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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는 나만 지킨다-129화 (129/221)

제129화. 약속

늦은 오후, 해는 지평선에 걸쳐 있었고, 붉고 따스한 색감의 햇살이 무너진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만안 경찰서 옥상.

그곳에는 고풍스러운 소파가 중앙에 놓여 있었다.

강시온이 즐겨 있는 공간이었다.

이곳에선 안양시 내부 전반을 내려다볼 수 있었고, 처음 만경의 군주가 되었던 상징적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진재희가 그곳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벌써 연달아 다섯 개비째.

그녀의 주위로는 꽁초들이 버려져 있었다.

박지수와의 전투에서 상처를 입었던 재희의 몸은 회복이 빨랐다.

애초에 다친 수준도 아니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후유증은 여전했다.

박지수의 몸을 헤집고 다닐 때, 그녀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었다.

아버지. 그리고 꿈.

그건 무척이나 후회스럽고 괴로운 기억이었다.

분명 전생에 모두 털어 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떠오르니 힘들었다.

재희는 손 떨림을 겨우 진정시키며 담배를 빨았다.

목구멍을 통해 연기가 폐까지 차오르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때, 옥상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걸어왔다.

“여기 있었네.”

풀썩-.

강시온은 목욕을 마치고, 그녀 옆에 앉았다.

그가 앉는 순간, 재희의 몸이 한 차례 흔들렸다.

시온은 도시를 바라보며 물었다.

“술 먹었어?”

재희는 자신의 몸 냄새를 맡더니 시온에게 답했다.

“조금.”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사실 그녀는 물에 섞은 소주를 세 병이나 마신 뒤였다.

게다가 담배를 태우면 태울수록 더욱 술기운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에게 취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부정했다.

“정말…… 조금 먹었어.”

재희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담배 연기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시온은 도시를 바라보다 그녀를 곁눈질로 살폈다.

그리고 물었다.

“담배는 왜 피우는 거야?”

“……담배?”

그의 물음에 재희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담배를 바라보았다.

사실 본인조차도 모른다.

담배를 왜 피우는지.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건강에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근데 모른다.

담배를 왜 피우는지.

살아가다 보니 담배를 피우게 되었고, 어느샌가 담배 없이는 못 사는 몸이 되었다.

진재희는 다시 담배를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내뱉었다.

그때 이어지는 그의 말은 재희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시온이 먼저 이런 것을 물어 올 줄은 몰랐다.

전생에도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니.

“나도 한 대 줄래?”

“……어?”

재희는 놀라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 번 펴 보게. 줘 봐.”

“…….”

절대 담배가 아까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재희는 그에게 담배를 피우게 하는 것이 왜인지 모르게 죄스러웠다.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던 친구에게 담배를 가르치는 느낌이랄까.

아니, 그것보단 가족에게 담배를 쥐여 주는 느낌과 비슷했다.

하지만 담배는 강시온의 재산이니, 막을 순 없었다.

재희는 자신이 쥐고 있는 담배를 바라보다 이내 새로운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시온은 그녀를 말렸다.

“한 모금이면 돼.”

“……응.”

그녀는 피고 있던 담배를 그에게 건넸다. 그러자 시온은 담배를 살짝 잡고는 어설프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하지만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지는 못하고 입에 머금다가 내뱉을 뿐이었다.

그러자 재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목까지 넘겨야…….”

“뭐?”

“아냐.”

“목까지 넘기라고?”

“어, 응.”

시온은 그녀의 말을 듣곤, 담배를 끝까지 빨아들였다.

이내 연기와 함께, 기침을 토해 냈다.

시온은 담배를 다시 재희에게 건네며 말했다.

“맛없어. 탄 맛 나.”

시온의 기침을 보곤, 재희는 입을 가리며 낄낄 웃어 댔다.

재희는 방금 그의 행동에서 묘한 행복감을 느꼈다.

“당연히 맛없지. 근데 맛있는 것도 있어.”

“담배에 맛있는 게 어딨어?”

시온은 입안이 텁텁해 입을 쩝쩝거리며 대답했다.

재희는 살짝 그에게 몸을 기울이고는 약간 높아진 톤으로 말했다.

“진짜야. 단맛 나는 담배도 있고. 시원한 맛 담배도 있어. 엄청 독한 것도 있는데, 그건 나도 못 펴. 레드라고 하거든.”

시온은 기침을 두어 번 더 토해 내고는 웃음기 가득한 재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허울 없이 마음껏 웃어 대는 진재희의 모습을.

그녀는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웃을 땐 웃고.

