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결의 (1)
비산에는 박지수가 두고 간 온갖 사치품들이 가득했다.
노동자들은 그것들의 무게를 측정하고 상납 액수가 맞는지 확인했다.
박지수는 주당 상납해야 할 사치품을 한 번에 전부 지불했다.
그리고 시온은 그 상납품을 모두 만경의 주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전쟁 전, 사기 증진을 위해서였다.
“설마, 박지수까지 물리치실 줄이야. 왜, 옛말에는 이런 말이 있죠.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가 정말 이기는 것이라고. 아-.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오.
해가 쨍쨍하니 무너진 도시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비산의 노동자들은 그곳에 모여 구슬땀을 흘려 가며 상납품을 옮겼다.
그들을 바라보던 시온 곁에는 비산의 마담이 검은색 실크 우산을 쓰고선 태연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한두 명씩 박스를 짊어지고는 바닥에 바짝 웅크리고 있는 오우거에 다가갔다.
그 근처에는 대공원 출신의 오우거 전담 조련사가 있었고, 오우거의 등에는 거대한 바구니가 장착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은 박스들을 바구니 안에 차곡차곡 쌓았다.
질겅질겅-.
바닥에 웅크린 오우거는 계속해서 질겅거리고 있었다.
오전에 먹이로 주었던 시체를 아직까지도 씹고 있는 것이다.
오우거의 먹이는 육고기였다.
하지만 안양역 지하상가 속 놈들이 모아 두었던 시체들은 이미 다 떨어졌다.
그랬기에 만경에서는 놈의 고기를 공급할 새로운 방법을 마련했다.
그중 하나가 장례 절차.
세력 내에서 사고로 죽은 주민의 시체를 오우거의 먹이로 공급하는 것이다.
거부감은 크지 않았다.
노동을 중시하는 만경의 주민들이, 죽음 뒤에는 오우거의 먹이가 되어 하나의 노동력이 되어 영원히 살아가는 셈이니.
비인류적, 비인간적.
그런 단어는 사라진 지 오래다.
만경에는 만경만의 철학과 강시온의 명령만이 있을 뿐이다.
오우거를 운영하기 위해선 신선한 육고기가 반드시 필요하고. 세력 내에선 시체가 늘어난다. 이들을 오우거에게 공급해 폭주를 막고 노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일거양득인 셈이다.
“군주님. 어떠십니까? 제 부하들이 만찬을 준비했는데, 함께하시렵니까?”
마담은 싱긋 웃으며 물었지만, 시온의 시선은 한 곳에만 꽂혀 있었다.
비산동 파미안 아파트 단지.
이번 동안과의 협상을 통해 얻어낸 영토였다.
사실 시온은 비산과 더불어 아파트 단지를 거머쥐기 위해 박지수와 협상했다.
그 협상을 통해, 비산동 아파트 단지를 거머쥐게 되었다.
아파트 단지는 비산 방어의 핵심이 될 것이다.
시온은 지난 한 달여 동안 아파트 단지를 하나의 ‘요새’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개조된 아파트 단지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아쉽지만, 다음에 함께 하시죠. 제가 바빠서.”
이젠 전쟁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만경의 군주 시온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뒤돌아선 시온은 상납품을 가득 실은 오우거와 함께 다시 만경을 향해 걸어갔다.
그 군주의 뒷모습을 비산의 마담은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동안 범계역 인근 대중목욕탕.
촤아악-!
장발의 남자는 기절한 윤하에게 차가운 물을 끼얹었다.
윤하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장발 머리 남자는 실실 웃으며 윤하에게 속삭였다.
“진짜-. 말-. 안 할 거야?”
“진짜-. 말-. 해라?”
“빨리-. 말. 말-.”
“애기야-. 힘들지 않아?”
그의 집요한 물음에도 윤하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이종원은 입꼬리를 내렸다.
동안의 B급 플레이어, 이종원.
그는 자신의 신체를 투명하게 만드는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덥석-!
