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는 나만 지킨다-90화 (90/221)

#제90화. 결의 (2)

푹-!

시온은 묵묵히 땅을 파다가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왜 그래?”

그의 심경에 변화를 가장 빠르게 느낀 건 진재희였다.

진재희는 삽을 흙에 꽂은 채, 시온에게 다가왔다.

시온 역시 삽을 흙에 파묻은 채 침묵을 지켰다.

“괜찮아? 조금 쉬지 그래.”

진재희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지만, 시온은 그럴 수 없었다.

전쟁이 2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쉴 수 없지. 쉴 순 없어.’

시온은 구슬땀을 닦곤 다시 삽을 들었다.

이제 한낮이면 기온이 영상까지 올라, 땀이 뻘뻘 나올 정도였다.

시온은 삽으로 흙을 퍼, 승용차 사이사이에 던졌다.

흙을 풀 때마다 일용직 노동자 일을 하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이런 강한 볕이 내리쬐던 날, 봄의 아지랑이가 공기 중 아른거리던 시절,

시온은 수레와 삽을 들고 종일 공사판에서 일만 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그땐 신축 빌라를 만들었고, 지금은 그것보다 더 거대한 자동차 성벽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오우거가 승용차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 그 고정 작업은 인간들이 담당했다.

승용차끼리 용접할 수 있다면 간단했겠지만, 세력에 그렇게 큰 여유는 없었다.

대신 승용차 사이 공간은 모두 흙으로 막아 메꿨다.

성벽을 모두 흙으로 뒤덮는 건 많은 노동과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견고해야만 하는 ‘동문’, ‘남문’에 노동력을 집중했다.

동문은 비산 방면을 향해 있었고, 남문은 3세력을 향해 있었다.

-쿠으으으…….

오우거가 마치 모래성을 쌓는 듯이 손쉽게 사람들이 모아 놓은 재료들을 천천히 쌓아 올렸다.

예전에는 작업에 오우거들이 많이 투입되었지만, 현재 가용할 수 있는 오우거 전력은 한 마리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전투 준비 중이었다.

“으, 으, 후, X발!”

주변이 요란했다.

반대편에서 최명준이 삽을 들고는 땅을 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온에 의해 노동에 투입된 간부들이 노동자들을 도와 성벽을 축조했다.

“이 X 같은 삽질. 허리 X나게 아프네. 아-.”

남자라면 대부분 군대에서 삽질을 배우겠지만, 최명준은 군대를 가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만 3년을 있었기에, 면제였다.

반면 시온은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지만, 삽질 하나는 잘했다.

벌써 몇 시간이고 이어진 중노동.

묵묵히 삽을 푸고 나르고.

시온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군주가 일반 노동자들과 함께 성벽을 축조한다.

그러한 점에서 시온은 다른 노동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하이고~ 군주님. 좀 쉬면서 하시지예.”

“군주님, 수건이라도 조금 두르시지요.”

“군주님, 이제 조금 쉬시지요.”

주변에서 걱정할 정도로 그는 최선을 다했다.

누구보다 가장 걱정했던 건 진재희일 수밖에 없었다.

군주의 불호령 사건으로부터 며칠이 지났지만, 시온은 일을 놓지 않았다.

곧 거대한 전쟁이 있을 것인데, 하루 몇 시간이고 중노동을 했다.

하지만 시온의 이 같은 행동은 모두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치는 쇼다.

어떤 이는 보여 주기식이 나쁘다고 말하겠지만, 정치에서 모든 건 보여 주기식일 수밖에 없다.

군주의 행동과 말이 세력의 구성원들에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 세력의 군주가 모두의 작업장에서 이런 퍼포먼스를 보여 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강력하다.

그때, 거리에서 배급 카트를 끌고 온 배급 인원들이 도착했다.

질서부장은 노동자들에게 소리쳤다.

“배급 시작하겠습니다!”

금일 동문의 새참은 특별식이었다.

만경은 초등학교를 접수하면서, ‘식판’ 수백 개를 얻게 되어 식사 배급이 원활해졌다.

아무래도 다수를 대상으로 배급할 때, 일정한 규격의 접시가 있으면 편리했기 때문이다.

전쟁 3일 전.

질서부장은 배급 카트와 수레를 끌어와 새참을 나눠 주었다.

질서부장은 ‘군주의 불호령’에서 제외되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없으면 세력의 생활이 돌아가질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마디로 총리급.