대화할 땐 대화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 종일 침울해하는 진재희를 보고 시온은 걱정이 앞섰었다.

그녀의 심정에 뭔가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걱정.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괜찮아 보였다.

“그렇게 독한 건 내 스타일은 아니야. 차라리 술을 먹지.”

“……그럼 술. 먹을래?”

“아니.”

“밥은?”

“먹었어.”

“간식?”

“그만.”

시온은 재희를 바라보았다.

양 볼은 불그스름하게 색이 차올라 있었고, 두 눈동자는 조금 풀려 있었다.

아무래도 취한 모양이다.

시온은 가지고 있던 생수병의 뚜껑을 따, 입술을 적셨다.

하지만 뭔가가 조금 달랐다.

단순히 술기운이라고 하기에는 진재희의 행동거지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성격이 조금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아님, 이것이 원래 성격인가.

원래부터 사람을 잘 챙기긴 했지만, 그건 특정한 상황에서 그런 것이었다.

이전보다 그녀는 분명 여유로워졌다.

“너 전생에는 뭐 했어? 운동 한 건 알고 있고.”

이런 대화, 사실 항상 봐 오던 사이에서 나눌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은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비로소 여유가 생긴 시온은 그녀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재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며 대답했다.

“난……. 별거 없었어. 그냥 백조.”

시온은 소파 앞에 놓여 있던 테이블에 생수병을 놓으며 되물었다.

“그래도 뭐라도 하고 있지 않았어?”

“……하고 있었던 건. 노래?”

“노래?”

시온은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예상외의 대답이었다.

재희는 시큰둥하게, 손으로 두 볼을 눌러 대고 있었다.

누를 때마다 입술이 삐져나왔다.

“어떤 노래? 가수였어?”

“아니, 아니. 전혀. 가수는 아니었어. 굳이 따지자면, 지망생?”

“노래…….”

시온 역시 노래에는 꽤 좋은 기억들이 있었다.

노래를 듣는다는 건,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즐거운 행위였으니까.

“……별거 아니었어. 유명하지도 않았고. 노래는 몇 곡 정도 냈지만. 너튜브 조회수 이천 정도. 그래도 버스킹으로 찍힌 영상이 좀 뜨긴 했지만…… 그걸로 끝.”

“가수를 하고 싶은 거야?”

“가수는 하고 싶지. 가수는 하고 싶은데…….”

재희는 시온에게서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체불명의 괴생명체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를 보며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포기했어.”

“……왜.”

“재능이 없었거든.”

재능이 없다.

그 말이 참 잔인하게도 들렸다.

시온은 지금껏, 재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다.

그에게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한 번 불러 봐, 노래.”

시온은 혼잣말하듯 말했다.

하지만 재희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안 돼. 기타도 없고.”

“왜? 여긴 나뿐이잖아. 그리고 기타는 저기 있어. 노동부장이 취미로 한다고 가져다 놓은 거.”

시온은 옥상 한 편에 세워 둔 기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금 재희는 노동부장이 무척이나 미웠다.

“……아니, 그래도.”

“나 듣고 싶어.”

그 말 뒤로 시온은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노래가 듣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궁금하기도 했고.

그녀가 지금껏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왜,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강시온은 진재희라는 사람을 더 알고 싶었다.

근데 생각보다, 노래를 부르던 사람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을 때 당사자는 조금은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그게 아무리 업(業)이고, 잘하는 것일지라도.

게다가 강시온 앞이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그가 부탁하면. 아니, 그런 눈동자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하면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노래 안 부른 지. 너무 오래됐는데.’

술기운이 차오르면, 평소 용기를 내지 못한 행동도 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그걸 술 먹고 실수한다 하지만.

그런 실수도 필요할 때가 있다.

강시온이 건넨 이 말은, 진재희에게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강시온이, 지금 자신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다.

진재희는 실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일 절만…….”

결국 그녀는 노동부장의 기타를 가지고 와 자리에 앉았다.

* * *

그녀는 기타를 조율하더니, 목을 한 차례 가다듬었다.

손끝으로 튕기는 기타 줄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흘렀다.

겨우 한 음절이었음에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윽고 그녀는 연주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은 쑥스러운 듯,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기타 음에 목소리 대부분이 묻혔지만, 그 아름다운 음색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이제 천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기타 선율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그리고 천천히 마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따뜻했다.

따뜻하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녀와 내가 앉아 있는 이 공간에 따뜻한 온기가 차올라 우리의 몸을 감쌌다.

그녀가 이렇게 목소리를 내기까지, 기타를 치며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까지.

어떤 인생을 보내왔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클라이맥스.

