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93화>
“천문석 그림이야. 너 잘 보고 있는 거 맞지?!”
“나 완전 잘 보고 있어! 빨리빨리! 나 급해!”
이세기는 십자검으로 땅바닥에 그린 천문석 그림을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평상시 표정은 담담해!”
“그런데 계속 보고 있으면 터지기 직전 화산을 보듯 조마조마해져!”
“특히 눈! 눈을 보고 있으면 그 안에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보이는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쾅 벼락이 터진 것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설명이 끝나는 순간 바짝 긴장한 얼굴로 바로 확인했다.
“어때? 알바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
쪼그려 앉아 유심히 그림을 살피던 특급 헌터는 번쩍 고개를 들고 외쳤다.
“땡땡, 땡땡땡- 이 그림 알바랑 하나도 안 닮았잖아! 알바는 엄청 잘생겼다니까! 내가 보여 줄게!”
“보여 준다고? 사진? 너 알바 사진 있던 거야?!”
“아니 사진 없어! 하지만 나 그림 엄청 잘 그려! 우리 삼촌도 인정했어! 앗! 드래곤 형은 내 그림으로 현상 수배 전단도 만들었어!”
특급 헌터는 낚싯줄이 칭칭 감긴 막대기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일필휘지!
파파팟- 번개같이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외쳤다.
“끝났어! 이 그림 알바랑 똑같이 생겼어!”
“……이게 알바라고?”
“어, 알바랑 완전 똑같아!”
이세기는 땅바닥을 봤다.
자신이 그린 천문석 그림.
꼬맹이가 그린 알바 그림.
나란히 놓인 두 그림에서 닮은 것은 눈, 코, 입이 있다는 것뿐, 다른 건 조금도 닮지 않았다!
아니 닮았다는 말 자체를 할 수 없다.
꼬맹이가 그린 그림에서 사람 얼굴로 보이는 건 눈, 코, 입 위치에 있는 원과 선뿐이니까!
“잘 그리긴 뭘 잘 그려! 이게 어떻게 잘 그린 그림이야?!”
“느낌! 느낌을 봐야지! 의사 할아버지도 말했어! 그림은 기술, 디테일은 중요하지 않아! 느낌이 중요하단 말이야! 드래곤 형은 내가 그려 준 그림으로 현상 수배 전단 만들어서 악당도 잡았다니까!”
“야, 이 그림으로 어떻게 사람을 구분해?!”
버럭 외치는 즉시 돌아온 대답.
“보여 줄게!”
다시 한번 일필휘지 파파팟- 막대기가 움직이고 땅바닥에 그림이 그려졌다.
방금전 알바 그림과 똑같이 선과 원, 소용돌이로 그려진 그림!
그러나 이번에는 보는 순간 감이 왔다!
“어, 잠깐 이 그림 설마?!”
“맞아! 내 얼굴 그린 거야! 잘 봐봐!”
자신이 그린 그림 옆에 착 누워 같은 표정을 짓는 꼬맹이!
[@ㅁ@]
“……!”
이세기는 말문이 막힌 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이없게도 이 황당한 그림과 꼬맹이의 얼굴에서 같은 느낌이 왔으니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다.
꼬맹이 말이 맞다. 알바는 천문석이 아니다!
결론이 나는 순간 맥이 탁 풀리고 훅 올라오는 피로와 탈력감에 아찔한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앗! 잘생긴 형! 조심해!”
번개같이 달려와 몸을 잡아주는 작은 손.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비틀 정자에 주저앉는 순간 오늘 하루 일어난 사건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제주도 해상 거대 악어.
-염동 광장 도주.
-청계천 급류 오르기.
-북한산 호수에서 다시 만난 용용이.
-우이천 격류를 타고 도망.
-중랑천에서 용용이와의 최종 격전!
‘이 모든 사건과 불운이 하늘의 인과도 뭐도 아닌 그냥 개고생이었다고?!’
하늘님!!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검고 뜨거운 울분이 울컥울컥 가슴을 거쳐 머리로 치밀어 올랐다.
‘으아아아아악-’
치미는 울분을 안으로 삼키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고 무언가 팍 터져 나왔다.
“으앗! 피! 형 코피 나잖아! 피피! 얼른 이걸로 피 막아!”
깜짝 놀란 외침과 함께 다급히 내민 휴지.
“고맙다.”
이세기는 얼굴을 들고 휴지로 코피를 막았다.
그러나 코피는 멈추지 않고 울컥, 울컥 계속 솟구쳤다.
“안 멈추잖아! 으앗! 119에 전화…… 잠깐 나한테 약 있어!”
번개같이 배낭을 뒤지는 꼬맹이.
“괜찮…….”
“찾았다! 형 빨리 이거 마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환호성이 터지고 붉은 액체가 담긴 작은 물병이 튀어나왔다.
