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산처럼 거대한 존재 (2)
‘형.’
소년은 형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날, 소년은 모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날의 기억은 너무나도 생생하고 충격적이어서 도통 잊혀지지 않았다.
소년은 떠올렸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형은 다 떨어져 나가는 변기통 위에 두 발을 아슬하게 올려 두고, 철봉 바에 묶인 노끈에 목을 걸고 있었다.
-준호야……!
당시 소년은 소변이 마려워 어물쩍 넘어갔지만, 시간이 지나자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그날, 형은 자살하려고 했다.
자신을 두고 세상을 등지려고 했다.
소년은 어릴 때부터 여러 일을 접하며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세상에 눈을 떴다.
그랬기에 그런 선택을 한 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항상 자신을 챙겨 주던 형.
힘들지만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던 형.
분명 형은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소년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곳에서의 1주가 바깥에선 1년……. 형은 이제 두 살 더 먹었으려나.’
그렇게 소년이 한창 형을 떠올리고 있을 때, 그의 귓가에 관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약속드립니다. 반드시요. 제가 책임지죠.”
하지만 소년은 관리자의 목소리 따윈 듣고 싶지 않았다.
형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날 생을 포기하려던 형은. 자신을 버리고 세상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형은, 그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형은 쉬지 않았다.
잠시도 쉬지 않았다.
형의 생활은 극단적으로 단조로웠다.
공사판 - 야간 아르바이트, 공사판 - 야간 아르바이트, 공사판 - 야간 아르바이트, 공사판 - 야간 아르바이트, 공사판 - 야간 아르바이트, 공사판 - 야간 아르바이트.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러다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형은 산처럼 굳건했다.
그야말로 거대한 바위처럼 굳건하게 할 일을 했다.
형은 소년을 위해 무슨 일이든 했다.
형은 소년만큼은 영양 불균형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늘 말했다.
형은 성장기에 라면과 그것을 불려서 만든 죽만 먹고 자랐기에, 또래의 남자아이들보단 키가 작았다.
하지만 소년은 달랐다.
형은 없는 돈을 끌어모아 고기와 신선한 야채를 사 왔고, 그 재료들로 정성스럽게 요리해 소년에게 먹였다.
또한 소년은 비타민 영양제라는 것도 먹어보았다.
그러면서도 형은 먹지 않았다.
힘든 시절.
억지를 부려서라도 형에게 그런 좋은 음식들을 먹여 주었어야 했건만.
소년은 그러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눈앞에 ‘맛있는’ 음식들을 보곤 형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 먼저 달려들었다.
옛날 치킨의 닭다리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보았던 형의 모습은 초라했다. 그의 종아리엔 언제나 파스가 붙어 있었다.
-후으…….
당시 형은 자신의 상처를 돌보며 신음했고, 종아리에는 멍 자국이 크게 나 있었다.
그러면서 형은 치킨 쪼가리, 정확히 말하자면 고기 한 점 붙어 있지 않은 밀가루 튀김 쪼가리를 주워 먹으며 소년에게 말했다.
-준호야, 맛있어?
-응…….
-많이 먹어. 치킨, 치킨, 노래를 불렀잖아.
형은 닭목을 쥐고 한입 물었다.
소년은 그런 와중에도 두 번째 닭다리를 뜯었다.
왜 그랬을까.
자신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왜 형에게 한 조각도 양보하지 못했을까.
소년은 머리를 감싸며 후회했다.
이제 소년은 아직까지도 그때의 일을 후회 중이었다.
“여러분들은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빠르게 라운드를 클리어한 무리입니다. 아마도 당신 덕분이겠지요.”
관리자 J는 머리를 감싸고 자책하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년 곁에 있던 동료들은 그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J는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설마하니, 그 짧은 시간에 클리어하다니.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닥쳐.”
“그러니 제 말을 따르시죠.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제 말을 잘 따라 준다면, 형의 위치를 알려 드리겠다고. 그래서 이미 알려 드렸지 않습니까? 이제 만나게 해 드린다는데.”
“닥치라고.”
J는 천천히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뱀처럼 유혹했다.
“강준호. 현존하는 최강의 플레이어.”
“…….”
