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경계의 너머 (1)
“겨울.”
난 K의 말을 나지막이 읊었다.
겨울은 오랫동안 생명체를 괴롭혀 왔다.
겨울은 생명체에게 혹한의 추위와 죽음을 불러왔다.
곤충은 겨울이 되기 전에 생을 마감하고, 몇몇 포유류는 잠자는 것으로 겨울을 보낸다.
근대까지만 하더라도, 아니 현대의 몇몇 지방은 아직도 겨울이 죽음의 계절이란 것은 변함이 없다.
당장의 내 삶도 마찬가지다.
상수도가 얼거나 난방이 되지 않아, 잠을 잘 때에도 패딩을 입고 몇 겹의 이불을 덮거나.
아니면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흐르게 하여 동파를 방지했다.
노인은 어떤가.
노인은 더더욱 겨울이 혹독할 것이다.
독거노인의 사망률은 겨울이 가장 높다.
이처럼 겨울은 생명체에게 죽음을 의미했다.
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하나의 작은 눈 결정이 손가락에 떨어져 녹아들었다.
도로에는 온갖 동사한 인간들이 가득했다.
차 안에서 자신의 아이를 끌어안은 채, 죽은 여자.
가로등을 난로 삼아 끌어안고 있다가 눈에 파묻힌 청년.
어떤 이유인지 모두가 앉은 채로 얼어붙은 사람들.
그리고 가로등에 목매달아 죽은 시체까지.
그것이 타인에 의한 것인지, 자살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로등에 일부러 올라가 자살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이 거리에도 ‘군주’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아-.”
숨을 내보내자, 새하얀 입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무언가 부스럭거림이 느껴져 땅을 바라보니 그것은 손가락이었다.
손가락이 얼어붙어 지르밟기만 하더라도 쉽게 으스러졌다.
우리가 쇼핑몰에서 지낸 지 7일.
그사이 세계는 격변해 있었다.
“이번 겨울은 지독하고, 지루할 겁니다.”
K가 눈이 쌓인 아스팔트 보도에 한 발자국 딛으며 말했다.
그녀는 이내 뒤돌아 나와 눈을 마주했다.
“어찌 되었건, 여러분들은 1라운드를 무사히 통과하셨습니다. 이제 2라운드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도록 할게요. 2라운드는 1라운드와 비슷하지만, 목표가 있어요. 그건 바로 얼어붙은 도시에서 살아남는 것.”
서벅 서벅.
K는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한 발자국 디딜 때마다 눈이 푹푹 꺼졌다.
“그거 아세요? 아직 시간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먼 고대의 인류는 겨울이란 계절이 언제 끝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답니다.”
K는 선 채로 얼어붙은 소년 동상 앞에 섰다.
소년은 입을 벌리고 있었고, 갈피 잃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랬기에 겨울은 하나의 재앙으로 다가왔죠. 어쩌면 겨울은 지구가 내린 시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만이 살아갈 수 있는, 자격 있는 존재만이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자연의 시련.”
그리곤 K는 그 소년의 머리에 몸을 기대었다.
“여러분들이 버텨 낼 수 있을까요? 지금껏 안락한 난방 속에서 살아온, 안전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던 여러분들이 말이죠.”
우직!
그 순간, K가 기대고 있던 소년의 목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소년의 목은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그 목의 단면에는 얼어붙은 피가 뭉쳐 있었다.
“어머. 엄청 약하네.”
K는 태연하게 반대편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자동차에 기대선 말을 이었다.
“아티팩트를 개방하죠. 2라운드부터는 플레이어 개개인의 아티팩트가 개방됩니다.”
우웅-.
K의 오른손에 작은 큐브 박스가 떠올랐다.
큐브 박스는 그녀의 손 위에 붕 떠올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티팩트는 선택받은 플레이어들만이 얻을 수 있는 신의 선물. 각 등급별로 S급 능력부터 F급 능력까지 있어요. 그렇다고 능력을 너무 낭비해선 안 될 겁니다. 대기 시간이 있기 때문이죠.”
그 순간, K의 큐브 박스가 정사각형의 여러 작은 박스들로 갈라지더니 이내 허공에 떠올랐다.
갈라진 박스들은 하늘 높이 흩어지더니 그중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아티팩트는 2라운드를 시작한 지금부터 일주일 이내에, 에리어에 포함된 선택된 플레이어에게 일괄 지급됩니다.”