종원은 윤하의 머리칼을 쥐곤 들어 올렸다.
“쿨럭……! 쿨럭!”
윤하는 힘겹게 입에 머금은 물을 토해 냈다.
종원은 윤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전히 속삭였다.
“애기-야. 그냥 만경에 관한 정보-, 말하고 편해-지자? 응? 아프지 않아?”
그 뱀처럼 속삭이는 간악한 말에, 윤하는 힘없이 대답했다.
“……절대 말 안 해.”
윤하는 굴복하지 않았다.
자신을 거둬 준 군주, 또 목숨을 구해 준 그를 배신하진 않을 것이다. 설령 모진 일을 당할지라도.
그 모습에 이종원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말 안 하면-. 진짜 놀이할 거다?”
그때, 윤하는 그런 협박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종원의 눈에다 침을 뱉었다.
퉤-, 추르륵-.
윤하의 침이 걸쭉하게 종원의 광대뼈를 따라 흘러내렸다.
하지만 종원의 광기는 윤하가 상상한 것 그 이상이었다.
“푸흐흐……!”
종원은 윤하의 침을 손바닥으로 쓸고는 혓바닥으로 빨아먹었다.
“달다. 응? 헤-.”
그리곤 헤벌쭉하게 웃어 댔다.
그의 광기 어린 모습에 윤하는 허탈하게 웃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뱉었다.
“사이코…… 새끼…….”
“자주 들어. 그 소리.”
이종원은 여전히 헤벌쭉하게 웃다가 갑자기 윤하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그리곤 다시 얼굴을 윤하에게 가까이 들이밀고는 헤- 웃으며 물었다.
“이런 게 사이코인가?”
말을 마친 그는 또다시 윤하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이런 게 사이코야?”
반복, 반복, 반복.
종원은 자신에 의해 무력화된 상대가 망가지는 모습에 욕망을 느꼈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미대를 다녔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예술가였지만 특이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원래 세상에선 사람을 죽일 수 없기에.
처음에는 개미, 도마뱀, 햄스터, 고양이, 강아지.
그렇게 음지에서 자신이 키우는 반려동물을 잔혹하게 죽여 가며 쾌락을 느껴왔다.
하지만 이젠 세상이 달라졌다.
개보다 인간을 더 죽이기 쉬운 세상.
게다가 인간은 지적 능력을 지닌 생명체였다.
고등 생물이 자신의 손에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그 모습.
이종원은 그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캬하하하학!!! 하하하하학! 하아아악!!!”
짜악! 짜악! 짝! 짜악-!
종원은 계속해서 윤하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가 굴복하길 바라며.
하지만 윤하는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곁에서 음식을 씹어 먹고 있던 같은 동안의 B급 플레이어 김용표는 말했다.
“군주님이 때리지 말라고 했는데…….”
김용표는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고, 종원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돼지는- 조용히- 나 일하잖아?”
그러자 김용표는 즉각 반응했다.
“너, 너! 나보고 돼지라고 부르지 말랬지!”
철퍽, 철퍽.
김용표는 의자에서 일어나 이종원에게 삿대질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뱃살이 일정하게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나, 난! 체질이라고!”
“체질- 좋아하시네? 멍청이-. 가.”
“너, 너가 나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뭘 알아?”
“다- 알지.”
그때, 이종원은 다시 윤하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윤하를 질질 끌고 가, 욕탕에 머리를 처박았다.
부글부글부글-.
이종원은 계속해서 윤하의 머리를 물속에 처넣은 채, 힘을 주어 눌렀다.
물속에 처박힌 윤하가 고통스러운 듯 부들댔다.
그 앞에 종원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어댔다.
“푸히히힣-! 히히히히히……!!! 아, 짜릿해! 너무- 짜릿해!!!”
철퍽거리는 소리와 부글거리는 소리.
물 떨어지는 소리.
