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파미안 아파트 단지 (1)
“…….”
나는 침착할 것이다.
그 어떠한 적의 공격에도, 함정에도 침착하게 대응할 것이다.
두 손은 마구 떨렸지만, 마음만큼은 단단히 먹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에서 이어진 기다란 빛무리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숫자로 보아 적들의 선봉대인 듯했다.
그럼에도 우리 군의 주력 부대와 맞먹을 정도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긴장돼?”
진재희의 목소리.
난 자연스레 옆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벌써 담배를 5개비째 몰아 피우며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난간에 아슬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두 다리가 앞뒤로 움직이며 난간 다리를 퉁퉁 치고 있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앉은 채로 날 돌아보았다.
그러곤 다시 담배를 물고 연기를 내뿜었다.
나에게 긴장되냐고 물었지만, 정작 긴장되는 건 본인인 듯싶다.
사실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다.
숨을 내쉬었다.
이젠 망설일 것이 없다.
여기까지 잘 해 왔고.
난 동생을 다시 만나기 전까진 죽을 순 없었으니까.
“지휘관님, 선제 타격 준비하세요.”
선제 타격이 필요했다.
적이 어떻게 대응할지 알아야 했으니까.
지휘관은 내 명령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만경으로 향하는 동안의 선발대.
전열에는 횃불을 든 방패병들이, 중간 열에는 창과 무기를 든 근접 전사들, 후열에는 궁수들이 자리했다.
일반적인 부대 편성이었지만, 이 편성은 그만큼 지난 역사 속에서 그 효율성이 검증됐다.
그리고 만경은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만경에서 쏘아 올린 유리병이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렸다.
휘릭-. 쨍그랑!
한 궁수는 하늘에서 날아온 유리병에 머리를 직격당하여 그대로 사망했다.
“포-격!!!”
최초 발견자가 위험을 감지해 부대에 소리쳤고, 동안의 전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방어 진형을 갖추었다.
이제 유리병은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휘릭-. 쨍그랑! 쨍그랑! 쨍그랑!!!
방패병이 서둘러 방패를 쳐들어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역시…… 저놈의 유리병이 먼저 반겨 주는군.’
하지만 동안의 전사들 역시 가만히 손가락이나 빨면서 전쟁을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만경의 무기가 무엇인지 사전에 알아보고, 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미리 세워 두었다.
괴물 사슴의 등에 가만히 앉아, 적의 포격을 바라보고 있던 동안의 지휘관은 전사들을 향해 손을 휘적거렸다.
산개하라는 의미.
명령을 전달받은 선발대 전사들은 이제 건물들로 숨어들었다.
2,000명에 달하는 선봉대는 8차선 도로에서 순식간에 건물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이어서 깨진 유리병으로 인해 기름 범벅이 된 8차선 도로에 불꽃이 날아들었다.
쨍그랑! 화르르르르르륵-!!!!
기름을 만난 불꽃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어두컴컴했던 밤 도시가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다.
차마 건물 안으로 숨어들지 못한 전사들은 불구덩이에 사로잡혀 차라리 빨리 죽여 달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이미 불구덩이에서 파묻힌 몇몇 전사들은 검은 숯이 되어 가며 타들어 갔다.
아무리 신발을 신었더라도 불에 달궈진 기름 위에서 걷는 건 힘들었다. 신발이 녹으면서 고통이 밀려왔고,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거센 불길에 잡아먹혔다.
탄내가 주변으로 가득 퍼져 나갔다.
동안의 지휘관은 툰툰의 고삐를 틀어 건물 안으로 대피했다.
아직 이곳까지는 적의 공중 포격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로는 불바다가 되어 봉쇄되었다.
동안의 선발대는 이제 은밀하게 움직여야 했다.
“적은 역시 선제 포격을 개시했습니다. 어떡하시렵니까?”
동안 입장에선 만경의 투석기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공성전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동안의 지휘관들도 만경의 무기가 우수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따라서 동안은 동안만의 우위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동안만의 우위.
그건 압도적인 병력 숫자였다.
동안 지휘관은 건물 안으로 몰려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작전대로 실행한다. 전사들, 5분 뒤 아파트 단지로 진격한다.”
“예! 알겠습니다…….”
“옛!”
그들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동안 선발대의 임무는 적의 주요 방어 지점을 완벽하게 교란하는 것이었다.
임무 내용은 간단했다.
만경의 투석기가 무용지물이 되게끔, 건물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천천히 적의 본거지로 진격하는 것이다.
다행히 안양은 대도시다.
건물 사이의 공간이 적고, 건물들이 빽빽하게 자리잡혀 있다.
그리고 동안의 선발대는 은밀한 진격을 이어 나갔다.
도로는 이미 불바다였고, 어느 세력에도 속하지 않은 도로의 방랑자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타 죽어 갔다.
그리고 두 세력이 처음으로 접촉한 곳은 만경의 도시 비산동, 파미안 아파트 단지였다.