“삼촌이 몰래 숨겨 놓고 혼자만 먹는 엄청 비싸고 좋은 약이야!”
“원래는 완전 맛없는데 내가 수박 토마토랑 섞어서 업그레이드시켰어!”
“완전 맛있고! 엄청 비싸고! 몸에도 좋아! 이거 마시면 당장 피 멈출 거야!”
“빨리 마셔! 피 계속 나잖아! 빨리빨리! 의사 할아버지가 피 흘리다가 한 방에 훅 간다고 했단 말이야!”
정신없이 말을 쏟아 내더니 어느새 뚜껑이 열린 물병을 강제로 먹일 듯이 들이미는 꼬맹이.
“…….”
꼬맹이의 말과 행동에서 가식 없는 진심이 느껴질 때 입가에 웃음이 걸리고 문득 깨달았다.
한국에 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친구를 만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오늘 친구를 만나지 못했어도 괜찮다.
언제나 진심인 의리 있는 꼬맹이 특급 헌터를 만났으니까.
“웃지 말고 빨리 이 약 먹으라니까! 피, 피, 피! 계속 나잖아!”
“그래 알았어. 알았어.”
이세기는 웃으며 물병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순간 몸 중심에서 폭발하듯 퍼져 나가는 화한 느낌!
가슴속 검고 뜨거운 울분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고.
피로로 딱딱하게 굳은 어깨와 근육이 스르르 풀렸다!
멈추지 않던 코피가 단숨에 멈추고.
아찔한 현기증, 머리를 울리던 통증, 짙은 피로가 사라지는 순간.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오며 금가고 찢어진 근골이 시간을 돌린 듯 아문다.
바짝 마른 땅에 비가 내리듯 몸과 정신에 차오르는 활력과 상쾌함!
이세기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이 약 뭐야? 엄청나잖아?!”
“그렇지? 굉장하지?! 삼촌이 꼭꼭 숨겨 두고 몰래 혼자만 먹는 약 3종류! 거기에 내가 열심히 키운 수박 토마토를 갈아서 넣었잖아! 맛있고 몸에도 좋은 특급 약이야!”
꼬맹이의 자랑스런 외침이 조금도 과하지 않았다!
마치 미래의 체력과 활력을 미리 끌어오는 듯한 이 놀라운 약효라니!
“이 약 엄청 비쌀 거 같은데 괜찮은 거야? 너 삼촌한테 혼나는 거 아냐?”
“당연히 괜찮지!”
특급 헌터는 주저하지 않고 작은 손을 내밀며 외쳤다.
“우리는 친구잖아!”
“그렇지. 맞아. 우리는 친구였지.”
이세기는 작은 손을 맞잡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급류에서 건져 준 거. 아까 밥 사주고, 이 특급 약까지 모두 고맙다. 특급 헌터. 반드시 보답할게.”
“친구끼리인데 뭘.”
특급 헌터는 맞잡은 손을 크게 흔들다 깜짝 놀라 외쳤다
“앗! 벌써 2시 55분이잖아! 나 이제 진짜 가야 해! 잘생긴 형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최 순경 누나 올 거야! 최 순경 누나한테 말하면 하늘에 묻는 돌멩이 ‘친구’ 찾아 줄 거야! 그럼 안녕안녕 힘든 일…… 명함! 명함 줘야 하는데! 어디지? 어디에 놨지?!”
정신없이 옷과 배낭을 뒤지기도 잠시 번쩍 손을 드는 특급 헌터.
“찾았다! 내 명함!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특급 헌터 – 무엇이든 도와드립니다!]
연락처 없이 이름과 선명한 의도만 적힌 명함.
이상한 이름을 가진 이 꼬맹이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명함이었다.
이세기는 씩 웃으며 확인했다.
“전화번호 없는데 연락은 어떻게 하는 거야?”
“하늘님한테 나 불러달라고 말하면 내가 바로 올게!”
왠지 모르게 기시감마저 느껴지는 황당한 방법.
이세기는 하늘을 향해 장난스레 외쳤다.
“특급 헌터 좀 불러 주세요. 이렇게 말이지?”
“아니지! 하늘이 아니라, 하늘님한테 말해야 한다니까!”
“하늘님 특급 헌터 좀 불러 주세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하늘님이 들어 주고 싶게! 재밌게, 흥미진진하게 말해야지! 하늘님 엄청 바쁘단 말이야! 그냥 말하면 안 들어 줘!”
“재밌게, 흥미진진하게? ‘멋진 하늘님. 의리 있는 특급 헌터 좀 불러 주세요?’ 이런 식으로?”
“…….”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특급 헌터의 시선에서 기시감이 느껴지고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걸 왜 못하지?!’
돌멩이 녀석이, 자신이 수없이 지었던 표정, 시선, 생각과 같다.
