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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1269화 (1,270/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69화>

“여우 이름 뭐냐니까? 왜 톡에 답이 없어?! 오빠……!”

류세연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다 다급히 말을 삼켰다.

자신을 지켜 주던 할머니는 제주도로 내려가셨다. 지금 오빠라고 부르면 무자비한 응징을 당한다!

얼어붙은 채 한참을 기다렸지만, 옥탑방 안에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삼촌……?”

조심스레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가자 소파에 잠든 두 사람이 보였다.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든 옥탑방 오빠, 천문석.

수건을 쥐고 머리맡에 앉아 꾸벅꾸벅 고개를 까닥이는 특급 헌터.

머리를 말려 주다가 그대로 잠든 듯한 모습!

뚝, 뚝-

특급 헌터의 입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침이 옥탑방 오빠의 머리카락을 적시고 있었다.

“진짜 피곤했나 보네.”

류세연은 베개와 담요를 챙겨 머리 뒤에 베개를 받치고, 담요를 활짝 펼쳐 몸을 덮었다.

그리고 티슈로 특급 헌터의 입가와 천문석의 머리카락을 닦아 내다 문득 얼굴을 바라봤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깊게 잠든 모습.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고 가슴속에 따뜻한 온기가 퍼져 나갔다.

오빠가 처음 옥탑방에 이사 온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커다란 집에 혼자 잠들기가 무서워 찾아온 옥탑방.

자신에게 소파를 양보하고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들었던 옥탑방 오빠.

한밤중 몇 번이나 눈을 뜰 때마다 앞에 있던 얼굴.

몰래 화장실을 갈 때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화장실 앞에서 말을 걸어 주던 그 모습.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러 소년은 어른이 되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그때의 옥탑방 오빠가 있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여전히 꼬맹이 류세연이 있는 것처럼.

류세연은 씩 음흉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천문석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오빠. 언젠가는 꼬맹이 류세연이 아니라 다르게 부르게 될 거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지? 우리 한번 연습해 볼까? 내가 말하는 데로 따라 하는 거야.”

그리고 귓가에 입을 가져가 아주 작게 한 단어를 속삭였다.

순간 악몽이라도 꾼 듯 부르르 떨며 대답하는 천문석.

“안 되는데…… 약속했는데…….”

류세연은 설풋 웃었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처음 약속을 말했던 사람은 이미 약속을 잊어버렸다.

그럼에도 오빠는 여전히 고지식하게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너무나 옥탑방 오빠답게.

문득 오래전 그날이 기억났다.

스스럼없이 오빠, 동생으로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앞으로는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말했었다.

‘생각해 봤는데. 오빠는 너무 흔해. 꼬맹이 류세연. 특별히 너에겐 삼촌이라고 부를 자격을 줄게!’

어린 류세연은 특별하다는 말에 신이나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게 됐다.

“아빠, 엄마.”

친하게 지내던 아랫집 꼬맹이 부모님.

집주인이 딸과 거리를 뒀으면 좋겠다는 말에 어린 오빠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린 오빠는 어떤 마음으로 약속하고, 어떤 마음으로 10년이 넘도록 그 약속을 지켰을까?

아무것도 모르던 꼬맹이 류세연도,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대학생 류세연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었다.

아는 것은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과 슬픔의 크기에 아이와 어른, 나이는 상관없다는 것뿐.

오빠는 약속을 지켰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리를 뒀다.

“…….”

부르는 이름이 오빠에서 삼촌이 됐어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함께 나눠 먹었던 라면, 같이 하늘로 날린 종이비행기, 함께 놀러 갔던 놀이동산.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이 쌓인 마음은 모든 것을 바꾼다.

늘 혼자였던 우울한 꼬맹이 류세연은 크게 웃고, 먼저 말을 걸고,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자라났다.

옥탑방 오빠 덕분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열심히 알바하고, 불운에 한탄하다가도, 환하게 웃으며, 언제나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는 옥탑방 오빠.

“…….”

세연은 천문석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머리카락 정말 많이 자랐네…….”

“빡빡이 되는 줄 알았어…….”

잠꼬대하듯 돌아온 대답.

류세연은 다급히 웃음을 삼키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철수 오빠가 새로 연 사무실에 축하 인사하러 간다고 양복을 입고 축하 선인장까지 샀던 그 날.

집에 돌아온 옥탑방 오빠의 머리카락은 빡빡 밀려 있었다.

얼마나 황당했던가?

그러나 그 결과 오리온 길드 최후식 이사님, 경석 언니와 알게 되고 김철수 사무실은 빠르게 성장했다.

