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78화>
낮처럼 환하게 밝혀진 상해 항구.
당장이라도 터질 듯 바짝 긴장한 군인 수천 명이 항구 전체를 봉쇄하고 있었다.
항구 곳곳에 은폐 마력장 발생기가 깔리고, 건물 옥상과 타워 크레인에 광학, 적외선 교란 장치가 설치돼 작동했다.
1급 보안 시설 이상의 경계를 펼친 군인들 중심에는 비계를 설치하고 겹겹이 마력 회로가 새겨진 차양으로 옥상과 벽 전체를 봉쇄한 건물이 있었다.
“하필이면 상해 항구에서……!”
한 장교가 봉쇄된 건물을 바라보며 머리를 부여잡는 순간 공기를 찢는 굉음이 들려왔다.
타타타타타타-
“헬기?!”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추락하듯 빠르게 지상으로 내려오는 눈에 익은 헬기가 보였다.
“상교님? 사격합니까?!”
“뭐? 미친! 사격 금지! 전 부대원 사격 금지! 컨테이너 밀어내고 착륙 유도한다!”
장교는 다급히 명령하며 신호탄을 들고 공터로 달렸다.
이 순간 헬기에서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100미터가 훌쩍 넘는 허공을 지나 산처럼 쌓인 컨테이너를 밟고 그대로 몸을 날려 지상으로 뛰어내린 각성자.
“장웨이 사령관 각하!”
“어디냐? 바로 안내해라!”
“네, 이쪽으로!”
“상황은?!”
장교는 봉쇄한 건물로 달려가며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03시 33분 야오간(遥感) 4, 8호 신호가 끊겼습니다. 즉시 예상 지역에 병력을 투입 수색을 시작했고. 04시 29분에 현장 발견. 바로 항구 전체를 봉쇄했습니다!”
“현장 상태는?”
“현장을 본 병사 전원 격리 조치했고,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잠시만 보안 해제하겠습니다.”
장교는 봉쇄한 건물 출입구에 손을 올렸다.
철컥-
마력 스캐너가 고유 각성력 패턴을 읽고 잠긴 문이 열렸다.
장웨이 사령관은 바로 문을 통과해 은폐, 광학 교란 마력 회로가 겹겹이 새겨진 봉쇄망을 통과했다.
이 순간 보였다.
환하게 밝혀진 수십 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벽면에는 거인이 거대한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내려쓴 듯한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會者定離]
장웨이 사령관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통화권 이탈이 떠 있는 스마트폰 갤러리로 들어가 클릭했다.
화면 가득 떠오른 문서와 벽면에 써진 글자를 빠르게 비교했다.
‘필적이 일치한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순간 불현듯 떠올랐다.
회자정리, 네 글자로 끝나지 않는다.
會者定離 去者必返!
회자정리 거자필반!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남에는 헤어짐이 정해져 있고.
거자필반(去者必返)!
해어진 사람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뒷말은? 거자필반은?! 다른 벽, 주위 건물은 전부 확인했나?!”
“이 건물에는 없었습니다. 바로 항구 전체 1차 수색했지만 나오지 않아, 2차 정밀 수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물건들을 발견했습니다! 이쪽으로!”
장교를 따라 벽에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장웨이 사령관은 깨달았다.
‘거자필반은 없다.’
천검은 처음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불이 꺼지듯 흔적도 없이 떠나갔다.
당장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지금은 첫 번째 연방 총선 선거기간!
천검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남중국 연방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장이다!
“하필이면 왜 지금?”
장웨이 사령관은 탄식하는 순간 깨달았다.
‘지금일 수밖에 없다!’
총선이 끝나고 남중국 연방이 성립해 천검이 연방 총통이 되는 순간 체제는 완성되고 떠날 수 없다.
장기판 위의 왕이 2x2, 4칸의 궁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연방 총선을 앞둔 선거 운동 중인 지금은 대외적으로 공표할 수도, 천검을 찾으러 움직일 수도 없다.
연방 총선의 중요도가 끝도 없이 치솟았으니까!
총선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천검이라는 권위가 사라진 새로운 남중국 연방의 최고 기득권층이 된다!
선거가 끝나고 나서도 상황은 마찬가지.
새로운 질서가 완성되면, 군벌 수장 아니 연방 상임 위원들의 총의를 모아 천검을 연방 총통에 올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권력은 공백을 용납하지 않는다.
남중국 연방이란 체재가 완성되는 순간 연방 상임 위원이 천검의 빈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
천검이 떠날 기회는 바로 지금 연방 총선이 치러지기 전, 모든 헌터 군벌이 선거 운동에 정신이 팔린 지금뿐이었다.
그리고 천검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문득 시선을 내리자 보였다.
회자정리. 네 글자가 새겨진 벽 아래.
자신이 준비했던 보안 스마트폰과 신분증, 보안키, 비자금 카드, 강화 전투복과 마도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천검은 네 글자와 함께 끝없는 부와 절대 권력, 손에 넣은 모든 것을 놓고 떠나갔다!
