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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는 나만 지킨다-37화 (37/221)

#제37화. 칙령 (2)

경찰서 내 최고 권력자는 경찰서장임에는 틀림이 없다.

대부분의 조직이 격변 이후로도 기존의 위계질서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김동길이 그랬고, 지금 이곳의 경찰서장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결코 기존의 위계질서만으로는 지금 세상에서 버틸 수 없다.

이렇게 변화된 세상 속에서 어떻게 기존의 리더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괜찮겠어? 나도 같이 갈까?”

곁에 있던 진재희가 시온에게 물었다.

시온은 이런 일까지 진재희가 따라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온은 그녀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냐. 먼저 가 있도록 해.”

“정말 괜찮겠어?”

진재희는 걱정되는 듯 다시 물었다.

시온은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끄덕였다.

“응.”

그녀의 걱정을 뒤로하고, 시온은 이청춘을 따라 계단에 올랐다.

그 뒷모습을 진재희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만안 경찰서, 5F.

“이쪽입니다.”

이청춘은 앞장섰다.

난 그를 따라 걸었다.

우리가 걸을 때마다 주변 경찰들이 힐끗거리며 쳐다보았다.

날 보는 것이 아닌, 이청춘 경사를 보는 것이었다.

이청춘을 따라 5층 내부 회의실로 향했다.

길게 늘어진 복도 끝에는 회의실이 하나 있었다.

그 앞에는 순경 한 명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순경은 이청춘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 다가왔다.

“반장님. 살아 계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어. 그래. 안에 서장님 계시지?”

“예.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이청춘은 서장실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의 습관인 듯했다.

그리고 날 한 번 돌아보곤 서장실 문을 열었다.

끼익-.

그곳은 회의실이었다.

방을 가득 채운 의자에는 경찰서 간부들이 앉아 있었다.

화이트보드에는 이름들이 가득했고, 책상에는 서류로 만들어진 인적 사항들이 가득했다.

만안 경찰서뿐만 아니라, 근처 지구대에서 이곳으로 온 지구대장들, 시민 대표들도 이 자리에 있었다.

개중에는 꽤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안양시 의원, 길인호.

길인호는 서장 옆에 앉아선 이곳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안양시에 속한 높으신 분들은 대부분 이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이청춘은 서장에게 경례했다.

“충성.”

“오. 청춘아. 너.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중앙에 앉아 있던 서장이 벌떡 일어나선 단숨에 달려왔다.

이청춘 경사를 와락 안은 서장은, 다시 그를 바라보며 어깨를 토닥였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정말 다행이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문제없습니다.”

“그래. 앉아. 어디 따뜻한 거라도 좀 내주고 싶지만. 미안하다. 지금 상황이 그렇게 좋지가 않아서.”

“문제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고맙다. ……근데 이분은?”

서장은 그제야 내게 관심을 보였다.

이청춘 경사는 나를 서장에게 소개했다.

“정찰 팀원 중 한 분입니다. 이번 정찰 원정에서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셨죠.”

“아. 감사합니다. 제 부하를 지켜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서장은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난 서장의 손을 쥐었다.

차가웠다.

언젠간 제거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니, 지금 마주 잡은 이 손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나만 느끼는 감정이겠지만.

“강시온입니다.”

“시온 씨. 이리 들어오세요. 제가 자리를 하나 내드려야겠네요.”

서장은 달려가 자신의 의자를 끌고 와선, 입구 쪽 테이블에 나를 앉혔다.

그리고 서장은 접이식 플라스틱 의자를 가지고 와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어느 정도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고, 곧 서장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근데 시온 씨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서장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청춘이 서장에게 먼저 말했다.

“강시온 씨를 내부 관리자로 임명하는 게 어떨까 싶어, 서장님께 모셔 온 겁니다.”

“관리자?”

난 두 경찰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시온 씨를?”

서장은 의아한 듯 되물었지만, 이청춘은 단호했다.

“예. 확실합니다. 정말 잘할 겁니다. 침착함, 문제 해결력, 그리고 리더십까지. 저번에 시민분들 중에 관리자분을 선별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물론 그랬지. 네가 말하는 거면 난 무조건 신뢰한다만은.”

서장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듯이 날 쳐다보았다.

그리고 서장의 눈은 힐끗거리며, 자꾸 의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저 남자가 저 자리에 앉아 있는 순간 깨달았다.

길인호 의원.

광복절이나 새해가 되면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인사를 나누는, 그럴 때마다 활짝 웃고 있는 의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정부에 속한 사람으로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정부가 해결할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신의 게임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할,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저 재난이라고 치부할 부류가 저런 정치인들이다.

정치인, 그중에서 안양시 의원의 힘은 여기서 큰 힘을 지닌 듯했다.

“글쎄요. 어떨까요?”

끼이익-.

길인호 의원이 자세를 고쳐 앉으니, 의자의 경첩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길인호는 내게 물었다.

“강시온 씨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스물입니다.”

“대학은요?”

“고등학교 중퇴입니다.”

중퇴 이야기를 듣자마자 길인호는 내게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도 반말로 답해 주었다.