그 박스 너머로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은 K가 보였다.
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K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플레이어.”
눈앞에 있던 박스는 자연스레 인벤토리로 들어갔다.
말을 마친 K는 안개처럼 몸이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기우우우우우우웅-!
익숙한 울음소리에 난 큐브 박스를 손에 올려 두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고래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몸은 고래였지만, 지느러미가 8개나 달려 있다.
그 지느러미가 나비의 날갯짓처럼 나풀거리며 고래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고래의 눈동자.
쇼핑몰에서 봤었던, 검은 연기로 뒤덮인 창문에 비친 그 검은 눈동자였다.
그곳에선 공포의 존재였지만, 지금 이 순간 고래는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한평생 이토록 아름다운 생명체는 처음이었다.
울음소리와 생김새, 그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고래는 건물 사이를 날아가다 이내 반대편 산자락으로 넘어갔다.
우리 모두가 고래가 사라질 때까지 그것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 * *
쇼핑몰의 생존자들은 다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각자 두꺼운 옷을 갖춰 입고 필요한 물품들을 챙겼다.
시온은 몇 겹이나 겹쳐 입고, 그 위에 하얀 패딩을 입었다.
거기까지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1층에 모였다.
이주연은 살아남은 여중생에게 빨간 목도리를 둘러 주며 말했다.
살아남은 청 팀 아저씨를 죽였던 그 어린 소녀였다.
“언니랑 같이 갈래?”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주연은 조금 안타까운 듯 침묵하다 이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어디 갈 데라도 있니?”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씩씩한 모습에 주연은 웃었다.
세범은 두꺼운 패딩을 주워 입고 스포츠 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모두 쇼핑몰 안에 있던 상품들이었다.
그리고 주연에게 말했다.
“가자. 누나.”
“어, 응. 갈게.”
주연은 세범에게 다가가면서도 남겨진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소녀는 묵묵히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서, 그곳에서 주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범은 쥐고 있던 다른 스포츠 가방을 주연에게 건넸다.
주연은 말없이 그것을 건네받곤 길을 나섰다.
그곳에는 강시온과 진재희가 있었다.
세범이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우린 북쪽으로 갈 거야. 집이 서울이라.”
“그래.”
시온은 별 관심이 없는 듯, 무뚝뚝하게 답했다.
사실 그는 어서 빨리 헤어졌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동생을 찾으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세범은 재희와 시온을 번갈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세범은 그의 무뚝뚝함에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간다.”
세범은 그 말을 끝으로 주연과 함께 길을 나섰다.
남매의 발자국이 두 줄로 남았다.
곧 남매는 반대편 거리로 사라졌다.
아마 국도를 따라 올라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시온은 쇼핑몰 입구에 남겨진 빨간 목도리의 소녀를 한 번 돌아보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진재희가 말없이 그를 따랐다.
* * *
나는 도로를 따라 대교를 넘고 있었다.
대교라고 해도, 기찻길을 넘기 위해 만든 2차선 도로로 이어진 차도였다.
하지만 그 차도의 중간 부분이 완전히 무너지고 그 위로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당장 한 발자국을 내딛기 전까지는 바닥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난 조심스레 한 발자국씩 걸었다.
그럴 때마다 뒤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거리의 군주가 있을 거야.”
진재희는 내가 대답하든 안 하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1라운드 때 건물이 아닌 거리로 잡힌 무리들. 그들이 아마 2라운드에선 가장 큰 세력일 거야. 솔직히 이렇게 대놓고 거리를 걷는 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 둬.”
난 그녀의 말을 들으며 눈밭을 걸었다.
아니.
사실 듣기보단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우선은 거점을 잡아야 할 텐데. 아무래도 방어하기 어려운 큰 건물보단 작은 빌라 같은 것을 거점으로 삼는 것이 좋아. 2라운드부터는 1라운드와 비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완전히 양상이 달라질 테니까.”
푸욱-!
갑자기 발이 푹 꺼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의 중심을 잃었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눈앞은 낭떠러지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내 몸은 공중에 붙들린 채, 떨어지지 않았다.
“…….”
숨을 고른 뒤, 고개를 돌렸다.
진재희는 내 팔을 잡고 버티고 있었다.
목소리 크기로 봐선, 꽤 멀리서 따라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진재희는 내게 다가와 몸을 잡아 주었던 것이다.
