는 만경을 떠나기 전날, 시온과 옥상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고, 이젠 나아갈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진재희는 여전히 걱정이 앞섰다.
“강준호? 이름 참 대충 지었네. 언 부모인지는 몰라도. 차암나.”
이미 잔뜩 취해서 흥이 오른 최명준은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연신 낄낄거렸다.
진재희는 날카로운 눈매로 최명준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명준은 본체만체하며 술을 한 잔 더 입에 털어 넣었다.
재희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강시온 쪽을 돌아보았다.
시온의 표정이 점차 여유로워졌다.
다행히 평정심을 되찾는 듯 보였다.
촌장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이 노인이 괜한 말을 꺼낸 것 같군요. 괜찮으십니까?”
“별것 아닙니다.”
강시온은 금세 노인의 말을 일축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동생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를 얻은 것은 다행이었다.
관리자 K와 거래를 중단한 후로, 동생의 행방을 알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섣부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동생 준호가 이곳을 거쳐 갔다는 정보는 큰 수확이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숲을 지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수원을 모른다는 건 이상해.’
강시온은 지금까지 둘러봤던 마을의 풍경에 대해 떠올렸다.
숲 밖의 사람들과는 명백하게 다른 행색.
미묘하게 평화로운 마을의 분위기.
아름답게만 보였던 마을의 풍경을 다시 되짚어보니 온통 수상한 점투성이였다.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본 게 얼마 만이었지?’
시온은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힘이 전부인 이 세상은 아이들에게 특히 가혹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 했고, 그렇게 수많은 아이가 죽어 나갔다.
하지만 이곳, 마을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일절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 안에서만 살아간다면, 행복한 아이들의 모습이 이상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정말 바깥의 상황을 아예 모르고 있다는 것인가.
‘명백하게 이상해.’
강시온의 눈에 점점 경계와 불신의 빛깔이 차올랐다.
챙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희가 물정에 어두워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나 보군요. 그……. 아! 술, 술을 빚는 장인들을 한번 만나 보시렵니까? 아까 저분이 드신 검은 액체를 장인들이 본다면, 분명 흥미로워할 겁니다.”
“뭐? 싫어! 콜라는 절대 못 주지.”
최현지는 자신의 콜라를 뒤로 감추며 으르렁거렸다.
최현지와 최명준은 강시온의 동생에 대해 몰랐기에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있었다.
“콜라요? 아, 그 액체가 콜라라는 거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챙의 시도는 좋았으나, 그것은 실수였다.
챙의 말에 시온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콜라를 모른다고?’
수원이 어딘지도 모르는 데다 콜라 또한 모른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살던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혹시 대한민국이 뭔지 아십니까?”
시온은 미끼를 던졌다.
“대한민국이요? 그것도 술에 섞어서 먹는 액체입니까? 뭐든 좋습니다. 저희 장인들이 본다면 분명 좋아할…….”
그리고 챙은 미끼를 물었다.
‘믿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닌 건 확실하다.’
3라운드의 기믹인가?
혹은 그저 모르는 척 연기를 하고 있는 세력인가?
시온은 의심을 멈출 수 없었다.
이들이 무언갈 감추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러니 그들과 이렇게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시온은 결단을 내렸다.
“그럼 저희는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시온과 같은 생각이었던 진재희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급변한 강시온의 분위기를 알아챈 최명준과 최현지 또한 군말 없이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촌장은 곤란하다는 듯 쩔쩔매며 일행을 만류했다.
“허허, 이것 참 저희가 무슨 결례라도……. 곧 해가 질 텐데, 하룻밤이라도 묵어가시지요. 숲 밖은 정말 위험합니다.”
촌장은 그러면서도 허허로운 웃음을 유지했다.
그의 온화했던 웃음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진재희는 반달 모양으로 곡선을 그린 촌장의 주름진 눈을 노려보았다.
탐욕.
그건 탐욕의 눈동자였다.
그때 챙 또한 촌장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맞습니다. 숲의 밤은 거칩니다. 빛남은 안전하니 부디 머물다 가 주세요. 날이 밝는 대로 밖으로 나갈 길잡이를 섭외해 드리겠습니다.”
챙의 만류에도 일행들은 일말의 관심 없이 짐을 챙겼다.
곧 일행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준비를 하자, 챙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 그렇지. 수원. 수원으로 가신다고요? 아까 말씀드린 그 어린 방랑자를 안내했던 길잡이와도 상의해 보겠습니다. 내일은 꼭 수원으로 안내해 드릴 수 있도록요.”
강시온은 챙과 촌장을 쳐다보았다.
무언가 다급하다는 듯 진땀을 빼고 있는 두 사람.
이 정도로 대놓고 수상하게 나오자 오히려 우스울 지경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모습에 시온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강시온은 생각했다.
이들은 지금 당장은 큰 위협이 될 수 없는 수준이라고.
그런 점을 감수하더라도 아직은 이들에게서 얻어 낼 것들이 훨씬 많이 남아 있었다.
시온은 담담히 말했다.
“그렇다면 강준호 일행이 머물렀던 숙소로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당연히 되지요.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챙은 다급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 * *
챙이 안내해 준 숙소는 마을 외곽에 있었다.
빛남의 여느 집들과 똑같이 집의 형태로 자라난 나무처럼 생긴 숙소.
마을의 잡다한 소음에서부터 멀어진, 조용한 장소였다.
챙이 숙소를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진재희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저들이 뭔갈 숨기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재희는 킁킁거렸다.
“냄새가 나. 피 냄새. 마을 곳곳에 말이야.”
