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겨울나기 (2)
“저, 정말 대단하십니다. 관리자님.”
뒤따라오던 김수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내게 말했다.
난 여전히 차트를 뒤적이고 있었고, 그의 말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보일러 건설을 위한 내부 구조를 계획한 뒤, 전반적인 일정을 김수경에게 설명했다.
내일부터는 일반 노동자를 추가로 모집해서, 본격적으로 보일러 시공을 시작할 것이다.
김수경은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며 중얼거렸다.
“말만으로도 사람을 설득할 수 있군요……. 저, 저 말입니다. 조금 뜬금없지만, 면접 학원 같은 데 가면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특강 들은 적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무원 준비 전에 말입니다. 관리자님은 그쪽으로 진로를 잡아도 괜찮으실 것 같은데요? 약간 강사 느낌.”
정말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김수경이 내게 하는 이유나 목적에 대해 생각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차트를 겨드랑이에 끼우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30분.
무언가를 추가로 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6시면 경찰서 수뇌부들에게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서 보고해야만 했다.
난 계단 층 앞에 멈춰 선 김수경에게 말했다.
“김수경 씨.”
“예. 관리자님.”
김수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대답했다.
“내일까지 도와주셔야만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신체 건장한 사람들로만, 그러니까 남녀노소 불문입니다. 차트상에서 인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인원이란 인원은 전부 내일까지 표시하세요. 총원 812명이었죠?”
“아, 맞습니다.”
총원 812명.
오늘 추가로 들어온 인원이 몇 명일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쇼핑몰 내부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였다.
쇼핑몰에서는 정말 간단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것도 하루가 꼬박 걸렸으니.
수백 명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건,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가능하시겠어요?”
솔직히 하루 만에 이 정도의 업무를 처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경찰서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인원들을 조사하고, 따로 분류하고, 표시까지 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그와 난 오늘 처음 만났다.
그러니 그가 400명 정도만 조사하더라도 좋은 일이었다.
김수경은 내가 건네는 차트를 받고선 얼떨떨하게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네. 하겠습니다. 내일 점호 전까지 실시하면 되는 일이죠?”
“그렇습니다. 부탁드릴게요. 해야만 합니다. 내일부턴 정말 바빠질 테니.”
“알겠습니다. 관리자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수경은 차트를 조금 넘겨보더니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걸어갔다.
조금 걷는가 싶더니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일 것이다.
800명을 하루 만에 조사하려면.
난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다 다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고 시간이었다.
난 5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5층에는 이미 많은 시민들이 추가로 들어온 식량을 배식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줄의 맨 앞 열에는 이청춘 경사도 보였다.
하루 동안 보지 않았을 뿐인데, 그가 오랫동안 보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오늘 하루가 유난히도 길었다.
난 나열된 줄 사이를 지나 간부 회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고민도 않고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들은 밥을 먹고 있었다.
오늘 정찰조가 가지고 왔던 식품 중 가장 신선한 것을 수뇌부가 먼저 챙겼던 것이다.
“아, 왔습니까. 우리 관리자 씨.”
길인호 시 의원이 먼저 반응하여 내게 말했다.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고 있던 수뇌부들도 하나둘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난 밥을 먹고 있던 그들에게 말했다.
“지하 유치장을 개방해 주십시오.”
길인호가 내가 작성한 계획서를 들고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소시지를 입에 털어 넣었다.
“허허, 하루 만에 뭔가를 요구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하지만 뭐. 강시온 씨니까.”
그리고 그것을 좀 오물오물 씹더니 내게 말했다.
“근데 유치장은 왜요?”
“작업에 필요한 재소자들을 차출할 생각입니다.”
그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경찰서장이 거들었다.
“허어…… 그건 안 됩니다. 재소자들은 헌법에 따라 형이 확정되지 않거나 교도소로 이동하기 전까지는 유치장에 있어야만 합니다. 제소자들이 그곳에 있는 건, 대한민국 법에 따른 일입니다.”
경찰서장이 말하는 동안, 길인호 시 의원은 묵묵히 밥을 먹고 있었다.
예상했던 반박이었다.
하지만 경찰서장의 성격을 고려해 미리 대응책을 생각해 두었다.
