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는 나만 지킨다-92화 (92/221)

#제92화. 존재

존재들이 사는 공간 VAREN.

이곳이 관리자들의 출발지라고 하면 ‘인간’들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이곳은 온통 하얀색뿐이었다.

하늘도 지면도 옷도 가구도 이곳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이곳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 어느 시간대에 속하지 않은 공간이다.

원래부터 있었던 공간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공간이다.

VAREN의 기준은 이 공간에 살아가는 ‘존재’들조차 모른다.

‘존재’들의 위 차원의 누군가가 그 기준을 내세울 순 있겠지만, 아직까지 ‘존재’들의 위의 존재는 없었다.

지구와의 ‘거리’ 역시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이곳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곳이고, 분명 지구와는 떨어져 있지만 가까이에 있는 곳이기도 했다.

‘존재’들은 이곳을 ‘베이런’이라고 불렀다.

‘존재’들은 신이라고 불리면서도 신은 아니었으며, 위대한 업적을 이뤘음에도 모두가 위대한 존재는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신적 존재로 불리는 ‘존재’들도 따지고 보면, 인간과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낸다.

일을 하고, 휴식을 취하며, 가끔은 쾌락을 즐기기도 한다.

물론 그들의 일, 휴식, 쾌락은 인간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내뿜는 위상과 위용은 다른 생명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베이런에 도착한 존재들은 중앙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상영관.

격식에 맞춰 차려입은 관리자들은 중앙홀의 상영관으로 몰려드는 존재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저마다 코인을 하나씩 꺼내어 하얀 보관함에 집어넣었고, 그렇게 게이트를 통과할 때마다 관리자들은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관리자들은 베이런의 존재들을 모시는 인간과 존재 사이의 중간자였다. 또한 사업가들이기도 했다.

우주 각지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생중계하며 존재들의 ‘쾌락’을 충족시켜 주는 대가로 그들의 돈을 받아 냈다.

1회 상영당 100게런.

게런은 존재들이 사용하는 통화(通貨)다.

곧 시작될 상영에 앞서 모여든 이들은 저마다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미 상영관 앞에는 수천의 존재들이 밀집해 있었다.

이번 주 가장 큰 빅 매치인 동안과 만경의 전쟁을 보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상영관으로 들어가는 존재들로 거리와 복도는 북적거렸다.

상영관 안에는 온통 하얀 바탕의 거대한 스크린이 있었다.

그리고 스크린의 양쪽에는 군주들의 프로필 사진이 펄럭이고 있었다.

좌측에는 박지수가, 우측으로는 강시온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에 모인 존재들은 이미 들떠 있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정말 오래 기다렸어요. 아, 이날만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아, 저걸 보세요. 어제의 하이라이트 영상입니다. 강시온의 저 엄청난 연설을 보시라니까요! 만경의 주민 모두가 완전히 한 남자에게 매료되어선 감정이 고조되고 있어요. 강시온이야말로 안양을 통합할 군주의 재목입니다. 강시온에게 천 게런을 걸겠습니다.”

“무슨 소리! 연설하면 동안의 박지수가 더 엄청났다고요. 저들은 진정한 의미의 ‘전사’라고요. 게다가 동안의 세력이 만안의 3배 이상이지 않습니까? 이번 전쟁은 당연히 박지수의 승리일 겁니다.”

본 상영회에 앞서 존재들은 서로가 응원하는 군주를 두고 열띤 토론을 펼쳤다.

몇몇 존재들은 주먹다짐을 하거나 네가 옳냐, 내가 옳냐 따지면서 멱살을 쥐고 소리치기도 했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들.

상영관에 모인 존재들은 이미 수만이었다.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리고 단언컨대 이 상영관의 주인공은 관리자 ‘K’였다.

인자한 표정을 한 백발의 노(老) 존재가 K에게 다가갔다.

K는 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아. K양.”

“오셨습니까. 13번 천호님.”

“정말 완벽했어요. K양.”

노 존재는 K의 두 손을 다정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K를 칭찬했다.