“당신은 굉장한 인물이야. 우승에 가장 근접한 남자라고. 당신과 당신의 부하들은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걸 해냈어요. 벌써 3라운드를 클리어했잖아요?”
“…….”
“그래, 그래. 좋다 이겁니다. 제가 특별하게 하나의 정보를 더 알려 드리도록 하죠.”
말을 마친 J는 뒤로 물러나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찾는 그는 이제 막 3라운드에 접어들었고, 거대한 전쟁에서 승리했어요. 정말 대단한 결과여서 제 동료도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뭐?”
형이 전쟁을?
그 위험한 일을 했단 말이야?
소년의 가슴이 철렁 가라앉았다.
형은 그저 집에서 아니, 괜찮은 무리 안에서 안전하게 버텨 주길 바랐건만. 소년의 형은 지금 리그를 치르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형, 제발 안전한 곳에만 있어 줘.
소년은 머리를 감싸며 자책했고, J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3라운드를 치르고 있다고요. 그의 시간으로는 글쎄. 리그가 시작된 지 2년이나 3년 정도 지났으려나. 당신들이 그 숲에 있는 동안 이 현실 세계의 시간은 흘렀으니까요. 2주 지내셨으니까, 2년이죠. 2년.”
뿌득-.
한 번 이빨을 부딪친 강준호는 J를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네놈들은 형과 날 떨어뜨릴 수작만 부리고 있을 텐데. 모를 줄 알아? 내가 형을 만나는 걸 존재들이 바라지 않을 테니까. 내가 안양으로 향하려고 하면 네놈들은 필사적으로 막았지. 빛남 퀘스트를 수행하고 안양을 먼저 접수하려고 해도 네놈들은 막았다. 그 간사하고 빌어먹을 시스템 안에 숨어서 말이야. ……난 지금 당장이라도 형을 만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근데도 불가능했지. 왜? 네놈들의 그 더러운 시스템이 막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어. 형과 난 쉽게 만날 수 없다는 걸. 그래서 수원으로 가라는 것이겠지. 내 말이 틀려?”
강준호의 뜻밖의 대답에 J는 조금 놀랐다.
J는 어깨를 으쓱였다.
관리자라고 할지라도 눈앞의 남자는 도저히 당해 내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강준호는 겉으로는 아이처럼 보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이미 성숙한 상태였다.
“하하. 그렇게 생각하시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오해하진 마세요. 당신과 강시온의 만남은 저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전 그것이 이 리그의 끝일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끝은 없다. 네놈들을 내 손으로 모조리 몰살시키기 전까진 형을 만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러지 않고, 내가 형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더 이상 네놈들이 설정한 ‘나의 길’에 ‘형을 만나러 가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을 때야. 그래서 순순히 따라 주는 거지. 네 방식을. 어느 쪽이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내가 그래 왔듯이.”
말을 마친 강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J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옆을 지키고 있던 이주연이 강준호를 말렸다.
그녀는 1라운드를 강시온과 함께 치른 여자였다.
“준호야! 관리자에게 손대면……!”
“내 말이 틀려……? 이 X발 새끼야?”
이주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준호는 성큼성큼 J에게 다가가 위협했다.
강준호의 눈동자에는 살의가 가득했고, 온몸에서는 살기와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 신적인 존재에 버금가는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J는 웃고 있었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준호를 사실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여간 형제란 것들이 쌍으로.’
강준호는 그런 J에게 말했다.
“리그에서 우승하면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 준다고 했나? 신의 힘으로.”
“예-. 우승한다면 말이죠.”
이제 J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냉랭해진 J의 표정을 본 강준호는 실성한 듯 소리를 내어 웃었다.
“푸흐흐흐……!”
한참을 웃고 난 뒤,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결코 소년의 얼굴에선 나올 수 없는 사악한 표정이었다.
강준호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J를 훑어보고는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했다.
“좋아. 씹어 주마. 네놈이 던진 그 더러운 미끼를.”
“…….”
강준호가 한 걸음 J에게 다가가자, J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바늘이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네놈들이 스스로 수장(水葬)될 때까지 그 미끼를 물어뜯어 주마.”
강준호의 곁에 있는 건 이주연뿐만이 아니었다.
남자가 하나,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다.
그들 모두는 강준호를 충실히 따르는 부하였다.
또한 그들 모두가 리그에서 제일가는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은 방랑자 연합.
