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57화>
휘잉, 휘이잉-
붉은 바람이 우뚝 솟은 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탁-
불쑥 튀어나온 가죽신이 나뭇가지를 밟고 붉은 비단옷을 입은 몸이 내려섰다.
빙글 몸을 돌리자 울긋불긋 물든 나뭇잎 사이로 보였다.
방금까지 있던 건물.
다급히 몸을 피해야 했던 이유.
꼬물꼬물 벽을 기어 오르는 새하얀 강아지와 그 등에 매달린 사슴벌레, 황금 풍뎅이, 별갑 거북이. 그리고 무시무시한 다람쥐!
“어떻게 저렇게 모였을까?”
하나같이 대요마에 버금가는 격을 갖춘 존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저기에 하늘 고래만 더해진다면 허공도의 주인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다시 싸울 엄두가 나지 않는 조합이었다.
“정말 운이 좋았구나.”
새삼 운이 좋았다는 게 느껴졌다.
첫 싸움에서 이상한 꼬맹이를 먼저 제압하지 못했다면 당하는 건 자신이 됐을 거다.
그렇기에 악연을 끊고 선연을 잇기 위해 대가 없이 동물들 모두를 풀어 줬다.
그리고 예상대로 선연(善緣)이 이어져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비록 무자비한 딱밤에서 시작된, 차 한잔 마실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충분했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얼굴과 목소리, 그 안에 담긴 마음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돌멩이. 천문석, 오빠.”
문득 고개를 내리자 보였다.
손바닥에 놓인 한 가닥 머리카락.
새치를 핑계로 뽑아 온 돌멩이의 머리카락이다.
이 머리카락은 증거이자 약속이었다.
마침내 돌멩이를 다시 만났다는 증거.
잠시 헤어지지만, 결국 다시 만나게 된다는 약속.
톡- 한 올의 머리카락을 뽑아 손에 놓인 머리카락 위에 떨어뜨렸다.
“하늘은 무정하고, 천의는 아득하니.”
“하늘의 인과는 그 누구도 끝을 헤아릴 수 없고.”
“생사필멸은 신조차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노래하듯 말하며 양손을 하나로 모았다.
“삶은 그 끝이 정해져 있으나 본질은 영원하니.”
“많이 그리워하는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리라.”
주정뱅이 도박꾼이 장난스레 웃으며 했던 이야기는 진실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경계를 걸은 건 헛수고가 아니었다.
자신의 그리움은 마침내 무정한 하늘에 닿았고 돌멩이를 만났으니까.
이제 후생의 인연을 이을 때였다.
공물, 주술력, 업과 명운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하늘은 무정하니 무정한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유정(有情).
하늘을 바라보는 이의 지극한 마음뿐.
‘부디 다시 이어지기를.’
맞닿은 양손에 지극한 마음과 아득한 기원을 담아 빌었다.
활짝 펼친 손바닥 위에는 하나로 매듭지어진 머리카락이 놓여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순간 문득 고개 들어 바라봤다.
이상한 꼬맹이의 동물 친구들이 꼬물꼬물 기어오르는 목적지 옥상.
잎이 무성한 나무 화분이 줄줄이 놓여 있고, 바닥에는 구불구불 새하얀 선이 그려지고, 한편에는 넓은 평상이 놓여 있다.
그리고 작은 옥탑방이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래된 소파.
숨이 죽은 카펫.
손때 묻은 가구들.
……
손이 닿을 때마다 마음으로 흘러들어오던 사념들.
뜨거운 흑차를 나눠 마시고.
맛있는 밥이 차려진 상에 마주 앉았다.
낡지만 포근한 소파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며 웃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여름에는 달콤한 수박을, 찬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에는 호빵과 귤을 먹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함께 방수 페인트를 칠하고, 밧줄을 타고 창문을 청소하고, 장을 보고 숨이 차게 달리고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울고 웃으며.