“다른 군벌에 비밀 유지…….”
장웨이 사령관은 말하는 순간 깨달았다.
천검은 사라졌다.
해안 경비대를 움직여 항구를 봉쇄했지만, 이곳은 푸젠성이 아닌 상해다.
다른 군벌 수장들이 알게 되는 건 막을 수 없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반드시 총선에서 승리해 연방 상임 위원이 되는 거다!
남중국 권력의 최상층부, 연방 총선에 매진하던 헌터 군벌이 발칵 뒤집혔다.
***
발칵 뒤집힌 건 남중국만이 아니었다.
북중국, 미국, 한국 일본, 러시아, 유럽…… 천검을 감시하던 정보기관은 모두 비상이 걸렸다.
천검을 감시하던 인공위성과의 통신이 끊겼다.
아무리 저궤도 위성이라도 지상에서 160km 이상 높이에 떠 있다.
거리는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방패.
에베레스트산 높이가 불과 8,848m, 1km도 안 된다.
중력을 거슬러 160km 거리에 있는 인공위성을 공격하는 건 아무리 21세기가 헌터, 각성자의 시대라도 상상할 수 없었다.
1세대 헌터 중에서도 전설인 이태성, 추이린, 장철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처음 통신이 끊겼을 때는 당연히 통신 장애, 기능 고장, 데브리 충돌을 예상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유성우와 위성 궤도이탈 보고가 올라오며 알게 됐다.
천검을 감시하던 다른 정보기관의 인공위성에도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대한민국 서울 동대문구 월세방 05시 58분.
CIA 제이나 김은 분통을 터트렸다.
“하필이면 그때!”
타깃의 행적 보고서를 쓰느라 잠시 천검에게서 눈을 뗐을 때 사건이 터졌다.
“미친! 인공위성 17개 완파! 20개 이상의 위성 궤도가 비틀렸다고?!”
천검을 감시하던 위성 총 37개가 날아갔다.
날개 파손으로 긴급 착륙한 초고고도 정찰기 날개에서 검격의 흔적이 남은 위성 파편이 발견되며 진실을 알게 됐다.
천검은 160km 상공의 위성을 공격했다!
즉시 위성 궤도를 조정하고 고고도 정찰기와 정찰 드론을 띄웠지만, 천검 이세기는 이미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습격? 내전? 테러? 의도적인 잠적?!
천검은 160km 이상 떨어진 인공위성을 미지의 방법으로 추락시켰다.
그런 천검이 사라졌는데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
핵잠수함을 놓친 것 이상의 긴급사태였다.
CIA는 발칵 뒤집혀 천검이 마지막으로 확인된 상해시를 샅샅이 훑어 항구를 특정했지만, 항구에는 이미 은폐, 광학, 적외선 교란 마력 회로가 촘촘히 깔렸다.
그리고 지금 사이코메트리 분석가 제이나 김의 팀에도 긴급 명령이 떨어졌다.
[즉시 한국 지부 TF에 합류해 천검의 행적을 추적한다.]
제이나 김은 풀지도 않은 캐리어에 옷과 노트북을 쓸어 담고 단기 월세로 빌린 방을 나와 건물 밖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이제 곧 복귀 명령을 받은 팀원이 픽업하러 올 거다.
제이나 김은 문득 고개 돌려 건물을 올려다봤다.
비쭉 비쭉 나무가 솟은 건물 옥상, 옥탑방에 타깃이 있었다.
본사의 지시로 대만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부터 추적한 타깃.
평범한 청년 헌터 천문석.
처음부터 헛수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며칠의 조사 결과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증명했다.
-관찰 1일 차. 건물을 청소하고, 세입자를 일일이 찾아가 전등을 갈고, 배관을 고치고, 문을 수리했다.
-관찰 2일 차. 공구와 자재가 잔뜩 실린 손수레를 끌고 동네를 누비며 안테나를 고치고, 과일을 따고, 빈 병을 날랐다.
타깃, 천문석은 헌터가 아니라 일 잘하는 ‘동네 일꾼’ 그 자체였다.
본사는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다!
제이나 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본사 녀석들.”
이제 진짜 중요한 일을 할 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천검’을 찾는 것!
헌터 군벌로 분열된 남중국의 통합은 100년이 지나도 불가능하다는 게 대세였다.
그런 남중국을 1년도 지나지 않아 연방의 이름으로 하나로 묶은 게 천검이다.
CIA에서 개입하기도 전에 모든 게 끝났다.
천검 이세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남중국에 나타난 모든게 베일에 가려진 천외천의 각성자.
리웨이 상장과 푸젠 군벌의 반을 박살 내고 내전에선 반대편 수뇌부를 압살했다.
피 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헌터 군벌의 땅과 권력, 이권을 모조리 빼앗아 하나도 남긴 없이 뿌렸다.
