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생각
1층, 홍 팀의 주둔지.
깃발 몬스터가 처치되었다는 알림 창과 동시에 곳곳에서 작은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다행이다. 성공했어.”
“시온 씨, 정말 대단해요. 또 뭔가 해내셨네요!”
“정말 다행이다.”
사람들이 안도와 함께 기뻐했다.
그들은 내게 감사를 표했고, 난 그런 그들 사이에서 말없이 알림 창을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곳에 온 뒤로 처음으로 의도하지 않은 결과물이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정말 진재희 혼자서 깃발을 손에 얻은 것이라면 우리에겐 큰 이득임은 분명하다.
피해 없이 성과를 올렸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난 이마를 짚었다.
상황이 복잡해졌다.
‘젠장.’
결과적으로는 좋은 방향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계획은 틀어졌다.
이대로 주력 부대와 함께 9층에 올라가 청 팀의 기세를 꺾어 다시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아군의 피해를 없애고, 청 팀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계획에는 하루 이틀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다시 공격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졌다.
홍 팀이 이미 깃발을 획득한 상황에서 일부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쳐들어갈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1라운드를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지금으로선 시간을 벌어야 했다.
놈들이 이곳으로 곧바로 쳐들어올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 생각을 하니, 마냥 안도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난 곧바로 경계 근무자를 불렀다.
그들은 이제 내 말에 곧바로 반응해선 고개를 들었다.
“세 분 모두, 지금 바로 3층으로 이동하세요. 적의 움직임이 포착되면 바로 내려오시고.”
노인과 여자아이 둘이 대답도 없이 서둘러 3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들이 떠난 뒤, 사람들은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동안의 평화를 즐겼다.
하지만 난 맘 놓고 그 평화를 즐기고 있을 순 없었다.
생각하자.
내겐 두 가지 문제점이 놓여 있다.
흑 팀의 왕, 그리고 청 팀의 다음 행보.
우선 흑 팀의 왕.
그 사람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과연 존재하는 사람인가.
내 주위에 있는 것인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번 특별 게임에 참가한 것이겠지.
그 생각 뒤로 고개를 뒤흔들었다.
‘단순한 질문은 생각하지 말자.’
지금 다음 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정말 단순하게 생각하자.
흑 팀의 왕이 홍 팀에 숨어 있다면, 아직까지도 날 죽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홍 팀에 속한 모두가 내가 ‘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중에는 2층에서부터 6층까지 추가로 들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직 내가 왕인지 모른다.
가능성이 있다.
노골적이지 않게, 그들을 감시할 필요가 있다.
‘잠깐만.’
뇌리에 스친 생각 하나가 날 멈추게 만들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흑 팀의 왕이 지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흑 팀의 전력은 K의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걸 의미하는 바는 흑 팀은 ‘공개’되지 않은 제3의 세력이라는 의미였다.
‘왜 지도상에 보이지 않았을까. 설마 어드밴티지를 받은 건가?’
흑 팀이 정말로 어드밴티지를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공개되지 않은 세력에 대한 어드밴티지 역시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흑 팀이 존재한다는 건, 사실이고 그 흑 팀의 존재가 시스템상에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드밴티지를 부여받았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난 주위를 둘러 빠르게 사람들의 수를 세었다.
이곳에 모여 있는 우리 팀은 나를 포함해서 정확히 스물여덟 명.
경계를 보낸 셋과 위에 올라가 있는 진재희까지 합치면 서른둘이 맞았다.
‘그렇다고 해도 가능성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어.’
K가 내게 주었던 총이 만약 의도된 바라면 흑 팀의 왕 역시도 이에 상응하는 이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시스템 창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특성이라면.
‘놈은 여기에 숨어 있을 수도 있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순간, 소름이 올라왔다.
내 생각은 가장 가능성 있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흑 팀의 왕이 시스템 창에서 감지할 수 없는 능력을 어드밴티지로 받았다면, 나는 시스템 창만으로 녀석을 구분해 낼 수 없다.
그 말은 우리 홍 팀의 32명 중 흑 팀의 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능성은 반반.
놈은 박쥐처럼 홍 팀이나 청 팀에 속해 있다가 좋은 타이밍에 나타나 공격할 것이다.
‘그게 흑 팀이 살아남는 방법이었어.’
눈동자만 돌려 주변 인물들을 빠르게 살폈다.
갑자기 주위 모두가 나의 적이 된 것처럼 그들의 눈매가 매섭게 느껴졌다.
그들의 수많은 시선들이 오로지 나에게만 꽂힌 듯했다.
외부의 적도 완전히 토벌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부의 적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부의 적에 대해서는 지금 딱히 대항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걱정들이 계속해서 날 괴롭혔다.
