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범계역
동안의 수도 범계역의 풍경은 경악스러웠다.
일단 엄청난 숫자의 간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것을 바리케이드라고 부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 숫자가 어마무시하게 많았다는 것이다.
바리케이드 근처로는 괴물들의 시체가 한데 모여 불태워지고 있었다.
지난 3라운드의 흔적들이었다.
동안의 병력들은 흩어져 각자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범계역 거리 전역에 퍼져 있는 전사들은 한눈에 봐도 그 수가 압도적이었다.
그들은 전부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활과 화살을 지닌 이들도 있었고, 작살을 지닌 이들도 있었다.
사슴을 탄 기마대가 무리를 이뤄 아스팔트를 뛰어다니고 있었고, 놈들의 상징인 X친 태극기가 이곳저곳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병력은 아직 의왕에 파견된 본대가 합류하기 전이었다.
본대까지 합쳐진다면 동안의 군사력은 가히 가공할 만한 수준이었다.
놈들과 맞부딪히게 된다면 분명 아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볼 것이다.
시온은 전쟁을 모른다.
전쟁을 몰랐음에도, 승리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1만이 넘어가는 세력의 군주였고,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자였다.
패배는 곧 패망이다.
병사와 전사는 반드시 서로를 죽여야 할 운명이다.
빌어먹을 시스템은 인간들이 서로 죽고 죽이며 스스로 괴멸하길 바랐다.
유해종이라는 명목으로, 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다.
“…….”
이번 정찰로 시온은 사전에 동안 세력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얻고자 했다.
이를 위해 따라온 것이 하윤하였다.
하윤하는 한 번 본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하여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플레이어다.
시온은 하윤하를 이용하여 동안의 모든 정보를 빼낼 것이다.
시온은 몸을 낮춰 윤하의 눈을 바라보며 단단히 일렀다.
“위험한 일이 생기거나 생길 것 같으면 그 즉시 복귀하도록 해. 약속해 줘.”
시온의 진중한 목소리에 윤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군주님.”
턱-.
시온이 윤하의 어깨에 손을 놓으며 위로했다.
하윤하는 이제 혼자서 이곳에서 며칠 동안 있어야만 했다.
시온은 소녀가 적의 시야에 포착되지 않게 이 일대를 위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시온은 자신의 전용 침낭과 사치품이었던 과자, 음료 몇 개를 더 주고 밤에 춥진 않을까 핫 팩도 여러 장 챙겨 주었다.
지금 하윤하의 역할은 중요했다.
하지만 먼 타지에, 이젠 몬스터도 많아진 이 무너진 도시 속에.
15살 먹은 아이를 혼자 남겨 둬야 하는 시온은 마음이 불편했다.
“호위는 오늘 내로 세 명이 도착할 거고. 삼일 간격으로 교대할 거야. 부족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해 줘.”
“군주님…….”
시온은 윤하의 패딩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고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하윤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시온에게 다짐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저놈들이 뭘 먹고 뭘 입고 뭘 싸는지까지 전부 관찰할게요! 반드시 군주님께 도움이 되겠습니다!”
“……믿음직스럽네. 고맙다.”
“예……! 헤헤.”
킁-.
하윤하는 코를 들이마시곤 웃어댔다.
온도는 아직 초봄.
서늘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최현지는 그 옆에 가만히 서, 군주와 윤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음 같아선 자신이 하윤하 곁에 머물고 싶었지만, 최현지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시온으로부터 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최현지는 만경으로 복귀해야 했다.
꼬르륵-.
그때, 하윤하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은 시온은 윤하에게 물었다.
“배고파?”
시온은 자신의 가방에서 라면을 꺼내었다.
윤하가 가장 좋아한다고 했던 라면이었다.
시온은 윤하를 위해 직접 라면까지 챙겨 왔었다.
“…….”
꼴딱-.
세력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관리인이라고 할지라도, 사치품이었던 라면을 먹어 본 것이 손에 꼽았다.
최현지와 같이 먹었던 것이 전부였다.
사실 시온은 사치품을 국력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잘 소비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만경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사치품을 아껴서 모아 둘 뿐 사용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시온은 하윤하를 위해 사치품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의 하윤하의 능력은 국력,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슥슥-.
시온은 무너진 벽면의 잔해들을 옆으로 치워 버리고 라면을 잘게 부숴 소스를 뿌렸다.
비록 대파도 계란도 찬밥도 김치도 없는 부숴 먹는 라면이었지만, 이곳에서 먹는 라면은 그 어느 때보다 맛있을 것이다.
적어도 윤하에게는.
이것으로 만경 측 첩보원의 소초가 완성되었다.
담배를 피우며 물끄러미 동안의 수도 범계역을 바라보는 진재희에게 최현지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최현지는 그녀가 궁금했다.
