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겨울나기 (1)
시온은 계단을 따라 1층에서부터 걸어 올라왔다.
1층 로비, 그곳에는 김수경이 불러온 30명 남짓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하나같이 추위에 떨며 초췌한 얼굴을 하고선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입구 쪽은 유리문에 불과해서 그 틈 사이로 찬바람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모여 있는 시민들이 뿜어내는 입김은 마치 흡연장을 연상케 했다.
“모두 모인 건가요?”
시온은 그들을 줄 세우고 있는 김수경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는 사람들을 열을 맞춰 세우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옙. 말씀하신 전문직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다 모였습니다. 추가적으로 관리자님께서 동그라미로 쳐놓은 인원들은 좌측 일 열에 배치했습니다.”
그는 시온에게 마치 직장 상사를 대하듯이 깍듯하게 대했다.
이곳은 사회생활을 하는 공간은 아니었다.
그저 살려고 발버둥 치는 작은 생활 집단에 불과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기존 세계의 잔상을 쉽게 떨쳐 내지 못했다.
이 모든 역경을 이겨 내면 다시 봄이 찾아오고, 출근길에 나서며, 학교에 가고, 주말이면 가족들이랑 놀러도 가는 그런 삶을 아직까지도 꿈꾸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이제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진재희가 그 증거였다.
이 수백 명의 사람들 중,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건 강시온과 진재희뿐이었다.
시온은 차트를 살피다 이름을 불렀다.
“이종철 씨.”
“예. 접니다.”
보일러 전문 기사 이종철이 열 한가운데에서 손을 들며, 대열로부터 힘없이 걸어 나왔다.
이종철은 유일하게 보일러를 다룰 줄 아는 전문직 기사였다.
그가 앞서 걸어 나오자 시온은 물었다.
“보일러 다룰 줄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만.”
“저쪽으로 가시죠.”
“…….”
이종철은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다 이내 시온을 불렀다.
“저기요. 관리자 양반.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경찰서장은 관리자를 한 명 배치했으며, 지금 이곳의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전문가를 배치했다고 했다.
이곳 경찰서에선, 시민들에겐 적어도 서장의 명령이 절대적인 힘이었다.
1라운드부터 이곳에 있었던 사람은 물론이고,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까지.
사람은 자신을 지켜 주는 존재에 대해 충성을 다하고, 복종한다.
왕국이 생겨난 고대의 인류 역사 속에서 이는 증명되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새로 임명된 관리자라고 하는 눈앞의 학생은 믿음직스럽지 않게 보였다.
시온은 너무나도 어려 보였고, 사회 경험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자신들의 목숨을 좌우할 관리자라니.
제아무리 서장이 인정한 능력자라고 할지라도, 시온이 썩 믿음직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저기. 관리자 양반.”
이종철은 강시온을 한 번 더 불렀지만, 시온은 그저 차트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시온은 이종철의 말이 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노동자 개개인의 대화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한가롭게 이야기나 하고 앉아 있을 여유 따윈 없었던 것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선 시간이 부족했다.
1분이 아까운 시간, 시온은 자신이 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시온이 대답하지 않자, 이종철은 아랫입술을 까득 물었다.
추위 탓에 아랫입술은 건조했고 버짐이 피어 있었다.
‘이놈도 결국 서장과 똑같은 놈이야. 우릴 모두 죽일 놈들……!’
쥐고 있는 권력을 내려놓지 않고, 자신의 마음대로 하는 권력.
이종철은 서장의 통제, 관리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종철은 힘없이 지정된 장소로 걸어갔다.
“다음 최세헌 씨.”
시온은 계속해서 노동 가치에 따라 사람을 분류했다.
핵심이 되는 노동 계층, 그러니까 겨울나기를 위한 작업 전문가를 최상위 계층으로 분류했고, 그 밑으로는 보조, 막일 등으로 나눴다.
크게 두 가지 기준을 두고 나눴다.
첫 번째는 보일러와 관련된 난방 전문가.
두 번째는 세공에 관련된 손재주를 요구하는 전문가.
현 강시온 관리자 체제 아래에서 보일러 관련 전문가가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다.
시온은 그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쥐여 줄 생각이었다.
보상이 없다면 일의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분류를 마치고, 강시온은 이종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종철 씨.”
“예.”
이종철은 강시온의 부름에 또다시 힘없이 손을 들어 보였다.
몇 명의 사람들이 땅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고, 시온의 시선은 그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시온은 이종철에게 말했다.
