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318화>
천문석은 염동 광장을 가로지르며 생각했다.
‘배달 라이더로 위장해 천공의 섬에 올라 백도어를 심는다!’
워커 실트의 계획은 시도하자마자 실패했다.
그러나 워커 실트는 포기하지 않고 2번째 계획을 세웠다.
‘2일 후 재금 아카데미 창립식에 참가해 당당히 천공의 섬에 올라간다!’
워커 실트의 2번째 계획에 필요한 건 두 가지.
-자신과 워커 실트가 백도어를 박을 동안 어그로를 끌어 줄 강자.
-천공의 섬에 올라가는 티켓, 재금 아카데미 창립식 초대장.
문제는 재금 아카데미 창립식이 내일모레 열린다는 것이다.
그렇다! 한 달도 일주일도 아닌 내일모레! 2일 후에 창립식이 열린다!
‘아니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고 재금 아카데미 창립식을 이틀 전에 발표한단 말인가?!’
날벼락처럼 갑자기 전해진 소식에 광화문 게이트 지역뿐 아니라 염동 광장까지 술렁이고 있었다.
천문석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외침에 귀를 기울였다.
“재금 아카데미 창립식을 한다고?”
“……염동 대협, 이태성 길드장, 추이린 수석 전부 오겠지?”
“당연하지! 다른 곳도 아닌 재금 그룹에서 만든 아카데미인데!”
“재금 그룹과 관련된 1세대 헌터는 전부 다 참가할 거다.”
“와, 거기 참가하면 제대로 눈도장 찍겠는데?”
“그런데 내일모레라고? 왜 이렇게 급하게 해? 원래 내년 초에 한다지 않았나?”
“뭔가 사정이 있겠지. 그보다 중요한 건 창립식 열리는 장소가 천공의 섬이란 거다!”
“그게 왜? 재금 아카데미가 천공의 섬에 있는데 당연한 거잖아?”
“그러게, 일정 당긴 게 이상하지, 장소는 평이한데?”
……
의아해하는 시선이 모이는 순간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은밀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창립식이 열리는 당일. 천공의 섬에서 재금 중공 마탄을 특가에 판매한다는 소문이 있다.”
“재금 중공 정품 마탄을 특가에?!”
경악한 외침과 깜짝 놀란 얼굴.
그리고 일어날 일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몸을 돌려 달려가는 사람.
정보를 준 헌터에게 달라붙는 사람.
전화기를 붙잡고 다급히 외치는 사람.
“나중에 보자! 급한 일이 생겨서……!”
“혹시, 너 창립식 초대장 구할 방법 아냐?!”
“……초대장 구해라! 재금 아카데미 창립식 초대장 반드시 구해야 한다!”
……
느껴진다.
바람을 타고 불이 번져나가듯.
염동 광장에서 도로 넘어 헌터업 1번지 종로로 퍼져 나가는 뜨거운 열기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헌터 업계에 발을 걸친 모두가 재금 아카데미 창립식 초대장을 구할 거란 것을!
당연했다.
1세대 헌터, 대형 길드에 눈도장을 찍을 기회!
그리고 진짜 더럽게 비싼 재금 중공 정품 마탄을 싸게 살 기회니까!
문득 화인처럼 새겨진 기억이 떠올랐다.
세연이네 건물에 있는 정통 대한 무당파, 통천 도사 김통천 관장님께서 마탄 가격에 고통받는 모든 헌터들을 대표해서 일갈하셨다.
‘재금 중공! 이 미친놈들이 마탄 라이선스 비용을 더럽게 비싸게 먹여 놔서! 총알값! 컥- 소리 나올 정도로 비싸! 헌터가 몬스터 잡겠다고 총을 갈기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거지 되는 거야!’
‘뭐? 마탄을 빵야뺭야 쏜다고? 네 통장이 빵야뺭야다!’
“…….”
이 순간 천문석은 직감했다.
초거대기업 재금 그룹이 세운 아카데미 창립식이다.
게다가 재금 아카데미 창립식이 열리는 날은 내일모레, 2일 후!
대한민국의 아니 전 세계 헌터 업계, 아니 정·재계 모두가 발칵 뒤집힐 사건이다.
어지간한 권력자라도 재금 아카데미 창립식 초대장을 얻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워커 실트는 어지간한 권력자가 아니라 W. S. 인더스트리의 오너다.
초거대기업 W. S. 인더스트리의 ‘인맥과 영향력’이면 초대장을 얻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천문석은 워커 실트의 실패를 직감했다.
W. S. 인더스트리의 ‘인맥과 영향력’은 봉인됐다.
자신과 워커 실트가 천공의 섬에 올라가는 건 다른 사람들처럼 인맥, 마탄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동 병참 도시 소환을 위해, 전능 옥좌의 통제권을 빼앗을 백도어를 박기 위해서였으니까!