“괜찮아.”
나는 대강 짐을 풀어놓고 진재희에게 작게 눈짓을 보냈다.
진재희는 곧바로 그 의미를 알아채고 슬며시 나와 함께 숙소를 빠져나왔다.
“형님! 어디 가세요?”
“산책.”
최명준을 뒤로 하고 나와 진재희는 함께 숲을 거닐었다.
빛남의 숲은 외곽의 숲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숲 자체의 크기도 크기지만, 그것보다 숲속의 모든 것이 컸다.
작은 나무 정도 크기에 고사리같이 생긴 식물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단풍잎처럼 갈라진 정체불명의 잎사귀들은 파라솔로 사용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심지어 숲의 곤충들마저 거대했다.
손바닥만 한 개미들이 줄지어 기어 다녔고, 어디선가 잠자리 같은 게 날아갈 때면 무슨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룡들이 살던 중생대의 숲을 본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내가 별말 없이 숲을 보고 있자, 진재희가 안절부절못하며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준호 때문인 거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니까…….”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같으면 저런 수상한 마을엔 1초도 머물기 싫어. 하지만 저들이 먼저 동생의 이름을 말했어. 왜인지 동생의 흔적이 여기에 있을 것 같아.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여기서 얻어 내고 싶은 정보가 많아. 미안.”
“미안할 게 뭐 있어. 하면 내가 여기 다 썰어 버리면 돼.”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학살을 약속하는 모습에, 난 피식 웃어 보였다.
“네가 있어서 여기 있겠다고 결정 내린 거야. 솔직히……. 쟤들이 우릴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리고, 저들이 정말로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일 수도 있잖아.”
“그건 그렇지.”
“얻어 낼 수 있는 걸 전부 얻어 낸 뒤에 만경으로 돌아가자.”
“……응. 알겠어.”
진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숲의 밤은 지독히도 고요했다.
시끄러운 풀벌레들조차 숲의 몬스터들을 피해 숨을 죽이는 시간.
“허억……. 커억!”
그런 고요한 숲속에서 필사적으로 숨을 몰아쉬는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공포에 질린 채 앞만 보고 내달리는 중이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남자는 발아래에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미처 살피지 못하고 그대로 걸려 고꾸라졌다.
온몸이 진흙 투성이가 된 남자는 필사적으로 다시 일어나 달렸다.
자신을 뒤쫓아 오는 이 고요함이 천천히 자신의 숨통을 옥죄여옴을 느끼면서.
“만경의 왕이시여……! 왕이시여……! 흐으으으……. 흐아아아아……! 어디 계십니까.”
남자는 거의 우는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가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기 위해 잠깐 멈추어 선 순간.
옆 수풀에서 두 눈동자가 반짝이며 떠올랐다.
휘익!
“끄아아악!”
수풀에서 날아온 올가미가 한순간에 남자의 다리를 휘감았다.
남자는 옴짝달싹 못 하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히, 히이익! 살려 줘!”
남자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올가미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숲에서 더욱 반들거리는 한 쌍의 눈동자.
그것은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리고.
“끄아악! 끄으…….”
그 무언가는 자신의 날카로운 이빨로 남자의 몸을 순식간에 찢어 버렸다.
흉측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뒤틀리듯 벌어진 입.
그리고 그 안에 촘촘히 박혀 있는 날카로운 이빨들.
입에서는 군침을 질질 흘려 대고 있었다.
그리고.
꾸드득! 우적우적! 까드드득!
수십 개의 이빨들이 남자의 뼈를 부수고, 살점을 찢기 시작했다.
놈은 행복하다는 듯, 방금 사냥한 남자의 시체를 뜯어먹었다.
그때, 수풀 사이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불빛은 천천히 그 무언가에게 다가갔고, 그 무언가 또한 자신을 다가오는 불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빛은 그 무언가에게 점점 가까워지더니 수풀 사이에서 정체를 드러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빛남의 사내.
챙이었다.
챙은 불빛을 들어 무언가를 향해 들이밀었다.
“너……!”
무언가는 챙이 들어 올린 불빛을 보고는 주인에게 혼나는 똥개처럼 끙끙대며 온몸을 뒤틀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산발이 된 장발.
그 사이로 삐쭉 튀어나온 뾰족한 귀.
그리고 뒤틀리듯 벌어져 있는 기괴한 입.
챙은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하나야. 내가 함부로 인간을 잡아먹으면 안 된다고 했지. 마녀님께 올릴 진상품이면 어쩌려고.”
촉수를 뻗어 남자를 사냥한 정체불명의 괴수는 다름 아닌 하나였다.
하나는 반쯤 뼈만 남은 인간의 넓적다리를 집어 든 채, 멋쩍은 듯 살살 웃었다.
“히히. 맛있다! 맛있다! 배고팠다! 인간 죽었다! 미안하다!”
챙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하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꼬마를 야단치고 싶지는 않았다.
“촌장님이 야단치실 테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다 먹고. 흐르는 물에 잘 씻고 와. 다음부턴 꼭 마을 사람들이 있을 때 같이 먹자. 그리고 말이야. 넌 인간의 말이 아직 어눌하니까, 손님들 앞에서는 자제해.”
“알았다! 먹는다! 같이 먹는다! 행복한다! 우리 마을 사람들! 손님들!”
“그리고, 뼈들은 따로 숨겨 놔. 나중에 목걸이 만들어 줄게.”
하나는 살점이 가득 껴 있는 이빨을 드러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챙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그런 하나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챙은 귀여운 동생을 혼내는 일에는 언제나 서툴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