“보일러를 재가동할 겁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시온의 말에 이곳에 있는 모두가 놀랐다.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김수경 순경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없는 지금, 이곳은 전기와 수도, 가스까지 안 나오는 데다 하루에 한 끼 챙겨 먹기도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보일러를 재가동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건, 이종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이종철은 물끄러미 시온을 바라보다가 이내 조금 웃어 보였다.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말도 마소. 관리자 양반. 도시가스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데, 도대체 어떤 보일러를 가동할 생각이오? 게다가 경찰서는 난방 자체가 건물 바닥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난방 기구를 사용하는데.”
“연통을 꼭 바닥 전체에 깔아 둘 필요는 없죠. 당장은 거주 층만을 그렇게 만들 겁니다.”
시온은 그의 말에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자 이종철 역시 곧바로 대답했다.
“말도 안 되오. 그러면 바닥 시멘트를 다 들춰내야 할 것인데, 그만한 인력과 장비를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시간도 오래 걸릴 거요. 그리고 우리 상태를 보면 모르겠소? 지금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상태란 말이오. 우린 나약한 시민일 뿐이요.”
“누가 바닥을 다 드러낸다고 합니까?”
“뭐요?”
강시온은 그의 말을 끊으며 경찰서 밑바닥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경찰서 밑바닥은 시멘트와 강판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것을 사람의 힘으로 떼어 낸다고 하면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그건 지금이 평시라고 할지라도, 중노동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온이 생각한 방식은 바닥 면을 전부 드러내지 않아도 되었다.
“이 바닥에 연통을 놓고선 그 위에 합판을 깔 겁니다. 그렇다고 바닥 전체에 연통을 놓는다는 것이 아니라 보온 역할만 하면 될 테니, 층당 3줄 정도의 연통이면 될 겁니다. 급하면 합판은 안 깔아도 됩니다. 우리는 아파트와 같은 난방이 아니라 적어도 사람이 얼어 죽지 않을 정도의 따뜻함을 원하는 거니까요.”
“……이 바로 위에?”
“그래요. 연통은 근처 아파트에서 채집하고. 가열 통은 1층에 설치할 겁니다. 연통 채집을 위한 채집조를 제가 따로 모집하겠습니다. 그리고 합판과 같은 경우에도 만안구 일대를 뒤지다 보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겠죠. 널리고 널린 게 합판이니까요.”
시온이 생각한 계획은 간단했다.
보일러의 가동 원리는 물을 가열하여 발생하는 따뜻한 증기를 연통으로 보내, 바닥을 따뜻하게 데워 주는 것이다.
이렇게 방 안을 일정한 온도로 유지시킨다면, 겨울을 무난하게 보낼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만약 연통을 모아 경찰서 내부, 정확히는 시민들의 거주 구역 바닥에 깔아 놓는다면 임시적인 난방 수단을 확보할 수 있을 터다.
시온의 이 계획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지만, 두 가지의 큰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를 이종철이 콕콕 집어냈다.
“연통은 내구성이 약해서 일반 성인이 조금만 뛰어도, 금방 찌그러지거나 터질 겁니다. 그러니까 보온 유지에도 힘들겠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가열과 펌프요.”
“…….”
시온을 포함한 모두가 이종철을 주목하고 있었다.
“어떻게 연통을 가열할 생각이오. 가스도 안 들어오고, 애당초 그 정도 양의 물을 가열할 에너지원도 없는데. 또 어떻게 가열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펌프는 전기에 의해 작동되는 방식이오. 전기가 아니면 펌프는 움직이지 않소. 펌프가 작동되지 않으면 보일러는 쓸모가 없지. 나도 그런 것들을 여기에 있는 동안 생각했는데, 안 될 것 같아서 침묵했소만…… 후우…….”
이종철은 말을 끝까지 잇고는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그는 긴 문장을 말할 때 숨이 차 보였다.
체력적으로 이미 거의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시온은 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두었다.
가장 단순하고도 직관적인 방식을.
“사람이 할 겁니다. 단열, 가열, 펌프. 그 모든 걸.”
“……?!”
모두가 그의 말에 놀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니, 가능하다고 해도 이 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도대체 몇 명이나 그 작업에 필요할 것 같소……? 수십 명이요. 수십 명. 보일러 하나에.”
“예, 할 겁니다. 그것이 수백 명일지라도.”
강시온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시온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온은 고개를 살짝 좌로 기울이며 이곳에 모인 모두를 압도했다.
“……아님, 얼어 죽든가요.”
시온은 그들에게 분명히 전했다.
