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추위
이청춘의 정찰 팀은 두 시간 동안이나 눈을 파내며 나아가 겨우 목표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매일 같은 거리를 정찰했지만, 밤 동안 계속해서 쌓인 눈은 정찰을 나설 때마다 또 파 줘야 했다.
그랬기에 정찰 팀의 선두 세 명은 삽을 가지고 계속해서 눈을 퍼내고 있었다.
중노동에 가까운 작업을 하며 그들이 나아가는 곳은 안양시 내부의 가장 큰 상권이었다.
안양일번가.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시기는 해가 정오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를 가는 추위 속에서 정오의 해는 그들에게 일말의 휴식을 제공해 주었다.
본격적으로 일번가에 들어가기 전, 이청춘 경사는 팀원들에게 휴식을 부여했다.
그들은 휴식을 취할 때면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거리는 괴물 놈들이 즐비했으니까.
‘후우.’
이청춘은 담배를 몰아 피우며 창밖으로 펼쳐진 일번가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오늘로써 안양 최대 상업 지구에 들어가게 된다.
지금까지는 이 일대에서 식량을 수색해 조달했지만, 이제부턴 좀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했다.
하루가 다르게 시민들이 늘어났지만, 식량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믿을 것은 정찰 팀뿐이었다.
그들이 성과를 내야만 했다.
이청춘은 세계가 멸망해 버렸더라도 경찰로서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경찰의 임무가 곧 시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
이청춘은 담배를 다 태운 뒤, 사람들에게 전진할 것을 명령했다.
촤륵-!
이청춘은 삼단 봉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휴식을 마친 인원들은 상권가에 진입할 각오를 다잡았다.
이곳은 최대 식량 요충지인 만큼 괴한이나 괴물의 수가 여타 다른 곳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로지 이청춘의 생각이었지만,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식량이 많다는 건, 그걸 노리고 있는 포식자들도 많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이청춘은 건물 코너에 몸을 바짝 붙여선 넓디넓은 8차선 도로를 살폈다.
적막, 고요.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 소리.
고요는 곧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 수십 명의 경찰관 동료들이 순직했다.
국가 비상사태에 고귀한 희생이었다.
하지만 이청춘은 더 이상 동료를 잃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일번가 상권 안의 식량들을 확보해야만 했다.
이청춘의 심장이 미친 듯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두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렸고, 숨소리는 거칠어졌다.
지금 당장 죽을 수 있다는, 생명체라면 어쩔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하는 거야. 할 수 있어. 하자.’
그가 긴장한 채로 벽에 바짝 달라붙어 있으니, 한 남자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는 강시온이었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두려움 따윈 없었다.
“어엇. 자, 잠깐!”
이청춘이 그를 막았지만 이미 강시온은 일번가 도로에 발을 딛었다.
강시온이 먼저 8차선 도로에 들어섰고, 그 뒤로 진재희가 따랐다.
두려움 따윈 없는 모습에 이청춘은 벽면에 기댄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왼편 눈밭으로부터 수 갈래로 뻗어 나오는 촉수들이 보였다.
솨사사사삭-!
지금껏 동료 경찰들을 죽였던 괴물이었다.
이청춘은 깜짝 놀라선 앞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두고 소리쳤다.
“위험해!”
그의 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닿기도 전에 촉수는 빠르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의 소리침이 무안할 정도로.
서걱-!
진재희는 날아드는 촉수를 검으로 담백하게 잘라 냈다.
말 그대로 담백.
단 한 번의 휘두름이었고, 그녀의 검날에 촉수들은 힘없이 고꾸라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허…….”
그 진귀한 장면에 이청춘은 허탈할 뿐이었다.
* * *
처음으로 들어간 곳은 알바생이 계산대 위에 죽어 있던 일번가 초입의 편의점이었다.
이청춘은 편의점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무전기를 사용해 본부와 교신했다.
한 30분이 지났을까.
포대 자루를 가득 짊어진 사람들이 눈밭을 헤치며 걸어왔다.
이곳까지 눈을 파며 오는 건 수 시간이 걸렸지만, 그 길을 따라오는 이들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포대 자루를 짊어진 경찰, 시민들이 식량을 차례로 담았다.
작은 편의점 하나를 털어 가는 데에는 1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청춘의 말로는 편의점 하나가 경찰서 전체 인원의 하루 식사량과 같다고 했다.