진재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조심해. 기존의 세상이라고 생각해선 안 돼. 하나씩 알려 주긴 하겠지만, 몇 년이 걸려도 이 세계의 비밀을 모두 알아내진 못했어. 전생의 너조차 말이지.”
난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바로 섰다.
그리고 진재희는 나보다 앞서 걸었다.
아마 길을 터주기 위함일 것이다.
“도시는 하나의 야생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언제나 긴장을 놓아선 안 돼. 우리 인간은 리그가 개최된 순간부터 먹이 사슬의 최하층이니까.”
진재희는 눈밭을 앞서 나가 길을 터 주었다.
덕분에 편하게 그녀의 뒤를 따를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하거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동생뿐이었다.
진재희의 설명이 이어지며(대부분 듣지 않았지만) 눈밭을 헤쳐 나가던 그때.
왼편에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쉐엑, 서걱-!
의식할 순 있었지만 볼 순 없었다.
그리고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문어 다리처럼 생긴 넝쿨 식물이 피를 흘리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꿈틀거릴 때마다 피가 새하얀 눈밭에 사방으로 튀었다.
어느새 진재희는 검을 꺼내 들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자각하기도 전에, 진재희는 위험을 감지하고 내게 날아든 몬스터를 베어 냈던 것이다.
스응- 착.
진재희는 검집에 검날을 집어넣으며 설명했다.
“스노우 네펜데스. 눈밭에 숨어 있다가 먹잇감이 등장하면 이렇게 촉수를 내밀어 낚아채. 그리고 반짝이는 물건이면 환장하고 달려들어.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반응조차 못 할 거야.”
“…….”
그때, 진재희는 내 앞에 바로 서더니 패딩에 달려 있는 지퍼를 떼어 냈다.
뚝.
그녀의 악력이 얼마나 센지, 그것을 마치 캔 뚜껑을 따는 듯 떼어 냈다.
츠츠츠측…….
넝쿨들은 다시 눈 사이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만약 진재희가 따라오지 않았더라면, 난 집에 가기도 전에 이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세찬 눈보라가 불었고, 시야는 당장 10m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며칠 만에 바뀌어 버린 세계는 적응력이 뛰어난 인간에게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였다.
겨울.
갑자기 그 단어가 미친 듯이 두려워졌다.
빌라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지금까지 쇼핑몰에서 경험한 살육의 현장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동생 준호도 게임을 했을 것이다.
동생이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막연한 생각보다 동생의 상태를 확인했을 때, 어떻게 변해 버릴지 모를 내 심정이 더 두려웠다.
“……빨리 가야겠어.”
난 재희를 앞서 터벅터벅 대교를 건넜다.
집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대교를 넘어서 3블록 정도 골목을 걷다 보면 빌라가 보였다.
이름도 사랑 빌라.
“후우…….”
숨이 차올랐다.
원래라면 10분 만에 오는 거리임에도 2시간이나 걸렸다.
입구는 눈으로 가득 차 있었고, 몇몇 얼지 않은 시체가 빌라 근처에 쓰러져 있었다.
집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심장은 미친 듯이 콩닥거렸다.
가는 길을 멈추었다.
쇼핑몰의 생존자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지만, 오직 한 여자만이 날 따라오고 있었다.
진재희.
그녀는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부터 날 감시라도 하는 듯,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
전방을 바라보았다.
건물 곳곳에 금이 가 있었고, 새하얀 외계 넝쿨 식물들이 건물 외벽을 감싸고 있었다.
그 거리로는 몇몇 작은 소동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지구에선 볼 수 없는 괴이한 형태의, 사슴과는 비슷하지만 머리 위로 솟은 뿔이 영롱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사슴들은 내게 위협을 가하진 않았지만, 내가 한 발자국 더 다가가자 흩어졌다.
난 빌라로 들어가기 전, 한숨을 내쉬곤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진재희는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긴 오지 마.”
떨리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아마 잘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진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 끄덕임을 확인하곤 계단을 내려갔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간 곳, 그 아래에는 나와 동생의 집이 있었다.
101호.
문고리를 돌리니 잠겨 있었다.
왼쪽에 놓여 있던 화분을 열어 여분의 열쇠를 확인하였다.
열쇠는 그대로 있었다.
난 그 열쇠를 쥐고선 문고리의 잠금장치를 열었다.
딸깍.
곧 잠금장치가 해제되었고, 난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조금 긴장한 가운데,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익-.
경첩 소리가 요란했다.
그리고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구린내가 났다.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