바로 그곳이 그들의 첫 번째 접경지였다.
* * *
비산동 파미안 아파트 단지.
지하는 2층, 지상은 32층까지 솟아 있는 거대한 비산동의 거주 구역.
35개 동이 있으며, 세대는 총 4250세대다.
이곳은 멸망 이후, 비산동의 마담이 새롭게 도박과 유흥의 거리로 만들었다.
동안의 첫 번째 목표는 ‘비산 탈환’이었다.
치욕스러운 외교 협정으로 빼앗긴 곳을 피와 무력으로 되찾아 오겠다는 박지수의 의도였다.
파미안 아파트 단지 앞으로는 안양천이 흐르고 있다.
그곳은 만경의 핵심 식수 공급처였고, 기존의 세계에서 사용하던 차량 다리도 있었다.
동안의 선발대는 그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2천 명의 병력이 차례로 다리를 건너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동안의 전사들이 편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도록 가만히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만경의 병사들이 아니었다.
밤 도시에 가득 울려 퍼지도록 만경의 동 대장이 소리쳤다.
“사격!”
그와 동시에 만경의 병사들은 아파트 내부 창문에서 석궁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연사 속도는 분당 10발 내외.
야간인 탓에 만경의 사수들은 동안의 전사들이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현대적인 소총조차 야간 장비가 없으면 적을 맞추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자라면 알 것이다.
야간 사격은 그냥 감으로 맞춰서 쏘는 수준.
야간 사격은 모 아니면 도다.
전부 맞추거나, 전부 못 맞추거나.
그랬기에 시온은 아군의 사수들이 적을 맞출 수 있는 작전을 전달했다.
바로 한 곳만 집중 사격하는 것.
중요한 건, 적도 화살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를 이용하면 충분히 타격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만경의 화살은 계속해서 쏘아졌다.
그리고 시온의 작전은 점차 먹혀들기 시작했다.
다리를 건너던 전사들의 귀에 어느 순간부터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하지만 깨달은 순간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휘리리릭-. 팍!
“억……!”
단조로운 바람 소리가 들리고, 화살에 맞은 전사는 앞으로 쓰러졌다.
발사된 볼트가 전사의 오른 눈알에 적중한 것이다.
볼트는 눈을 관통하여 뒤통수에 빠져나올 정도로 관통력이 대단했다.
옆에서 함께 달려 나가던 전사가 죽자, 부대는 크게 흔들렸다.
“적습이다!!!”
“으…… 으!”
“모두 엎드려!!”
죽음 앞엔 모두가 평등하다.
하나같이 겁에 질려 땅바닥에 엎드렸다.
또 그건 만경의 병사들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볼트를 피하기 위해 바닥에 바짝 엎드렸던 전사들은 그대로 볼트가 등에 박혀 죽었다.
파바바바박!
동안의 지휘관은 엎드려 오들오들 떨어 대는 전사들에게 소리쳤다.
“빠르게 지나가! 어서!!! 지체하지 말고!”
보이지도 않은 밤 도시.
어디선가 날아오는 화살.
전사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미 다리를 건넌 전사들 역시 어찌할 줄 모르고 숨기 급급했다.
동안의 기습은 이대로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만경에도 영웅이 있듯, 동안에도 영웅은 있었다.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발굽이 아스팔트를 만나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사슴을 탄 여자가 고삐를 틀어쥐고는 다리를 향해 내달렸다.
그녀는 화살이 빗발치는 다리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도깨비 가면을 쓴 동안의 플레이어.
금발의 생머리는 세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등에는 창, 한쪽 손에는 차 문을 개량한 소형 방패를 쥐고 있었다.
도깨비 가면은 여전히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도중, 볼트 하나가 그녀에게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휘릭-. 챙-!!!!!
하지만 볼트는 그녀의 방패에 맞아 튕겨 나왔다.
볼트의 관통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부딪히는 순간 불꽃이 튈 정도였다.
덕분에 도깨비 가면도 방패를 놓쳤다.
하지만 겨우 방패를 놓쳤다고 그녀가 멈칫거리진 않았다.
“……!”
도깨비 가면은 신경 쓰지 않고, 더욱 세차게 사슴을 몰며 앞으로 돌진했다.
화살 비가 잦아들자 그녀는 등에 메고 있던 창을 꺼내 들어 아파트 단지로 접근했다.
조자룡.
그녀를 처음 본 만경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중국의 위인을 떠올렸다.
그녀가 타고 있던 괴물 사슴 툰툰은 단숨에 아파트 단지 담벼락을 넘어 들어갔다.
훽-!
단지 내에는 만경의 무기를 든 병사들이 달려드는 도깨비 가면을 마주하고 있었다.
당황한 만경의 사수들이 소리쳤다.
“……쏴! 쏴!!”
“으야아아아!!!”
“죽어!”
도깨비 가면의 용맹함에 만경의 병사들은 당황했다.