목욕탕 타일에 윤하의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장에 죽고 싶을 정도로 강한 자기 파괴 욕구가 드는 이 순간에도.
하윤하는 절대,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두 시간이 지났다.
윤하의 꿋꿋한 모습에 종원은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웠다.
“왜……! 왜! 왜! 왜!!! 왜야!!!!! 원래 이러면!!!! 이러면!!! 이, 이건!!! 클리셰가 아니잖아!!!”
종원은 탕에서 하윤하를 꺼내 목욕탕 바닥에 내팽개쳤다.
철푸덕-!
그러자 윤하는 고통스러운 듯 입 안에 들어온 물을 내뱉었다.
이종원은 광기에 휩싸여선 목욕탕 떠나가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이……! 이건 아니야!!!!! 벌써 몇 시간째야!!!!!!!! X발!!!!! 8시간째라고!!!!!! 8시간!!!!!”
“……쿨럭! 쿨럭! 으…….”
“이건 안 되잖아! 빨리! 빨리이……! 아, 제발! 아아아아악……!!!”
종원은 머리를 감싸곤 고통스러운 듯 소리쳤다.
그때, 종원은 쓰러져 있던 윤하에게 단번에 다가가선 무릎 꿇고 두 손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제발 울며불며 살려 달라고 말해 주세요. 제발요. 제발. 이건. 아니잖아요. 제발요. 제발. 제발. 제발요. 제발. 울어 주세요. 굴복해 주세요. 이젠 그만 죽여 달라고 해주세요. 네? 제발. 제발. 제발.”
“…….”
자신의 눈앞에서 두 손을 싹싹 빌고 있는 종원을 보며, 윤하는 공포를 느꼈다.
도대체 이 녀석은 뭐지?
법의 규제가 풀리고, 억제되어 있던 ‘욕망’의 족쇄가 풀리면 어떻게 되는지.
윤하는 지금 눈앞의 이종원을 보며 느끼고 있었다.
처음엔 폭력으로 고문하다가 자신의 욕구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무릎 꿇고 사정한다니.
괴리감이 들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사람이 원래 세계에선 도대체 얼마나 많이, 우리 주위에 있었을까.
그 생각까지 미치자, 윤하는 소름이 돋았다.
“……싫어.”
공포스러웠다.
눈앞의 상황은 너무나 역겨웠고, 공포스러운 데다 불편했다.
솔직히 윤하는 생전 ‘자살’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한번 시작한 삶을 어떻게 자신 스스로 끊을 수 있는지.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들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살아가는 고통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섰을 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땅바닥에 이마를 박고선 흐느끼던 이종원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곤 고개를 들었다.
“……방금 싫다고 했어?”
웃었다.
종원은.
그리고 웃는 종원 앞에서 윤하는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그때, 종원은 바퀴벌레처럼 팔꿈치로 서서히 윤하에게 기어갔다.
“방금…… 싫다고 했지? 그치?”
“으으…….”
더 다가갔다.
“그치? 그치?? 그치??? 어!!!!”
종원은 더 다가가, 윤하의 목을 움켜쥐려고 했다.
하지만.
덥썩-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종원을 움켜쥐곤 반대편 벽면에 던져버렸다.
콰앙!
“…….”
“…….”
종원은 화장실 벽면에 처박혀 피를 흘렸다.
그리고 윤하는 갑자기 등장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온몸에 상처가 있는 남자.
팔 한쪽이 없었다.
그는 박지수의 호위, A급 플레이어 이형승이었다.
이형승은 안경을 치켜올리곤 한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그의 옆으로 동안의 군주, 박지수가 걸어왔다.
동안의 군주는 여자였다.
그녀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코트와 하얀 목티, 어두운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신발은 갈색 워커를 신고 있었다.
누가 봐도 대학생, 그리고 단정한 모습.
박지수는 하윤하를 보며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병신 새끼가 건드리지 말라니까. 꼭 말을 안 쳐 들어요.”
이종원에게 하는 말이었다.