그녀의 서열이 노동부장보다 한 급 위인 것도 위와 같은 이유였다.

인간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기본 영양소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다. 거기에 물까지 필요하다.

강시온이 그녀에게 내렸던 가장 중요한 명령은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명령에 맞춰 질서부장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부부장을 비롯한 전문가들을 관리자로 두어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배변부터 샤워 시설, 식단과 시민들의 잠자리까지.

‘생활 영역’에서 질서부장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오늘의 식단은 으깬 종나물과 쥐사골, 네뿔사슴 고기, 소주였다.

종나물은 최근 들어 만경 곳곳에서 자라나는 식물을 채취한 것이다.

생긴 것이 꼭 종처럼 볼록한 열매가 줄기에 달려 있지만, 그 식감과 색은 감자와 비슷했다.

쥐사골은 만경 주민들의 소울푸드였고, 네뿔사슴 고기와 최상급 사치품이었던 소주가 오늘의 특식.

전반적으로 괴물들은 서식지에 따라 그 분포도가 다른데, 만경은 특히 네뿔사슴, 오우거, 용뱀과 생쥐가 잘 잡혔다.

잘 요리된 큼지막한 사슴 고기가 노동자들의 식판에 올려졌다.

오랜만에 맛보는 단백질과 지방질의 맛에 노동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전쟁까지는 2일.

아니, 사실상 이미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제 슬슬 만안 인근 국경선으로 동안의 전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테니.

시온이 방금 전 소스라치게 놀랐던 건, 어쩌면 눈앞에 다가온 죽음에 대한 불안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거대한 전쟁을 마주한 군주에게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계속해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겨 내야 했다.

이겨 내서 안양을 통일해야만 했다.

그래야 동생을 만날 테니.

그러기 위해선 이곳에 있는 모두를 이용해야만 했다.

“비산동은 순조롭습니까?”

식판을 든 시온은 아직 숟가락도 들지 않은 채로, 지휘관들에게 물었다.

지휘관들 역시 모두 시온을 따라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2군 지휘관이 시온에게 말했다.

“예. 금일 저녁, 회의에 보고 올리겠습니다.”

작전은 순조롭다.

시온에 의해 작전 전반이 계획되었고, 세부 작전은 지휘관들이 수행하고 있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세찬 폭우가 내릴 모양이다.

* * *

동안의 주민들은 ‘자유’라는 신념 아래 똘똘 뭉친 집단이었다.

박지수는 그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주었다.

기존의 억압받던 사회 최하 계층을 규합하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했다.

세상이 멸망했다고 말하는 대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포했다.

외세와 처절하게 맞부딪히고 싸우며 ‘자유’라는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존재들.

그 존재들이 전사들이었다.

박지수는 이제 그들을 규합하고, 훈련시키고, 살인 기술을 연마하여 인간 이후의 존재를 꿈꿨다.

인간 이후의 존재.

그건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누리는 존재들이다.

박지수의 전사들은 범계역 술집 거리에 몰려들었다.

박지수는 그 중심에 있는 중앙 분수대에 자리 잡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의왕과의 불평등 조약.

만경과의 불평등 조약.

1라운드와 2라운드를 주름잡던 동안의 위세는 이제 바닥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박지수는 자신의 욕망과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이다.

이젠 영원한 악도 영원한 정의도 없다.

정의는 곧 세상을 손에 쥔 지배자에 의해 언제든지 변하는 것.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 어쩌면 한 달 뒤에.

박지수는 만경을 접수하고 안양의 태양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안양에 남은 유일한 정의로 자리 잡을 것이다.

세력을 넘어 국가로, 국가를 넘어 제국으로.

역사는 박지수의 손으로 다시 쓰이게 될 것이다.

비가 억세게 내려치는 범계역 로데오 거리.

5만이 넘어가는 동안의 전사들이 중앙 분수대에 몰려들었다.

밀집한 그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건물, 거리, 옥상에 빼곡히 자리 잡은 동안의 전사들은 한 여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심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박지수는 억센 비를 맞으며 소리쳤다.

이곳에 모인 전사들 역시 억센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모든 전사를 압도했다.

“우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 모인 자들이다. 우리의 욕망을 방해하려고 드는 자들을 난 좌시할 순 없다. 너희들은 그들을 가만히 둘 수 있겠나? 놈들은 경찰이라는 정부의 개 밑에서 자란 새끼 강아지들일 뿐이다.”