“하지만 서장님. 우리가 구조된 이후를 생각해 주십시오.”
“구조된 이후라니요?”
그가 묻자, 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유치장에 가 봤습니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더군요. 재소자들이 처벌받아 마땅하다는 서장님의 생각에 저도 백번 동의합니다. 하지만 구조된 다음 재소자들 중 한 명이라도 그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 밝혀지면? 재소자 관리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경찰서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알기 쉬운 남자였다.
그리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어떻게 서장의 자리까지 올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 잠깐. 알 것 같았다.
지금처럼 길인호 시 의원과 같은 권력자에 붙어서 자신의 몫을 속속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나 풀어 줄 순 없을 노릇이죠. 저희가 재소자들을 아직 그곳에 둔 이유는 하나입니다. 경찰서 내부의 질서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서죠. 경찰의 본분은 관리 책임이라기보다는 질서를 유지하는 거잖아요. 맞죠?”
길인호가 티슈로 입 주변을 닦아 내며 말했다.
역시 길인호는 호락호락한 남자가 아니었다.
“전원 해방은 안 됩니다. 그 분류는 저희 측 수사관이 하도록 하죠. 하지만 기본적인 대우는 해 주도록 하죠. 일반 시민과 같이 식료품과 의류,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청소도 좀 하고요.”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결국 재소자들의 자유를 허락받았으니.
그리고 나는 그 건달만 있으면 되었다.
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2층, 3층을 시민들의 거주 공간으로 만들 겁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인력들의 거주 공간을 한 공간으로 축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층에서 공사를 시작하면 그 층에서 생활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공권력을 빌려달란 말씀이신가요?”
그 질문을 던진 길인호는 계획서를 옆에다 밀어 놓곤, 차가운 콩나물국을 플라스틱 수저로 떠먹었다.
“예.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시민들은 좁은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계신데, 이 이상으로 좁게 생활하면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을까요?”
국을 떠먹은 길인호가 날 노려보았다.
“관리자의 가장 큰 책임은 바로 폭동이 일어나지 않게 중간에서 잘 조율하는 것입니다. 알잖습니까?”
“관리자에게 추위를 해결해 보라고 얘기한 것도 바로 어제의 의원님이셨죠.”
그 말에 길인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곤 킁킁거리며 콧물을 두 번 삼켰다.
이곳에는 등유 난로가 있어, 어느 정도 포근한 온도였다.
요즘에는 꽤 희귀한 자원이었지만, 이곳의 수뇌부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인호는 입을 쩝쩝거리더니 이쑤시개로 이빨 사이에 낀 콩나물을 떼어 내며 말했다.
“좋아요. 한번 해 보세요. 이제 하루뿐인걸요. 생각이 있으신 것 같은데, 책임은 모두 본인이 지겠다고도 했으니, 한번 본인 생각대로 해 보세요.”
난 그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놈의 책임, 책임, 책임.
원래 그 자리가 책임을 지는 곳이 아닌가.
왜, 높으신 분들은 책임지는 자리에 있으면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다.
이번 보고에서 얻어야 할 건 얻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파이팅하세요. 시온 씨.”
문고리를 잡은 내게 길인호가 말했다.
난 그의 말에 고개를 살짝 숙이곤 회의실을 나왔다.
끼익-, 텅.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차가운 한기로 인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난 차가운 한기를 맞으며 방으로 걸어갔다.
하루가 지났다.
종일 정말 많은 것을 손보았다.
그럼에도 아직 남아 있는 많은 일들을 보면, 지금까지 얼마나 개판으로 세력을 운영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서장과 의원의 무능함이 절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시민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으니.
내일부턴 더 바빠질 것이다.
* * *
파아아앗-!
진재희의 손아귀에 다시금 빛이 일렁였다.
빛은 점점 형태를 가지며 검의 형상을 갖추었다.
꼬박 9시간 연속된 훈련.
시온이 종일 경찰서를 돌아다니는 동안, 진재희는 아티팩트 구현 훈련에 열중했다.
그녀의 몸은 이미 땀으로 가득했다.
지력을 이끄는 힘은 단순하면서도 힘든 과정을 겪어야 했다.