같이 크고 자라난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삶.
그것이 자신의 바람이었다.
인연은 이어지고, 삶을 함께하게 되리라.
온천지가 하얀 눈으로 물든 그 날 버려진 산속 사당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손에 놓인 하나로 매듭지어진 머리카락이 바로 미래에 자신을 찾아올 삶, 후생의 약속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자 후생의 약속이 보였다.
계단에서 뛰어나와 한달음에 옥상을 가로질러 옥탑방으로 들어가는.
“돌멩이.”
그 뒤를 쫓아 전력 질주하는 너무나 익숙한 얼굴과 체형의.
“류세연.”
한참의 시간이 지나 우당탕탕 달리는 이상한 꼬맹이와 호위무사처럼 그 옆에 찰싹 붙은.
“특급 헌터, 한경석.”
모두를 향해 작별 인사를 했다.
“곧 다시 만날 그날까지 잠시 안녕.”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디뎠다.
휘잉, 휘이잉-
한 줄기 붉은 바람이 불어와 나무를 휘감고 멀리 날아갔다.
* * *
천문석은 거실을 가로질러 거실 창문 앞에 섰다.
창문 아래 탁자 위에 놓인 반듯하게 개어진 빛바랜 녹색 츄리닝.
문득 손을 올리자 아직도 남아 있는 체온이 느껴졌다.
꿈도 환상도 아니다!
방금까지 누군가 이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
“……설마 내가 홀린 건가?!”
녹색 츄리닝을 드는 순간 툭 떨어진 손수건!
반사적으로 공중에서 낚아채자 비단 손수건에 수놓아진 붉은 새싹들이 보였다.
“……!”
순간 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은 기억의 파편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붉은 바람, 붉은 비단, 붉은 새싹들!’
그리고 간질간질 뇌리를 긁는 무언가!
이 무언가는 기어가 사라진 시계처럼 헛돌고, 조각이 뭉텅이로 사라진 퍼즐처럼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뭐지? 기억해라! 생각해 내라!’
스스로에게 외치는 순간 숨 몰아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 허억, 헉- 오빠. 뭐야? 왜 갑자기 도망쳐? 무슨 일……? 이게 뭐야?! 문! 현관문! 문이 왜 이래?!”
“사정이 있었어…….”
“뭔 사정이 있길…… 어, 손에 그거 내 츄리닝?! 그게 왜 여기에…… 안 돼!”
한달음에 달려와 츄리닝을 낚아채 등 뒤로 숨기는 류세연.
“이 츄리닝 나 준 거잖아! 다시 가져가는 게 어디 있어?! 이미 점유 취득 시효 지났어!”
자신의 보물을 뺏길 위기에 처한 꼬맹이처럼 단호히 외치는 류세연.
“야, 그 츄리닝 준 게 아니라! 네가 그냥 가져다 입은 거잖아! 그리고 뭐? 점유 취득 시효? 점유 취득 시효 20년이야!”
“아니거든 우리 건물에서는 2년이거든!”
“와! 그럼 네가 1년 365일 누워 있는 저 소파도 시효 완성됐냐?!”
“당연하지!”
“무슨 말도 안 돼…….”
버럭 외치는 순간 깨달았다.
엉뚱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새고 있다!
지금 중요한 건 빛바랜 녹색 츄리닝의 소유권이 아니라, 저 녹색 츄리닝을 입고 나타났던 ‘류세연2’의 정체다!
파파파팟-
머리에서 불꽃이 튀고 머릿속 기억이 영화 보듯 펼쳐졌다.
‘류세연2’는 대화, 호칭, 말투, 표정, 작은 몸짓 하나까지 류세연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진짜 류세연’을 보니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었다.
-0.7cm 정도 작은 키!
-틀어 올려 묶은 긴 머리카락!
-은연중 풍기는 기품과 우아함!
‘이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가장 가능성이 큰 답은?!’
