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죽임 (1)
피가 한데 모여 흘렀다.
그뿐만 아니라 피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 [O]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덮쳤다.
“아아…… 아아!!!”
“이젠 싫어…… 싫어…….”
“어어어…… 어어어…….”
사람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끼거나 절망했다.
오로지 그들 중 나만이 두 다리로 서 있었다.
K는 박수를 치며 내게 다가왔다.
“대단해요. 순간 판단 능력, 위기 대처 능력. 그리고 통쾌한 복수까지. 와우. 정말 대단했어요.”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K는 바짝 다가와서는 내 볼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리고 K는 내게 속삭였다.
“약속한 대로 아이템을 줄게요.”
K의 손아귀에는 빛이 일렁이는 구체가 있었다.
난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인간은 빛을 손에 쥘 수 없다.
그랬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K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말했다.
“아, 맞네. 하등 종족에게는 아이템 개념이 없구나. 깜빡했어요. 인벤토리를 여는 법은 간단해요. 인벤토리! 라고 말하면 돼요.”
그녀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난 그녀의 표정을 한 번 살피고는 이내, 조용히 중얼거렸다.
“인벤토리.”
타앗-!
그 순간, 눈앞에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가로세로 9X9 형태의 박스 창이었다.
그리고 그 빛을 쥐자, 곧 첫 번째 박스 창에 아이템이 떠올랐다.
난 그 아이템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스미스 앤 웨슨 모델 617, 10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리볼버 권총이었다.
손가락을 모션에 가져다 놓으니, 친절히 발포 방법도 나와 있었다.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라도 ‘총’이 멸망한 세계에선 절대적인 무기라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였으니까.
난 눈만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여전히 중얼거렸다.
“어때요? 내기하길 잘했죠?”
“…….”
“그거, 다른 사람은 없어요. 이 세계에 통용되는 모든 화약 무기들은 리그 내에서는 금지되었거든요. 그건 일종의 ‘아이템’으로서 우리가 판매하는 물품이고. 그러니까 다시 말해... 그건 진짜 엄청나게 큰 이점이죠. 당신한테만 주어지는.”
화약 무기라고 하면, 일반 군부대나 경찰에서 사용하는 소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녀의 말을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이 총은, 어쩌면 전 세계에서 유일한 총일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난 인벤토리를 서둘러 닫았다.
누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본능적인 행위였다.
K에게 물었다.
“판매? 그렇다면 너희들이 우리 플레이어들에게 판매하는 물품도 있다는 말이야?”
“음? 으으으음……? 내가 그런 말도 했나?”
K는 갑자기 당황해서는 말을 얼버무렸다.
내가 계속해서 K를 노려보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하아-. 이래서 똑똑한 애들은 싫어. 그거 지금 말하면 나 잘려요. 응? 그러니까 모르는 척해 줘요.”
“뭐, 됐어.”
상관없다.
어차피 총만 가지고 있다면, 멸망한 세상 속에서 커다란 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건 변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총알. 잘 써요? 그거 보기보다 엄청 비싼 거니까.”
“……상관 마.”
“푸흐흐……! 냉철해~ 냉철~.”
쿵!!!
그때, 웬 굉음이 매장 가득 울렸다.
정신이 나간 듯, 오들오들 떨던 사람들도 화들짝 놀라선 천장을 바라보았다.
굉음은 위층으로부터 울려왔다.
그리고 아까부터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
발끝으로 느껴지는 이 진동에서 난 소름이 돋을 정도의 위기감을 느꼈다.
이 진동이 조금 전, K가 말한 ‘놈’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헐, 미친. 벌써 왔네. 큰일 났다. 여러분! 드디어 저의 귀여운 펫들이 오고야 말았답니다!”
K는 다시 사람들을 주목시켰다.
그녀는 폴짝거리며 주저앉은 사람들 사이사이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흔들며 소리쳤다.
“아이참. 생존자 여러부운~! 그렇게 주저앉아서 절망할 시간 없다니깐요? 이젠 진짜 현실감을 가져야 할 때라고요!”
그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악-!!!”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에스컬레이터에서 피를 흘리며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아악! 사, 살려 줘! 살려 줘.”
하지만 곧 남자는 위에서 날아온 무언가에 맞아 쓰러졌다.
진동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난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곧 재앙은 시작되었다.
위층 에스컬레이터로부터 수십 마리의 초록 괴물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우두두두두두두!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발 하나 섣불리 뗄 수 없었다.