한사코 시온 곁에 머물며 그를 지키는 존재.
남매인가?
연인인가?
아님, 무엇인가.
궁금한 것이라면 못 참는 최현지의 오지랖이었다.
“언니. 담배 피우면 피부 안 좋아지는데.”
최현지는 진재희에게 가볍게 말을 걸었다.
그 목소리에 재희는 시선을 돌려, 최현지를 바라보았다.
최현지는 한쪽 손은 후드티 주머니에, 다른 손으론 콜라 캔을 쥐고선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진재희는 담뱃재를 한 차례 털곤 다시 입에 물었다.
둘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색해진 최현지가 발길을 돌리려던 차에 진재희가 입을 열었다.
아주 조용하게 혼잣말하듯이.
“……너 스물여덟.”
“응……?”
재희의 말에 최현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든 말든 진재희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며 말을 이었다.
“……나 스물넷.”
“네?”
되묻는 현지에게 재희는 간결하고 명확하게 대답했다.
“내가 언니 아니라고.”
훽-.
진재희는 담배를 건물 밖으로 던지며 최현지를 지나쳤다.
가벼운 눈인사조차도 없었다.
“아…….”
그런 진재희의 뒷모습을 최현지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왠지 그녀와는 친해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최현지가 바라던 것이었지만.
그러던 중 최현지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가…… 나이를 말했었나……?”
날이 저물고 있었다.
* * *
동안과의 불가침 조약 이후, 세력의 최고 수뇌부들은 거의 매일 같이 회의장에 모였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모인다 해도, 정답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시온의 자리는 공석이었기 때문일까.
벌써 세 시간째, 진행된 회의는 어제와 비교하여 전혀 진전이 없었다.
대응 방식에 대한 각자의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다.
만경 권력 서열 5위, 1군 지휘관이 각 간부들에게 말했다.
“방어에 집중해야 합니다. 추가로 성벽을 늘리거나 함정을 매설하여 적의 사기를 빠르게 떨어뜨리는 겁니다. 함정은 저희 측 전문가가 설치 중입니다. 노동부장님. 인원을 조금 더 빼주시죠. 지금 1군에 투입된 인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서열 4위, 노동부장은 곤란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거참. 형님. 무리라니까…… 우덜도 지금 화살 제작에 인력 부족해 가지고는 미치겄어.”
회의의 분위기는 정돈되지 않았다.
1군 지휘관과 노동부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간부들끼리의 이야기가 오갔다.
서열 6위, 2군 지휘관이 물었다.
“질서부장님. 근데 새로 유입되는 생존자들은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 겁니까?”
그녀의 질문에 서열 3위, 질서부장이 답변했다.
“현재로서는 노동부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습니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해야 하니까요. 말린 고기부터 페트병에 담긴 식수. 식량은 15일치 정도는 확보하고 있습니다.”
“몇 명 기준입니까?”
“현재 저장 식품은 상비군일 때를 가정하여 말씀드립니다.”
만경의 상비군은 2,000명 내외다.
“하지만 전쟁이 총력전으로 치닫게 된다면, 아무래도 그 정도의 보급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여자의 말을 듣고 있던 서열 3위, 최명준은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소리쳤다.
“아, 그래서 어쩌자고! 그냥 시발, 내가 가서 다 끝장낸다니까?!”
“제발 참으시죠…… 총대장님. 이건 정규 회의이지 않습니까…….”
옆에 있던 서열 8위, 질서부부장이 그를 말렸다.
하지만 최명준의 심술을 막을 순 없었다.
그는 애초에 이 자리가 마음에 안 들었다.
아직 시온이 오지도 않았는데, 저들끼리 먼저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형님도 없는데 뭔 놈의 회의. 벌써 며칠 째야! 쓸데없이 모이기만 하고 정답은 못 내놓고 있고.”
그때, 최명준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재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거슬렸던 것이다.
시온의 옆자리.
서열 2위, 진재희,
그녀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최명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자 아래로 그늘진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이, 양아치. 가만히 있지?”
그 말에 가만히 있을 최명준이 아니었다.
“뭐……? 양아치? 아이, 미친년이…… 너 진짜 한번 떠보자니까? 왜 자꾸 형님 믿고 설쳐?”
“죽인다. 그만해라.”
“와- 이 새끼……!”
벌떡-!
최명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진재희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1군 지휘관이 큰소리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만!”
1군 지휘관은 이곳에서 제일 나이가 많았다.
그러니 인생의 선배로서, 또 전쟁을 총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집중시킨 것이었다.
애초에 며칠 동안이나 결론을 못 낸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강시온은 결과를 원했다.
하지만 시온의 부재 탓인지 회의에서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군주님이 회의에 참석하셨다면…….’