천문석은 번쩍 고개를 들고 외쳤다.
“쌍둥이! 류세연! 너 쌍둥이 언니나 동생 있지?!”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너무나 익숙한 눈빛이 돌아왔으니까.
“…….”
미친놈 보듯 바라보는 눈빛이!
“야, 전부 농담……!”
잽싸게 말을 돌리려는 순간 현관문을 통과하는 두 사람.
“특급 헌터가 왔다! 세연 조심해! 알바 마녀한테 홀렸어!”
“마녀? 홀렸다고?? 오빠가??”
류세연의 눈빛이 특급 헌터에게도 쏟아졌다.
“둘이 같은 꿈이라도 꾼 거야? 마녀 꿈? 갑자기 무슨 마녀 타령이야.”
“난 마녀가 아닐 쌍둥이…….”
“우리는 완전 정상이야! 마녀가 방금까지 여기 있었어! 내 친구들이 증인이야! 사슴이, 반짝이! 친구들 빨리 와서 증언 좀 해 줘!”
그러나 동물 친구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이제는 한경석까지 의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진짜 마녀가 있긴 한 거야?’
한경석의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천문석과 특급 헌터는 동시에 외쳤다.
“진짜 있었어!”
“진짜 있었어!”
“붉은 바람!”
“붉은 바람!”
……
“잠깐만 기다려! 내가 증인 데려올게! 친구들 어디 갔어?! 양동작전 취소야! 빨리 나와!”
특급 헌터는 말릴 틈도 없이 타다닷- 옥상으로 뛰어나가며 외쳤다.
“니케, 탱탱이, 거복이!”
외침을 듣는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거복이!
열사의 사막!
기동 병참 도시!
사막을 달리는 놀라운 도시의 주인!
‘워커 실트7!’
기동 병참도시의 ‘워커 실트7’은 지구의 ‘워커 실트’와 모습, 사고, 말투 모든 것이 같았다.
눈앞의 ‘류세연’과 사라진 ‘류세연2’처럼!
순간 파파팟- 떠올랐다.
시간을 거스르며 만난 사람들!
헌터 장철과 회사원 장철.
염동 대협 마혁진과 칠성파 보스 마혁진.
‘자신이 만난 ‘류세연2’가 이들과 같다면?’
‘장철 헌터, 염동 대협 마혁진이 시간을 거슬러, 2004년 부산과 2000년 세기말 대한민국에서 과거의 자신을 만난 것과 같은 상황이라면?!’
즉, 미래의 ’류세연2‘가 과거의 천문석, 바로 자신을 만나러 온 거라면?!
순간 촉이 왔다.
이거다! 이거라면 모든게 설명된다!
“류세연2는 미래의 류세연이다!”
깨달음의 탄성을 터트리는 순간.
류세연과 한경석의 시선이 마주쳤다.
“……!”
“……!!”
다음 순간 그 시선은 천문석에게 향하고 동시에 말이 튀어나왔다.
“오빠 괜찮아?”
“친구 괜찮아?!”
“의문이 풀렸어! 하하하- 됐어! 이제 이걸 어떻게 활용할지만 생각하면 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뭘 활용한다고?”
“미래 지식! 류세연2의 미래 지식을 활용하면 로또…… 어, 어?!”
천문석은 말하는 순간 깨달았다.
류세연2는 미래 정보는 조금도 흘리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만났으면 처음에 로또, 주식, 부동산 정보부터 줬어야지! 두괄식! 결론, 핵심은 앞에 말해야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담아 외치는 순간.
류세연의 얼굴은 황당을 넘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로또? 갑자기 뭔 헛소리야?! 경석 언니! 오빠 진짜 괜찮은 거 맞아? 혹시 이번 출장에서 뭔 일 있던 거야? 119 불러야 하는 거 아냐?!”
“방금까지 멀쩡……?”
