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55화>
“무, 양파, 쑥, 마늘…… 대파를 넣었다고? 주스에?”
“맞아. 그리고 거기에 센트라도 넣었어! 미친 듯이 쓴맛 느껴지지?”
꼬맹이처럼 씩 웃으며 자랑스레 대답하는 장세린.
천문석은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은 표정으로 다시 확인했다.
“센트라? 됐고. 주스에 대파는 왜 넣은 건데?”
“감칠맛을 더하려고?”
“찜닭도 아니고 주스에 무슨 대파야?!”
버럭 소리치는 순간 마찬가지로 버럭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 특제 주스는 원래 그런 거야!”
“맞아! 어쩔 수 없어! 천명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이겨 내야 하는 거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특급 헌터.
꼬맹이들이 공룡에 빠지듯 ‘천명’에 완전히 꽂혔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드는 장세린.
“역시 특급 헌터! 훌륭해! 여기 남은 특제 주스도 마셔! 고난과 시련을 이겨 내고 천명을 받는 거야!”
장세린은 쓱 야채 주스가 담긴 쟁반을 밀어주고.
특급 헌터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컵을 손에 쥐었다.
“야, 잠깐만…….”
진실을 밝히려는 순간 단호한 외침과 함께 주스를 입에 가져가는 특급 헌터.
“안 돼! 전설 퀘스트를 받기 위해서는 고난과 시련을 이겨 내야 해!”
단숨에 주스를 마시려는 순간 컵을 쏙 낚아채는 손!
“앗?!”
“누구야?!”
특급 헌터와 장세린은 동시에 외치고 동시에 얼어붙었다.
한 손에 과일이 담긴 쟁반을 든 채 주스 컵을 유심히 보는 세린이 엄마.
“앗! 내 고난과 시련!”
“잠깐만 내가 잘 설명을…….”
뭘 어떻게 할 틈도 없었다.
꿀꺽-
장세린의 야채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컵과 쟁반을 내려놨다.
그리고 웃음도 분노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장세린…….”
“엄마 오해야! 특급 헌터가 자발적으로 마신 거야! 절대 내가 강제로 먹인 거 아니야!”
“맞아! 내가 먹는다고 했어. 나 천명 받아야 하거든!”
“천명? 하늘 말하는 거니?”
“맞아! 고난과 시련을 이겨 내고 하늘에서 전설 퀘스트 받아서 꼭 해야 할 일이 있거든!”
“해야 하는 일? 혹시 뭐 가지고 싶은 거 있는 거니? 숙모가 사줄게.”
특급 헌터는 힐끗 베란다 정원 구석의 장민을 살피고 숙모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작게 속삭였다.
“세계를 하나로 이어야 해.”
“세계를 하나로 이어? 아, 혹시 세계 평화?”
“앗! 맞아! 세계 평화야!”
순간 세린이 엄마의 무표정한 얼굴은 환하게 펴졌다.
“아유. 어쩜 우리 조카는 이렇게 어른스러울까. 우리 세린이가 본받아야 하는데.”
“엄……!”
장세린이 버럭 외치는 순간 탁- 그 앞에 놓이는 야채 주스.
“넌 이 주스 얼른 마셔.”
“네? 제가요?”
“설마 너도 못 먹는 주스를 동생한테 준 건 아니겠지?”
“……!”
지진이라도 난 듯 동공이 흔들리고 뒤이어 어깨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완벽한 논리 앞에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장세린은 남은 2컵의 특제 야채 주스를 모두 마시고 털썩 주저앉았다.
형용할 수 없이 비틀린 장세린의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 웃음을 삼킬 때 특급 헌터의 탄성이 들려왔다.
“훌륭해! 누나도 고난과 시련, 천명 받으려는 거구나!”
“세린이는 벌써 천명 받았단다.”
“내가? 천명을 받았다고?”
“누나가 천명을 받았다고?!
장세린과 특급 헌터가 동시에 외치는 순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세린 엄마.
“세린이는 설거지하는 천명을 받았단다. 자 세린이 얼른 설거지해야지?”
“엄마! 나 헌터 랭킹 20위권의 오러 각성자야! 내가 설거지하는 건 국가적 손실……!”
말없이 손을 들어 말을 끊고 거실을 가리키는 세린 엄마.
장세린, 특급 헌터.
천문석, 한경석.
평상 위 네 사람의 시선이 손을 따라 움직였다.
손끝에는 앞치마에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하고 있는 1세대 헌터, 강철 해머 장철이 있었다.
“국가적 손실?”
“…….”
장세린은 말없이 일어나 터벅터벅 걸어갔고.
천문석, 특급 헌터, 한경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도 도울 일이……?”
“숙모 난 뭘 하면 될까?”
“…….”
“아뇨. 손님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죠. 그보다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네. 괜찮습니다.”