W. S. 인더스트리의 ‘인맥과 영향력’으로 초대장을 얻는 건 범인이 누군지 알려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워커 실트는 W. S. 인더스트리가 아닌 자신의 능력만으로 초대장을 구해야 한다.
순간 워커 실트와 얽혔던 사건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부산 던전 7층, 공방 도시 난장판.
열사의 사막, 기동 병참 도시 도주극.
해운대 앞바다, 거대 괴수 vs 악어 로봇 대전.
……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워커 실트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리고 하늘의 대답이 무엇일지 감이 왔다.
천문석은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염동 광장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273번 버스를 탔다.
“워커 실트. 재수 없는 녀석! 하아-”
* * *
“야, 특급 헌터, 이세기?! 없냐? 얘들 아직 안 왔나 보네?”
염동 광장에서 돌아온 늦은 오후,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건 간단했다.
이세기와 특급 헌터가 열심히 동네 민원을 처리하고 있다는 것!
“이세기 화이팅 힘을 내라! 카캬카카캌-.”
천문석은 통쾌한 웃음과 함께 청소하고 샤워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난 늦은 밤에 녹초가 돼서 돌아올 이세기와 쌩쌩한 특급 헌터를 위해서!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오후 4시 50분, 딱 저녁 시간에 맞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급 헌터가 왔다! 잘생긴 형! 빨리빨리!”
“……이거 꼭 해야 하는 거야?”
“세연 누나 건물에선 이게 국룰이라니까! 국룰! 내가 설명했지?!”
“이세기가 왔다…….”
옥상으로 난 창문에서 특급 헌터의 씩씩한 외침과 이세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앗! 알바 있었잖아?!”
“돌멩이, 너 일 있다더니. 언제 돌아왔냐?”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그보다 너희 민원……?”
천문석은 질문하다 멈칫했다.
“……그거 다 뭐냐?”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의 생각지도 못한 모습!
특급 헌터는 빵, 떡, 과자가 가득 담긴 빵빵한 봉투를 양팔로 껴안았고!
이세기는 쌀 포대, 생수, 김치 같은 식료품과 비누, 휴지, 세제 같은 생필품이 하나 가득 쌓인 헌터용 지게를 짊어졌다!
“오늘 안녕안녕안녕 인사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선물 줬어!”
“동네 분들이 주신 거야. 특급 헌터 그 봉지 줘. 내가 정리해 놓을게.”
식료품과 생필품이 가득한 헌터용 지게를 짊어진 채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지르는 이세기!
‘뭐지? 이 익숙한 기시감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놓치고 있던 것들이 보였다!
깨끗한 옷!
여유 있는 얼굴!
활력이 넘치는 몸!
휴가 2일 차 자신이 동네 민원을 처리하고 돌아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
“이세기, 너 왜 이렇게 멀쩡해?! 특급 헌터 민원처리하러 간 거 아냐?! 설마 오늘은 민원이 하나도 없던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할 일은 매일매일 생기는 거란 말이야! 검사 할아버지가 말했어. 어차피 더러워진다고 청소 안 하면 개판 되는 거 순식간이야! 더러워질 거라도 매일매일 청소하고! 쓰레기가 보이면 계속계속 치워야 해! 앗 쓰레기!”
특급 헌터는 외치다 말고 거실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줍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오늘은 좀 이상했어. 가는 곳마다 민원, 할 일이 분명 있었거든? 그런데 잘생긴 형 소개하고 내가 인사한 다음에 민원 처리하려고 하니까. 갑자기 괜찮다는 거야! 국숫집 할머니, 서점 누나, PC방 사장형…… 전부 다 오늘은 됐고 나중에 와서 해 달라고 했다니까! 검사 할아버지는 내가 인사하니까 막 화를 냈어!”
“검사 할아버지가 화를 내? 원래 그분은 너한테 분노한 상태가 패시브 상태…….”
특급 헌터의 외침이 천문석의 말을 끊었다.
“제육볶음! 검사 할아버지 나한테 제육볶음 먹고 싶다고 화를 냈다니까! 왜지? 왜 나한테 제육볶음 먹고 싶다고 화를 낸 거지?! 앗! 설마! 검사 할아버지도 강제로 고등어 먹고 있던 거라면?! 아앗! 나한테 구조 요청 한 거라면?! 누구지? 누가 검사 할아버지한테 고등어를 먹인……?! 앗! 김 판사 할머니구나! 알바, 김 판사 할머니가 범인이야!”
“김 판사 할머니?”
“맞아! 김판사 할머니! 알바 어떡하지?! 김 판사 할머니 판사봉! 이따만한 판사봉 가지고 있어! 쾅쾅쾅- 판사봉 내려치면 단단한 호두가 한방에 가루가 돼! 으아앗! 검사 할아버지 김 판사 할머니 판사봉에 맞고 있는 거 아닐까?! 알바 당장 검사 할아버지 구해 주러 가야 해!”
