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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는 나만 지킨다-70화 (70/221)

#제70화. 도시 속의 도시: 방랑자의 경우 (1)

시온이 피어 올린 수증기는 얼어붙은 도시 속, 유일한 희망이었다.

허름한 로브를 뒤집어쓴 방랑자는 무너진 도심 사이를 걸었다.

도시의 경계가 무너진 지,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필드에는 지금껏 적지 않은 플레이어가 어떠한 소속도 가지지 않은 채, 방랑자로서 필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경기 파주에서부터 내려온 방랑자는 서울을 거쳐 과천 안양 방면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끝없이 필드를 돌아다니던 방랑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곳이 있었다.

그것은 멀리서 보이는 도시였다.

“…….”

방랑자는 얼어붙은 승용차로 미어터지는 다리 위에서 하얀 눈과 초록 식물이 어우러져 있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2라운드가 거의 끝나면서, 도시에는 지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식물들이 피어올랐다.

그 크기와 생김새는 모두 기존 지구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한 건물을 전부 휘감을 정도로 거대한 넝쿨이나, 이끼처럼 축축하게 콘크리트에 퍼져 있지만 살아 있는 식물, 각양각색으로 피어 있는 꽃들까지.

그리고 그 도시의 한구석에선 수많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공장의 굴뚝과 같았다.

“뭐지?”

방랑자는 입술을 삐쭉 내밀곤, 안주머니에서 지도를 펼쳐 들었다.

얼어붙은 승용차 위의 눈을 쓸어버리곤 지도를 펼쳐 들었다.

“어디 보자…… 과천의 진혼, 동안의 전사들…… 그럼, 저기가 동안구인가?”

방랑자는 그곳이 동안구라고 생각했다.

경기 남부에서 봐 줄 만한 세력이라고 하면 과천의 진혼이나 동안의 전사들뿐이었다.

하지만 지도를 살피던 방랑자는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오잉? 동안구가 아니라…… 만안구인데. 저긴.”

혹시 동안구의 식민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잠깐 뇌리를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방랑자 커뮤니티.

이 세계에서 방랑자는 플레이어 중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있는 직업군이었다.

그 커뮤니티 속, 플레이어들은 각자 세상을 지배하는 핵심 세력에 대해 정보를 공유했다.

그리고 그중, 동안의 전사들도 정보 공유의 대상이었다.

동안의 전사들은 현재 의왕의 세력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고, 그녀는 그들의 지도 역시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곳은 동안의 전사들이 아니었다.

그녀가 모르는 독자적인 세력이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흠…….”

원래 방랑자는 동안을 거쳐, 의왕으로 내려가 최종 목적지인 수원으로 가려고 했다.

수원에는 정말 거대한 세력이 자리 잡고 있다고 했으니까.

수원은 수원화성을 수도로 잡고, 독자적인 사회 시스템을 구축한 곳이다.

게다가 그곳은 방랑자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외부의 개입을 극도로 경계한다고 했다.

하지만 저 연기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건 방랑자의 도리가 아니었다.

“가 볼까?”

방랑자는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모험심에 웃어 보이고는 펼쳐 든 지도를 안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그녀는 이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방랑자의 길이 언제나 그렇듯, 훼방꾼은 있기 마련이다.

-크르르르…….

쿵, 쿵!

네발로 기어 다니는 기괴한 생명체. 늑대를 연상케 했지만, 그 크기는 하마처럼 거대했다.

사람을 뼈째로 씹어 먹는다는 희귀한 몬스터, 핏빛 갈퀴의 울프족.

방랑자는 고개를 돌려 울프를 바라보았다.

“아, 여기는 울프족의 서식지구나!”

새로운 정보.

그 정보에 방랑자는 환호했다.

방랑자는 애초에 이 리그를 다른 군주, 플레이어와는 다르게 진행해 왔다.

방랑자들은 이 기상천외한 배경, 몬스터, 던전을 하나의 RPG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복전, 탐색전이 아닌 모험이 주된 목적이었다.

방랑자는 로브를 벗어 들었다.

그러자 갈색빛이 감도는 생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왔다.

세계가 멸망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현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허벅지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와 벨트, 상의는 털이 무성한 양털 야상 점퍼를 입고 있었다.

“이야. 벌써 재밌는데.”

스응-.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티팩트를 불러들였다.

그러자 거대한 날을 가진 검은 낫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크르르르…… 크아아아아아!!!!!

“…….”

서-걱.

그녀가 낫을 한 번 휘두르자, 울프를 포함한 그 뒤의 배경까지 단숨에 베어졌다.

* * *

방랑자 최현지.

그녀는 지금 만경의 출입국 사무소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도시 속 도시, 만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출입국을 거쳐야 했다.

출입국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길게 늘어진 줄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푸-.”

최현지는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담배를 물고 왼편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페인트로 새긴 낙서가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모든 이들이여, 노동은 신성한 의무이자, 우리를 구원한 대군주의 명령이다.

-꺼져라. 동안구의 졸개들.

-꺼져라. 관리자의 족속들.