난 그 말을 들으며 계산대를 바라보았다.
진재희는 진열대의 담배를 보루로 챙겨 가방에 넣고 있었다.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모든 주머니에 담배를 구겨 넣었다.
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청춘에게 다시 물었다.
그는 어느새 담배 한 까치를 물고 있었다.
“식량 조달에 들어가는 인력들이 얼마나 됩니까?”
내가 묻자, 이청춘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이내 담뱃재를 털어 내며 대답했다.
“한 마흔 명쯤 됩니다. 그중 경찰관은 스물아홉 정도 되고요. 총 2개 팀으로 나뉘어 있어요. 정찰 팀과 식량 팀. 2개 조로 되어 있고, 각 조는 대략 10명쯤 됩니다.”
그의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난 그 연기를 들이마시곤 기침을 해 댔다.
담배 연기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청춘은 몸을 돌리며 내게 사과했다.
“아, 미안합니다. 제가 원래 담배를 안 피우는데…… 이것 참.”
그는 나보다 연장자인데도 불구하고 몸을 돌려 담배를 피워 댔다.
난 그런 그를 두고 손사래 쳤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서에 관련된 구조를 자세히 알고 싶은데.”
“서…… 말씀이십니까?”
“예. 경찰들은 첫 라운드를 어떻게 끝내셨는지.”
솔직히 이곳에 온 뒤부터 계속해서 궁금했던 내용이었다.
각각의 건물이 다른 주제를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건물만 1라운드를 면제받은 것도 아닐 텐데.
경찰서에 속한 경찰관과 민원 시민들은 대부분이 살아남은 것처럼 보였고, 전투의 흔적도 없었다.
시체와 전투, 혈흔이 가득했던 쇼핑몰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청춘은 담배를 문 채로 조금 생각하더니 이내 답했다.
“투표를 했습니다.”
“투표요?”
“예. 어떻게 해야 할지. 뭐. 그런 거요.”
칙.
이청춘은 피우고 있던 담배를 편의점 유리문에 비벼 꺼트렸다.
그는 이젠 날 돌아보고 있었다.
그는 허리에 두 손을 짚더니 편의점 바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건달을 죽였습니다. 셋째 날에요. 왕을 찾아내는 거야 저희 형사들이 취조가 전문 아닙니까. 다행스럽게도 유치장에 있던 건달이 왕이었고, 우린 저항하는 그를 죽였습니다. 저희도 이 상황을 단순한 테러나 누군가의 장난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모두의 의견을 수렴해서 서장님께서 결정하신 사항입니다.”
“그렇군요.”
그는 담뱃갑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돌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난 그의 앞을 막아섰다.
난 그를 올려다보았고, 이청춘은 조금 당황했는지 동공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두 번째는요?”
공개되지 않은 왕.
흑 팀의 왕에 대해선 듣지 못했다.
이청춘은 내 눈동자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건 말씀드리고 싶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그는 억지로 돌아 바깥으로 나갔다.
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로서는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었다.
이 경찰들이 도대체 얼만큼의 정의감을 가지고 있는지.
경찰들의 입장에서 난 살인자다.
쇼핑몰에서 수십 명의 사람을 죽였고, 권총으로도 사람을 죽였다.
경찰은 날 체포해야 마땅하고, 난 경찰서에 있어선 안 될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기는 확률적으로 힘들다.
과연 경찰들은 우릴 범죄자로 볼까, 아님 일반 재난민처럼 볼까.
지금 그의 행동을 비추어 볼 땐.
그들 역시 무언가 꺼림칙한 것이 있어 보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오히려 일이 쉬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난 그를 따라 편의점을 나섰다.
그곳에는 어느새 식량을 가득 담은 포대 자루 수십 개가 쌓여져 있었다.
사람들은 등에 그것을 들쳐 메곤 하나둘 경찰서로 움직였다.
눈밭이 가득한 도로.
그곳에 긴 행렬이 이어졌다.
* * *
식량 분배 권한은 오로지 담당 경찰관에게 있다.
우선권은 정찰에 나갔던 시민과 경찰관에게 있었다.
또 정찰 팀에 속한 사람들은 일반 시민과는 별개로 화장실, 식품 스틱을 한 개씩 추가로 받고 있었다.
수당이었다.
