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군포 가는 길 (3)
츄르르르르릅-!
검은 물체가 최현지의 전신을 갑옷처럼 휘감았고, 그녀의 손은 검날처럼 날카롭게 바깥으로 뻗어 나갔다.
단번에 눈앞의 상대를 잘라 버릴 듯한 기세로 휘두른 최현지의 손은, 눈앞의 상대를 확인한 순간 우뚝 멈춰섰다.
“으으……! 죄송하다……! 살려 준다……!”
“……!”
그녀 앞에 있었던 건 귀신도, 몬스터도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발목까지 길게 자라 있는 아이.
아이는 울먹이며 움찔대고 있었다.
그때, 아이는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미안하다……! 살은다……! 살은다…….”
척 봐도 일부러 기른 머리는 아니었다.
며칠은 못 씻은 듯한 꾀죄죄한 얼굴 하며, 옷이라고는 나뭇잎 몇 개로 간신히 몸을 가린 그 아이는 도저히 문명인이라고 볼 수 없었다.
마치 원시인을 보는 듯했다.
특이한 점은 그 아이가 한국말을 하고 있다는 것.
그 아이는 자신의 두 손에 들고 있던 물체를 최현지에게 들이밀었다.
그것은 마치 초록 색깔의 해삼(?)처럼 보였다.
‘해삼……?’.
아이는 조그마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설명했다.
“물 먹는 하마……. 물……. 먹는다…….”
“물……. 물 먹는 하마라고……?”
그건 분명 옷장에 넣어 두는 제습 도구의 이름이었다.
아이는 손짓 발짓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물 먹는 하마다. 물 좋아한다. 본다. 물 먹는다. 본다. 물 먹는다!”
아이는 냇가의 물로 자신의 팔뚝을 적셨다.
그러고는 해삼을 팔뚝 위에 올렸다.
그러자 해삼은 금세 팔뚝에 있던 물을 쑤욱 빨아들였다.
아이가 호들갑을 피웠다.
“본다. 물 먹는다. 맛있게 먹는다. 물 먹는다. 물 없어진다. 물 먹는다. 감기 안 걸린다. 감기 위험하다. 약초 비싸다! 물 먹는다!”
“어어, 아, 아, 알았어. 잠깐만.”
최현지는 아이가 하는 말을 정확히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황상 수건 대용으로 건넸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에게서 해삼을 건네 들었다.
마치 돼지 내장처럼 미끈거리는 감촉이었다.
최현지는 이미 검은 물체로 전신을 휘감아놓았기 때문에, 딱히 수건이 필요하진 않았다.
어차피 검은 물체가 피부에 남은 물기를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의 성의를 무시할 순 없으니.
최현지는 팔등 부분만 검은 물체를 거두고, 그곳에 해삼을 올렸다.
그러자.
“푸하하하하하하-! 아, 미친! 아 너무 간지러워! 아 잠만!”
최현지는 금세 해삼을 떼어 버렸다.
물을 빨아들일 때 감촉이 미칠 듯 간지러웠다.
“괜찮다. 참을 만하다! 좋다! 안 죽는다! 버텨라. 물 먹는 하마. 감기 안 좋다! 물 먹는 하마!”
“아니, 아니. 난 됐어. 이제.”
최현지는 아이에게 해삼을 돌려주었다.
그때였다.
“하나! 도망쳐!”
마찬가지로 나뭇잎 옷을 입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반대편 수풀에서 튀어나오더니, 아이 앞을 가로막았다.
남자는 으르렁거리듯 최현지를 위협해 왔다.
“꺼져! 다가오지 마!”
“하나! 괜찮다! 하나! 괜찮다! 안 아프다! 아야 안 하다! 괜찮다!”
“조용히 해! 하나! 물러서!”
“하나! 괜찮다…….”
남자는 창을 들고는 최현지에게 겨누었다.
최현지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남자의 창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남자가 들고 있었던 건, 넝쿨과 돌로 이루어진 아주 조잡한 무기였으니.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았다.
게다가 남자는 비교적 어른처럼 보이기는 했어도, 많이 쳐 줘야 스무 살은 될까 한 청소년 같았다.
“……하아.”
최현지는 엉뚱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히 긴장했달까.
잠깐이었지만, 조금은 쫄아 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최현지는 맥이 빠져, 전신을 휘감은 검은 물질을 불러들이려다가, 자신이 씻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남자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야-. 저기로 꺼져 있어. 누나 옷 좀 입게.”
하지만 고분고분 말을 따를 남자가 아니었다.
“움직이지 마!”