“어디서 저런 인간을 구하셨는지…… 압도적인 격차도 정치 싸움으로 한 번에 역전. 시온이 기어이 지수를 압박할 때, 그 대사, 행동, 몸짓. 그 모든 것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결국 시온의 그 한 방으로 두 세력 간에 균형이 좁혀졌고…… 이런 성대한 전쟁까지 올 수 있었죠. 당신은 정말 연출의 천재군요. 저번에도 그러시더니…… 역시 이번에도 최고였습니다.”

“과찬이십니다.”

K는 미소를 보였다.

13번 천호는 그런 K에게 나긋하게 물었다.

“그런데 K양. 두 군주 모두 심혈을 기울여서 키우셨을 텐데. 관리자 입장에서 볼 때,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그대는 그들의 곁에서 가장 오래 있었지 않습니까.”

만경의 강시온.

동안의 박지수.

두 군주 중 과연 누가 승리할 것이냐, 이는 이곳에 모여든 존재들의 최고 관심사였다.

베팅 금액은 5대5를 유지하며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리그’를 오랫동안 봐 오던 전문가들도 이번만큼은 난해해 했다.

숫자상으로는 동안의 박지수가 우위였다.

하지만 만경에는 강시온이 있었다.

전쟁은 박지수가 압도적인 병력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동안파와, 그럼에도 시온이 이길 것이라는 만경파.

두 집단은 아예 객석마저 따로 분리해 앉아 대립하고 있었다.

강시온과 박지수.

둘 모두 K에 의해 성장한 플레이어였다.

리그는 존재들의 무료함을 충족시켜줄 즐길 거리.

이미 K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 있게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 제 생각엔…….”

K의 대답에 13번 천호는 놀라워했다.

* * *

소리치는 관객석 위로 VVIP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베이런의 모든 세상이 하얀색이었지만, 이곳의 실내만큼은 어두웠다.

눈앞의 거대한 유리창 너머론 대형 스크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어서 빨리 전쟁이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강시온이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연신 열변을 토해 내고 있었다.

다음 화면에는 박지수가 단도로 자신의 볼을 베어 내는 장면이었다.

모두 본격적인 전쟁 전, 군주들의 연설을 리플레이한 장면이었다.

환호와 갈채가 쏟아졌다.

강시온과 박지수, 두 군주는 이곳에선 그야말로 스타였다.

그리고 그 어두운 공간, VVIP석에는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황금 왕좌에 앉아 있는 그는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베이런의 존재가 아니라.

그리고 관리자 K는 천천히 그 VVIP석으로 걸어 들어갔다.

또각, 또각.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준비됐습니다.”

K는 그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는 말없이 손짓했다.

이제 시작하라는 명령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K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스크린의 화면이 넘어가면서 관중들의 함성이 더욱 커져 갔다.

그 화면은 두 세력을 비교한 전문가의 분석 자료였다.

[만경의 군주: 강시온]

[수도: 만경]

[자원

●보유 도시: 5

●시민 수: 16,851명 (부상 91명 / 경상 83명, 중상 8명)

●플레이어 수: 29명, S급(1) A급(1) B급(3) C급(13) D급(1) F급(10)

●지역 내 순위: 2위

●식량: 135일 (+45)

●식수: 31일 (+10)

●지지율: 98

●전력:

병력 16,851명 / 1군(8400), 2군(5000), 3군(1,000), 4군(2421), 지휘관(30)

무기 9,041개 (+340) / F급(6,389), E급(2548), D급(88), B급(3), A급(13)]

VS

[동안의 군주: 박지수]

[수도: 범계]

[자원

●보유 도시: 13

●시민 수: 66,851명 (부상 2,901명 / 경상 1,083명, 중상 1,718명)

●플레이어 수: 103명, S급(0) A급(3) B급(5) C급(20) D급(12) F급(63)

●지역 내 순위: 1위

●식량: 435일 (+55)

●식수: 20일 (+15)

●지지율: 64

●전력:

병력 58,157명 / 1진(20,400), 2진(15,300), 3진(13,000), 4진(9400), 지휘관(57)

무기 15,041개 (+340) / F급(12,901), E급(2,089), D급(51), B급(0), A급(0)]

비교분석 자료가 스크린에 나오자, 베팅 금액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수치상으로는 동안의 박지수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하지만 시온의 능력을 믿는 자들도 많았다.