적어도 이 경찰서 내부에서 플라스틱 스틱은 화폐로써 사용되고 있었다.
스틱의 개수는 1000개에 육박했고, 근처 문방구에서 공수한 것이라고 했다.
아이들 장난감이라고 하는데, 어떤 놀이를 위한 장난감인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식량에 대한 가치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컵라면 하나가 스틱 하나일 수도, 유통 기한이 지난 도시락 하나가 스틱 하나일 수도 있었다.
2라운드가 시작된 후, 경찰들은 하루 이틀 대가 없이 나눠 주기도 했지만, 통제를 위해 현재와 같은 방식을 취했다.
경찰서장의 방침이었다.
정찰이 끝나는 오후 5시 무렵이 되면, 5층에는 일렬로 긴 줄이 이어졌다.
종일 굶은 사람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고, 악취 또한 엄청났다.
“화장실 문제가 가장 심각합니다. 먹는 것이 없으니 변 같은 경우는 적더라도, 소변 문제가 심각해요.”
일렬로 늘어진 줄 옆으로 이청춘 경사가 오르며 말했다.
그 뒤로는 강시온과 진재희가 뒤따르고 있었다.
“저희 정찰 팀이야 뭐. 정찰 나가면 화장실을 해결한다고 하지만, 이곳 내부에선 매일 같이 눈을 녹여 그것을 정화 시설에 투입해야 되기 때문이죠. 그것이 수십 명이면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아시다시피 이곳에는 741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길게 늘어진 줄을 모두 무시하고, 제일 앞 열로 다가갔다.
정찰 팀의 특권이었다.
먼저 음식을 선점할 수 있는 권리.
소란스러운 분배소 안에는 이번 정찰에 나섰던 사람들이 음식을 고르고 있었다.
음식은 창고에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대부분이 내부 처리 업무를 담당하는 경찰관에 의해 정리된 것이었다.
강시온은 탄수화물이 풍부한 도시락을 골랐고, 진재희는 냉동 편의점 생닭을 골랐다.
이청춘은 그중 빵을 집어 들었다.
“그렇다고 외부에서 무분별하게 방뇨를 할 수도 없죠. 통제가 안 되니깐요.”
이청춘은 자리로 돌아가 열쇠로 개인 서랍을 열어 빵을 그곳에 넣었다.
이청춘은 강시온, 진재희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어찌 되었건, 시온 씨. 그리고 재희 씨는 정찰 팀을 계속한다는 말씀이죠?”
“예.”
시온은 대답했고, 재희는 고개만 끄덕였다.
“어디 보자.”
드르륵-.
이청춘은 다른 서랍을 열어 그곳에서 서류철을 꺼내 손가락에 침을 몇 번 손가락에 묻히더니 서류들을 넘겼다.
그리고 휘갈겨 쓴 이름들 가장 끝에 모나미 펜으로 그들의 이름을 적었다.
시온은 힐끗거리며 정찰 팀 명찰을 살폈다.
빗금이 쳐져 있는 몇몇 이름들이 보였다.
정찰 도중 사망한 인원들이었다.
이청춘은 그들의 이름을 적고선 간단한 인상착의, 개인 정보를 기입했다.
그리고 둘에게 손을 내밀었다.
먼저 시온이 그의 손을 쥐었고, 이어서 재희가 쥐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위험한 일은 경찰관들이 우선적으로 처리할 것이니, 너무 염려 마시고.”
“예. 잘 부탁드립니다.”
“정찰은 아침 점호 이후 매일 07시에 출발합니다. 지금은 휴식을 취하세요. 체력을 보충해야 뭐라도 하니까요.”
“예. 그러죠.”
강시온과 진재희는 그렇게 길게 늘어진 줄을 피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청춘은 의자에 몸을 누운 채, 물끄러미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독특하네.”
이청춘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질문이 많은 법이다.
강시온 역시 질문이 많았다.
하지만 다른 생존자들은 ‘언제 구조될 수 있을까.’, ‘정부는 어떤가.’, ‘경찰 내부에서는 현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가.’에 대해 묻곤 했다.
물론 그것이 정상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강시온은 그러지 않았다.
두려워 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이런 재난을 미리 예방해 두었던 사람처럼 차분했다.
이청춘은 처음에는 진재희에게 유독 눈이 갔지만, 이젠 강시온에 더 눈이 갔다.