너무나 당연한 숨 쉬는 법을 질문받은 느낌!
‘아, 이게 이런 느낌이구나!’
새삼 역지사지를 깨닫는 순간.
특급 헌터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명함 줘. 내가 번호 써 줄게.”
특급 헌터는 잽싸게 명함에 번호를 적어 건넸다.
“이게 네 핸드폰 번호야?”
“아니 그거 알바 번호인데.”
“알바면 나보다 잘생겼다는 너 친구? 알바 번호는 왜?”
“전화해서 특급 헌터 바꿔 달라고 말하면 바꿔 줄 거야! 으앗! 벌써 57분이잖아! 나 이제 진짜 가야 해!”
“내가 리어카 좀 밀어줄까?”
“정자에서 움직이면 안 된다니까! 최 순경 누나 여기 바로 이곳 정자로 온단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안 움직일게. 그럼 잘 가라 특급 헌터.”
“잘생긴 형! 진짜 안녕안녕! 엄청난 힘이 솟는다! 이야아아압-.”
특급 헌터는 기합과 함께 리어카 손잡이를 끌고 달렸다.
악어가 실린 리어카는 순식간에 놀이터를 빠져나가 경희 슈퍼를 향해 나아갔다.
“특급 헌터! 다음에는 내가 밥 사 줄게! 고마웠다!”
“원래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거야! 안녕안녕! 카카카카캌-.”
긴 웃음과 함께 경희 슈퍼 옆 골목으로 쏙 들어가는 리어카와 특급 헌터.
이 뒷모습과 웃음소리에 불현듯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돌멩이, 천문석.
이세기는 자신이 왜 그렇게 집요하게 특급 헌터에게 천문석을 아는지 확인했는지 이 순간 깨달았다.
나이, 얼굴, 성격, 말투 모든 게 다르다.
하지만 특급 헌터는 천문석을 닮았다.
이유 없이 남을 돕고.
아낌없이 가진 것을 나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웃음소리!
카카카카카캌-
적예가 이름 붙인 비열한 악당 웃음소리가 자신의 친구와 너무나 비슷했다!
이세기는 문득 손에 쥔 명함을 봤다.
[특급 헌터 – 무엇이든 도와드립니다!]
[010-xxxx-xxxx]
특급 헌터라는 이름과 알바의 휴대폰 번호가 같이 적힌 명함.
“알바가 천문석인 줄 알았는데…… 감이 항상 맞을 수는 없지.”
어이없는 헛다리를 짚었지만,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은 법!
한국에 온 1일 차로는 나쁘지 않았다.
엠마라는 헌터를 알게 됐고, 특급 헌터라는 좀 이상하지만, 의리 있는 어린 친구가 생겼으니까!
이세기는 오랜 친우처럼 하늘을 향해 말을 걸었다.
“하늘님, 썩 괜찮은. 아니,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하하하-”
그리고 명함을 잘 접어 상의 주머니에 넣고 정자 기둥에 걸린 시계를 봤다.
[2:59]
아직 오후 3시도 되지 않았다.
오늘 하루가 끝나려면 아직 시간이 있었고, 내일 다시 돌멩이, 천문석을 찾기 위해서는 할 일이 많았다.
이제 곧 온다는 최 순경의 도움을 받아 잃어버린 배낭부터 처리해야 한다.
“지갑, 신분증, 라이선스, 돌멩이 선물 전부 다 배낭에 넣어 두는 게 아닌데. 헌터 라이선스 재발급이 되려나. 하아아-”
한숨을 내쉬는 순간, 마치 대답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잉-
귓속에서 울리는 높고 날카로운 소리!
소리는 마치 공이 튀듯 왼쪽, 오른쪽 양쪽 귀를 빠르게 오갔다!
“이명? 갑자기 왜?!”
반사적으로 일어나 내력을 모으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지고, 손발이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순간 전신에 가득한 활기와 체력, 내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설마?!”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남중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하루하루가 살얼음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그렇기에 그 탁월한 ‘효과’를 알면서도 ‘부작용’ 때문에 사용할 수 없는 ‘약’이 있었다!
“포션! 포션 쇼크?! 포션을 마신 기억은……?!”
이 순간 정자에 놓인 빈 물병이 보이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꼬맹이가 준 물병!
그 안에 담긴 약은 포션이었다!
“……!”
진실을 깨달았지만, 뭘 어떻게 할 시간은 없었다.
[03시 00분]
놀이터 정자의 시계가 오후 3시 정각을 가리키는 순간.
이세기는 포션 쇼크로 그대로 정신줄을 놓고 픽- 정자에 쓰러졌다.
이때 경희 슈퍼 앞에 자동차 한 대가 멈춰 섰다.
파란색과 노란빛 도장이 들어간 차체와 지붕 위에 설치된 붉고 푸른 경광봉.
최 순경이 탄 순찰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