“직업은?”

“일용직 노동자.”

“혹시 부모님은 무얼 하나?”

“돌아가셨어.”

“사람을 통제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관리자의 직책을 맡을 수 있을까요? 회계나, 운영, 기타 전산 같은 거. 아…… 그러니까 뭐 그건 못하겠구나. 고등학교 중퇴자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흠. 그럼 수학 같은 건 하실 수 있나? 덧셈? 뺄셈? 식량 조달처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어요. 아님, 식수 조달? 눈만 삽으로 퍼 녹이면 되니까. 일용직 노동자는 삽질을 잘하잖아요.”

“…….”

난 길인호의 마지막 말에 침묵했다.

고아, 고등학교 중퇴자, 일용직 노동자.

날 수식하는 그 단어들.

지금 눈앞의 기성세대들에게는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것들이었다.

대부분이 경찰 간부 출신.

왼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의사일 것이다.

시 의원은 두말할 것도 없고.

시민 대표로 앉아 있지만, 저 사람이 입고 있는 옷과 시계만 하더라도 이전에 어떤 위치를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사회의 기성세대들과 나는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었다.

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러 왔지만, 그들은 내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내 말을 듣지 않아도, 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낼 테니.

하지만 이곳에서 유일하게 날 감싸고 드는 존재가 있었다.

“의원님. 강시온 씨는 위기 대처 능력과 두뇌 회전이 뛰어납니다. 그건 방금 전 제가 경험했기에 감히 여러분들께 장담할 수 있습니다. 아티팩트 개방이 이제 몇 시간 안 남은 이 시점에서, 강시온 씨만큼 이 내부 상황을 깔끔하게 해결해 줄 인재는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

길인호 의원은 고개를 조금 쳐들곤 거만하게 이청춘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손가락을 툭툭거리며 책상을 두드렸다.

무언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정장 속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길인호는 담배 끝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어떤 권한을 원하십니까?”

길인호는 다시 존대하며 내게 직접 말을 건넸다.

이청춘이 대신 말하지 말고, 내가 직접 자격을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바라던 바였다.

“현재 내부 관리는 누가 하죠?”

“이 회의실에서 진행합니다.”

난 길인호에게 물었고, 그는 곧장 답했다.

“임무가 부여된 인원은 없고요?”

“표면적으로는 서장님께서 총책임을 맡고 있습니다만. 경찰관들은 모두 개인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원리 원칙에 따라서 말이죠.”

어느새 회의실 내부는 길인호가 내뿜는 담배 연기로 자욱해졌다.

이곳에선 오직 나와 길인호의 목소리만 오갔다.

“재난 상황 발생 시, 경찰 내부의 행동 강령은 무엇입니까?”

난 서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서장은 길인호의 눈치를 조금 살피다, 내게 말했다.

“재난 매뉴얼 말이죠? 우선적으론 통제입니다. 경찰은 재난 상황에서 폭동이나 범죄로부터 시민들의 질서와 안전을 보장해야 합니다. 지금 상황으로선 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본부와의 교신을 계속해서 시도 중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민을 노동력으로 사용하지 않고, 방치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난 곧바로 되물었고, 서장은 두세 번 헛기침을 하더니 시선을 회피했다.

알 것 같았다.

만약 이런 상황 속에서 시민을 노동력으로 사용하여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그 책임은 모두 서장이나 의원이 지게 된다.

그건 재난 상황에서 경찰관이 할 수 있는 조치가 아니다.

법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민주 국가에서 경찰은 일반 시민에게 명령할 수 없다.

또한 시민은 경찰의 명령을 거부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

재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찰은 시민들에게 권고할 수 있을 뿐, 강제할 수 없다.

만약 강제로 노동력을 차출하거나, 권고를 무시한 시민을 응징한다면, 법의 처벌을 받게 된다.

경찰은 법에 의해 움직이는 집단. 즉, 이들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지 못한다.

경찰서장과 의원이 나란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게 저희도 지켜야 할 원칙이 있기 때문에.”

“도대체 뭘 알고서 이야기하는 건지…….”

경찰서장과 안양시 의원.

두 명 모두 이 사태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정상화된 이후, 여기서 벌어진 일에 대해선 자신들이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은 아직 정부가 기능하고 있고, 법이 지켜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난 몇 번의 대화를 통해, 둘의 생각을 읽어 냈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책임지기 싫죠?”

그 말에 두 남자 모두 깜짝 놀라며 날 바라보았다.

나 역시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이대로 가다간 우린 다 죽는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날은 더욱 추워지고 있고, 정체불명의 괴물들은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식량. 도시에 남아 있는 식량으로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1년? 아니, 제가 볼 때엔 한 달도 못 버틸 겁니다.”

끼익-.

몸을 조금 뒤척일 때마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구조대와 정부 지침을 기다리는 건 좋습니다. 그건 재난 매뉴얼 상의 원칙이기 때문에 경찰들로서는 당연히 따라야겠지요. 그건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 집단은 괴멸하고 말 것입니다.”