박지수의 목소리는 모두를 압도했다.

시온과 마찬가지로 박지수 역시 타고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박지수는 그들 사이로 걸어갔다.

나이, 성별, 직업.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군주의 걸음걸이.

억센 빗줄기 아래에서 그녀의 발걸음은 도도하고 당당했다.

그 누구도 박지수의 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비에 홀딱 젖은 그녀가 다시 소리쳤다.

“그야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거다! 과거 우린 두 번의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의왕과의 조약으로 호계를 잃었고, 만경과의 조약으로 비산을 잃었다. 이 치욕 앞에 너희들은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제 그녀는 전사들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수천 명의 전사들이 박지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지수는 그들 앞에서 더욱 당당하게 힘껏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져간 우리의 것들을 다시 빼앗아라! 모든 것을 빼앗고, 그들 모두를 너희의 노예로 부려라! 인간은! 원래 동물이다. 약육강식!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건 당연한 질서다! 너흰 강하다. 그 누구보다! 어느 인간보다! 강하단 말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이 빌어먹을 세상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며!”

그녀는 계속해서 괴성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박지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비 내리는 범계역에 울려 퍼졌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고 있었고, 동안 전사들의 감정은 고조되었다.

“가서! 모조리 짓밟고, 모조리 노예로 만들어라.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너희들에게 노예를 주겠다! 너희들의 욕망을 억제하려는 자들은 모두 악마다. 악마를 죽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의다! 죄책감? 치욕? 연민? 다 집어치워. 세상은 변했고, 이렇게 변한 세상에 어울릴 수 있어야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장담한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그녀는 돌연 품 안에 단도를 꺼내 들었다.

동시에 검은 코트도 벗어 던졌다.

그때, 박지수는 자신의 관자놀이에 칼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촤아아악-!

“……?!”

“!!!!”

“……!!!”

뚝…… 뚝…….

그녀는 단도로 자신의 관자놀이에서부터 볼까지 주욱 상처를 내었다.

붉은 핏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가 솟구치며 얼굴의 반쪽이 피범벅이 되었음에도.

그 피가 억센 빗물 씻겨 내려가며 얼굴에 기괴한 흔적을 남기고 있음에도.

그녀는 전사들을 보며 웃었다.

이빨을 드러내며,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 앞에서 웃었다.

이것은 박지수의 결의였다.

존경은 두려움으로부터 생겨나기도 한다.

전사들은 그런 광기에 휩싸인 박지수를 보며 두려워함과 동시에 존경심을 느꼈다.

박지수는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군주의 결의를 자해를 통해 드러내 보였다.

동안의 군주 박지수는 시온과 마찬가지로 시스템이 선정한 리더였다.

부하들이 가지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그들을 이끌 줄 아는 완벽한 리더였다.

그리고 그 군주의 강인한 결의는 이곳에 모여든 전사들 모두에게 전해졌다.

박지수의 관자놀이에서 흐른 핏줄기가 바닥에 떨어져, 빗물과 함께 섞이는 순간.

무기를 쥔 전사들은 하나같이 박지수를 향해 함성을 내질렀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랴아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갸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랴아아아아아아-!!!!!!!!!!!!!!!!!!!!”

포효.

전사 한 명 한 명이 마치 한 마리의 맹수라도 된 듯.

그들 모두가, 박지수의 퍼포먼스에 열광하고 포효했다.

박지수는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두 번 다시 이런 치욕적인 조약을 맺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스윽-.

박지수는 볼에 흐른 핏물을 닦아 냈다.

벗어 놨던 검은 코트를 왼손으로 쥔 채, 그녀는 단검을 쥔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 단검의 끝은 전사들의 포효에 맞춰 주는 듯 저 너머의 공간. 만안구 쪽을 가리켰다.

비가 주룩주룩, 그녀의 곧게 뻗은 팔에 떨어졌다.

“……가서 취하라.”

전쟁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하루.

그녀의 명령과 동시에 동안의 1진 병력, 2만 400명은 진격하기 시작했다.

사슴을 탄 기마대가 열을 맞춰 진격하기 시작했다.

무기를 쥔 전사들이 살기를 띤 채, 진격하기 시작했다.

버스 전차와 원거리 공격기도 진격하기 시작했다.

만경의 주민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기 위해.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