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58화>
적예!
이름을 듣는 순간 철컥 머릿속에서 무언가 맞물렸다.
헛돌던 톱니가 끼워지고, 뭉텅이로 사라진 퍼즐 조각이 생겨난다.
머릿속에 불꽃이 튀는 순간 챠르르 펼쳐지는 기억들!
무림 던전, 이상 던전!
그리고 세기말 대한민국 천강의 불꽃에 불타는 전생 천마는 말했다!
‘적예한테 잘해라. 곧 널 찾아갈 거다. 힘내라! 카캬카카카-’
전생 천마는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잠시 멈춰 둔 운명이 기다리는 균열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 말대로 적예가 찾아왔다.
그것도 류세연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모습으로!
이게 가능한 건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자신도 모르게 외치는 순간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바 왜 놀라?”
“당연히 놀라는 게 정상……! 앗! 너 이 이름 어떻게 안 거야?!”
“알바가 이거 나한테 빌려줬잖아?”
의아해하는 얼굴로 손을 흔드는 특급 헌터.
“……뭐?”
반문하는 순간 휘파람을 닮은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위잉, 위이잉-
특급 헌터의 손에 들린 채 흔들리는 퐁퐁검에서!
“퐁퐁검?!”
무림 던전에서 친우 이세기에게 받은 나뭇가지를 다듬어 만든 피리!
이세기에게 퐁퐁검을 받았을 때가 적예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때다!
불현듯 기억나는 순간 탁- 퐁퐁검을 내미는 특급 헌터.
“퐁퐁검에 이름 새겨져 있잖아? 알바가 새긴 거 아냐?!”
“……!”
속이 빈 나뭇가지 검, 퐁퐁검 안을 살피자 보이는 두 글자.
적예(赤芮)!
순간 손에 쥔 손수건에 시선이 닿았다.
붉은 새싹이 수놓아진 비단 손수건에!
특급 헌터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모든 의문의 답은 처음부터 자신의 손에 있었다.
비단 손수건에 수놓아진 ‘붉은 새싹’이 바로 이름이었다.
붉을, 적(赤).
뾰족뾰족한 새싹, 예(芮).
“적예! 붉은 새싹이 적예였구나!”
“맞아! 마녀 이름은 적예야!”
특급 헌터가 외치는 순간.
한경석이 불쑥 끼어들었다.
“적예, 적예라고? 진짜로, 정말로 마녀가 있던 거야?!”
“당연하지! 친구들 마침내 때가 왔다! 우리는 알바랑 같이 마녀를 추적해! 아주아주 고통스럽게!”
“때려 줄 거야? 울려 줄 거야?!”
“간지럼을 태울 거야! 내가 당했던 것처럼! 눈물, 콧물이 줄줄 흐르고! 배가 막막 땅겨서 웃지도 못할 때까지! 절대 봐주지 않을 거야!”
특급 헌터는 움켜쥔 주먹을 번쩍 들며 외쳤다!
“복수, 복수, 복수!”
순간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으으-!
디디딛디-!
왕, 왕왕왕-!
……
겉으로 보기에는 꼬맹이와 사슴벌레, 황금 풍뎅이, 강아지, 거북이, 하늘다람쥐 귀여운 동물들이 외치고 우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울음소리에서 물결치듯 기파가 퍼져 나갔다.
구으으으으으응-
대기가 북을 치듯 요동치고 전신에 저릿저릿한 전율이 일었다!
특급 헌터의 분노에 동물 친구들이 호응했다!
당장이라도 폭풍처럼 몰아칠 듯 들썩이고 있다!
“잠깐, 잠깐만 대기!”
천문석은 다급히 제지하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빛바랜 녹색 츄리닝에 류세연 모습으로 자신 앞에 나타난 존재는 99% 적예가 맞다!
붉은 새싹이 수놓아진 비단 손수건이 그 증거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다!
가장 근본적인 의문!
적예가 세연의 표정, 감정, 사고, 목소리로 자신 앞에 선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전법륜인 딱밤을 맞고, 구인창의 경력에 구르고.
한 일이라고는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사소한 대화뿐이었다.