이때 뻥 뚫린 현관 너머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친구들 거기 있었구나! 빨리 올라와! 얼른 증인 서 줘!”
왕, 왕왕-
“마녀 사라졌다니까! 작전 취소야! 그냥 막막 달려와도 괜찮아!”
불쑥 난간에 올라온 동글동글 새하얀 서리 늑대 새끼, 탱탱이!
탱탱이 등에 줄줄이 매달린 사슴이, 반짝이, 거복이, 니케!
“잘했어!”
특급 헌터는 탱탱이를 양손으로 번쩍 들고 달려왔다.
“여기 증인 있어!”
천문석은 이 모습을 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손을 봤다.
비단 손수건!
‘아직 늦지 않았다!’
류세연2에게 당한 특급 헌터의 동물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는 류세연2가 남겨 놓은 비단 손수건이 있다!
서리 늑대 탱탱이가 비단 손수건에 남겨진 흔적으로 류세연2를 찾아내 미래 정보를 얻어 내면 된다!
“특급 헌터! 당장 우리 할 일 있어!”
천문석은 특급 헌터를 향해 달렸고 그 뒤로 류세연과 한경석이 따라붙었다.
“할 일? 오빠 방금 돌아왔는데?!”
“친구! 뭔가 좀 이상해!”
옥상 중앙에서 만나는 순간.
천문석과 특급 헌터는 동시에 외쳤다.
“류세연2 당장 찾자!”
“마녀 증인…… 어, 류세연2?”
“마녀가 류세연2 맞잖아? 시간 없어 얼른 추격하자! 탱탱이한테 이 손수건 냄새 맡고 추적하라고 해 줘!”
비단 손수건을 내미는 순간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특급 헌터.
“마녀, 류세연 아닌데.”
“뭐? 너 기동 병참 도시 기억 안 나? 너랑 도시 걸고 구슬치기했던 ‘워커7’! 기억하지?! 그때랑 같은 경우야!”
“아닌데. 마녀는 류세연이랑 완전히 다른데.”
특급 헌터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단호히 잘랐다!
“……!”
말문이 막히는 순간 번쩍 떠오른 생각!
“특급 헌터. 너 설마! 마녀 정체! 누군지 알고 있는 거야?”
“당연히 모르지! 내가 말했잖아! 하늘하늘 붉은 비단을 이렇게, 이렇게 칭칭 감고! 휘잉휘이잉- 붉은 바람이 불었다니까! 그렇지? 친구들 내 말이 맞지?!”
구으으-!
띠디딛디-!
왕, 왕왕왕-!
……
고개를 끄덕이며 우는 동물 친구들.
‘아니 이게 뭔 소리야? 누군지 모르는데 어떻게 아니라고 확신을……?!’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너 혹시 얼굴 본 거야? 세연이랑 얼굴 달랐던 거야?!”
“아니 얼굴 못 봤는데. 그래도 류세연 아냐!”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단호히 대답하는 특급 헌터.
“야, 얼굴도 못 봤는데! 어떻게 류세연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건데! 난 얼굴 보고 대화도 했어! 류세연이랑 완전! 쌍둥이처럼 똑같았단 말이야!”
천문석이 황당함에 소리치는 순간.
특급 헌터는 마주 버럭 외쳤다.
“이름이 다르잖아!”
“……뭐?”
“세연 누나랑 마녀! 이름 완전 다르다고! 이름이 다른데 어떻게 같은 사람…….”
“……아니아니! 잠깐 잠깐만!”
천문석은 다급히 말을 끊고 물었다.
“너 마녀 이름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그게 왜 당연해! 얼굴도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름을 알아…….”
외치는 순간 깨달았다.
이유, 방법은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건 특급 헌터가 자신이 만난 존재의 안다는 사실이다!
천문석은 바로 핵심을 확인했다.
“이름이 뭔데?”
특급 헌터는 퐁퐁검을 휙 뽑아 들며 외쳤다.
“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