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교착 상태 (1)
뚝.
“어라……?”
안경을 낀 동안의 플레이어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열 손가락에 묶여 있는 검은 실.
그 실들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플레이어 곁에 있던 박지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왜, 왜? 왜 이래?”
“……졌 ……어요.”
“졌다고?”
“네…….”
“네가?”
“예…….”
“말이 돼?”
박지수는 믿기지 않는 듯 계속 물었지만, 그녀의 대답은 같았다.
상대 플레이어에게 졌다는 것에 충격받은 건 비단 박지수뿐만이 아니었다.
동안의 플레이어 역시 충격받아선 고개를 푹 숙였다.
“졌어요. 확실히…… 졌습니다. 저 새끼…… 괴물이에요…… 적어도 A……? 아니, S일지도. 조심해요.”
플레이어는 박지수를 다시 올려다보며 당부했다.
설마 해태가 당할 줄이야.
이것만큼은 박지수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해태는 최강이었다.
의왕과 전면전을 펼칠 때도, 해태는 아무리 모진 공격을 받더라도 금세 되살아나는 불사신과 같은 존재였다.
애초에 해태의 본체는 적어도 1km 이상 벗어난 안전지대에 있었으니 말이다.
플레이어의 정신력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해태는 무적이었다.
그런 해태가 당했다.
만경에도 능력 있는 플레이어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강한 플레이어가.
박지수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놈도 이 정도 힘을 썼다면, 아마 정신력을 모두 소모했을 거야. 반격하진 못하겠지. 결국 전투는 우리의 승리야.’
선발대뿐일지라도, 동안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첫 전투에서 승기를 잡는다면, 이후의 전투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번가 초입 전투는 박지수에게도, 강시온에게도 중요했다.
박지수는 만경이 해태를 ‘쓰러트린 자’만큼 강력한 플레이어를 더 보유하고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완전히 사기니까.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휘릭-.
해태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검은 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 순간, 동안의 본대로 엄청난 압력이 밀려들었다.
부르르……!
박지수의 얼굴 살이 마구 흔들리고, 온몸이 중력에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모든 힘이 지나간 뒤엔, 박지수의 눈앞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서-걱!
“아……!”
“커헉……?!”
전방에서 날아든 참격은 해태의 목을 베었다.
그와 동시에 호위가 박지수의 앞을 가로막았고, 그대로 참격을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해태와 호위를 베어 낸 그 힘은 일대로 퍼져 나가며 모든 것을 베어 낸 뒤 하늘로 치솟았다.
애써 준비했던 투석기, 각종 공성 장비, 깃발 등.
모든 것이 하늘로 솟구쳤다.
“……뭐, 뭐지?”
박지수가 당황한 사이, 해태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츄르르륵-!
뒤로 자빠진 그녀는 자신의 목을 움켜쥐곤 울먹였다.
“카하악……! 컥……! 아……! 사, 살려 줘……! 살려 줘……! 주, 죽기 싫어…… 싫어…… 싫어…… 싫은데…… 싫…… 싫…….”
피를 흘리면서 해태는 천천히 죽어 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누구 하나 반응할 수 없었다.
동안의 가장 강력한 플레이어 중 하나였던 해태와 유능한 호위 한 명이 전사했다.
그것도 적의 원거리 공격에.
해태가 일격에 죽었다는 것도 충분히 충격적이었지만, 그 뒤에 이어진 광경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검은 낙뢰가 동안 선발대에 차례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검은 파도’가 도로를 가득 채웠다.
그 광경은 박지수조차도 감탄할 정도였다.
“아.”
그 파도는 동안의 전사들을 집어삼켰다. 수많은 전사들은 파도에 휩쓸려 죽어 갔다.
“……군주님! 피하십시오.”
부상당한 호위들이 피를 흘리며 다시 그녀 앞을 막아섰다.
동시에 전사들 역시 박지수 앞을 막아섰다.
그것을 바라보던 박지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은 그녀는 씨익 웃었다.
‘……역시 재밌어.’
재밌다.
미치도록 재밌다.
어떤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보다.
어떤 메가 히트 게임보다도 재미있는 광경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경험해 봤던 그 어떤 것보다 최고다, 이건!
미친 듯이 박진감 넘치고, 일평생 본 적도 없는 압도적인 비주얼이었다.
사람을 죽고, 죽이는 광경은 세상 그 어떤 쾌락보다 즐거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고대의 황제들이 왜 그토록 정복 전쟁을 하지 못해 안달인지.
왜 그들은 높은 상석에 앉아 전투 현장을 관람하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동시에 이런 리그를 개최한 신께 감사했다.
박지수는 지금 즐기고 있었다.
이 떨림, 이 전쟁, 이 기대, 이 두려움을 말이다.
“……흐흐흐. 흐흐흐흐……! 흐흐하하하하하하! 아……! 아! 아! X발, 너무 재밌어!”