당장이라도 달려가자는 듯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특급 헌터.
“김 판사 할머니가 판사봉으로 검사 할아버지를 때린다고? 그게 뭔 소리야?! 판사봉으로 사람을 왜 때려?”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
“아, 잠깐! 김 판사 할머니랑 검사 할아버지! 두 분 관계가…… 부부인 거야?!”
“당연히 아니지! 김 판사 할머니 검사 할아버지 딸의 딸의 외할머니야!”
“딸의 딸의 외할머니면…… 어? 부인 맞잖아?”
“아니라니까! 김 판사 할머니 검사 할아버지 아들의 아들의 친할머니야!”
‘아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딸의 딸의 외할머니, 아들의 아들의 친할머니인데 부부는 아니라고?!’
천문석은 머리를 총 가동해 머릿속으로 복잡한 가계도를 그리다 깨달았다.
‘아차, 말려들었다!’
언제나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특급 헌터의 화법에 말려들었다!
지금 중요한 건 검사 할아버지와 김 판사 할머니의 복잡한 가계도가 아니다!
천문석은 단호히 자르고 질문을 던졌다.
“특급 헌터 걱정할 거 없다! 내 촉이 검사 할아버지는 무사할 거라고 말한다! 그보다 저기 식료품이랑 생필품 어떻게 된 거야?”
“진짜? 검사 할아버지 오늘도 살아남았어? 휴우- 다행이야!”
“이세기 지게에 실린 물건 어떻게 된 거냐니까?”
“지게? 아! 동네 사람들이 선물로 줬는데?”
“……비누, 휴지, 생수, 쌀 포대? 저 지게에 실린 물건이 전부 다 선물이라고?!”
“어! 오늘 이상하게 막막 선물이 쏟아졌어! 앗! 이문 설렁탕 복순이 주인 누나가 설렁탕도 그냥 줬어! 고기가 국물보다 많은 특급 설렁탕을!”
“……고기가 국물보다 많은 특급 설렁탕? 그걸 그냥 줬다고? 공짜로?! 그것도 그 철저한 이문 설렁탕에서?!”
“그렇다니까! 나 배 터지는 줄 알았잖아! 그런데 왜 공짜로 줬을까? 이문 설렁탕 복순이 주인 누나는 10년 단골한테도 절대 외상 안 주는데?! 왜지, 왜 나한테 공짜로 준거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 으으윽-”
이유를 알지 못해 머리를 부여잡은 특급 헌터.
천문석은 어째선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돌멩이 쌀 포대랑 물은 부엌 뒤 창고에 놓는다.”
냉장고에 척척 물건을 넣고 번쩍 쌀 포대와 생수를 나르는 더럽게 잘생긴 이세기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특급 헌터, 혹시 이문 설렁탕에서 줬다는 특급 설렁탕 이세기한테도 줬냐?”
“그럴 리가 없잖아! 연공 서열! 잘생긴 형은 알바랑 나, 우리랑 다르게 우리 동네 신입이잖아!”
“아, 그렇지! 이세기는 신입이지! 아니었구나! 하하-”
이유 모를 안도감에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목소리가 이어졌다.
“잘생긴 형은 흐물흐물 맛없는 도가니탕 줬어!”
“……!!”
천문석은 잽싸게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했다.
[이문 설렁탕]
설렁탕(특) 16,000원
도가니탕(특) 19,000원
“이거보다 고기가 2배는 많았어!”
“…….”
천문석은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아니 뭐가 이따위야! 내가 나가면 일거리가 쏟아지는데! 이세기가 나가면 선물이 쏟아진다고?!’
모사재인 성사재천은 워커 실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특급 헌터가 왜 연공 서열을 부르짖는지 새삼 깨달았다!
‘하늘님! 이건 아니죠! 연공 서열!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하늘님을 믿었는데! 이런 식으로 차별하는 건 아니죠!’
천문석은 하늘을 향해 절절한 마음을 담아 외쳤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하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은 부엌에서 들려왔다.
“어, 이 냄새 설마, 설마? 으앗! 잘생긴 형! 큰일 났어! 완전 대박이야! 오늘 우리 운 완전 좋아! 알바가 오늘 저녁으로 돼지고기 엄청 많이 김치찌개 끓였어!”
특급 헌터는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 둔 냄비 뚜껑을 열고 환호했다.
“김치찌개?”
“그냥 김치찌개가 아니라! 돼지고기 완전 많은, 기름 둥둥 알바표 특급 김치찌개야! 카카캌-.”
“그래? 오늘 운 정말 좋은데? 하하하-.”
카카카카캌-
하하하하하-
특급 헌터와 이세기의 통쾌한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어째선지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천문석은 털썩 소파 위에 널브러졌다.
“알바, 우리 언제 저녁 먹어?!”
“……씻고 와. 바로 먹자.”
천문석은 1초 만에 다시 일어나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