2020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옥탑방 오빠의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류세연은 천문석의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마음을 담아 속삭였다.

“엄마, 아빠 일 미안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난 아주 오래오래 기다릴 수 있으니까.”

“기다리지 말라니까…….”

잠꼬대마저 성실하게 대답하는 이 모습이라니!

류세연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며 질문을 이어 갔다.

“오빠는 전생에 거북선 노잡이 아니었을까?”

“마도 18문에서 개같이 굴러…….”

“국가 핵심 인재, 재금 아카데미에 연구원으로 입학! 이렇게 앞날이 창창한 내가 오빠 옆에 있잖아? 와, 이거 뭐야? 완전완전 대박이지?!”

“그러니까 그 대박 필요 없다고…….”

“네이버 부동산에 즐겨찾기 해 둔 건물 기억하지?”

“나의 빛, 나의 꿈, 나의 희망…….”

“조금만 기다려. 입학식 끝나고 샤이닝 보너스 받으면 내가 살 테니까.”

“내가 찍은 건물을 왜…….”

류세연은 씩 웃으며 귓가에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옥탑방 오빠의 소원이니까.”

“…….”

류세연은 빙그레 미소 지은 채 잠든 천문석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멈추는 순간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끝! 오빠랑 특급 헌터 모두 예뻐졌어. 그럼 잘 자고 내일 봐.”

류세연은 거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고 거실 불을 끄려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말했다.

“아, 깜빡할 뻔했네. 오빠가 데려온 그 새끼 여우 이름 뭐야? 태희, 경석 언니랑 여우 이름 때문에 난리 났는데?”

이 순간 천문석이 아닌 그 옆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섬초…….”

“섬초, 섬초? 특이한 이름인데 이상하게 입에 착착 붙네? 그럼 우선 섬초라고 부를게. 잘자 오빠…….”

류세연은 거실 등을 끄고 옥탑방에서 나갔다.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낡은 소파 위에는 베개를 베고 담요를 덮은 천문석과 특급 헌터가 쿨쿨 잠들었다.

이 순간 사람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워커 실트는 전능 옥좌 탈취 계획을 세우고.

같은 건물 단기 월세를 빌린 CIA 제이나 김은 정신없이 이세기를 분석했다.

에코, 아리엘, 케인 이사를 삼킨 미궁 악어는 엄청난 수의 해양 마수와 몬스터를 끌고 한국으로 올라오고.

붉은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가는 적예 뒤를 퐁퐁이, 용용이, 분노한 니케가 따라붙었다.

미국 서부 뉴포트에선 비제우 검공과 바라카스 발도를 태운 화물선이 대한민국으로 출발했고.

서울 하늘에 뜬 전능 옥좌에선 발명가 김철수가 추이린에게 남중국 사건의 전말을 듣고 있었다.

김철수와 임옥분 여사는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내려가고.

장민 대표는 염동 대협 마혁진을 움직여 붉은 비단 바람의 흔적을 추적하고, 남중국 단혈철검 주호의 정보를 모았다.

늦은 가을밤 스노우볼은 데굴데굴 구르고, 인과는 점점 더 복잡하게 얽혀들어 갔다.

남일도 던전에서 구른 천문석과 가짜 누나의 정체를 밝히러 동분서주한 특급 헌터는 세상모르고 쿨쿨- 깊게 잠들었다.

*   *   *

“……!”

천문석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으아악-! 내 머리 왜 이래?!”

특급 헌터의 외침과 함께!

정말 오래간만에 푹 잔 아침.

반사적으로 눈을 뜨는 순간 보였다.

“야, 너 머리 왜 그래?! 카캬카카캌-”

스탠딩 거울 앞에 앉은 머리카락을 예쁘게 땋아 올려 고정한 특급 헌터의 모습이!

“알바! 지금 웃을 때가 아냐! 머리! 누가 머리카락 이렇게 해 놨다니까! 빨리 범인 찾아야지!”

“야, 범인 찾을 필요 없어. 이 집에서 누가 그런 장난을 쳤겠냐? 당연히 한 명밖에 없지.”

순간 특급 헌터의 눈동자에 깨달음의 빛이 스치고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녀! 설마, 마녀가 돌아온 거야?!”

“뭐? 카카캌-.”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모습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졌다.

“알바! 웃지 말고 빨리 일어나! 마녀 도망치기 전에 잡아야지!”

“미안 특급 헌터. 난 앞으로 일주일 동안 빈둥거려야 해. 너무 힘들었거든.”

