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군포 가는 길 (2)
최현지는 문득 느껴진 인기척에 단숨에 아티팩트를 불러들였다.
촤르륵-!
그녀의 검은 물체가 물을 가르며 인기척이 난 곳을 향해 뻗어 나갔다.
물보라가 최현지를 중심으로 파동을 이루며 퍼져나갔다.
검은 물체가 뻗어 나간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
분명 기척을 느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 느꼈나……?’
방랑자로 살아온 최현지는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위협 감지 능력이 뛰어나 언제든 대비할 수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인지 숨만 쉬어도 기분 나쁜 숲이었다.
* * *
최현지는 장난감을 사 달라는 동생처럼 한사코 진재희의 옷자락을 당겨 댔다.
“제바알, 동생님아.”
“싫어.”
“콜라 좀 줄게. 병뚜껑에 따라서.”
“필요 없어.”
“어려운 건 아니잖아!”
“쉬운 것도 아니야.”
두 여자는 최명준 뒤를 걸었다.
진재희는 걷는 내내 최현지의 투정을 받아 주어야 했다.
진재희는 묵묵히 나무뿌리들을 넘으며 앞으로 나아갔고, 그녀의 뒤를 따르던 최현지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 숲, 왠지 귀신 나올 것 같단 말이야. 막……. 아니, 어제도 분명 뭔가 내 배후에서 날 덮치는 것 같았거든? 그거 때문에 요즘 씻지도 못했어.”
“씻지 마, 그럼.”
“어떻게 안 씻어? 땀 나고, 찝찝하잖아!”
“…….”
진재희는 이 이상 대답하기를 그만 두었다.
최현지는 쫄랑쫄랑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다시 졸라 댔다.
“씻을 때만 같이 씻으면 안 돼? 꼭 같이 안 씻어도 돼. 아니면 구경? 아니, 구경은 어감이 좀 야한가……. 그냥 말동무나 하는 거지. 헤헤. 어차피 얼마 걸리지도 않고.”
진재희는 인상을 팍 구기며 물었다.
“내가 네 옆에 죽치고 있으면 시온이는 누가 지켜?”
“아니, 왕님이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뭘 지켜.”
최현지의 핀잔에 진재희는 뒤돌아 그녀를 찌릿 노려보았다.
최현지는 애써 웃으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아, 아. 알겠어. 오케이! 항복. 이제 아무 말도 안 할게.”
진재희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앞서 걸어갔다.
최현지는 맨 뒤에서 인상을 찌푸린 채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꿍얼대며 걸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전방에서 걸어가던 강시온이 주먹을 쥐며 원정대를 멈춰 세웠다.
강시온은 진지한 얼굴로 전방을 바라봤다.
진재희가 최명준을 지나쳐 강시온에게 다가갔다.
“왜?”
“저길 봐.”
진재희는 강시온의 눈동자를 따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눈동자는 동그랗게 커졌다.
한 폭의 그림처럼 현대 문명의 건물이 자연의 나무와 줄기, 꽃이 어우러져 있었다.
녹슨 역의 간판은 넝쿨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 입구에는 간간이 문명의 흔적들이 보였지만, 이제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들뿐이었다.
역 앞에 있는 매점 또한 괴상하게 생긴 식물들로 뒤덮여 본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최명준은 매점 가판대에 꽂혀 있던 여자 수영복 모델 표지의 잡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야, 먹을만한 건 다 털린 것 같지만, 이런 보물이 아직 남아 있네.”
최현지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잡지를 넘겨보는 최명준을 경멸하는 얼굴로 쳐다봤다.
“어휴, 저 변태 같은 X끼. 이런 상황에서도……. 어? 자판기다!!!!!”
최현지는 매점 옆에 서 있던 자판기 하나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달려갔다.
“콜라, 콜라, 제발 있어라.”
최현지는 자판기 겉면을 곧장 뜯어버리며 내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판기 내부엔 깊숙이 자라 있는 나무뿌리들로 인해, 찌그러져 다 흘러 버린 콜라 캔 몇 개만 굴러다닐 뿐이었다.
“에라이, 씨.”
-쾅!
최현지는 성을 내며 자판기를 힘껏 차버렸다.
그러자.
-우우우우웅.
지금까지 그냥 언덕인 줄만 알았던 거대한 물체가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솟아올랐다.
에메랄드빛 갈기와 기다란 목을 가진 아름다운 용각류 몬스터였다.
외형은 마치, 브라키오 사우르스.
그 몬스터는 초록빛의 눈동자를 꿈뻑거리며 강시온 일행을 바라보았다.
“니X……. 저게 뭐야…….”
몬스터에게서 공격 의사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강시온 일행은 숨을 죽이고 몸을 낮추었다.
곧 몬스터는 느릿한 걸음으로 숲속을 향해 사라져 갔다.
놈이 움직일 때마다 일정하고 느린 진동이 숲에 한가득 울렸다.
쿵……. 쿵…….
강시온과 일행은 잠시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거대한 몬스터가 떠나자, 더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의왕역 앞에 누워 있는 거대한 시체가 일행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드, 드래곤……?”