마치 선전 포스터처럼 낙서가 건물 벽면에 크게 쓰여 있었다.

최현지는 고개를 살짝 틀어, 만경의 병사들을 살폈다.

식칼을 봉 대에 묶어 창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활을 든 궁수들도 보였다.

복장은 제각각이었지만, 공통점이라면 왼쪽 어깨에 빨간 천이 둘러져 있다는 것.

파란 천을 두른 병사들도 보였는데, 이는 소속을 의미하는 듯싶다.

‘체계적이네.’

방랑자의 의무는 정보를 습득하는 것.

최현지는 도시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곳저곳을 살피며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만경에 들어가기 위한 줄은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기어이 최현지의 차례가 오자, 그녀는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천으로 둘러싼 막사로 들어갔다.

여기서 단순 여행객들과 입주 희망자들을 나누는 모양이었다.

최현지를 맞이한 건, 어깨에 파란 천을 두른 어린 소녀였다.

14살에서 16살?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앳된 인상이다.

하지만 소녀는 최현지가 들어왔음에도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리스트를 살피고 있었다.

최현지는 담배를 버리곤 소녀 앞에 앉았고, 곧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

피곤에 찌든 소녀의 목소리.

최현지는 묵묵히 소녀의 물음에 답했다.

세력에 들어오기 위해 필요한 절차였으니까.

상당히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절차였다.

본래 직업부터 성별, 나이, 어디서 왔는지, 목적은 무엇인지.

소녀는 빼곡하게 최현지의 정보를 종이에 적었다.

“예상 거주 일수는?”

“어…… 음…… 몰라요?”

최현지가 두리뭉실하게 대답하자, 소녀는 그녀를 찌릿 노려보았다.

그러자 최현지는 하하하, 멋쩍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한 5일 정도……? 그 정도요.”

“……허리 세워.”

“네?”

“의자에 등 붙이고 허리 세우라고.”

“아…… 네.”

소녀의 말투는 차갑고 위엄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하윤하.

군주 강시온에 의해 고용된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하윤하의 능력은 머릿속에 정보를 차곡차곡 저장해, 도서관처럼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는 것.

그랬기에 그녀는 출입국 심사 관리소장으로 임명되어, 이곳에 오는 모든 인물을 관리 감독하고 있었다.

모두 강시온에 의해 주어진 임무였다.

최현지는 고분고분 말을 따랐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르라는 말도 있다.

대부분의 세력이 독자적인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기 때문에,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문화와 체계를 배워야 했다.

물론 이곳처럼 체계적이고, 꼼꼼한 곳은 처음이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출입국 심사라니.

하윤하는 계속해서 ‘만경’ 내에서 지켜야 할 ‘여행자법’을 말했다.

“만경 내에서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타인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거나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야간 통행 역시 금지되어 있다. 저녁 10시부터 해가 뜰 때까지가 야간이다. 허가된 일수만큼만 만경 안에 거주할 수 있다. 만일 위의 내용을 어길 시, 군주님의 칙령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만경 내에서는 화폐가 통용된다. 화폐는 이거.”

윤하는 오른손에 빨간 플라스틱 라이터를 쥐곤 자연스레 흔들었다.

최현지는 힐끔 라이터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이 라이터가 없으면, 만경 내에서는 거주가 불가능할 거다. 그러니 거주 희망자가 아닌 방랑자를 대상으로 마련된 제도가 있지.”

“오…… 뭔데요?”

이 도시엔 방랑자의 개념이 잡혀 있었다.

이는 군주가 시스템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사실 이렇게 도시를 가꿔 놓은 것만 보더라도, 이곳의 군주가 얼마큼 능력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최현지는 이 세력의 군주가 누군지 궁금했다.

윤하는 두 손가락을 깍지 끼고선 말했다.

“물물교환이다. 바로 이 몸이. 네가 가지고 있는 물품 중 쓸 만하다고 판단되는 걸, 이 라이터와 교환해 주지.”

“오…… 라이터 하나의 값어치는 얼마나 되는데요?”

“배식을 한 번 받을 수 있을 정도.”

“흐음~”

최현지는 라이터를 바라보며 화폐의 가치를 가늠해 보았다.

라이터 하나에 배식 한 번.

그렇다면 만경 내에서, 이 플라스틱 라이터의 값어치는 대략적으로 국밥 한 그릇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듯싶었다.

최현지는 원래 세계에서도 국밥 가격을 기준으로, 국밥보다 싸면 저렴한 식단, 국밥보다 비싸면 고급 식단으로 분류했었다.

최현지는 소녀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좋아요. 제가 이래 봬도 방랑자 중에서는 꽤 인지도가 있거든요? 어디 보자…… 뭐가 좋을까…….”

최현지는 자신의 커다란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방랑자 중에서도 꽤 상위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는 능력자였다.

그랬기에, 경기 북부, 서울, 이곳 안양에서 값어치가 있을 만한 물건들은 잔뜩 가지고 있었다.

텅.

그리고 최현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카세트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추가로 카세트테이프까지 3개.

“이건 어떠신가? 구미가 좀 당기시나?”