물론 난 ‘구조대’나 ‘정부’가 아직까지도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이런 단어들을 꺼냄으로써, 그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들의 권력을 이용하려면, 우선 그들의 방식을 어느 정도 수긍하는 척을 해야 했다.

“여러분들은 시민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어요. 구조 이후, 정부에선 이번 사태의 책임자를 찾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여러분들은 책임을 피하고 싶을 겁니다.”

이제껏 날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도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권력을 사용할 줄 모르고 도망가기에만 급급한 사람들.

그들의 자존심을 긁는 말이었다.

시 의원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면서 말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니 묘수가 있나 보지요?”

그의 말은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시 의원까지 된 남자가 일용직 노동자 출신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알량한 자존심보다, 당장은 시 의원으로서 자신이 가진 권력이 욕심날 것이다.

난 그 권력욕을 이용할 것이다.

“제가 책임지죠. 그러니 앞으로 모든 내부 권한을 제게 주십시오.”

난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자연스레 풀며 말했다.

길인호는 날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조금 웃어 보였다.

“시온 씨가 뭔데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서 당신이 책임지겠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그래요, 뭐. 그럼 시온 씨. 제 말 잘 들어봐요. 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비하하는 것 아닙니다만,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비하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시온 씨는 고등학교 중퇴자에, 나이도 어리고, 일용직 노동자에다가 부모도 없는데,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이제까지 사회에서 당신은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죠? 이전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이 지금 여기서 어떻게 책임을 지신다는 거죠? 언론과 시민들이 당신을 믿을까요? 당신이 이곳에 있던 모든 일들의 책임자라고 하면 그대로 믿겠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강시온 씨. 저희를 납득시켜 보란 말입니다.”

회의장에 있던 모두가 날 돌아보았다.

난 손가락 끝에 있는 작은 상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긁혔는지도 모를 상처.

무언가에 베여 있었고, 피는 나지 않았다.

난 그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납득.”

재밌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이 회의실에 온 순간부터, 그들이 며칠째 회의만 하고 있는 상황까지.

혹시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내가 그들을 납득시킬 상황은 아니었다.

책상에 즐비하게 놓여진 생존자 목록.

그리고 그들은 그 목록과 함께 화이트보드에는 몇 명의 이름도 적혀있었다.

그들은 이미 책임자를 선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십 명이 죽었다.

경찰 내부적으로도 1라운드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저들 입장에선 위법을 저질렀다.

표면적으론 사람들을 규합하고 보호하고 있지만, 사실 이건 보험에 불과했다.

경찰 수뇌부는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과 책임질 수 없는 죄에 대해서.

화이트보드에 적힌 몇 명의 이름 중에는 날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청춘 경사의 이름도 보였다.

“당신들이 오히려 나에게 부탁해야 하는 입장 아닌가요?”

그때,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은 거짓말처럼 모두 상기되었다.

마치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간단했다.

화이트보드에 적힌 시민의 이름.

회의.

생존자 명단.

그들이 대화를 유도하는 방법.

길인호는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지만, 책임은 다른 사람이 지도록 유도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 했다.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다른 시민을 한 명 꼽자니, 주어지는 권리를 남용할 가능성이 있고.

그 와중에 이청춘 경사, 그들로서는 나름 믿음직스러운 인물이 추천한 인물.

그게 바로 나였으니까.

그들의 입장에서 난.

천재일우.

굴러 들어온 떡.

건방진 꼬맹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지금은 재난 상황입니다. 이전에 내가 뭘 했건, 어떤 위치에 있었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저 밖에는 괴물이 떠돌아다니고, 괴물들은 권력이 있던 없던, 강하던 약하던, 상관없이 사람들을 죽입니다. 이런 상황에선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이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능력은 높은 학벌이나 고귀한 신분이 아니라 당장 밖으로 나가서 먹을 것을 구해 오는 능력이니까요. 당신들은 그저 제 능력을 인정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처럼 고등 교육을 받고, 높은 위치까지 오른 사람이 내 능력을 인정해 준다면, 모두가 납득할 겁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제겐 권한이 생기고,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게 되겠지요.”

나는 일부러 그를 은근히 높여 주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 부하들이 가득한 장소에서 무시를 당하는 것이었으니.

난 그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척을 했다.

내가 원하는 결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난 그제야 길인호를 마주 보았다.

길인호는 어느새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는 담배 끝이 말려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담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맺었다.

“우리 솔직해집시다. 당신들은 그냥 꼭두각시가 필요한 거잖아요?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꼭두각시. 내가 그 꼭두각시가 되겠습니다.”

모두가 침묵했다.

아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길인호의 답을 기다렸다.

그의 대답만 있으면 되었다.

이곳에 온 순간 알았다.

표면적인 권력은 경찰서장이 쥐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이곳의 지휘자는 안양시 의원 길인호였다.

길인호는 담배를 재떨이에 넣어 툭툭 비벼 껐다.

어느새 그의 재떨이에는 담배가 산처럼 쌓아 올려져 있었다.

끼익-.

길인호는 거만하게 의자를 뒤로 젖히고는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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