“앗! 그렇구나! 알았어! 걱정 마! 내가 꼭 마녀 잡아서 알바 복수까지 해 줄게!”

“그래 고맙…… 잠깐! 내 복수를 왜 하는데?”

“어? 당연히 복수해야지?”

순간 특급 헌터의 시선이 움직였다.

위!

자신의 머리카락 방향으로!

“……!”

소파에서 튕겨 올라 바닥을 밟고 도약, 스탠딩 거울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피해자는 특급 헌터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빡빡이 트라우마 때문에 몇 달 동안 자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땋아 올려 머리핀까지 꽂아 놓았다!

그리고 옥탑방에 들어와 이런 짓을 할 범인은 한 명뿐이다.

“꼬맹이 류세연!”

“앗? 마녀 다음 타깃이 세연이야?! 알바! 빨리빨리! 세연을 구해야 해!”

천문석과 특급 헌터는 한달음에 옥상을 가로질러 계단을 뛰어내려 류세연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류세연! 네가 겁을 상실했구나!”

“마녀 등잔 밑에 숨어 있던 거야? 나와라! 분노한 알바가 왔다!”

그러나 세연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알바! 텔레비전에 이 쪽지 붙어 있었어!”

특급 헌터가 가져온 쪽지.

[경석, 태희 언니랑 백화점 갔다 올게. 오늘 태희 언니 맞선만 3건 있어서 저녁 늦게 들어올 거야. 그분이랑 만남은 연기해 달라던데? - 세연]

“…….”

“알바? 마녀 안 찾아?”

뻘쭘하게 서 있기도 잠시.

천문석은 말했다.

“배고프다 우선 밥부터 먹고 빈둥거리면서 생각하자.”

“우리 고기 먹는 거야?! 고기고기?!”

“아니지! 휴가 첫날인데 당연히 짜파게티지!”

“난 계란후라이 2개!”

한달음에 옥탑방으로 돌아와 짜파게티 3개에 계란후라이 4개, 파김치를 꺼내 아침을 해결했다.

“내가 설거지!”

“난 청소기 돌릴게!”

쏴아아아-

천문석이 뒷정리 후 설거지하는 동안.

위이이잉-

특급 헌터는 청소기를 들고 옥탑방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다했어!”

“끝났다!”

설거지와 청소가 끝난 순간 특급 헌터는 외쳤다.

“알바 햇살 엄청 좋아! 1등급 햇살이야!”

쨍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직사광선.

“정말 그러네? 이불 말리자!”

“내가 퐁퐁검으로 두들길게!”

옥상 빨랫줄에 담요, 이불, 베갯잇이 줄줄이 널리고.

빵, 빵, 빠아앙-

특급 헌터의 기합과 함께 퐁퐁검이 허공을 갈랐다.

이불을 모두 너는 순간 다시금 들려온 외침.

“알바! 화분에 물 줄게!”

“그럼 난 유리창 청소!”

화분에 물을 주고, 유리창을 닦고, 간만에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하고, 쓰레기를 정리해 건물 밖 분리수거장에 내다 놓았다.

“아 깔끔하다. 이제 빈둥거리러…….”

“앗! 알바 계단! 내가 내려오면서 보니까! 계단이랑 난간이 지저분한 거 같아!”

“어 그러네? 좋아! 계단 청소다! 난 계단.”

“나는 난간 닦을게!”

쓱쓱, 쓱쓱-

천문석이 양동이와 대걸레로 계단을 청소하며 내려갈 때.

쓰으으으윽-

특급 헌터는 손걸레로 계단 난간을 문지르며 뒤 따라왔다.

옥상에서 1층 건물 입구까지 계단과 난간 청소를 마치고 로비를 청소하고 우편함을 정리하는 순간 이어지는 외침.

“알바! 낙엽! 주차장에 낙엽 잔뜩 있어! 빗자루 가져올까?”

“아니 빗자루는 시간 오래 걸려. 계단 창고에 송풍기 있어.”

위이이이잉-

크고 작은 송풍기를 들고 특급 헌터와 함께 자동차와 주차장에 흩어진 낙엽을 한곳으로 모을 때.

“잘 날아간다. 하하하…… 어!”

천문석은 벼락 치듯 깨달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우리 청소하고 있잖아? 알바! 이거 엄청 신기해! 위잉, 위이잉- 바람이 막 나와서 낙엽이 다 날아가! 카카카칵-!”

“아니,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하루 종일 빈둥거리기로 했잖아!? 그런데 지금 낙엽 청소는 왜 하고 있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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