천검이 끝까지 손에 쥔 것은 단 하나.
남중국 연방이란 대의!
그 결과 헌터 군벌에서 각성 헌터, 비각성 헌터, 일반 시민까지 남중국 모든 사람의 마음을 연방의 대의 아래 모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버렸기에 잡을 수 있던 단 하나 마음, 천명.
천검은 천명을 얻어 ‘남중국 연방’이란 불가능한 위업을 이뤄냈다.
그런 천검이 남중국에서 사라졌다!
제이나 김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꼈다.
천검과 비견할 만한 각성자가 있었다.
게이트 전쟁의 흐름을 바꾼 전투 예지, 아니 확률 변수 고정의 능력자 검은 폭풍 이세영.
‘확률 변수 고정.’
전무후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능력에 본사는 검은 폭풍의 각성력의 그릇이 깨지고 능력을 잃는 것을 방관했다.
하지만 두 번의 실수는 없다!
사라진 천검을 반드시 찾아내 회유한다!
결심하는 순간 자동차가 멈춰 서고 묵직한 배낭을 멘 팀원이 내렸다.
“팀장님.”
제이나 김은 팀원과 교차해 자동차에 타며 고개를 까닥였다.
“비밀번호 4321.”
“네. 청소 끝내고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제이나 김을 태운 자동차는 천문석이 있는 건물을 떠나, 천검 추적 TF가 있는 한국 지부를 향해 출발했다.
* * *
삼합회는 주호와 장웨이 사령관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호가 은밀하게 움직이는 순간 바로 그 움직임을 포착했다.
“단혈철검 주호가 자리를 비웠습니다!”
“이 타이밍에 자리를 비워? 확실한 건가?!”
“최림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단혈철검 주호가 심복과 함께 한국으로 갔습니다. 한직으로 밀려난 왕체에게 확인했습니다!”
단혈철검 주호.
랭커조차 상대가 안 되는 절대 강자가 자리를 비우고 한국으로 갔다!
바로 지금 무력으로 들이치면 잃어버렸던 상해 지단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무력을 사용하는 순간 끝장이다.
삼합회와 철검장 사이를 중재한 건 천검의 심복 푸젠 군벌 수장 장웨이 사령관이었으니까!
헌터 군벌 수장은 왕과 같은 권력자들!
아무리 선거로 정신이 없어도 위신이 상하는 순간 장웨이 사령관은 반드시 보복한다.
방법은 하나!
어떻게든 주호가 돌아오기 전에 장웨이 사령관의 암묵적 양해를 얻어야 한다!
장웨이 사령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재력, 인맥, 정보 모든 것을 동원하고 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정보가 다시 한번 들어왔다.
“천검이 사라졌습니다.”
거대한 충격이 삼합회 수뇌부를 강타했다.
하지만 곧 모두는 깨달았다.
철검장과 장웨이 사령관의 그늘이 되어 주던 거목 천검이 사라졌다.
푸젠 군벌 수장, 장웨이 사령관의 힘과 영향력의 반 이상 깎여 나갔다.
그야말로 천재일우, 하늘이 준 기회다!
바로 지금이 상해 지단을 집어삼킨 철검장을 역으로 집어삼킬 기회다.
천검이 사라진 지금이라면 장웨이 사령관의 분노는 충분히 무마할 수 있다.
폭풍처럼 들이쳐 아직 제대로 뿌리박지 못한 철검장을 통째로 집어삼킨다!
자리를 비운 단혈철검 주호가 모든 것을 알았을 때는 되돌리는 게 불가능하다.
천검이 사라지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지금, 모든 것을 잃은 주호의 편을 들어 줄 헌터 군벌은 없었으니까!
‘주호가 돌아오기 전에 승부를 본다!’
삼합회는 모든 힘과 재력, 인맥, 간자를 총동원해 자리를 비운 주호, 철검장, 헌터 군벌 사이의 연락을 조용히 차단하고 단숨에 몰아칠 준비를 시작했다.
천문석과 주호가 연방 총통 천검 이세기라는 꿈에 부풀어 잠든 새벽.
상상하지도 못한 사건의 스노우볼이 구르고 도미노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천검 이세기가 친구를 찾아 남중국을 떠난 것!
이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남중국 헌터 군벌은 패닉에 빠질 새도 없이, 중요도가 미친 듯이 치솟은 총선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미국, 북중국, 러시아, 일본, 유럽, 한국의 정보기관은 사라진 천검 추적에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부었다.
-삼합회는 천검이 사라지고 주호가 자리를 비운 천재일우의 기회에 철검장을 삼키기 위해 힘과 인맥, 재력을 총동원했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천문석과 주호의 현재와 미래를 송두리째 바꿔 버릴 스노우볼이 구르고 도미노가 쓰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천문석과 주호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 채.
‘연방 총통 천검 이세기’라는 이미 물거품처럼 사라진 꿈에 부풀어 꿀 같은 단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휴가 4일 차의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