세린 엄마는 설거지 중인 장철과 평상에 앉은 한경석에게 잠시 눈길을 줬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저 혹시 실례되는 질문일지 모르겠는데…….”
“네, 괜찮으니까 말씀하세요.”
“숙모! 빨리 물어봐! 한국 사람은 빨리빨리 해야 한다고!”
“저기 아가씨랑 우리 그이 얼굴에 그려진 그림에 무슨 이유가 있는 건가요?”
“네? 그림이요?”
“고양이, 안경 그림 같은데…….”
“……!”
“내 얼굴에 고양이 그림이 있다고?”
“앗! 진짜야! 경석 형 얼굴에 고양이 있어! 삼촌! 삼촌 대사건……!”
거실로 달려가는 특급 헌터를 반사적으로 낚아채는 순간 깨달았다.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
워커 실트가 한국행 비행기에서 한 낙서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눈앞에서 보고 있었으면서도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지?!’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들.
-염동 광장, 염동 대협, 마혁진 동상.
-노화 역전 각성한 임옥분 여사님.
-인공 사막과 거대 선인장.
-공방에 숨어 있던 특급 헌터와 냠냠이,
-장철 헌터, 장세린, 세린이 엄마. 한자리에 모인 가족.
이유는 간단했다.
얼굴에 그려진 그림에는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쉴 새 없이 사고가 터졌으니까!
“혹시 마력회로 그런 건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그냥 낙서인데…….”
“네? 누가 얼굴에 저런 낙서를?!”
세린이 엄마가 깜짝 놀라 반문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얼굴에 낙서를 한 사람은 워커 실트.
초거대기업 W. S. 인더스트리의 베일에 가려진 오너였으니까!
워커 실트가 했다고 말해도 되는 건가?!
워커의 정체를 밝혀도 괜찮은 건가?!
모든 것을 밝히면 과연 믿을까?
생각의 폭풍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칠 때 반사적으로 잡은 특급 헌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바 이럴 때가 아냐! 빨리빨리! 한국 사람은 빨리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그렇다! 빨리빨리! 자신이 여기에 이렇게 계속 있을 이유가 없다!’
생각과 동시에 입이 열렸다.
“걱정 마세요. 3일, 3일이 지나면 지워질 겁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특급 헌터 잘 있어라! 경석아, 우리 이제 가자!”
특급 헌터를 놓아 주고 몸을 돌리는 순간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알바! 집에 간다고? 숙모 알바 간대. 나도 이만 갈게! 장민이랑 삼촌 바쁜 거 같으니까 나 대신 말 좀 해 줘! 안녕!”
재빨리 평상 구석에 놓인 배낭을 메고 신발을 신고 앞장서는 특급 헌터.
“알바. 빨리 따라와!”
“너 어디 가려고?”
“내 집 가야지.”
“여기가 너희 집이잖아.”
방금 전 천문석과 똑같은 표정을 짓는 특급 헌터.
“여기는 장민 집이잖아? 알바 기억 안 나?! 내 집은 알바 옥탑방 거실, 천공탑 아래 있잖아?!”
자명한 진실처럼 말하는 특급 헌터.
여기서 설득을 하려다간 언제나처럼 엉망진창이 된다!
천문석은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번쩍 손을 들고 베란다 정원 구석을 향해 외쳤다.
“장민 대표님!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앗! 아앗! 아아앗!”
특급 헌터의 깜짝 놀란 외침이 울려 퍼질 때 장민 대표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 다시 전화 걸겠습니다. 알바 씨 가시게요? 좀 더 쉬다 가시지 않고?”
“충분히 쉬었습니다. 세연이도 기다릴 테니 이제 가봐야 할 거 같네요.”
장민 대표와 세린이 엄마에게 꾸벅 인사하는 동시에 힐끗 특급 헌터를 눈짓해 신호했다.
“맞아. 우린 충분히 쉬었어. 장민, 숙모 안녕. 우린 이만 집에 갈게. 알바 얼른 집에 가자! 피곤해서 좀 자야겠어.”
“…….”
장민 대표는 말없이 특급 헌터를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아앗!”
흠칫 놀라 머리를 가리는 순간 머리카락을 문지르는 부드러운 손길.
“장민?”
“알바 씨 괜찮을까요? 쉬시는데 폐가 아닐까요?”
“네?”
‘아니, 이게 뭐야? 내가 잘못 들었나?!’
그러나 특급 헌터의 얼굴도 놀람으로 굳어 있었다.
“진짜로? 나 집에 가도 괜찮은 거야?!”
가출 3일 만에 돌아온 아이가 다시 놀러 가겠다고 말하는 상황.
평소의 장민 대표라면 절대 허락해 줄 리 없었다.
그러나 장민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바 씨가 허락하면.”
“저는 상관없지만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진짜로 나 가도 되는 거야?! 장민 분노 안 해?! 나 또 고등어 먹는 거 아냐?!”