지력도 결국 시스템이다.
인간에게 내재된 이계 능력은 본래의 인간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명상, 집중.
인간은 이 두 가지 수련 방식을 통해 지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시스템 내부에서 내재된 입력값에 따라 인간의 몸에서 열이 나게 된다.
“후…….”
진재희는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다 검이 형상되기 전 이만 정신을 놓아 버렸다.
스르륵- 풀썩!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져 옆으로 쓰러져선, 거친 숨을 내뱉었다.
“하아, 하아.”
진재희는 추욱 늘어진 빨래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추운 날씨가 계속되는 와중에, 이런 명상, 집중을 통해 체온을 유지하려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건 미련한 짓이었다.
왜냐하면 추위로 느끼는 고통보다, 지력 부작용이 훨씬 더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오고, 온몸의 땀구멍에서는 땀이 흘러나오고, 입을 다물 수도 없어서 병신처럼 벌리고만 있어야 했다.
그게 지력 수련이었다.
끼익-.
그때, 방문이 열리며 시온이 들어왔다.
시온은 슬그머니 추욱 늘어진 진재희를 바라보다, 반대편 침대에 걸터앉았다.
“뭐야? 훈련?”
시온은 보기만 해도, 상대가 어떤 상태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진재희는 턱과 혀를 움직이며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아니…… 아냐. 그냥 아직 한참 부족해.”
진재희는 힘겹게 상체를 올렸다.
회귀자라 가능한 회복력이었다.
일반인이 지력 수련을 시작하면 며칠 동안은 꼼짝하지 못한다.
시온은 차트를 가만히 살펴보다 말했다.
“결과를 내기 위해선 지루한 과정이 따르잖아.”
“……응.”
“그러니 조금만 참아.”
시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그 말이 그녀에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는 시온은 모를 것이다.
진재희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2L 페트병에 담긴 눈을 녹인 물이었다.
시온은 차트를 옆에 내려놓고, 퀘스트 창을 열었다.
그리고 퀘스트 창 너머의 진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꼴딱, 꼴딱.
얼마나 더운지, 겉옷도 벗은 채였다.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도 상의는 검은 탱크톱, 하의는 카고팬츠뿐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길게 다리를 뻗은 진재희는 패트병에 든 물을 꿀떡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목부터 쇄골까지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까지 땀에 젖어 있는걸 보니, 어지간히 더운 모양이었다.
“퀘스트 창 보고 있는 거야? 진전이 있어?”
진재희는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물을 훔치며 물었다.
시온은 그제야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둬 퀘스트 창을 살폈다.
[퀘스트: 정부의 개]
[업적 달성:
●시민들의 안락함 수치 30% 이상 달성 (현재 수치 2%)
●지속적인 식량 보급 경로 해결 (0/1)
●경찰력 내부 가용 노동력 수치 100% 달성 (현재 수치 37%)
★ 보상: 업적 포인트 - 150 ]
‘안락함 수치는 하락했고, 가용 노동력은 상승했네.’
시온은 퀘스트 창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만약 수치가 0%가 된다면 퀘스트 실패가 되어 버리는 거야?”
“응. 몇 퍼센트 남았는데.”
“2.”
“조금 위험하네.”
“별수 없어.”
“내가 도울 일은 없을까?”
진재희는 다시 추워졌는지, 윗옷을 여미며 그에게 물었다.
“있어. 하지만 아직은 아냐.”
“뭔데?”
시온은 퀘스트 창을 닫았다.
적어도 남은 2퍼센트를 지키기 위해선 내일 유의미한 결과를 내야 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들의 생활이 분명 나아지고 있다는 걸 남은 시민들에게 알려야 했다.
“사냥에 나설 거야. 널 제외하고 한 명 더 봐 둔 사람이 있어. 내일 오전에는 나와 같이 지하실 좀 같이 가자. 네 의견도 묻고 싶어.”
“사냥?”
“응.”
시온은 다시 진재희를 바라보았다.
진재희는 야상 소매 쪽으로 팔을 집어넣고 있었다.
시온은 그녀를 보며 말을 맺었다.
“몬스터 사냥.”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