몇몇은 창과 화살을 쏘아 대며 대항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도깨비 가면의 전투력은 만경의 병사들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는 플레이어였으니까.
휘릭-! 서-걱.
그녀가 한 번 창을 휘두르자, 전열에 있던 두 병사의 목이 달아났다.
도깨비 가면은 쉬지 않았다.
계속해서 휘둘렀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만경의 병사들이 마구잡이로 죽어 나갔다.
잘린 목이 허공으로 날아갔고, 그녀가 창을 찔러 넣자 한 번에 픽픽 쓰러졌다.
도깨비 가면은 정확하게 병사들의 급소만을 노려 창을 찔러 넣었다.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든 도깨비 가면은 만경의 방어 세력을 교란하곤 단숨에 동안의 공격로를 확보했다.
동안으로서는 참으로 힘들게 얻은 기회였다. 동안의 전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야-! 돌격해!”
“으아아아아아!!!”
“아아아악!!!”
마구잡이로 흩어진 화살과 동료의 시체를 넘어 1,800명에 달하는 선발대가 단지 내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검과 둔기를 쥔 채, 아파트 단지를 손쉽게 넘어 만경의 병사들과 전투를 시작했다.
도깨비 가면은 피와 살점이 튀기는 전장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
“…….”
두 사람은 눈을 마주했다.
남자는 만경의 최명준이었다.
이곳을 지키는 만경 최고의 전투원.
도깨비 가면은 가만히 최명준을 노려보다 이내 고삐를 거머쥐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최명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만경의 병사들은 아파트 단지 곳곳에서 개미처럼 나와 수비했고, 담벼락을 넘은 동안의 전사들은 그들을 뚫기 위해 싸웠다.
“…….”
최명준의 곁에는 정예대원 50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명준은 말없이 과도를 쥐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도깨비 가면을 향해.
곧 그의 걸음은 빨라졌고,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둘이 서로 스쳐 지나갈 때 최명준은 도깨비 가면을 향해 단도를 휘둘렀다.
휘릭-. 푹!
최명준의 단도가 툰툰의 목에 꽂혔다.
반면 최명준의 목을 노린 도깨비 가면의 창은 볼을 스치듯 지나갔다.
-휘이이이이! -휘이익!
툰툰이 괴로운 듯 마구잡이로 요동쳤다.
덕분에 도깨비 가면은 툰툰에서 뒤로 굴러떨어졌다.
쿠당!
최명준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도깨비 가면은 최명준의 공격을 용납하지 않았다.
최명준이 자신에게 파고들자, 도깨비 가면은 주먹을 꾹 쥐고는 그보다 더 파고들어 밑에서 그의 턱을 가격했다.
퍽!
“우욱……!?”
“…….”
최명준의 턱을 가격한 뒤에도 도깨비 가면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오른쪽 갈비뼈에 스트레이트를 한 번.
다시 왼쪽 턱을 향해 잽 한 번.
도깨비 가면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그녀의 금발이 휘날렸다.
하지만 최명준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다시 단도를 쥔 채, 기회를 포착한 그는 도깨비 가면을 향해 휘둘렀다.
서-걱!
도깨비 가면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뒤로 빼, 피했지만 가면의 안면부는 세로로 갈라졌다.
최명준은 휘청거리며 자세를 잡았다.
“이 X년이……! 더럽게 아프네……!”
다시 최명준은 도깨비 가면의 목을 움켜쥐려고 했지만, 그녀는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딸그락.
도깨비 가면이 양쪽으로 갈라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자연스레 그녀의 얼굴이 최명준의 눈에 들어왔다.
“…….”
“…….”
강한 자들끼리는 한 번의 경합만으로도 서로의 실력을 알아본다.
공격에 성공한 최명준도.
공격을 당한 도깨비 가면도 서로를 알아보았다.
각 세력의 최고 급의 전력이라는 것을.
사라라락…….
금발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허리로 떨어졌다.
그리고 도깨비 가면의 얼굴을 마주한 최명준은 조금 놀랐다.
“…….”
앳된 얼굴의 큰 눈동자.
하지만 결의에 찬 눈동자.
그녀는 푸른 눈을 가진 서양인 소녀였다.
최명준의 눈 사이가 좁아졌다.
“이런…… X발…… 양키 년이. 너 뭐냐?”
“…….”
하지만 그녀는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
들을 줄도 몰랐다.
도깨비 가면은 지면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창을 다시 주워 들었다.
만경과 동안의 병력들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싸우는 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 속에서,
도깨비 가면과 최명준은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말 안 해? 그럼 몸의 대화를 한 번 나눠 볼까?”
최명준이 먼저 과도를 쥐고선 달려들었다.
타앗-!
최명준은 도깨비 가면의 움직임을 살폈다.
도깨비 가면.
멸망 이후, 처음으로 최명준에게 대적하는 존재였다.
아니, 처음으로 최명준이 밀리는 존재였다.
그것이 플레이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