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메트로 세력 (2)
종전 이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날씨는 이제 한여름이었다.
반팔 반바지가 아니고서야, 차마 거리로 못 나올 정도.
더위에 못 이긴 몇몇 사람은 안양천에 뛰어들어 열기를 식히기도 했다.
혹한이 끝나니, 폭염이 찾아왔던 것이다.
거리에는 익숙한 향기와 소리가 들렸다.
매미 소리와 풀 냄새.
도시를 감싼 거대한 외계 식물은 지구에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병사들의 할 일은, 인간을 위협하는 몬스터를 토벌하는 일이 주가 되었다.
이제 그 토벌 작전도 형식화되어, 전투 작전에 투입하는 병사들만 해도 3천이 넘었다.
지난 6개월간 세력에 새롭게 들어온 인구는 오백 명 정도.
이제 라운드가 많이 지난 터라, 인간들은 세계에 적응하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새로 유입되는 사람들의 수는 적을 수밖에.
생각보다 메트로 세력이 잠잠했고, 도시는 평화로웠다.
이 밖에도 만경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건 역시 도시.
이제 그들은 진정한 아포칼립스의 주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무너진 도심 속, 새로운 목재 건축물들이 건물 사이로 자리 잡았다.
각양각색의 거대한 꽃들이 갈라진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어떤 식물들은 잭의 콩나무처럼 거대한 줄기로 건물을 휘감아 위로 치솟기도 했다.
그 위에는 몇몇 허가받은 시민들이 나무집을 만들어 살고 있었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뛰어다녔고, 거리의 야바위꾼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도박판을 벌였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여지없이 사창가와 술집들이 있었고, 전쟁 이후 자리 잡은 놀이 문화는 아직까지도 큰 인기를 끌어 주요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오우거는 그 개체수를 늘려 현재는 80마리에 육박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인간들의 시체가 적어져, 그들의 먹이 환경을 보장해 줄 수 없었다.
그랬기에 예전과는 달리, 놈들을 수리산에 풀어 방목하는 형태로 키우고 있었다.
오우거 외에도 전략 무기는 새로운 전문가들이 발전시키고 있었다.
기존의 활과 화살, 석궁과 볼트를 개선해 더 견고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거리에는 대장간이 있어, 많은 대장장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충실히 일했다.
음식문화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기존에 먹던 음식들이 점차 사라졌고, 이제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작물들을 주식으로 삼기 시작했다.
재배할 수 있는 외계 작물을 발견한 것이다.
어둡고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나는 작물.
감자처럼 생겼지만, 맛은 무처럼 알싸하고 달달했다.
알토란.
누군가 그렇게 작명을 했고, 세력의 사람들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알토란의 재배 방식은 단순했다.
안양천 주위 땅에 알토란의 종자를 심으면, 주기적으로 뿌리를 잘라 주고 물만 뿌려 주면 되었다.
물론 맛은 없었다.
단지 탄수화물을 얻기 위한 작물일 뿐.
이 모든 노동은 2등 시민, 동안에서 잡아 온 전사들이 도맡아 했다.
알토란뿐만 아니라, 사냥해서 먹을 수 있는 몬스터.
외계 꽃에서 채취한 다섯 가지 향을 내는 향신료.
여러 형태로 가공된 말린 육포와 인근 안양천에서만 잡히는 해산물까지.
매일 새롭게 발견되는 식품들로 거리는 북적거렸다.
“팝니다, 팔아요! 오늘 잡은 싱싱한 물고기. 한 마리에 1스틱.”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맞추면 두 배. 맞추면 두 배. 자, 동네 어르신 아줌마 딸내미 삼촌 이모 고모 아저씨 조카의 사위 사돈 아재의 고종 팔촌에 조상님까지~ 다 와서 한번 맞춰 보소. 맞추면 두 배요~ 맞추면 두 배~.”
“알토란, 한 봉다리를 3라이터에 드려요. 거져요. 거져.”
“아저씨, 일단 와 봐. 오늘 잡은 건데. 팔딱거리면서 뛰는 것 좀 봐.”
“으잉. 다 죽었구만. 뭘.”
“아이! 뭘 죽어! 팔딱거리고 있잖아.”
이제 이곳은 새로운 문화와 환경,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잃어버렸던 웃음이 다시 거리에 피어났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사람들은 환호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은 온 도시를 다니며 모두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제 모두가 평범한 삶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이 모든 건 도시의 왕이 이룩한 업적이었다.
……그리고 이 도시의 왕, 강시온은 이제 이곳을 떠날 준비를 모두 마쳤다.
* * *
최현지는 풀잎을 문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리쬐는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새로운 계획……. 참 그게 어려운 거죠?”
강시온의 앞이었지만, 최현지는 누워 있었다.
그랬기에 진재희가 주의를 주었다.