동시에 난 청 팀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모든 것이 고구마 줄기처럼, 사건을 풀어 나갈 때마다 또 다른 사건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지난 전투에서 일방적 승리를 거머쥐었어도 웃을 수가 없었다.
나는 조금의 정신적 휴식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김동길은 이제 무슨 수를 사용할까.
내가 만약 김동길이라면, 지금 이 순간 무얼 했을까.
그의 시점에서 사건을 들여다보다, 또 나의 시점에서 대응책을 생각했다.
차분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이제 김동길은 결코 날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란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청 팀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했을 테니, 녀석은 전면전을 벌일 것이다.
누군가 뇌를 두 손으로 쥐었다 폈다 하는 것처럼 조여왔다.
그리고 사건은 불현듯 찾아왔다.
“또 왔어!!!”
매장 가득 노인의 갈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금 전, 경계 근무로 올려 보냈던 노인과 아이였다.
그들이 올라간 지 채 5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놈들이 몰려오고 있어!!! 지금 곧장 이곳으로 향하고 있단 말이야!!! 아이고야!!!”
모두가 노인을 바라보았고, 내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역시 김동길은 예상대로 움직였다.
그들이 오기까지는 5분, 아니 3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 * *
“시온 씨! 이제 어, 어떡합니까?!”
“일단 무, 무기부터 쥐어야겠죠?! 어쩌죠, 시온 씨?”
이젠 모두가 날 바라보았다.
단순히 의식해서가 아닌, 정말 모두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 하나하나가 내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 이제 저흰 어떡하면 돼요?”
“저희 소화기는 다 썼는데, 이제 어쩌죠?!”
“아이구야! 이제 어떡하냐!”
생각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말들을 귓가에 담는다.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경우의 수와 그들의 요구 사항으로 가득 차 뒤죽박죽 섞였다.
그래서 온전히 ‘생각’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결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수’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와중에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이들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듣기 싫었다.
순간적으로 그들을 혐오할 정도였다.
“시온 씨, 적들이 쳐들어오면 어떡하죠?”
“시온 씨, 저희 투창 부대는 어떡하면 됩니까? 말만 해 주세요!”
“시온 씨, 불침번 경계는 어쩌죠?!”
“시온 씨.”
“시온 씨, 시온 씨!”
“시온 씨!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세 글자가 새하얀 머릿속을 채워 갔다.
‘시’와 ‘온’, 그리고 ‘씨’라는 글자가 원자처럼 마구잡이로 휘날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씨온시온시온시씨온시온시온시온시온시온씨시온시온씨시온시온시온시온씨시온시온시온시온시온시온시온시온시온온씨시온시온시온시씨온시씨온시온씨시온시온시온시온시시온시온온온시씨온시온.
더 이상 내가 정말 강시온이 맞나? 라고 의문이 들 정도로 난 자아와 현실 사이에서 혼란에 빠졌고, 곧 불안과 함께 분노가 찾아왔다.
‘왜 나만.’
왜 나만 고민하고, 나만 걱정해야 하는가.
그들은 내가 없다면 자립할 수 없나.
신생아인가.
난 그들을 지킬 의무가 없다.
왜 나에게만 모든 부담감을 안기는가.
왜 항상 나만 고민하고, 왜 항상 나만…….
나만…… 나만…….
모든 것이 암전(暗轉)되었던 순간, 그 어둠 속에서 불쑥 두 손이 튀어나왔다.
짜악!
“정신 차려.”
“아.”
그녀의 두 손이 내 양 뺨에 닿아 있었고, 곧 뺨이 얼얼해져 왔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이주연이었고, 그녀는 지금껏 봐 왔던 표정 중 가장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우리는 그냥 따를 테니까.”
마치 잠에서 깬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난 조심스레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의 눈높이는 같았다.
“뭘 고민해. 넌 우리의 왕이고. 왕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잖아. 그 뭐냐, 루이인가? 루이 십 세?”
“14세, 누나…….”
이주연은 세범을 돌아보며 자신의 말이 옳은지 확인했다.
이세범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하.”
순간적으로 입꼬리가 씰룩였다.
멍청한 소리였다.
‘왕’이라는 직위도 결국 관리자에 의해 부여받은 일시적인 역할에 불과하고, 난 원래 평범한 일용직 노동자일 뿐이다.
그랬기에 내가 그 직위를 받는다고 해서 홍 팀의 사람들을 내가 마음대로 쥐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것도 아니다.
그저 그들이 날 믿고 따라와 준 것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멍청한 소리가 내 심금을 울렸다.
“맞아요! 형! 형 생각대로 해요.”