아니 평소와 다른 게 하나 있긴 했다.
머리카락 한 올을 톡- 뽑아 갔다.
하지만 머리카락 한 올 뽑아 가겠다고 이 모든 것을 했을 리는 없다!
당연히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을 거다.
그 목적을 모르는 이상 적예의 뒤를 쫓을 수는 없다!
나비 효과.
광화문 광장이 염동 광장이 된 것처럼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으니까!
‘떠올려라! 생각해라! 목적이 뭐지?!’
적예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적예의 생각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적예에 대한 기억은 누군가 가져간 듯 싹둑 사라졌다.
하지만 몇 번이나 듣고 보고 겪었다!
무림 던전 이세기에게.
이상 던전 적염성 곳곳에서.
세기말 대한민국 전생 천마에게!
방금 전에는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적예의 목적은……?!
“……복수!”
“복수…….”
불쑥 튀어나온 특급 헌터의 외침을 얼떨결에 따라 외치는 순간 다다다! 빠르게 말이 이어졌다.
“맞아! 우리의 목표는 복수야!”
“알바 빨리빨리! 한국 사람은 빨리빨리 움직여야 해!”
“마녀도 한국 사람이면 벌써 KTX 타고 도망가고 있을 거야!”
“우리는 바로 추적해야 해!”
“구으응사슴이, 반짝반짝반짝이, 탱탱볼탱탱이, 거복거복이, 부두목니케!”
특급 헌터는 번쩍 양손을 들었다.
“모두 출으브븟!”
천문석은 잽싸게 특급 헌터의 입을 가리고 외쳤다.
“대기, 모두 대기! 하나만 확인하고! 세연아 손! 확인할 게 있어 손 좀……!”
“브븟! 으븝으븝!!”
모두의 시선이 류세연에게 모였다.
“확인? 갑자기 뭘 확인한다는 거야?”
고개를 갸웃하는 류세연.
“…….”
“…….”
“…….”
천문석, 특급 헌터, 한경석은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이 모습을 바라봤다.
“그 넋 나간 표정 뭐야? 내 미모와 지성에 깜짝 놀랐나?”
“…….”
“…….”
“…….”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는 세 사람.
“뭐야? 민망하게! 그럴 땐 바로 아니라고 해야지! 자, 여기 손! 오빠 얼른 확인해 봐!”
민망해하는 웃음과 함께 길고 가는 손가락이 다가왔다.
손가락이 장난스레 톡 가슴에 닿는 순간 막힌 둑이 열리듯 말문이 트였다.
“……너 괜찮아?”
“응?”
“세연? 혹시 무슨 일 있어?!
“누가 강제로 고등어 먹인 거지? 맞지? 그렇지?!”
“뭐야, 갑자기 다들 왜 그래?”
천문석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너 왜 울고 있냐?”
“뭐? 내가 운다고? 하- 오빠! 내가 그런 사기에 속을 줄 알아? 나 이제 꼬맹이 류세연 아냐! 재금 아카데미 1기! 연구생으로 입학이 결정된 국가 핵심 인재라고!”
“세연! 진짜야! 알바 말이 맞아!”
“특급 헌터 너까지? 하-”
류세연은 헛웃음과 함께 얼굴에 손을 가져간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
손끝에 만져지는 촉촉한 무언가!
“……!”
반사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셀카 모드로 얼굴을 보는 순간 넋 나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왜 울고 있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
눈물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전신이 타 버릴 듯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왜 이러지? 오……?”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류세연은 허수아비처럼 그대로 쓰러졌다.
* * *
“누나!”
“세연아!”
특급 헌터와 한경석이 다급히 움직일 때.
천문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쓰러지는 류세연을 받았다.
두 팔에 걸리는 몸에서 느껴진다.
쿵쿵, 쿵쿵쿵쿵-
전신을 울리는 맥동과 그 맥동을 따라 꿈틀꿈틀 휘몰아치는 엄청난 힘!
6계통의 각성력도, 정사마, 유불선의 무공도 아니다!
다른 계통의 힘, 주술력이다!