그럼에도 이 즐거움을 이어 나가기 위해선, 최대한 전력을 아껴 두어야 했다.
일번가의 공성전이 패배로 돌아가고, 박지수의 선발대는 괴멸 직전까지 몰렸으니 말이다.
“……전열을 정비한다. 전원 후퇴해.”
박지수는 그 말을 뒤로 돌아섰다.
또다시 동안의 트럼펫이 전장을 향해 울려 댔다.
뿌우우우우-!
후퇴하라는 군주의 명령이었다.
* * *
비산동 파미안 단지.
네온사인 한 줄기 없는 깊은 밤이었지만, 그럼에도 비산동은 어둡진 않았다.
아파트 단지가 끝없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솟은 검은 연기가 밤하늘을 뒤덮었고, 이 일대는 공기 중에 떠오른 불씨들로 그야말로 불지옥을 연상케 했다.
적들의 요새와 가장 근접하던 208동의 23개 층이 불타고 있었다.
몇몇의 병사들이 불타는 고통을 이겨 내지 못해 뛰어내렸고, 그들은 하나같이 낙사했다.
207동도 함락 직전.
209동은 적의 공략 대상 중.
상황은 처절했다.
제아무리 뛰어난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한들, 플레이어 앞에서는 시간 벌기에 불과했다.
화르르르륵-!
불은 계속해서 번지고 있었다.
비산동 최전방 아파트, 207동.
그 화력이 얼마나 강한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206동, 210동의 병사들도 치솟는 불길에 고통스러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고통과는 별개로 병사들은 교량 너머로 이동했다.
불타는 아파트를 빠져나오는 207동 병사들.
그들은 옥상 사이에 연결된 좁은 교량 위를 달리고 있었다.
몇몇은 교량 위에서 뒤따라오는 아군에게 밀려 23층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살고자 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빨리!!!”
“어서!!!”
한 명, 두 명.
화상을 입은 병사들이 207동에서 206동으로 건너왔다.
206동 대장, 정현수.
정현수는 난간에 아슬하게 선 채, 계속해서 화살을 쏘았다.
207동 옥상에 있던 적의 플레이어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휘릭-. 푹. 휘릭-. 푹!
온몸이 불타고 있는 동안의 플레이어는 현수의 화살을 정통으로 맞고도 태연하게 병사들을 죽여 나가고 있었다.
동안의 플레이어는 불길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현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터벅터벅 다가오더니 옥상 사이를 잇고 있던 교량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덕분에 교량을 건너오던 병사들은 곧장 23층 밑으로 떨어졌다.
“으아아아-!!!”
“꺄아아아악-!!!”
그들의 처절한 비명이 단지 가득 울려 퍼졌다.
화염밖에 없는 공간, 207동에 있었던 수비대는 안타깝게도 두 명을 제외한 모두가 ‘전멸’했다.
“크흑……!”
정현수는 눈살을 찌푸린 채, 놈을 바라보았다.
동안의 플레이어도 정현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현수의 아버지가 단번에 달려와선 소년의 팔을 잡아챘다.
덥썩-!
“현수야……! 현수야! 도, 도망가자! 여긴 위험해……! 저, 저 괴물 새끼는 위험해!”
자신의 팔뚝을 잡은 아버지의 처절한 울음에 현수는 더욱 인상을 구겼다.
현수는 몇 번이고 아버지의 손을 뿌리쳤지만, 아버지는 더욱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현수는 매몰차게 그의 몸을 밀어 버렸다.
“잊었어!? 정말?!”
아들의 뿌리침에 나약한 아버지는 힘없이 무너졌다.
현수는 아버지에게 소리쳤다.
“저 새끼들이……! 동생 죽였잖아……! 물 기르다가!!! 화살에 맞고 죽었잖아!!! 아빠 딸이! 내 동생이!!!! 저 새끼들한테!!! 나…… 저 새끼들 똑같이 죽여 버리기 전에는……! 절대 못 가.”
아버지는 침묵했다.
현수는 다시 반대편 옥상을 바라보았다.
“……난 동 대장이야. 여길 지켜야 돼. 도망갈 거면, 아빠 혼자 가.”
“현수야……!”
퍼벙-! 화르르르륵-!
부자(父子)의 대화는 반대편 옥상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끊어졌다.
정현수는 다시 눈을 돌려 207동 옥상을 바라보았다.
더 큰 불길이 하늘 높게 치솟고 있었다.
그 불길 앞에 동안의 플레이어가 서 있었다. 놈은 207동를 단독으로 쳐들어와 수비대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는 비산 일대에 새로 파견된 박지수의 부하였고, 불에 내성을 지닌 자였다.
피부가 녹아들고 새하얀 두개골이 드러날 정도였지만, 놈은 끄떡없었다.