그녀는 이제 완전히 목소리를 내어 노래를 불렀다.

음이 조금 틀릴 때면, 입꼬리를 살며시 올리며 웃어 보였다.

음 중간에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재빠르게 올리기도 했다.

코드를 잡고 있는 왼손은 빠르게 이리저리 움직였고, 오른손은 일정한 리듬으로 기타 줄을 건드렸다.

일 절만 부른다던 그녀는 이제 이 절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던 미소를 한없이 내비치기도 했다.

행복한 미소였다.

노래를 하면 할수록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난 연주가 끝날 때까지 소파에 편히 누워 노래를 들었다.

얼마만의 안락함인지.

정말로 편안했다.

그리고 조금은 행복했다.

* * *

재희는 기타 줄을 지그시 누르며 노래를 끝냈다.

그러곤 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어땠어……?”

“…….”

시온은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재희는 혹시 자신의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봐 불안했다.

하지만 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았어. 너무 좋았어.”

그제야 재희도 웃을 수 있었다.

“……정말?”

“무슨 노래야?”

“영국 가수. 메론 파이브. 로스트 드림.”

“……좋네. 그거. 네가 불러서 그런가?”

“아니야. 원곡은 미쳤지. 특유의 음색이 정말 좋거든. 솔직히 난 원곡의 반도 못 따라가.”

“그래도 좋아.”

시온은 소파에 놓인 기타 줄을 한두 번 튕겨 보았다.

그러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래, 계속하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시온의 응원에 재희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할 수 있다면 말이지.”

재희는 노래를 계속한다면 성공할 거라는 그의 말이, 왠지 모르게 재미없는 농담처럼 들렸다.

하지만 시온은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

“언젠가, 무대에서 네 노래를 듣고 싶네.”

시온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말에 재희는 약간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꿈이야. 관객들 앞에서 노래해 보는 게.”

“담배부터 끊어. 모순되잖아.”

“어? 어떤 게.”

재희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들다,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툭-.

시온은 소파 등받이에 두 팔을 기대며 말했다.

“돌아가고 싶다고, 다시 원래의 세계로 되돌려 살아가고 싶다면서. 목 관리는 왜 안 해? 무의식적으로 포기한 거 아냐?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목 관리도 안 하고 말이야. 목소리는 좋아. 솔직히 난 음악은 잘 모르겠지만. 네 노래는 확실히 좋아. 그러니까 목 아껴. 막상 되돌아갔는데 그 목소리를 잃어 노래를 못 부르면 아깝잖아.”

재희는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만약……. 우리가 돌아간다면. 서로를 기억할 수 있을까? 되돌아간다는 건,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잊는 건데.”

모든 것을 되돌려 놓겠다는 건 곧 모든 기억을 잊은 채,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확실치는 않았다.

승리자들은 기억을 가진 채로 돌아갈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기억을 잊은 채로 처음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평화롭게 보이지만,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은 예전의 대한민국으로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 두 사람이 하고 있는 과정은 변하지 않는다.

싸운다.

이긴다.

나아간다.

이 세 가지 과정뿐이다.

“뭐가 되었건, 변하는 건 없어. 약속했잖아. 내 동생만 찾게 해 준다면, 네 목적. 내가 이뤄 주겠다고.”

툭-.

시온은 소파 등받이를 살짝 밀며 멀어졌다.

“수원 원정 출발은 6개월 뒤. 그때까지 준비해 둬. 오늘은 푹 쉬고.”

시온은 옥상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재희는 쥐고 있던 담뱃갑을 찌부러뜨리고는 되돌아가는 시온을 붙잡았다.

“시온.”

“?”

시온은 옥상 문고리를 쥔 채 그녀를 돌아보았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럼 모든 것이 전부 되돌아간 다음,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꼭 내 무대에 와 줘. 만약 내가 기억을 잃더라도 네가 내 무대에 자연스럽게 올 만큼 정말 유명한 가수가 될게.”

“…….”

“……그러니까 꼭 와 줘. 그땐 제대로 널 위해 불러 줄게.”

그건 아득히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기억을 잃든, 잃지 않든 자신의 무대에 와 달라는 약속.

섣불리 할 수 없는 약속이었다.

시온이 승리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기억을 온전히 가진 채로 되돌아갈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평소의 시온이라면 거절했을 거다.

그는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사람이니까.

이뤄지지 못할 꿈 따윈 애초에 꾸지도 않고.

지켜지지 못할 약속 같은 건 애초에 하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는 그녀의 장단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동생이랑 같이 갈게.”

시온은 그녀와 같은 꿈을 약속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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