근처에 있던 김용표가 곧장 다가와 박지수 앞에 무릎 꿇었다.
“죄, 죄, 죄송합니다. 군주님. 제가 말렸는데.”
“아가리 닫아. 입 냄새 나니까. 그리고 떨어져.”
“네…… 네네…… 네!”
후다닥!
김용표는 무릎 꿇은 채로 그녀에게서 벗어났다.
박지수는 헐떡이고 있는 윤하 앞에 섰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쪼그리고 앉아 윤하의 얼굴을 매만졌다.
상처가 심했다.
지수는 다른 한 손으론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으론 윤하의 턱을 이리저리 돌리며 나른하게 물었다.
“시온이가 뭐랬어?”
“……뭐?”
“세력에서 한자리 준데? 아님, 뭐…… 돈을 많이 준대? 아님, 다른 거? 어떤 거?”
“…….”
윤하는 지수의 손 움직임에 따라 고개를 좌로, 우로 움직였다.
그렇게 윤하의 얼굴을 뜯어보던 박지수는 유혹의 말을 던졌다.
“내가 더 챙겨 줄 수 있어. 부? 명예? 아님, 남자를 줄까? 매일 새로운 남자를 줄 수도 있어. 네 이상형에 꼭 닮은 사람이 나올 때까지 매일매일 세 명씩 줄게. 나이 좀 어린놈들로만. 아님, 뭐. 먹을 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
“말해 봐, 왜 말 안 해? 원하는 것이 있을 거 아니야? 강시온이 너한테 뭔가를 해 준다고 했으니까…… 아니, 뭐 그랬으니까? 이렇게 네가 벙어리처럼 입 닫고 있는 거 아니겠냐고.”
“…….”
“……내가 그것보다, 두 배. 아니 세 배 더 줄게. 자-. 말해 봐. 원하는 게 뭐야?”
* * *
원하는 것.
사람이라면 반드시 원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하윤하에게도 꿈이라는 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멸망한 뒤라,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윤하는 가족을 잃었다.
1라운드 때, 고속도로에서 고블린들이 들이닥쳤을 때.
가족 중 유일하게 안전벨트를 풀고 있었던, 윤하만이 도망쳐 나왔다.
안젠벨트를 묶고 있었던 남은 가족들은 그대로 잡아먹혔다.
그 뒤로는 방황뿐이었다.
눈밭을 뒤져 가며 안 먹은 것이 없었다.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닥치는 대로 먹었다.
정체불명의 사체도 마다하지 않았다.
방랑자들을 상대로 음식을 훔치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방황하다 이제 힘이 다했을 때, 죽음을 직감했다.
원하는 것.
그래, 하나뿐이었다.
혹시 따뜻한 그 감정을 아는가?
그 순간에 자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먹먹해지는 감정.
그냥 학교에 가서 석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는 도시의 거리에서.
친구들이랑 수다를 떨다 정류장에서 헤어지고.
집에 와서는 씻고 밥을 먹곤 침대에 누워 너튜브나 보며 키득거리는 것.
그런 지루한 일상이 반복된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에는 따뜻함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시온은 모든 것을 잃어 버린 그녀에게 따뜻함을 떠올리게 해 준 군주였다.
지금껏 만났던 어른과는 달랐다.
강시온은 유일했다.
이 세계, 이 공간, 이 리그 속에서.
유일한 어른이었다.
당시 그를 만났던 장면은 아직도 생생했다.
눈에 파묻힌 윤하의 몸이 일정하게 뒤흔들렸고, 곧 시야는 다시 밝아졌다.
화사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배경으로 선 남자. 그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
구조?
설마 나 구조당하는 것인가?
이 세계에 더 이상 구조라는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윤하는 시온의 손에 이끌려 눈 속에서 나왔다.
윤하가 시온의 품에 안겼을 때엔 왠지 모르게 따뜻했다. 그 따뜻함은 그녀가 원했지만 찾을 수 없었던, 급기야는 잊고 있었던 감정이었다.