그리고 세연이 서 있는 옥탑방 거실에 방금까지 주술공의 대가가 있었다.
적예!
적예가 머문 공간에서 흘러들어온 주술력에 류세연의 신체가 반응하고 있다!
이것이 적예가 도망치듯 떠난 이유다.
류세연을 만나는 순간 이렇게 될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적예는 류세연과 접촉하지 않았다.
시차를 둔 간접적인 접촉만으로 이렇게 강렬한 반응이 가능하다고?!
분명 매개체가 있다!
“세연! 왜 그래!”
“119, 119 전화할까?!”
양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쏟아졌다.
“확인부터!”
천문석은 기감을 터트리고 마음을 열었다.
파스스슥-
기감이 스며드는 순간.
파지지직-
맥동하는 주술력이 마음으로 밀려왔다.
숲을 태우는 불이자, 산을 무너트리는 물이다.
밤하늘의 별빛이자, 태양을 가리는 어둠이다.
관념을 구현하는 힘, 주술력이 마음에 차오르는 순간 눈을 감고.
지권인의 수인을 짚어 영육과 혼백의 사이, 심상 공간에 불꽃을 피워 올린다.
그리고 밀려오는 주술력을 장작 삼아 이 불꽃을 키운다!
화르르륵-
심상 공간에 거대한 불꽃이 태어나는 순간 폭풍처럼 맥동하는 주술력이 흐릿해지고 기감에 그 근원이 느껴졌다!
‘손가락!’
번쩍 눈을 뜨자 보였다.
손가락에 끼워진 붉은 반지!
반지를 잡고 그대로 뽑아냈다.
두두두두두두-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점점 더 강하게 맥동하는 반지!
세연의 몸에서 떨어졌는데 오히려 맥동하는 주술력이 강해지고 있다!
“이 반지 뭐야?!”
자신도 모르게 외치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앗! 그 반지 내가 주워 온 반지야!”
“적염성!”
외침과 동시에 잊고 있던 시선이 움직였다.
붉은 구리반지 안쪽 면에 새겨진 이름.
류세연.
적예(赤芮).
적예가 무심결에 남긴 주술력이 트리거가 되어 반지가 두 사람의 본질을 연결했다.
그리고 자신이 강제로 연결을 끊어 내는 순간 갈 곳 잃은 주술력이 폭발할 듯 압축되고 있다.
홍수가 난 하천의 물길이 막힌 것처럼!
폭발을 범람을 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꽉 막힌 물길을 뚫어 주면 된다!
류세연을 대신할 새로운 출구를 만들면 된다!
‘천문석 바로 자신!’
“경석아! 류세연, 특급 헌터! 긴급 탈출!”
외침과 동시에 전법륜인의 수인을 짚어 심상을 연결하고 손가락을 펼쳤다.
이때 다시금 외침이 들려왔다.
“알바! 여기야!”
다다다다닥-
텔레비전 옆 금속 조각상을 낚아채 달려오는 특급 헌터!
“아앗! 이거 놔! 핥지 마! 긴급 탈출해야 한다고!”
다닥다닥 전신에 붙은 동물들에 의해 무력화된 한경석!
“특급 헌터! 얼른 튀어! 실패하면 폭발해!”
특급 헌터는 양손의 조각상과 활짝 열린 나무상자를 내밀며 외쳤다.
“괜찮아! 이 상자 엄청엄청엄청 넓어! 그리고 여기 아수라 도장에 휘잉휘잉 잠자고 있어! 상자에 같이 넣으면 휘잉휘잉이 다 먹을 거야!”
무한의 상자!
아수라 조각상!
용권풍의 정령, 휘잉휘잉!
‘가능성이 있다!’
천문석은 바로 반지를 던졌다.
핑그르르르-
구리반지가 상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휘잉휘잉! 부탁해!”
특급 헌터는 아수라 도장을 그 반도 안 되는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는 즉시 정신없이 흔들었다.
“이야아아아아압-!”
타다다다다닥-
반지 부딪혀 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잠시 어느새 소리가 사라졌다.
“휴- 성공이야!”
“잘했다! 특급 헌터!”