최현지는 감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드래곤의 시체.
녹색의 풀과 이끼를 피부처럼 두르고 있는 거대한 용의 시체였다.
최명준도 저도 모르게 감상을 말했다.
“이 세상이 X돼 버린 것 맞나 보네. 진짜 드래곤이잖아? 와. 아니 솔직히 진짜 멋있네. 이거.”
“…….”
눈 앞에 펼쳐진 장관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숲에 집어삼켜진 의왕역.
그리고 그 의왕역을 둘러싼 거대한 용의 사체.
처음에는 어째서 죽어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복부에 뚫려있는 거대한 구멍을 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드래곤은 분명 누군가에게 격파당한 것이다.
원정대는 천천히 용의 사체로 다가갔다.
사체라고 하면 보통 악취가 나겠지만, 용의 사체에서는 악취는커녕 꽃향기와 풀내음이 진동했다.
실제로 용의 사체에서 흘러나온 듯한 초록 빛깔의 피가 주변 대지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피가 스며든 곳의 근처엔 비현실적으로 비대해진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알록달록한 식물들.
진재희는 강시온 옆에서 나머지 두 사람이 듣지 못할 정도로 중얼거렸다.
“녹룡(綠龍)……. 확실해.”
“3라운드 군주 토벌 퀘스트의 목표?”
“응. 7색의 용 중 한 마리야. 찾는 것조차 어려웠을 텐데, 벌써 누군가가 용을 죽이다니.”
강시온은 녹룡의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진재희에게 물었다.
“분명 보통의 방법으로는 용을 죽일 수 없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 솔직히 지금 나도…… 매우 당황스러워. 어떻게 용의 비늘을 꿰뚫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건지. 용의 비늘을 뚫기 위해서는 붉은 원석으로 가공된 무기가 필요할 텐데.”
붉은 원석.
2라운드 당시, 동안의 군주였던 박지수가 광맥까지 찾아내 모으려 했던, 이 시대의 새로운 에너지원이었다.
“그 붉은 원석은 드워프 종족의 노련한 기술자들만 제련할 수 있다고 했고…….”
“……이 종족들은 대부분 인천에 몰려 살고 있지.”
“…….”
생각이 복잡해졌다.
시온은 녹룡의 시체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한창 구경 중이던 최현지와 최명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진재희에게 물었다.
“동생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했는데, 설마 동생이 죽였을 확률은?”
“동생의 나이가 열셋이랬지.”
“응.”
“모르겠어. 적어도 전생에선 네 동생을 보지 못했으니까. 아마 벌써부터 드래곤을 격파할 만큼 강해지긴 힘들었을 것 같긴 해.”
시온은 진재희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눈앞의 사체로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해졌다.
누군가가 이미 3라운드를 클리어했다, 라는 것.
‘진재희의 말을 들은 후, 우리가 목표로 잡았던 건 적룡(赤龍). 이 용이 죽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플레이어는 적어도 2, 3년 안에 이 용을 잡고 숲을 빠져나갔을 거야.’
시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생각이 복잡해진 것 때문이 아니라, 이 숲에 들어온 순간부터 머리가 미친 듯이 어지럽고 조여 왔던 탓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가끔 희미한 형상 같은 것도 나무 사이로 보이는 것 같았다.
강시온이 살짝 휘청거리자, 진재희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
“……뭔가 이상해.”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말을 이었다.
“……마녀와 연관되어 있는 건가? 이 숲에 들어온 뒤로 계속 이래. 어제부터 계속.”
“쉬자. 그냥 쉬어. 이 근방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할게. 며칠 동안은 쉬는 게 좋겠어. 요양한다고 생각해.”
“…….”
시온은 원래 같으면 더 나아갈 수 있다고 그녀를 말렸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결국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두 손으로 강시온을 붙잡고 있던 진재희는, 오른발로 바닥에 있던 돌멩이 하나를 차 버렸다.
툭.
그렇게 날아간 돌멩이는 멀리서 용을 구경 중이던 최명준의 머리통을 맞췄다.
탁-!
최명준이 인상을 팍 구기며 진재희를 돌아보았다.
“야이-! 미- 친- 사- 이- 코- 년- 아!!! 아, X마 돌게 하네?! 내가 X발! 동네 똥개냐고!”
성큼 성큼 성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최명준이 잔뜩 열을 내며 진재희에게 다가갔다.
최명준은 으르렁 댔다.
“능력이 없었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면서.”
“능력 없었어도 너 같은 건 그냥 밟을 수 있어. 난 너 같은 양아치가 제일 싫거든.”
최명준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진심으로 그녀를 위협했다.
“함 해 볼까? 우리? 진심으로? 주먹 대 주먹. 아니, 칼 대 칼로?”
“그것보단 네 형님이나 걱정하지, 그래?”
최명준의 핏발 선 눈동자가 곁에 있던 강시온에게로 갔다.
강시온은 그녀에게 기댄 채, 옅은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사자처럼 이글거리던 최명준의 눈동자가 금세 강아지처럼 누그러졌다.