지금껏 시온은 단호한 판단력으로 세력을 이렇게까지 발전시켰다.
시온이 없는 간부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질서부장은 시온의 힘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만하십시오! 저희가 일찍 모인 이유는 군주님께서 오기 전, 저희끼리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겁니다. 솔직히 각자의 임무가 바빠 이렇게 모이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말이에요. 적은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려고 하겠죠. 아무래도 보급이나 물자 면에서는 저희가 우세하니까요.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방어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3지역장님.”
“아, 예……!”
원래 만안 제3세력의 군주의 보직명은 ‘3지역장’으로 뒤바뀌었다.
세력 내 서열로는 13위였다.
“접경 지역에서 동안과 의왕의 전쟁을 직접 보셨을 텐데, 어땠습니까? 전사들은.”
“아……. 네…….”
3지역장은 고개를 푹 숙이며 그날을 회상했다.
3지역장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공포감이 느껴진 것이다.
“놈들은 잔혹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대를 계속 찌르고…… 사람 죽이는 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놈들은 소규모 단위로 몰려다니면서 학살극을 벌입니다. 그건…… 그건!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3지역장의 말을 들은 지휘관들은 묵묵히 그것을 받아 적었다.
3지역장의 말은 지금 지휘관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였기 때문이다.
현 지휘관들은 대부분 현대전에 어울리는 전술 지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대전과 무너진 도시 속의 전쟁 양상은 다르다.
짧은 시간 내에 적의 핵심 시설을 타격하는 것이 과거의 양상이라면, 긴 시간 동안 보병 위주의 전력으로 전투에 이겨 거점을 점령하는 것이 지금의 전쟁이다.
전쟁 양상은 완전히 뒤바뀌었지만, 그들은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쌓아 전략을 세워 왔다.
“지휘관님. 부대 개편은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까?”
질서부장은 1군 지휘관에게 물었다.
1군 지휘관은 그녀의 말에 곧장 대답했다.
“아, 예. 순조롭습니다. 방어 전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지휘관님. 방어 전력이라뇨?”
그때, 반대편에 있던 질서부부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부분의 간부들은 1군 지휘관의 ‘방어 소모전’ 전략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부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에 간부들은 서로 편을 나눠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니 단번에 치고 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오우거가 있지 않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상대의 전력은 최소한 우리의 세 배인데, 힘 대 힘으로서 부딪힐 순 없는 노릇입니다. 절대적으로 방어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아니, 부부장님. 방어야말로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저희 병사들의 강함은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최명준 대장과 그의 정예대를 보십시오! 적을 괴멸시키는 건 일도 아닐 겁니다!”
“그만!”
“그만할 것도 없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적은 일점 공세를 시작하여 단번에 만경으로 치고 들어올 겁니다. 그걸 이용해야만 합니다. 방어는 오히려 놈들이 원하는 거라니까요! 적의 중심 간부들은 분명 방어를 무너뜨릴 전력을 생산하고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믿어 주십시오! 1군 지휘관님! 적은 분명 우리가 ‘방어’만 하길 원할 테니까요!”
“……이봐, 당신! 아니, 강 대위!”
“강 대위라니……? 전 이제 2군 지휘관입니다! 1군 지휘관님.”
“난 군에서 대령까지 지내고 은퇴한 자라네. 그러니 내가 전투 경험은 더 풍부하지 않겠나?”
“1군 지휘관님이 하던 전쟁과 지금의 전쟁은 다르지 않습니까?!”
시온의 세력 내 간부들에게는 서열이라는 것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서로의 의견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애초에 ‘각 부’와 ‘군부’는 다르게 운영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열 순위가 낮더라도, 혹은 높더라도 서로에게 언성을 높이며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며칠 동안이나 서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각자의 의견만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결과를 내야 할 때였다.
‘그’가 회의장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끼이이익-.
“……?!”
“……군주님!”
“…….”
시온이 회의장에 들어서자, 시끄럽게 서로에게 큰소리치던 간부들은 모조리 침묵했다.
오늘 시온이 회의에 참석한다는 예고는 없었다.
시온은 갑작스럽게 회의를 점검하러 나온 것이었다.
군주의 등장에 모두가 죄지은 듯이 시선을 회피했다.
“…….”
시온은 이제는 고요한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에 간부들은 모두 시선을 떨구었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자, 시온은 천천히 회의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시온은 의자로 걸어가 천천히 앉았다.
다리를 꼬고, 턱을 괴어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간부들을 노려보았다.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서열 순위 20위권 내의 간부들도 서열 1위 앞에선 모두 주눅 들었다.
그리고 시온은 그들에게 싸늘하게 물었다.
“뭐 하는 겁니까?”
군주의 불호령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