“야. 일어나.”
하지만 진재희의 주의 따위에 아랑곳할 최현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리를 교차하며 이어 말했다.
“근데, 사실 방랑자라는 게 말이지? 혼자 다녀서 안전한 거거든. 네 명이서 다니면 위험해.”
강시온은 눈을 감은 채 답했다.
“방법을 찾아야겠지.”
그때 최명준이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걱정 마십시오! 제 목숨을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형님을 지키겠습니다.”
방랑자가 아닌 자도 현재까지 경기 남부까지는 통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는 문제없이 이번 원정에 자원할 수 있었다.
“네가 무슨 수로?”
진재희가 찌릿 최명준을 노려보며 묻자, 최명준은 순식간에 인상을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너, 왜 자꾸 시비냐? 계집.”
“난 너 같은 양아치 새끼가 제일 싫거든.”
“양아치? 난 건달인데.”
“자랑이냐? 양아치 건달 새끼.”
“아오! 저 미친년이 진짜!”
벌떡-!
최명준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진재희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렸다.
곁에 있었던 정현수가 최명준을 말렸다.
“차, 참으세요! 제발요!”
“언젠가 두고 보자? 어?!?”
각 간부들이 회의 아닌 회의를 하고 있을 동안, 강시온은 소파에 앉아 가만히 생각 중이었다.
지상으로 이동하자니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솔직히 자신에겐 진재희가 있어서 큰 걱정은 들지 않았지만, 변수라는 것이 있었다.
만약, 이번 원정을 통해 최현지나 최명준을 잃는다면…….
‘강행해야 할까. 아님…….’
강시온은 이마를 짚으며 고민에 빠졌다.
그때, 하윤하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어디 편찮으세요? 물이라도 가지고 올까요?”
시온은 눈을 떠 하윤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손에는 이미 물이 담긴 머그컵이 있었다.
“고맙다. 마침 목말랐어.”
시온은 머그컵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하윤하는 옆에 살며시 앉아 시온을 바라보았다.
“동생……. 찾으러 가시는 건가요?”
“……응. 찾아야지.”
“그러면 이번 원정에 절 데려가 주세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윤하는 언제나 시온의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
시온은 처음 윤하와 만났던 때를 떠올리며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도시 안에 있는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짧은 원정이 될 거야. 만약 수원으로 가는 길이 막혀있으면, 바로 돌아올 거니까 말이야.”
“걱정돼요…….”
“진재희가 있잖아? 최현지도 있고.”
“하지만…….”
“걱정 마.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넌 이곳에서 만경의 시민들을 위해 노력하면 돼. 넌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있어.”
하윤하의 능력은 압도적이다.
살아 있는 컴퓨터라고 봐도 무방했다.
사실상 질서부장의 건강이 악화된 이 시점에서, 세력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하윤하였다.
각성에 성공한 그녀의 능력은 그야말로 현 질서부장의 상위 호환이었으니까.
시온은 하윤하를 차기 지도자로 점찍어 놓았다.
무엇보다 하윤하는 강시온을 잘 믿고 따랐으니까.
“일찍 돌아오셔야 돼요? 왕께서 없는 만경은…… 정말 상상이 안 가요.”
윤하는 시온에게 물었고.
“그래. 일찍 돌아와야지.”
시온은 윤하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혹시 만약.
만약에 말이다.
이번 원정에서 시온이 동생 준호를 찾게 된다면.
그리고 또 준호가 만약 다른 곳에 속해 있어서 만경으로 올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강시온은 만경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목적은 어쨌거나 동생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은 귀환을 약속했다.
* * *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저희 만경은 왕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겠습니다.”
“필요하신 자원, 식량. 필요하시다면 전투병력도 시온 님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저희의 육체는 이미 시온 님의 것입니다. 시온 님이 없었더라면, 저흰 진작에 죽고 말았을 테니까요.”
“만경의 유일한 왕은, 오로지 당신뿐입니다. 무사 귀환하시어 저흴 다시 보살펴 주십시오.”
질서부장과 노동부장, 그리고 각 기관의 간부들까지 모두 마중을 나왔다.
그들은 강시온이 수원으로 원정을 떠난다는 사실을 만경의 시민들에겐 숨겼다.
왕이 세력 안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크게 동요할 테니.
이번 원정에 나서는 건 네 사람이었다.
길잡이 최현지, 짐꾼 최명준.
그리고 강시온과 진재희였다.
“콜록……! 콜록!”
강시온은 기침을 토해 내고 있는 질서부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전쟁을 치루기 전에도 그녀는 각혈은 물론이고, 자주 쓰러졌었다.
아마 지난 2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어머니의 마음으로 세력을 보살폈기 때문일 터.
병세의 원인은 과로였다.