남학생이 용기를 내 소리쳤고 이곳저곳에서 또 다른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시온 씨가 없었으면 우리 여기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어요.”
“아무런 부담 갖지 마세요. 학생. 우린 각오 되었으니까.”
“맞아요! 싸웁시다! 우리 싸워요!”
이젠 모두의 소리가 온전히 들리기 시작했다.
하.
덜컥 헛웃음이 나왔다.
깊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우린 결국 장기판 위의 말 같은 존재이고, ‘죽음’을 전제로 계획을 짜면 결국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
나와 동시에 이곳에 있는 모두가 기존의 세계의 법칙에서 동떨어진 자들이다.
이곳은 야생이고.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반드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난 순간 잊고 있었다.
우리에겐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아닌, 동물로서의 존엄만이 남아 있다.
동물로서의 존엄은 결국 생존이다.
그리고 홍 팀의 사람들은 그런 생존을 위한 희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난 뭘 생각하고 있던 걸까.
난 평화를 이룩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다.
그딴 건 바로 일주일 전까지만 먹히는 정의론이다.
내게 정의란 그저 다수의 사람이 살아남는 것.
완전한 승리?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도.
전 세계를 장악한 칭기즈 칸도.
희생 없이 승리하지 못했다.
그렇게 모든 부담감을 내려놓으니, 이젠 냉정해졌다.
난 그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대열 갖추세요. 서둘러요.”
나의 말에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위치로 올라갔다.
이곳은 원래 고블린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바리케이드였다.
하지만 지금은 수성(守城)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예정에 없는 전투였지만, 지리적으로 유리한 건 어찌 되었건 이쪽이다.
난 바리케이드에 올랐다.
곧 모두가 무기를 쥔 채,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다.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어서 그 침묵 속에서 서서히 그들의 발걸음이 들려왔다.
쿵, 쿵, 쿵…… 쿵! 쿵!
느린 발걸음 소리는 서서히 다가왔고, 곧 사방에 퍼져 나갈 만큼 가까워졌다.
마치 모든 공간 속에 그들이 있는 것 같았다.
인벤토리를 열어 총을 쥐었다.
묵직한 총의 감각이 느껴졌다.
난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망설이지 마세요. 망설이는 순간, 죽는 건 당신들일 겁니다.”
그리고 놈들의 발걸음은 더욱 커졌다.
덜컹-!
그 순간, 왼편 계단 층의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식칼과 도끼로 무장한 청 팀의 주력 부대가 있었다.
동시에 에스컬레이터 쪽에서도 더 많은 인원들이 몰려들었다.
놈들의 양동 작전이었다.
* * *
5층.
김동길은 소리쳤다.
“사람을 둘로 나눠! 에스컬레이터와 계단 층을 동시에 공략해!”
그의 명령에 사람들은 둘로 갈라져 이동했다.
김동길이 이끄는 병력들은 곧장 계단 층을 통해 내려갔다.
두두두두두!
몇십 명의 사람일지라도 그 발걸음이 모이면 큰 소리로 이어졌다.
한 부하 직원이 김동길에게 물었다.
“지점장님! 너무 무리해서 돌격하는 거 아닙니까?”
김동길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제일 앞 열에서 달려갔다.
아직까지는 청 팀이 유리하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젠 이판사판이었다.
병력 수를 얼마나 많이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게임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된다.
다가가기만 하면 된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한다면 숫자가 많은 청 팀이 승리할 것이다.
‘1층보다 아래층이라고 해 봐야, 지하야. 지하는 오히려 좋아.’
결국 홍 팀은 지하층으로 물러난다고 해도 독 안의 든 쥐였다.
이 전투가 마지막이다.
김동길은 반드시 전투에서 승리해, 밖으로 나갈 것이다.
이 빌어먹을 쇼핑몰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되찾을 것이다.
고급 외제 차.
9살이나 어린 와이프.
자신을 닮은 금쪽같은 두 딸.
강남의 75평짜리 매매가 125억의 고급 펜트하우스.
건물 2채.
고급 시계.
고급 옷.
자신을 따르는 수백 명의 부하 직원들.
자신을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동창들까지.
그건 모두 김동길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였다.
지금껏 빌어먹을 정도로.
골방에 처박혀 언젠가 인생에서 승리할 나날만 기다리며 공부해 오던 그의 인생이, 이제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되었다.
찔끔.
그의 왼쪽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다.
김동길은 지금 절박하다.
그 누구보다 절박하다.
나락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마지막 계단 층이 보였다.
그 아래로는 1층이다.
김동길은 단숨에 내려가 계단 층의 문을 열었다.
덜컹!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