일정한 세력을 갖추지 않고, 라운드 클리어에만 중점을 두는 플레이어 공략대였다.
그 대장은 강준호였다.
강준호는 말을 마무리했다.
“……기대해도 좋아. 그리고 이젠 내가 형을 지키겠어.”
모든 건 형, 강시온을 지키기 위해서다.
강준호는 형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조차 아깝지 않게 바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끝이 났을 때, 강준호는 형과 함께 꿈꾸던 세상을 만들 것이다.
더 이상 빌어먹을 돈 때문에, 빌어먹을 사람 때문에, 고통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다시 한번 결심한 강준호는 돌아섰다.
그가 돌아가자, 근처에 있던 동료들 역시 그를 따라 지하철역을 빠져나갔다.
강준호의 부하 중, 핑크색 머리의 여자는 J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바이-. 바이-. 또 봐.”
그러곤 낄낄 웃으며 강준호를 뒤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은 원래 ‘지하’에 있지만, 역을 제외한 모든 지면이 가라앉은 순간 지하의 의미는 없어졌다.
지하철역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몬스터.
녹룡(綠龍).
3라운드 최대의 포식자는 강준호에 의해 토벌되었다.
이로써 강준호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칭호를 부여받고, 리그 내에서 제일가는 플레이어가 되었다.
이는 전 세계 최초의 업적이었다.
“하하.”
그리고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J는 식은땀을 흘렸다.
애써 침착한 척 웃음 짓던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것참, 기대되네요.”
* * *
안양, 비산동 방어단지.
“쿨럭! 쿨럭!”
“숨 참아. 현수야.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시면 안 좋다.”
“……예. 군주님. 죄송합니다.”
“말도 하지 말고.”
시온은 정현수를 부축하여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이미 이곳에는 최명준의 정예대가 잔당들을 소탕하고 있었다.
멀찌감치 불길 속에서 전투를 이어 나가던 최명준은 강시온을 발견하곤 후다닥 달려왔다.
“형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근데…… 걔는 정현수?”
“만경으로 데리고 가, 치료부터.”
“아, 예! 알겠습니다.”
최명준은 이제 강시온의 말이라면 토씨 하나 달지 않는 예스맨이 되었다.
최명준은 기절한 정현수를 부축했다.
“꼬맹아. 숨 참아라. 연기 마신다. ……근데 너 뭐 한다고 이렇게 다쳤는데?”
“죄송…… 합니다. 총…… 대장님.”
“말하지 말라니까. 연기 마신다고.”
“총…… 대장님이…… 여쭈어보셔서……?”
최명준은 정현수를 데리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강시온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비산동 전장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아까 전부터 내리는 소나기에 거센 불길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고, 아파트 곳곳에 숨어든 전사들은 자발적으로 항복을 외치며 거리로 뛰어나왔다.
비산동의 결사대도 하나둘 무기를 쥐고 단지 내로 달려 나와 강시온을 마주했다.
비산동의 결사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군주의 방문에 크게 기뻐했다.
“군주님이다!”
“역시 군주님이 직접 오셨어!”
“군주님!”
“군주님!!!”
병사들은 불길이 거센지도 모르고, 강시온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강시온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의미는 ‘군주’ 그 이상이었다.
병사들은 화재를 진압하기 시작했고, 강시온은 그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잘 싸워 주었다.
비산동에서 살아남은 이 병력들은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희생되었어야 할 존재들이, 정현수의 각성으로 살아남은 격이었으니.
하지만 그에게도 의문은 남아 있었다.
분명 아티팩트가 주어지는 건, 2라운드가 끝나고서 관리자들에 의해 ‘선택’되는 것 일 텐데.
어째서 정현수가 아티팩트의 힘을 지금 얻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스템의 오류?
아니, 진재희가 말했다시피 신이 기획하고 실행하는 이 게임에 오류 따윈 없다.
그렇다면 이 또한 계획된 결과라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이는 세력에 있어서도 시온에게 있어서도 큰 이득이라는 사실이다.
어찌 되었건, 만경에 가장 필요했던 건 강력한 플레이어였기 때문이다.
전쟁은 끝이다.
남은 건 잔당 토벌뿐.
강시온은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만경의 병사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단지를 빠져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