난방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여기 있는 모두는 결국 다 죽을 것이라는 걸.
그렇기에 보일러 하나 가동하겠다고 수십 명 아니, 백 명 이상이 필요하다고 해도 시온은 감행할 것이다.
애초에 지금 화장실 물을 확보하기 위해 투입된 인력만 수십 명이다.
그것도 경찰 병력들로만.
그 정도 인력에 추가 인력이 보일러에 투입된다면, 보일러를 가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강시온의 계획이었다.
쓸모없는 작업에 투입된 인력들을 쓸모 있는 작업에 교체 투입시키는 것.
그리고 자세한 사항은 앞에 있는 이종철과 상의를 해 봐야 되겠지만, 인력으로 가동시킬 수 있는 전체적인 보일러 제작법도 생각해 두었다.
시온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곳의 노동자들에게 똑똑히 말했다.
“만약 할 수 없다면, 어쩔 겁니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죠. 여러분들, 아직 현실 파악이 잘 안 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린 살아남을 겁니다. 이 건물, 이 도시에서. 그러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눈을 퍼서 가열해 물을 만들고, 연통을 이어서 보일러와 연결시키고, 그렇게 이어진 연통을 다시 이어 가열 통까지 연결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일러가 완성되면, 난방이 될 것이고, 추위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가 단결할 수도 있구요. 그렇게 우리는 이 겨울을 날 것입니다.”
단 한 번도 표정을 누그러뜨린 적이 없었던 시온이 그 말을 한 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시온은 고개를 숙였다.
조금 숙인 것이 아니라, 거의 90도에 가깝게 숙였다.
강시온은 노동자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의 힘이 절실합니다.”
충분히 이렇게 고개를 숙이지 않더라도, 시온은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였다.
마치 경찰서장처럼 그저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고개를 숙였다.
시온이 원했던 건, 강제에 의한 어중간한 노동력이 아니었다.
시온이 원했던 건, 살고자 하는 의지와 단합, 그리고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그 행동력에서 발생하는 열정적인 노동력이었다.
그리고 강시온의 생각은 옳았다.
“아…….”
“하아-. 이것 참.”
강시온의 진심에 그곳에 있던 노동자들이 하나둘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그들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무언가라도 하지 않는다면, 정말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저들에게 남은 건, 그들을 단 하나의 행동으로 이끌어 줄 원동력뿐이었다.
그리고 시온은 그들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침묵하던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선 말했다.
“종철 씨. 함 해 보입시더. 이거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예? 저번에 종철 씨가 나한테 했던…… 거 뭐냐.”
“계획. 계획 말이야.”
한 사람이 말하자,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이 소리쳤다.
“맞네. 종철 씨가 보일러에 관한 계획을 조금 짜 두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요. 완전 불가능한 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저 학생처럼.”
“여기서 다 죽을 순 없어요! 저 학생 말대로 해 봅시다! 예?!”
“언제까지 구조대만 기다리고, 언제까지 경찰만 주구장창 믿을 순 없잖아! 그래! 함 해 보자고!”
“얼어 죽을 순 없죠! 안 그래요? 여러분!! 자, 일어납시다!”
시민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그들이 소리치는 와중에도, 강시온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이종철은 주변에 의기투합한 시민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강시온을 바라보았다.
“하아…….”
이종철은 마른 입가를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솔직히 강시온이 자신에게 말했던, 그 모든 것들은 차마 불가능하다고 확정 지을 수 없는 것이었다.
불가능했더라면, 이종철은 그의 의견을 일축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점들에 대해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안해 준다면, 이종철은 얼마든지 다시 검토해 볼 생각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의견이 교환되면 계획은 분명 더욱 정교해질 것이다.
솔직히 이종철은 답답했다.
그간 추위 때문에 고통받는 시민들을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에 답답했다.
하지만 이 순간, 강시온을 만나자 그의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주위에서 하나둘 참을 수 없어 일어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중심의 이종철.
아직까지도 고개를 숙인, 관리자 강시온.
이종철은 굴복할 수 없었다.
“……그래요. 한번 해 봅시다.”
시온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계획대로 모두가 의기투합하여 들고 일어났다.
기존의 경찰 방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리더를 향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지금은 이곳에 모인 수십 명뿐이지만, 보일러를 완성하는 순간 시온의 지지율은 솟구칠 것이다.
물론 보일러 가동에 관한 과제가 우선이겠지만, 지지율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여기저기서 소리치는 노동자들을 바라보며 시온은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곳의 겨울나기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 시작은 강시온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