더 이상 전기가 보급되지 않은 세계에서 카세트와 카세트테이프는 고가로 거래되는 품목이었다.

게다가 최현지가 가지고 있는 카세트테이프는 비교적 최신곡이 저장되어 있는 한국 가요 100선.

접수원 하윤하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

윤하는 책상 위의 카세트를 바라보다 헛기침을 해 댔다.

아무래도 놀란 듯 보였다.

사실 이런 고가의 아이템 같은 경우, 최현지는 철저하게 아끼는 편이었다.

정말 불리한 상황이거나, 급전이 필요할 때나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궁금했다.

이곳 만경.

이런 도시를 구축한 군주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인지.

“……조, 좋아. 이건 인정하지.”

윤하는 카세트를 자신 쪽을 가지고 오며, 주섬주섬 라이터를 세기 시작했다.

역대 최고 금액이 책정되었다.

* * *

출입국 심사를 빠져나온 최현지는 곧바로 이곳에서 카세트를 팔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우와…… 야하하하……! 이야……!”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건, 만경의 중심 상가였다.

중심 도로의 인도에서는 주민들이 돗자리를 깔거나 불을 피우거나,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양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옛 빌라촌은 이제 사람들의 거주 공간이었다.

창틀에 이불 같은 것을 말려 놓거나, 빨래를 털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최현지가 만경에 온 것이 일주일 중 유일하게 휴식일이었던 일곱 번째 날이었으니.

이미 거리에는 수많은 도시의 주민들이 가득했다.

“와. 진짜 대단해. 저건 뭐야. 설마 우물인 거야?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했어? 어머. 어머. 어머.”

최현지는 처음 유원지에 놀러 온 아이처럼 도시 이곳저곳을 살피며 구경하고 있었다.

돗자리 상인의 물품들을 살피던가, 길거리 음식들을 살피던가.

그녀가 가장 놀랐던 건, 더 이상 이곳의 주민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는 것이다.

모두 이곳의 군주가 해낸 업적일 터.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입국관 하윤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최현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 이 몸은 오늘 바쁜 날이거든? 그러니까 빨리 배정된 방으로 가지?”

“야-! 서, 설마! 여기 목욕탕도 있어?”

최현지는 목욕탕이라고 표시된 푯말을 보곤 놀라 물었다.

그러자 하윤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이곳 만경에는 없는 것이 없지. 모두 대군주님, 강시온 님께서 지난 1년 동안 이뤄 낸 업적들이야. 너도 지내다 보면…….”

“야-! 여기야? 내가 묵게 될 숙소?”

낡고 해진, CE 편의점 간판 위에 ‘방랑자 숙소’라고 빨간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계산대에는 주름이 가득한 노파가 소설책을 읽고 있었고, 원래 진열대가 가득해야 할 공간에는 이제 대기 의자와 작은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다.

“어. 그래…… 거기 맞다.”

하윤하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천천히 방랑자 최현지에게 다가갔다.

2층은 식당, 3층부터 5층까지는 숙소로 이용되었다.

이곳은 만경의 주민이 아닌 자들이 머물게 되는 숙소로, 원래 모텔 건물이었다.

최현지는 어느새, 카운터에서 노파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303호. 돈.”

“얼만데요?”

“6개.”

“일박에요?”

“그래.”

“와- 양아치. 국밥 6그릇?”

“싫으면 저 사람들처럼 골목에서 판자 덮고 자든가.”

노파의 말에 최현지는 반대편 골목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자신과 같이 다른 도시에서 이곳으로 온 방랑자들이 골목에서 모닥불을 피워 둔 채, 시시덕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최현지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라이터가 가득 담긴 자루를 내밀었다.

철크덕-!

한눈에 봐도 엄청난 양.

“……?”

노파는 깜짝 놀라, 최현지를 올려다보았다.

최현지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대충 10박. 음식은 주겠죠?”

“……그려. 하루에 한 번이지만. 저녁 6시다. 시간은 마을 중앙 광장에서 확인하고.”

“오케이~”

10박이면 라이터 60개, 국밥은 60그릇.

도시를 조금 둘러본 최현지는 확신했다.

이곳에 좀 오래 머물고 싶다고.

이 도시를 만든 군주와도 만나고 싶었다.

하루 이틀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최현지는 다시 그만큼 라이터를 건네었다.

제일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근데요. 할매. 우리 거래 하나 합시다?”

“……뭣이여?”

라이터를 세고 있던 카운터 노파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최현지를 노려보았다.

최현지는 힐끔, 하윤하를 확인하고 소녀가 이쪽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소곤거렸다.

“이 도시의 군주…… 아, 그러니까. 강시온이라고 했나?”

“어허-! 님을 붙여야지?! 이곳에선 군주님의 존칭을 함부로 불러선 안 돼.”

“아하하. 그래요. 그래. 강시온 군주님. 그 강시온 군주님에 대해서, 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업적이라든가. 뭐…… 이력 같은 거?”

지금 최현지는 너무나 궁금했다.

도대체 이런 도시를 만들어 낸 강시온이라는 남자가 누구인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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