이번 정찰에서 보여 준 강시온의 대범함.
그리고 진재희의 검술 능력.
‘주목할 필요가 있겠어.’
그는 페트병에 담긴 차가운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식도까지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경찰서 내부인데도 불구하고,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나왔다.
* * *
만안 경찰서, 2F.
햇빛이 사라지고 도시에 어둠이 드리우면 이곳 거주지는 달빛에 의존하여 살아갔다.
간혹 촛불을 꺼내 드는 사람이 있었지만, 촛불은 불어오는 한기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찬바람이 유리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곳곳에서 기침 소리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추위는 지독했다.
몇몇은 모르는 사람끼리도 몸을 바짝 밀착시켜 서로의 체온을 유지했다.
발밑에 있던 두 노부부가 오들오들 떨며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도시락 속 얼어붙은 쌀알을 오독오독 씹어 댔다.
노부부는 골판지를 바닥에 깔고 있었고, 두꺼운 패딩 하나로 추위를 버티고 있었다.
그 누구도 노부부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조차도.
이곳에서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건, 같이 죽자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곳은 곧 버티는 것이 일이었다.
난 주위를 힐끗거리며 살폈다.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경찰의 질서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라고.
질서가 무너지면 지도자가 새로 선출된다.
단번에 지도자에 오를 순 없겠지만, 점차 입지를 다잡아야 했다.
우선 쇼핑몰에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신임을 얻어야만 했다.
오독.
쌀알을 씹으며 방법을 생각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오직 나만을, 내가 없으면 안 될 환경을 만들 하나의 방법을.
“강시온.”
침낭을 펼치고 있던 진재희가 날 불렀다.
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건 어디서 난 거야?”
“아까 오면서 군인들의 수송 차량에서. 하나밖에 없었지만, 이거라도 어디야.”
“어.”
진재희는 이곳으로 오는 도중 수송 차량을 얼쩡거렸다.
“거기서 군장 안에 있던 여러 물품들을 챙겨 놨어. 야전삽, 침낭 그리고 이거.”
스응-.
달빛에 반사된 칼날 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군용 단검이었다.
“날이 갈려 있어서 날카로워. 사람의 피부쯤은 그냥 뚫을 수 있을 거야.”
진재희는 그 군용 단검을 내게 건넸다.
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안쪽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난 마지막 남은 쌀알과 얼어붙은 소세지를 입 안에 넣었다.
입천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침으로 살살 녹여 먹을 생각이었다.
침낭 안을 정리하던 진재희가 그곳에 들어가 누웠다.
나 역시 그 옆에 누웠다.
입고 있던 패딩 속으로 코를 밀어 넣었다.
그럼에도 몸 구석구석에 찬바람이 송송 들어왔다.
그때, 진재희는 내 왼 팔뚝을 툭툭 건드렸다.
“들어와. 핫 팩 두 개 터트렸어.”
“뭐?”
“그렇게는 체력과 체온을 완전히 보존할 수 없어.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훈련에 들어갈 거야. 오늘 정찰로 대충 어디서 훈련을 해야 할지는 정해 놨어. 넌 체력을 보충해야 해. 미리 말하지만, 난 훈련에 있어서 봐주는 것 따윈 절대 없어. 그러니까 오늘 침낭을 구한 건 정말 운이 좋았어. 따뜻하게 자야지 체력이 회복되니까.”
그 말에 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침낭을 힐끗 훑고는 말했다.
“좁을 것 같은데.”
“괜찮아. 네가 작아서.”
진재희는 침낭 안에서 얼굴만 내민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난 조금 생각하다, 이내 그녀의 침낭 속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패딩을 벗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좁았다.
퀘퀘한 침낭 냄새, 옅은 담배 냄새, 피 냄새도 조금 나는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을 맡으며 침낭 안으로 더욱 몸을 파고들었다.
침낭 안은 그녀가 터트린 핫 팩 덕분에 무척이나 따뜻했다.
침낭에, 핫 팩에, 사람의 몸까지 닿으니 온도가 유지되었다.
마치 안락한 요람에 몸을 담은 것 같았다.
추위뿐인 건물에서 이 작은 침낭 안은 유일한 안식처였다.
우린 서로 반대 방향으로 누웠다.
무슨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오랜만의 안락함에 잠이 쏟아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