“아, 알겠으니까. 저기로 좀 가 있으라고. 옷 좀 입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최현지의 말에도 남자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최현지는 이내 짜증스러운 표정이 되어 검은 물체를 움직였다.
촤르르륵-.
최현지의 몸을 휘감은 검은 물체에서 가시가 돋더니, 이내 괴기한 생명체처럼 변했다.
쿠구구구구…….
작은 물보라를 일으킬 정도로, 덩치가 거대해졌다.
마치 미국의 히어로 영화 속 검은 외계 생명체처럼.
최현지는 이빨을 드러내며 남자를 위협했다.
“꺼지라고.”
“히이익……!!”
물론 장난이었다.
검은 물질은 시전자가 설정한 어떠한 형태로도 변할 수 있어 상대를 겁먹게 하기엔 최적이었다.
최현지는 검은 물체를 크게 부풀렸다.
그러자 곧 그녀를 중심으로 동그란 구체가 만들어졌다.
‘됐다……. 그냥 이 안에서 입을란다.’
최현지는 옷가지를 집기 위해 남자를 지나쳤다.
하지만 그 순간.
아주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조잡한 돌창을 쥔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200 아니, 150m 정도에서.
그리고 거리는 계속해서 좁혀졌다.
굉장한 속도와 믿을 수 없는 파워.
최현지는 곧장 방어벽을 전개했다.
남자와 아이를 향해.
촤좌좌좌좌좍-!!!!!!!
주변에 나무뿌리들이 단숨에 휩쓸려 나갔고, 마치 폭풍이라도 지나가는 듯 거센 칼바람이 휘날렸다.
바람이 조금 사그라들자, 한 인물이 최현지 일행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진재희였다.
그녀는 돌창을 쥔 남자를 향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지만, 이를 막아 낸 것은 남자가 아니었다.
휘릭-. 까아아앙-!
거대한 두 힘이 부딪혔다.
회귀자 진재희와.
플레이어 최현지.
최현지는 진재희가 진심으로 휘두를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 역시 진심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곧 일대의 모든 물체가 두 여자를 중심으로 파괴되기 시작했다.
“…….”
“…….”
두 여자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최현지였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웃음 지었다.
“동생님아……. 제발 살살 좀. 죽을 뻔했으니까.”
“……비명은 뭐야?”
“실수…….”
“…….”
실수라는 말에 진재희는 그제야 성검을 거두었다.
최현지 역시 마구 떨리는 손을 꼭 쥐며 검은 물체를 거두었다.
‘괴물이네. 진짜…….’
굉장한 힘이었다.
최현지는 지금 만약 진재희가 자신의 적이었을 때를 상상해 보았다.
그것이야말로 끔찍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진재희의 뒤로 최명준과 강시온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최현지는 자신의 뒤를 살폈다.
공격받을 뻔했던 남자와 아이가 바닥에 쓰러진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 * *
나는 최명준을 따라 뿌리의 밑으로 내려갔다.
철푸덕-!
걸을 때마다 지면의 축축한 이끼 때문에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이곳은 뿌리 밑의 또 다른 공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공간이었지만, 그곳을 가득 채운 정체불명의 나방과 흡혈 곤충들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원정대는 갑작스러운 최현지의 비명을 듣고 급하게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먼저 도착한 진재희와 최현지를 마주하자,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최현지와 함께 있던 건, 괴물이 아닌 웬 원시인들이었다.
난 그들에게 다가갔다.
“누구야?”
“원주민이라고 해야 되나? 아님, 자연인……?”
진재희는 바닥에 쓰러진 두 사람을 보며 묵묵히 답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두 사람에게 물었다.
“누구지?”
그러자 아이가 손을 번쩍 들며 대답했다.
“하나! 하나! 이름! 하나!”
“조용, 조용, 조용히 해……!”
옆에 있던 남자는 잔뜩 겁먹어선 아이의 옆구리를 콕콕 눌러 댔다.
말투가 어눌하고, 몸에 걸친 옷가지들은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한눈에 봐도 도시와는 동떨어져 살아온 아이들이었다.
“이곳에 살고 있어?”
난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린 원래부터……. 여기서 살았고. 태어났어. 근데 너희가……. 우리가 사는 영역 침범한 거지.”
“……이곳에서 살고 있다고? 마을 같은 건 안 보이던데.”
“마을?”
“그래. 온통 울창한 숲일 뿐이고, 사람의 흔적은 없었어.”
난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빽빽하게 하늘을 가린 나무들.
나뭇잎들 사이로 내려오는 빛기둥이 선명할 정도로, 이곳은 어두웠다.
그때 쓰러져 있던 남자애가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나는 남자애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우거진 나뭇가지들 사이로 한 남자가 올라서 있었다.