그 화염 속의 플레이어는 말없이 난간에서 멀어지며 중얼거렸다.
“……부질없네.”
그리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시 무너진 교량을 향해 걸어갔다.
제아무리 플레이어라 한들, 이 거리를 뛰어넘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정현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불에 휩싸인 플레이어는 반대편 옥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놈은 난간을 강하기 디디고는 그대로 허공에 뛰어올랐다.
부웅-!
“……!!”
“!!…….”
“?!”
상공 50m까지 몸을 날린 불타는 플레이어는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건물 사이를 뛰어넘었다.
그것을 바라본 만경의 병사들과 정현수, 현수 아버지는 사색이 되었다.
실로 아름다운 장면이었지만, 동시에 공포스러운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터억-. 촤르르륵……!
놈은 반대편 옥상에 착지했지만, 곧 미끄러지며 넘어졌다. 그렇게 놈이 만들어 낸 불길은 화려하게 불타기 시작했다.
이제 209동에 도착한 플레이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골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불타고 있는 얼굴을 한 채로.
정현수는 이빨을 뿌득뿌득 갈며 놈을 노려보았다.
소년은 화살을 꺼내 시위에 넣었다.
“……전부 전투 개시!”
동 대장의 명령에 206동의 병사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현수 역시 209동 옥상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플레이어는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였으니까.
* * *
“208동…… 207동…… 209동이 모두 적의 수중에 넘어갔습니다.”
“101동, 104동 역시 함락 직전입니다…….”
“불이 아파트 단지 내부로 빠르게 번지고 있습니다. 소화기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촛불에 의지한 어두운 방 안.
침대에 누운 시온 주위로 각 참모들과 동 대장들이 모여들었다.
대교 앞에서 벌어진 적의 보급로 차단 전투 이후 이틀이 지났다.
무리하게 각성 능력을 사용한 시온은 좀처럼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각성을 사용해 보급로를 끊지 못했더라면 저들의 총공세는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시온이 막아 냈기 때문에, 이제 5개 동 정도가 적들에게 넘어간 것이다.
만경에는 아직 29개 동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놈들의 함락 시간을 계산하면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시간을 더 끌어야 했다.
“……후.”
시온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곤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곳은 꽤 멀리 있었음에도 병사들의 비명 소리와 불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시온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벅터벅.
비틀거리는 발걸음에 주위에서 시온을 부축하려 했지만, 시온은 건네는 손도 뿌리쳤다. 그러고는 안방을 나서 거실로 향했다.
그곳에 배치된 긴 책상 앞에선 정보 수집을 위한 각 동 대장들의 업무가 진행 중이었다.
정보 수집 절차는 간단했다.
저녁이 되면 시온이 만든 ‘수신호’를 이용해 일번가와 소통이 가능했다.
일번가로부터 정보를 받으면 곧바로 이곳에 수집된다.
이런 방식으로 이곳 117동 1501호는 아파트 단지 방어 지휘 본부로 기능하고 있었다.
“상황은요?”
“예. 일번가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일번가에서 패배했다면, 일이 복잡하게 되었을 것이다.
일단 전쟁 초기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일번가에 투입되었어야 할 병력들이 대거 이곳 비산동으로 투입되면서 적의 중심 세력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첫 전투에서 승리하여 적의 기세를 꺾었다.
이제는 그다음 수를 생각해야 했다.
시온은 터덜터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값비싼 휴대용 손전등이 책상 중앙에 놓여있는 ‘안양시 지도’를 상시 비추고 있었다.
그 위로 아군 세력과 적 세력의 예상 진격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곳의 총사령관은 2군 지휘관.
그는 과거 대한민국 육군 대위까지 올라갔던 자였다.
“현재 놈들의 진격로는 예상과는 다르게 총 세 방향입니다. 이곳, 이곳, 이곳.”
2군 지휘관은 차례로 지도의 북부를 가리켰다.
적의 병력은 적어도 1만.
동안은 이 전장에 어울리는 새로운 플레이어와 병력들을 보냈다.
저들이 새로운 전략을 취한다면, 이쪽도 새로운 전략을 취해야 한다.
서로 무기를 든 이상 전쟁은 일방적이지 않다.
약소국과 강대국이 전쟁을 벌이더라도, 그 세세한 전투 현장은 서로 잽과 스트레이트를 주고받는 난타전이다.
시온은 창문에 손을 기댄 채,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러곤 불타는 아파트 단지를 등진 채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침이 되면 놈들을 풀어요.”
시온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그러곤 이내 납득했다.
꽤 이른 시기였지만, 그 방법밖엔 없다는 군주의 판단이었으니.
오우거.
이제 만경에서 키운 살육 괴물들이 투입될 차례였다. 전장에서 뭉게뭉게 퍼지는 사람 고기 냄새가 오우거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