“형님! 아니, 형님! 갑자기 왜 이러시지? 괜찮으세요?!”
최명준은 진재희에게서 강시온을 받아 부축했다.
그녀는 그제야 베이스캠프를 설치하러 이동했다.
* * *
최명준은 땔감으로 쓸 만한 나무를 찾아 홀로 숲을 배회 중이었다.
‘X 같은 년…….’
퉤-.
최명준은 바닥에 침을 내뱉고는 아까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돌멩이를 차서 맞춰? 내 뒤통수에? 이 X만 한 년이…….’
분이 치밀어 올랐지만, 최명준은 잘 알고 있었다.
진재희와 싸우게 된다면, 자신은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당하게 될 것을.
하지만 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상이 뒤집히기 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는데.’
무시당하고, 얻어맞고, 갈굼을 받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조직에서는 이보다 더한 막내 생활도 버텨 왔기 때문이었다.
최명준이 진짜로 견딜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다.
조직에 속해 있을 때 최명준은 행동대장이었고, 모든 아우들은 그만을 믿고 따랐다.
당시엔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곳에서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최명준은 예전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거칠긴 했으나, 살맛 나는 인생이었다.
최명준은 주먹 하나로 나름 뒷 세계에서 알아주던 인물이 되었다.
-명준아. 내가 진실로 믿고 의지하는 동생은 너밖에 없다.
큰형님.
최명준은 큰형님에 대해 생각했다.
큰형님은 진심으로 자신을 인정해 주었고, 자신 또한 그런 큰형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랐다.
밑바닥부터 함께 조직을 키워 온 사이.
피를 나누진 않았으나, 두 사람은 형제였다.
뻔한 건달영화의 클리셰처럼 이권이나 속임수로 무너지는 그런 관계가 아닌.
정말로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그런 관계.
처음 유치장에서 걸어 나올 때, 최명준에게는 큰형님에게 되돌아가겠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물론 지금은 큰형님이 살아 있는지도, 죽었는지도 모를 상황.
하지만 그는 새로운 형님을 모시고 있었다.
강시온이었다.
하지만.
늘 같은 고민이 최명준을 옥죄었다.
‘시온 형님께서도 큰형님처럼 나를 믿어 주시는 걸까.’
가방끈이 짧은 최명준이라도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니겠지…….’
강시온은 분명히 말했다. 최명준은 짐꾼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라고.
이유는 단순하다.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뒤집힌 세상에서, 자신은 정말로 짐꾼 그 이상의 무엇도 될 수 없었으니까.
‘나에게 힘이 있었다면. 형님께서 날 믿어주셨을까.’
최명준은 단단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구박이든, 비난이든, 폭력이든 모두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가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비수처럼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강해지고 싶다. X발, X나 강해지고 싶다. 형님께 힘이 되어 드릴 수 있을 만큼.’
왜 자신한테는 아티팩트가 없는가.
솔직히 진재희나, 최현지 같은 애들이 자신에게 뭐라 하는 것보다, 진심으로 강시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이 더욱 치욕스러웠다.
최명준은 눈을 질끈 감고 나뭇가지를 줍기 시작했다.
자신은 잡일꾼.
짐꾼.
심부름꾼.
어쨌거나, 지금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때였다.
최명준이 자신의 형님에게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은, 이 정도뿐이었다.
* * *
강시온과 일행들이 설치한 베이스캠프.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개울.
최현지는 그곳에 쪼그려 앉아 자신의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마스크 팩~ 로션, 토너.”
최현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가방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를 잡아 빼냈다.
최현지의 손에 들린 것은 세안용품들.
그것도 나름 고급제품들이었다.
최현지는 개울의 물을 손으로 퍼서 얼굴에 뿌렸다.
최현지는 몇 번 문질러 얼굴에 앉은 먼지들을 걷어내고, 손에 폼클렌징을 짰다.
지금은 구하기 힘든 고급 폼클렌징을 아낌없이 얼굴에 치댄 최현지는 꼼꼼히 세안을 시작했다.
최현지는 피부 결이 다치진 않을까, 조심스럽게 세수했고, 곧 환해진 얼굴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뒤.
깨끗한 천을 꺼내 얼굴을 닦고, 값비싼 토너, 로션, 미백크림, 에센스까지.
아낌없이 얼굴에 발라 부드럽게 두드렸다.
최현지는 끊임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피부 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또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 썅.’
최현지는 놀란 고양이처럼 등을 움츠렸다.
그저께 있었던 그 기묘한 감각과 매우 비슷했다.
이 느낌, 이 소름.
귀신임이 틀림없었다.
원래 귀신은 귀신을 두려워하는 존재들에게만 달라붙어 따라다닌다고 했던가.
아직도 수많은 귀신에 관련된 미신을 철석같이 믿는 최현지는 팔로 머리를 감싼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점차 그 기척이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최현지는 천천히 뒤돌았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악!? 싫으다-!!!!!!!!!!!”
그리고, 두 비명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