천문석과 특급 헌터의 시선이 닿는 순간.
장민 대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며칠 동안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요. 입구에 차 대기 시켜 놓을게요. 알바 씨 잘 부탁드려요.”
“알바! 나 짐 제대로 챙겨 올게! 절대, 절대로 혼자 가면 안 돼! 경석 형 빨리 와!”
“어? 나는 왜……?!”
얼떨결에 특급 헌터와 같이 달려가는 한경석.
“진짜 괜찮으세요? 며칠쯤 방에 가둬 둬야 하지 않을까요?”
장민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특급 헌터는 가둬 둘 수 없어요. 가둬 두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도망쳐, 상상도 하지 못한 곳에서 나타나거든요. 저번 강릉 때처럼요.”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릉 이상 던전 사건.
황 비서에게 잡혀 자동차에 갇힌 채 이동하던 특급 헌터가 자신이 탄 강릉행 KTX에 나타났다. 그리고 강릉 이상 던전에 빨려 들어가 온갖 난장판에서 굴렀다!
“그런데 급하게 처리하실 일이라고요?”
“그게 사실은…….”
장민이 망설이다 입을 여는 순간 외침이 들려왔다.
“알바! 우리 준비 끝났어! 빨리빨리! 장민 맘 바뀌기 전에 튀어야 해!”
커다란 캐리어를 든 한경석과 함께 거실 통 유리벽 뒤에 숨은 특급 헌터.
“그럼 이만. 장민 대표님, 세린이 어머님. 식사 맛있게 잘했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뭘요. 다음에 다시 볼 때는 더 근사한 요리 대접할게요.”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네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웃으며 몸을 돌리는 순간 얼핏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한경석이 무림 던전에서 가져온 대환단!
대환단을 이용해 단혈철검 주호를 낚을 계획을 세웠다.
언제나 계획의 시작은 정보 수집!
그리고 지금 자신 앞에는 장민 대표가 있었다.
정보업체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보를 가진 대기업 장강 유통의 오너 장민 대표가!
“대표님 혹시 남중국 각성자 한 명 조사 가능할까요?”
* * *
마침내 돌아온 옥탑방 건물!
천문석은 계단을 오르다 문득 말했다.
“그런데 우리 뭐 까먹은 거 같지 않냐?”
“까먹었다고?”
“어? 친구도 그 생각했어?! 나도 뭔가 까먹고 있는 거 같은데……?!”
천문석, 특급 헌터, 한경석은 계단을 오르며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동선이 염동 광장, 재금 빌딩, 김철수 사무실, 인공 사막, 한경석 공방…….”
“잔치국수, 김 기자 누나, 검사 할아버지, PC방 형, 혼령 소리 내서 겁주고…….”
“인천 공항, 염동 광장, 완전 최고로 멋진 내 선인장…….”
기억 속 동선을 하나하나 되짚는 매 순간 생각날락 말락 간질간질거리는 뇌리!
이때 특급 헌터의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친구들! 완전히 까먹고 잊었어! 친구들!”
“친구들? 아!”
천문석은 번쩍 떠올랐다.
한경석 공방에 숨어 있던 특급 헌터의 외침!
‘마녀한테 잡혀 있는 친구들을 구해야 해!’
“동물 친구들?!”
“사슴이, 반짝이, 탱탱이, 거복이, 니케! 내 친구들! 알바 빨리 올라와! 옥탑방 휘잉휘잉 이제 깼을 거야! 우리 친구들 구하러 가야 해!”
타다다다다닷-
외침과 함께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오르는 특급 헌터.
“야, 잠깐! 네 동물 친구들 마녀, 세린이한테 잡혀 있는 거 아니었어?!”
특급 헌터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경석아 우선 올라가자!”
“알았어!”
천문석과 한경석은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활짝 열린 옥상문이 보일 때 문 너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으와와와와앗-
“특급 헌터?!”
“연속 도약할게!”
피피피피핏-
한경석과 함께 연속 공간 도약!
단숨에 계단을 지나, 옥상 철문을 넘어, 무성한 잎을 드리운 화분들을 지나자 보였다.
“친구들! 마녀한테서 탈출했구나!”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는 특급 헌터와 그 앞에 줄줄이 모여 있는 크고 작은 형체들!
사슴벌레, 황금 풍뎅이, 어린 서리 늑대, 별갑 거북이.
그리고 빙글빙글 공중을 활강하는 황금빛 줄무늬의 하늘다람쥐까지.
마녀에게 잡혀갔다는 특급 헌터의 동물 친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 모습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쾅 벼락이 떨어졌다.
‘장세린은 동물 친구들을 제압한 마녀가 아니다!’
쿵쿵, 쿵쿵쿵-
이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전신에 휘몰아치는 전율이 외치고 있다!
‘그 마녀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