“우리 안 튀어도 되는 거야?”
특급 헌터, 천문석, 한경석이 연이어 외치는 순간 류세연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지. 내 반지…….”
“걱정 마. 상자 안에 넣어서 주술력 뽑아내고 있으니까 나중에 꺼내면 돼. 그렇지 특급 헌터?”
“아닌데.”
“뭐?”
특급 헌터는 반지를 삼켜버린 상자를 내밀었다.
“들어가는 건 맘대로인데 나오는 건 랜덤, 나오고 싶을 때 나와. 요새 점점 안 나와서 큰일이야. 에휴-”
“…….”
“오빠……?”
“괜찮아! 내가 바로 빼서 줄게!”
천문석은 상자를 건네받아 미친 듯이 흔들었다.
훙훙, 훙훙훙훙-
그러나 아무리 강하고 빠르게 흔들어도 반지는 나오지 않았다.
짤랑, 짤랑, 짤랑-
어느 순간 쇳소리와 특급 헌터의 환호성만 울려 퍼졌다.
“대박이야! 동전이 막 떨어져! 경석 형! 빨리 주워!”
짤랑, 짤랑, 짤랑-
상자를 흔드는 매 순간 저금통을 흔드는 것처럼 500원 동전이 계속계속 튀어나왔다!
“……!?!”
얼떨결에 특급 헌터 옆에 쪼그려 앉아 500원 동전을 줍기 시작하는 한경석!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반지는 안 나왔다!
“내 반지!!”
류세연은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정신줄을 놓은 상태!
다시 깨어났을 때 반지가 없으면 일어날 일들이 눈에 선했다!
“나와! 제발 좀 나와랏!”
천문석은 혼신의 힘을 다해 상자를 흔들었다.
이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왕, 왕왕왕-?
“안 돼!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지금은 동전 주울 때야!”
천문석은 상자를 흔들던 손을 멈추고 확인했다.
“탱탱이 뭐라고 했는데??”
“추적 언제 하냐는데?”
‘아뿔싸!’
반사적으로 탱탱이 앞에 손수건을 내밀었다.
킁, 킁-
코를 박고 냄새를 맡더니 대답하는 탱탱이.
왕, 왕왕-
“뭐라고? 그게 진짜야?!”
특급 헌터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탱탱이는 고개를 휙휙 젓더니 슬렁슬렁 평상으로 걸어가 햇살 아래 발라당 누워 버렸으니까!
그리고 뜨거운 열기가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냄새 다 날아가서 추적 안 된다는데?! 알바 상자 안 흔들어? 500원 동전이 막 복사된다니까! 우리는 이제 부자야!”
“야, 무슨 빌 게이츠 동전 줍는 소리야! 500원 동전 줍느니 차라니 알바 뛰는 게 낫지! 추적도 실패하고! 세연이 깨어나면 분노할 텐데?! 으으윽-.”
머리를 부여잡는 순간 터져 나온 생각지도 못한 외침.
“오만 원! 우리 오만 원짜리 넣고 해 보자! 오만 원 복사되면 대박이잖아! 후식이 삼촌 장비 찾아올 수 있어! 친구!”
“앗, 아앗! 경석 형! 완전 천재잖아! 알바 돈이 막 복사가 되는 거야! 특급 쌩쌩이도 수리할 수 있어! 빨리빨리!”
특급 헌터와 한경석의 이글이글 욕망으로 불타는 시선.
천문석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하- 일련번호 때문에 지폐는 안 돼.”
“흐어어-.”
“으아아-.”
땅이 꺼질듯한 탄식이 흘러나오는 순간.
천문석은 잡낭에 들어간 손을 번쩍 들었다.
“지폐가 아니라 이걸로 해 보자!”
“……!!”
“……?”
충격과 경악으로 물든 얼굴!
“친구……?!”
“알바……?!!”
“맞아! 금이다! 1kg 골드바 반쪽!”
천문석의 손에는 반으로 쪼개진 골드바가 있었다.
찰나의 순간 황금빛 물결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거대한 열망이 터져 나왔다.
“당장 해 보자!!”
“당장 시작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