그녀의 능력은 출중했지만, 병세로 인해 그녀의 뒤를 이을 인물이 필요했고 그 인물이 하윤하였다.
“부장님. 하윤하를 잘 보살펴 주십시오. 그리고 속히 쾌유하시길 바랍니다.”
강시온은 부장의 두 손을 꼭 쥐며 당부했다.
질서부장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리고. 무사 귀환하시길 소망합니다.”
“예. 부장님. 저희는 이제 가보겠습니다.”
강시온은 그렇게 떠났다.
만경의 간부들은 왕이 가는 길에 행여 작은 돌멩이라도 있을까 우려하며, 시온이 필요할 때 세력이 가진 모든 힘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무너진 도심 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
간부들은 왕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이번 원정은 길어야 일주일, 짧으면 3일 안에 끝날 것이었다.
강시온은 정찰일 뿐이라고 말했고, 그를 배웅하는 간부들 역시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차피 금방 돌아올 테니 말이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5년간 돌아오지 않았다.
* * *
그들이 돌아온 건, 5년 뒤였다.
푸드득-!
비둘기가 날아들어 무너진 창틀에 앉았다.
강시온에게 보낼 보고서를 작성 중이었던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하얀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모이를 조금 챙겨 창틀에 앉은 비둘기에게 다가갔다.
비둘기는 자연스럽게 여자의 손바닥에 놓인 모이를 쪼아 먹었다.
여자는 비둘기 다리에 묶인 편지를 보았다.
그 편지를 바라보던 여자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왕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정말입니다. 지금 국경에 도착해 있으십니다. 금정역입니다.
“하아……!”
여자는 감격에 겨워, 손을 입으로 막았다.
방문이 힘차게 열렸다.
덜컹-!
깜짝 놀란 비둘기가 열린 방문 사이로 푸드덕 날아올랐다.
이어서 한 여자가 복도를 달려 그쪽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복도에 가득한 간부들은, 서둘러 양 끝에 서서 몸을 비켰다.
이어서 여자가 박차고 나온 방에서 두 명의 남자가 따라 나왔다.
“폐하……!!”
“폐하……!!! 어디 가시옵니까!”
부하들은 그녀를 ‘폐하’라 불렀다.
하지만 그들의 부름에도 여자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대신 달리고 또 달렸다.
여자는 경찰서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입구에 있던 병사는 왕의 등장에 순식간에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여자는 그 병사를 지나쳐 그대로 달려 나갔다.
시장 바닥을 지나갔다.
수레를 끄는 작은 몬스터와 수레에 탑승한 노인과 마주쳤지만.
우당탕-!
“우왁-!”
-끽끽 끼리릭!
여자는 그 둘을 빠르게 지나쳤다.
이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만경의 중앙 시장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그 시장통에서 북적거리며 물건을 사고팔며 흥정을 하고 있었다.
“댜코. 10개에 2라이터.”
“왜 이렇게 비싸? 어제는 안 그랬잖아.”
“생산량이 줄었어. 아니, 글쎄. 메트로 세력이 점점 원정대를 보낸다고 했나?”
“정말? 또 전쟁이 일어나는 게 아냐?”
“대한민국이라고 우기는 그 새끼들 때문에, 전쟁이야 거의 매달…….”
그때였다.
“비켜-!”
“매일……? 어, 어엇? 폐하!”
“비키라고!”
우당탕-!
흥정을 벌이는 가게 주인과 손님 사이를 여자는 박차고 지나갔다.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달리고 또 달렸다.
주변에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발 빠르게 궁을 뛰쳐나온 탓에 여자는 맨발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여자는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참고 참았다.
이번에는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경의 진정한 왕이 돌아왔다.
잊혀진 영웅이 돌아왔다.
국경에서 온 전보는, 현 만경의 왕조차 맨발로 뛰쳐나올 정도로 엄청난 소식이었다.
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시온이 돌아오지 않은 시간 동안 만경은 하윤하가 다스렸다.
새로운 왕으로서.
이젠 어엿한 숙녀의 모습을 한 하윤하는 국경을 향해 맨발로 뛰어나왔다.
‘왜? 도대체 왜 지금까지.’
왜, 5년 동안 연락 한 통이 없었을까.
원정을 떠난 후, 3년이 지난 시점부터 만경의 간부들은 강시온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윤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윤하는 시온이 분명 살아 있을 거라 믿었다.
계속해서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탐사대와 원정대를 울창한 숲을 향해 끝없이 보냈다.
그럼에도 탐사대도 원정대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하윤하는 믿고 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그리고 오늘.
바로 지금.
드디어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받았다.
국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인파들이 몰려 있었다.
하윤하는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 사람들을 헤집고 나아갔다.
그렇게 하윤하는 국경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는 곧 사람이 몰려 있는 국경 검문소에 도착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