K는 천천히 VVIP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앉은 자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마치 어린 강아지가 어리광을 부리듯, K는 그의 무릎에 엎드렸다.

그는 말없이 그런 K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곧 나긋하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해.”

“과찬이십니다.”

그는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한 손으로는 K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말이다.

스크린에는 이제 두 군주에 대한 홍보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웅장한 BGM과 함께 특수 제작된 그의 캐릭터가 움직였다.

화면에 강시온이 등장할 때마다 존재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그의 영상에는 동생 강준호의 모습도 보였다.

시온의 이야기에 존재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때 K는 조심스럽게 VVIP를 올려다보았다.

리그의 절대자.

모든 것을 구상하고, 리그를 개최한 존재.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알 수 없었고, 손에는 언제나 레이스가 달린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남자인지도, 여자인지도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절대자.

적어도 리그 안에서 그의 말 한마디는 절대적이었다.

절대자는 말했다.

“군주와 플레이어가 이제 제 가치를 증명하고 세력을 키워 냈다. K, 넌 이번 전쟁에서 누가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느냐.”

나긋나긋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

그 달콤한 목소리가 K의 귓가에 맴돌았다.

절대자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K는 언제나 행복했다.

K는 베테랑 관리자다.

지금껏 그녀가 도맡은 플레이어와 군주는 모두 상위 티어에 랭크되었다.

이번에도 그녀가 이뤄 낸 업적은 실로 대단했다.

절대자로선 K가 기특할 수밖에.

그리고 K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박지수일 겁니다.”

K는 박지수를 선택했다.

아니, 처음부터 박지수라고 생각했다.

이제껏 그녀의 대답은 틀린 적이 없었다.

특히 3라운드가 시작된 지금, 군주들의 성향과 세력의 토대가 확고해진 지금, 그녀의 추론은 더욱 정확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절대자는 그 이유를 물었다.

K는 그의 무릎에 여전히 엎드린 채, 스크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물론 강시온은 훌륭한 군주입니다. 하지만 군주의 자질을 지니고 있진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강시온은 1라운드와 2라운드를 거칠 때까지도 시스템의 선택받지 못한 군주입니다. 박지수는 그를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강시온은 그녀의 밑에서 성장하는 최고의 조력자가 되겠지요. 이번 전쟁은 그렇게 흘러갈 것입니다.”

“…….”

K는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추론을 이어 나갔다.

시스템은 군주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선택하고, 그 인물에게 권력을 쥐여 주어 그 인물이 리그를 이끌어 나가길 원한다.

게다가 시온은 쿠데타를 통해 군주의 자리를 거머쥔 자였다.

군주의 자격이 원래부터 없었던 남자.

투표를 통해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물론 시온은 K가 정말로 아끼는 플레이어였다.

그랬기에 그가 죽지 않게 할 것이다.

K의 판은 이미 다 깔려 있었다.

지금껏 K가 주도한 판들은 모두 그녀의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절대자의 생각은 달랐다.

“글쎄.”

절대자의 고운 손길이 K의 앞머리에서부터 정수리를 쓸었다.

이제 곧 전쟁은 시작된다.

스크린에 다시 빛이 차올랐다.

존재들의 함성이 이곳 VVIP실까지도 가득 채웠다.

시작된 경기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존재들의 함성이 상영관을 너머 온 베이런에 울려 퍼졌다.

다시 나타난 화면.

화면 속 박지수의 전사들은 승용차 탱크를 앞세워 진격하고 있었다.

두 군세가 충돌하기 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이 순간.

절대자의 검은 눈동자는 오로지 한 곳, 한 곳에만 꽂혀 있었다.

그리고 절대자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건 고차원의 존재들만이 알겠지.”

절대자와 K. 둘의 의견이 처음으로 갈리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차원’을 통틀어 처음으로.

이제 스크린은 성벽 가장 위를 비추고 있었다.

선봉에 선 만경의 군주 강시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두 세력의 선발대가 조우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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