K는 어느샌가 꺼내 든 폭죽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퍼벙벙!!!
“에잇! 몰라! 튜토리얼 시작, 시작, 시작! 알아서들 하시고, 꼭 살아남길 바라요!”
K는 그 말과 함께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하나둘 사람들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가능한 세게.
* * *
난 싸워 본 적이 없다.
어릴 적에도, 힘이 센 놈이 다가오면 자리를 슬그머니 피할 뿐이었다.
난 언제나 싸움을 싫어했다.
싸움은 정말 야만적인 행위가 아닐 수가 없다.
누군가는 내게 그럼 UFC 선수들도 야만적인 거냐? 라고 물었다.
난 그렇게 묻는 아이에게 답해 주었다.
UFC는 싸움이 아니라 스포츠라고.
싸움은 무언가 대가를 두고 서로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라고.
언젠가는 주먹을 휘둘러보았다.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닌, 허공이었다.
부웅-!
주먹은 허공을 가르고 전방을 향해 뻗어 있었다.
뭔가 공격한다는 것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정말 내가 주먹을 휘두른 것인가, 하는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다 결국 책을 펼쳤다.
지식은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더 높은 차원의 세계를 경험시켜 주었다.
난 그런 세계를 모험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마주한 세계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그야말로 다른 세계.
우당탕탕-!
진열대를 뛰어넘은 초록 괴물 한 마리가 남자를 넘어뜨렸다.
남자는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고, 그 근처로 초록 괴물들이 몰려들었다.
우적, 우적, 우드득!
사람의 뼈, 처음 봤다.
정말 하얗구나, 뼈라는 건.
남자의 뼈는 산 채로 부러진 채, 초록 괴물의 입에서 게걸스럽게 씹혀졌다.
주춤.
나도 모르게 뒷발을 움직였다.
도망간다고, 도망갈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이미 건물 외벽은 정체불명의 검은 연기에 둘러져 있었고, 밖으로 나갈 순 없다.
“인벤토리.”
총.
인벤토리를 열었다.
난 권총을 집어 들려다, 순간 멈칫거렸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지금 이 순간에 총을 꺼내 드는 것이 옳은 판단이다.
하지만 10발 가지고는 저 수십 마리의 괴물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10발을 운 좋게, 2마리씩 적중시켜 지금 눈앞의 괴물들을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단계에서는 굉장히 불리해질 수 있다.
당장 위층에는 더 많은 괴물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총은 무리였다, 이 튜토리얼 단계에서는.
‘생각해…… 생각하는 거야.’
모든 것에는 정답이 있다.
풀리지 않는 현상 따윈 없다.
뉴턴은 중력의 법칙에 대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곤 해답을 떠올렸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도 똑같다.
살 방법은 반드시 있다.
눈알을 굴렸다.
매우 빠르게, 이 일대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마치 사진을 찍듯, 뇌 속에 저장했다.
어둠이 가득한 매장이었지만,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떨어트린 스마트폰 불빛 덕분에 간간이 시야가 확인되었다.
괴물 한 마리가 뛰어가다 앞 진열대를 의식 못 하고 부딪혔다. 아주 얇은 진열대인데도 옆으로 피하지 못하고 부딪혔다.
포장된 밀대 봉 하나가 저쪽에 있다.
괴물 두 마리가 서로 여자의 다리 살을 두고 싸우다 한 마리가 한 마리를 죽인다.
괴물 한 마리가 아이를 향해 냅다 달려가다 미끄러져 넘어진다.
괴물 세 마리가 진열대 위에 있는 남자와 여자를 두고 에워싸고 있다. 그것을 오르진 못하고 있지만 충분히 넘어뜨릴 수 있을 것 같다.
세 가지 정보를 습득했다.
첫 번째, 괴물은 지능이 무척이나 낮다. 높게 봐 줘야 개 수준.
두 번째, 괴물은 몸의 균형 감각을 잡을 수 없다. 오로지 달릴 때만 균형이 유지되는데, 서 있을 때에는 얇은 다리 탓인지 비틀거렸다. 그랬기에 달려들 때에는 쉽게 방향 전환을 하지 못하고 앞으로만 달려 나갔다.
세 번째, 괴물은 얇은 근육 덕분에 놈들의 신장보다 높은 진열대는 오르지 못한다.
‘됐어. 할 수 있겠어.’
계획이 잡혔다.
난 가방에 감겨 있던 수건을 풀어 양손에 감았다.
그 순간, 옆구리가 서늘해져 왔다.