그는 활시위를 당긴 채로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그 남자는 소리쳤다.
“멈춰라! 너흰 누구고. 무슨 목적을 가졌으며. 왜 이곳에 왔지? 허튼수작 부리면 바로 쏘겠다.”
“오빠! 오빠! 오빠!”
그때 자신을 하나라고 소개한 여자애가 후다닥 뛰어갔다.
남자는 다시 소리쳤다.
“가만히 있어! 하나!”
“하으으……!”
“셋 셀 동안 대답해! 이 침입자들! 하나……!”
“하나! 하나?”
“하나! 조용히 하라고! 너 뭐해! 하나 챙겨!”
“아, 예. 예! 형!”
남자의 지시를 받은 소년은 달려 나가 하나를 챙겼다.
‘세력의 일원은 아닌가 보네. 그럼 가족 단위로 살아가는 부족인가. 어쨌거나 더 알아볼 필요는 있겠어.’
이곳을 빠져나가 수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난 다시 나무 위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날카로운 화살촉은 아직도 날 향해 있었다.
“남 걱정보단 자신부터 챙기는 게 어때?”
“뭐라……?”
그리고 그 순간.
날카로운 칼날이 남자의 목에 겨누어졌다.
남자의 등 뒤가 서늘해질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면 죽인다. 무기 버려.”
진재희였다.
어느새 그녀는 남자의 등 뒤로 이동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남자는 식은땀을 흘려 대며 쥐고 있던 활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제발…… 아이들만은. 부탁한다. 허튼수작 안 부릴 테니.”
진재희는 그를 데리고 나무에서 내려왔고, 난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 * *
자신을 챙이라고 소개한 사내는 강시온에게 말했다.
“그럼 그냥 지나가시는 중이셨습니까?”
“그래요.”
“아니, 전 비명을 듣고. 필시 저희를 공격하는 줄 알고…….”
챙의 말에 최현지는 몸을 움츠렸다.
차마 귀신이 무서워서 소리쳤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요즘 북쪽에서 도망자들이 많이 오는 바람에…….”
“도망자요?”
강시온은 그를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챙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북쪽에서 큰 전쟁이 일어났나 봅니다. 이곳에 도망친 그놈들도 대부분 다쳐서 왔더라구요. 방랑자분께서도 조심하십시오. 북쪽에는 무시무시한 군주 놈이 있는가 봅니다. 도망자들의 말에 따르면 사자의 갈퀴처럼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악마도 한 수 접고 갈 갈색빛의 눈동자……. 아, 꼭 방랑자님처럼 생겼나 봅니다. 지금 보니까 눈빛이 장난 없으시네.”
“공포의 군주. 무섭다아……! 괴물들, 막 이끈다!”
“…….”
무시무시한 군주 놈.
그건 혹시 자신을 두고 하는 소리인가.
강시온은 시선을 전방으로 옮겼다.
‘그렇게 무시무시하진 않았을 텐데.’
챙은 거대한 나무를 돌아 원정대를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타고 올라오십시오.”
그리고 그곳에는 자연적으로 생긴 듯한 나무줄기 계단이 있었다.
원정대는 챙을 따라 줄기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가장 앞서 걸어가던 챙은 갑자기 뒤돌아보며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곳이 바로 저희의 터전. 빛남입니다.”
챙이 자리에서 비키자, 빛줄기가 원정대에게 쏟아졌다.
시온은 순간적으로 손으로 햇빛을 가렸다.
그리고 빛에 적응이 되어 가린 손을 살짝 내린 순간 보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
엘프의 숲이 실존한다면 이렇게 생겼을까.
줄기 위에 마을을 세운 빛남의 주민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나무 열매를 따고 있었다.
아이들은 거대한 나무줄기를 미끄럼틀처럼 타고 놀았고, 어르신들은 파라솔만 한 나뭇잎 아래에서 나무 밑동에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복슬복슬한 털을 지닌 몬스터도 함께였다.
귀엽게 생긴 털뭉치 몬스터들은 평화롭게 주민들 사이를 뛰어다녔고, 주민들은 친근하게 이들을 쓰다듬었다.
숲속 이곳저곳에는 나뭇잎이 반사하는 찬란한 초록 빛깔의 빛줄기가 떨어졌다.
대자연의 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름다운 전경이었다.
세상이 이런 모습으로만 변한다면, 그건 재앙이 아니라 축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오오!”
최현지는 입술을 오므리고 감탄했다.
챙은 웃으며 강시온에게 말했다.
“당신들을 손님으로서 환영합니다. 편하게 쉬시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