세계가 멸망한 뒤엔 처음으로 느껴 보는 감정.
그날 윤하는 시온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시온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자신을 구조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윤하 자신에게는 삶의 전환점이었다.
세상에 착한 영웅들은 모두 죽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는데.
아무렴 어떤가. ‘희망’을 보았는데.
* * *
“지구를 준다고 했다. 그 세 배를 주면…… 생각해 볼게.”
“…….”
윤하의 그 말을 들은 박지수의 두 눈꺼풀이 끔뻑거렸다.
……지구를 준다고?
세상을 준다고도 아니고, 지구를 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박지수는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뚝.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윤하는 고개를 픽 숙였다.
소녀는 기절했다.
기절한 윤하 앞에서 박지수는 침묵했다.
말없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트 밑단이 축축했다.
목욕탕에 있던 그녀의 부하들은 침묵했다.
군주의 침묵은 곧 분노였기에, 그 누구도 말을 걸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눈치 없던 이종원이 사시미 칼을 들고 낄낄거리며 다가왔다.
“구, 군주님-. 이, 이제 저, 저, 애랑 놀아도 돼-요? 왜 고문하지 말라고 했던- 거예요? 할 놀이가-. 많은데. 달고나 놀이. 그리고…… 사극놀이…… 아아. 새로운 놀이가 잔뜩.”
“…….”
이종원의 말에 박지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옆으로 쓰러져 있는 하윤하를 내려다보았다.
내면으로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내 그녀는 킥, 하고 웃으며 말했다.
“……내버려 둬.”
“네, 네에-?”
이종원이 되묻자, 박지수는 인상을 팍 구기며 다시 말했다.
“애 건들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내 방으로 데리고 가. 치료부터 해.”
“왜-. 왜요-? 이, 이 애는 우리 정보를 쏙쏙 빼다가 판 비, 빌어먹을 년인데……? 완전 나쁜 아이인데……? 나쁜 아이는…… 버, 벌을 바, 받아야 하는 데에……? -우욹?!”
푸욱-!
그때, 이종원이 대꾸하자, 박지수는 곧장 그의 입에 칼을 꽂아 넣었다.
코트 안쪽에서 꺼내 든 군용 단검이었다.
츄르르륵…….
이종원은 피를 머금은 채, 고통스러운 듯 컥컥거렸다.
박지수는 이종원을 죽일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야이, 씨X 놈아. 내가 하라면 그냥 해. 뭘 쫑알쫑알 말대답이야. 어? 종원아. 넌 다 좋은데. 씨X 말대답만 하지 마. 알겠어?”
끄덕끄덕끄덕.
이종원이 입에 칼이 꽂힌 채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동안의 전사 하나가 목욕탕 안으로 들어와 군주에게 보고했다.
“군주님. 모든 병력, 집결 완료했습니다.”
박지수는 가만히 윤하를 내려다보다 이내 김용표에게 명령했다.
“여기 정리하고 나와.”
“예…… 예. 예. 군주님.”
그녀는 다시 전사를 따라 바깥으로 향했다.
빗소리가 들려왔다.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오후가 돼서도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그녀의 동공은 마구잡이로 뒤흔들렸다.
가슴이 콩닥거리며 미친 듯이 몸이 떨렸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아니, 설레는 것이다.
강시온의 군대와 자신의 군대가 서로를 죽이려고 들며 달려들 때.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군대가 강시온의 세력을 완전히 짓밟았을 때.
강시온은 자신의 것이 된다. 그걸 상상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그리고 저 소녀.
아마도 강시온이 아끼는 아이일 것이다.
그러니 시온의 마음에 거슬리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겠지. 곧, 자신의 남자가 될 테니까.
‘……하하. 하하하하.’
맨 처음 느꼈던 작은 설렘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박지수는 이를 즐기며 지하 목욕탕을 빠져나와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이미 전사들이 모여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