본능적으로 몸을 틀자, 그와 동시에 내가 서 있던 곳으로 날카로운 날붙이가 찔러 들어왔다.
쉐엑-!
“키헥헥헥헥! 캬아아악!!!”
괴물 놈의 날붙이는 아슬하게 내 몸을 스쳐 지나갔다.
괴물 놈은 피로 물든 이를 드러내며, 기이하게 웃어 댔다.
난 수건을 쥔 채,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해야 돼……!’
쥐고 있는 수건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해야 한다.
여기서 해야 했다.
반드시 저 괴물 놈을 죽여야 했다.
“캬아아아악!!!!”
괴물 놈이 달려들었다.
놈은 오로지 직진해 왔지만, 몸의 균형은 무너져 있었다.
나는 좌측으로 몸을 비틀었다.
도중에 멈출 수 없었던 괴물은 나를 지나쳐 앞으로 달려갔다.
곧 괴물은 균형을 못 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콰당!
괴물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난 단숨에 달려들어, 놈의 위에 올라탔다.
괴물의 신장은 해 봐야 1미터가 안 되는 수준.
마치 어린아이를 몸으로 짓누르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이 생명체를 죽여야 한다.
평생 괴물은커녕, 참새 한 마리 쉽게 죽이지 못했지만.
난 지금 이 순간, 이 괴물을 죽여야만 했다.
손에 움켜쥐고 있던 수건으로 괴물의 목을 묶었다.
손아귀 핏줄이 터지도록 뒤로 당겼다.
꾸우우우우욱……!
“쿠에엑…… 커헉…… 콕…… 카악……!”
괴물 놈은 수건에 목이 졸려 아등바등거리다, 이내 숨을 거두었다.
놈의 신체가 완전히 추욱 늘어지자 난 그제야 손을 풀었다.
괴물 놈이 스르르, 내 손아귀에서 쓰러졌다.
처음으로…… 생명체를 죽였다.
하지만 난 생각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봐 두었던 밀대 봉을 향해 달려갔다.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 따윈 없다.
밀대 봉 봉지를 쥐어뜯고선, 상품을 꺼내었다.
그리고 밀대 봉을 쥔 채, 천천히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몇의 사람들이 괴물의 공격에 저항하고 있었다.
몇 놈은 죽였지만, 몇 명은 당한 듯 보였다.
난 그들에게 소리쳤다.
“괴물은 직선으로만 움직여요!!! 사선으로 회피하세요-!!!!!”
그들을 구하기 위한 소리침이 아니었다.
그들이 싸워 줘야만, 내가 생존할 수 있다.
우리가 합심해야만 이곳의 괴물들을 처리할 수 있다.
내 말을 들은 몇몇 사람들이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괴물을 두고 옆으로 피해 냈다.
그리고 괴물을 한 마리, 두 마리 죽여 나가기 시작했다.
난 밀대 봉을 쥔 채, 앞으로 다가갔다.
괴물은 직선으로만 달려간다.
그리고 장애물에 부딪히면 다시 일어난다.
다시 직선으로 달려간다.
단순한 패턴.
나약한 괴물의 신체.
그에 비해 인간들은 대부분 신장 160cm 이상의 육체를 지녔다.
인간의 힘으로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는 시련이다.
부웅- 꾸직!!!
밀대 봉을 휘둘러 괴물의 머리통을 깨트렸다.
“으아아아아!!!”
“이 X새끼들!!!!”
사람들은 날 중심으로 차근차근 괴물들을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꾸직, 꾸직!!!
사람들은 반격에 들어갔고, 놈들의 초록 피가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었고, 괴물들을 밀어냈다.
하지만 시야가 아직 어두웠다.
난 매장 곳곳에 떨어져 있던 스마트폰을 보곤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은 불을 비춰요! 어서요!!!”
“네…… 네!!!”
“아…… 알겠네!”
전투를 할 수 없는 노인이나 아이가 스마트폰을 주웠다.
한 손에 세 개씩 쥐어 괴물을 비췄다.
파아아앗-!!!
빛이 매장에 드리웠다.
“캬아아아악-!”
“캬아악! 캬아아악!”
빛을 직선으로 맞닥뜨린 괴물들이 괴로운 듯, 시선을 회피했다.
새로운 정보였다.
‘놈들은…… 빛을 싫어한다.’
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괴물 놈들을 두고, 한 마리씩 머리통을 깨트렸다.
내 뒤로 많은 사람들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매장은 다시 침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