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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1254화 (1,255/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54화>

휘이이잉-

만져질 듯 선명한 붉은 바람이 인공 사막 위를 달리고, 그 궤적을 따라 새하얀 모래 위로 뾰족뾰족 붉은 새싹들이 솟아났다.

붉은 바람은 무언가를 찾듯 새하얀 사막 위를 빙글빙글 달리다 텅 빈 공방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휘잉, 휘이잉-

선명한 붉은 바람이 빙글빙글 공방을 회전하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꼬맹이! 너 딱 걸렸으니까! 얼른 나와! 안 나오면 네 친구 거복이 사막에 뒤집어 놓는다! 셋 센다! 하나, 둘, 셋! 한 번만 더 센다! 하나둘셋! 진짜 마지막 기회다! 하나……!]

몇 번이나 숫자를 외쳤으나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공방에 있던 천문석, 한경석, 특급 헌터와 냠냠이는 이미 뽀미의 초장거리 공간이동으로 빠져나간 후였으니까.

텅 빈 공방과 인공 사막에 있는 건 거대한 선인장뿐이었다.

[진짜 없는 건가? 하, 이 꼬맹이 녀석!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도망친 거야?!]

깊은 탄식과 함께 붉은 바람 속에서 붉은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걸어 나왔다.

가죽신이 공방 바닥을 밟는 순간 휙- 손을 뿌렸다.

붉은 골패가 공방 바닥에 떨어져 타닥, 타다닥- 높이 튀어 올랐다.

딱-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골패는 공중에 멈추고, 공간에 남은 사념이 허공에 영상으로 변해 떠올랐다.

한 아이와 고양이 한 마리!

선명한 고양이에 비해 아이의 모습은 뿌옇게 흐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3일 전 제압하기 직전 탈출한 이상한 꼬맹이다!

사물에 사념이 남은 직후인데도 윤곽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오랜 시간 수많은 세계를 걸으며 만났던 대요마, 마불, 괴선, 허신! 초월자와 같은 현상이다.

극을 넘어선 초월자처럼 인지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게다가 꼬맹이와 같이 튀어나온 동물들의 면면과 능력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다!

하늘 고래마저 나타났다면 세계의 나무를 유랑하는 섬, 전설의 허공도가 내려앉은 세계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혹시 허공도의 그분이 놀러 온 세계라면?!”

생각과 동시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 그럴 리가 없지…….”

영혼육백을 태워 세계의 나무를 키워 내신 그분이라면 도망칠 리 없었다.

그분이 분노하는 순간 천지신명이 같이 분노했을 테니까.

“그 꼬맹이 녀석 정체가 뭐지?”

자신도 모르게 말하는 순간 이 세계에 처음 도착한 며칠 전 기억이 떠올랐다.

혼돈의 경계를 걸어 도착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뭇가지가 뒤엉킨 세계.

이 세계는 이상할 정도로 차원압이 높았다.

간신히 차원압이 낮은 지점을 찾아 차원 방벽을 뚫고 내려서는 순간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과거를 비틀어 현재의 인과가 꼬여 있었다!

‘누가 이렇게 인과를 꼬아 놓은 거야?! 하! 가는 곳마다 이 모양이네!’

분통을 터트리며 꼬여 있는 인과의 실마리를 쫓았고, 하늘로 솟은 거대한 마천루에서 원인을 찾았다.

장세린.

원래라면 존재할 수 없던 한 사람이 꼬여 있는 인과의 이유였다.

‘한 사람을 위해 하늘의 인과를 비틀었다고?!’

하늘의 인과를 비틀기 위해선 엄청난 업과 아득한 기원이 필요하다.

역천을 바로잡는 역천, 인과율 집행자의 업과 업을 삼켜 기원을 이루는 마물, 흑전.

둘 모두가 있다 해도 천운이 따라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니 사실상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역천을 바로잡는 역천, 인과율의 집행자의 다른 이름이 바로 천마(天魔)였으니까!

천마의 업을 빌린다고?

천강의 불꽃에 한 줌 재가 될 가능성이 9할 9푼 9리다!

황당함은 곧 희열로 변했다.

장세린이란 존재 자체가 불가사의다.

즉, 이 세계에 자신의 인지를 넘은 초월자가 있었다!

바람에 몸을 숨긴 채 조심조심 장세린의 인과를 확인하려는 순간 불쑥 나타난 꼬맹이가 있었다.

‘가짜! 정체를 밝혀라!”

꼬맹이는 동물들과 함께 장세린을 기습 공격했고.

자신은 장세린을 지키기 위해 얼떨결에 모습을 드러내 동물들을 묶어 두고 꼬맹이를 제압했다.

그리고 금기를 범한 스스로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인연이 생기고 세계가 자신을 인지하면 다른 세계로 떠나지 못한다!’

흠칫 놀라 꼬맹이의 기억을 지우려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새하얀 새끼 고양이가 꼬맹이와 함께 공간을 뛰어넘어 도망쳤다.

아니 도망친 것보다 훨씬 더 상황이 나빴다.

인식 장애 주술을 겹겹이 걸어 둔 붉은 비단과 붉은 바람으로 전신을 가렸는데도, 꼬맹이는 정확히 자신을 인지하고 외쳤다.

’마녀! 반드시 돌아와 복수하고, 내 친구들을 구할 거야!’

꼬맹이가 자신을 향해 복수를 천명하는 순간 인연이 이어지고 세계가 자신의 존재를 인지했다!

천기가 영혼을 옭아매고 지기가 육백을 끌어당겼다!

가뜩이나 명운이 간당간당한 상태!

이대로는 세계의 인력을 벗어나 차원 방벽을 뚫고 경계를 걸을 수 없었다.

그를 찾기 위해 길고 긴 세월 동안 경계를 걸었던 것이 모두 수포가 될 상황!

어떻게든 꼬맹이를 찾아 기억을 지우고 인연을 끊어, 세계가 인지한 자신의 존재를 지워야 했다!

장세린의 기억을 지우고 붉은 비단 바람을 일으켜 꼬맹이를 쫓아가려 할 때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장세린의 고모라고 스스로를 밝힌 장민.

장민은 붉은 비단 바람에 휩싸인 자신을 인지하고 기억을 지우려는 자신을 향해 거래를 걸어왔다.

절대 거부할 수 없는 거래를.

원하는 건 한 사람의 둘로 나뉜 생을 하나로 합치는 것.

그 대가는 존재의 본질 그 자체인 명운의 반.

그래서 환몽(幻夢)의 주술을 펼쳤다.

그리고 도망친 꼬맹이를 쫓아 여기까지 오게 됐다.

문득 시선을 돌리자 허공에 떠오른 영상이 보였다.

알아볼 수 없이 흐릿한 영상.

그럼에도 자신이 만났던 꼬맹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잔류사념조차 흐릿하다.

흔적은 이미 사라졌고, 어디로 도망쳤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애초에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면 이곳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없었을 거다.

이대로라면 환몽이 완성되고 대가로 명운의 반을 받는다고 해도, 차원 방벽을 뚫고 혼돈의 경계를 다시 걷는 건 불가능했다.

이 세계가 마지막이다.

그를 찾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경계를 걷고 수많은 세계를 확인한 것도 이제는 끝이다.

“실수한 건가?”

자신도 모르게 말하는 순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다.

세계의 근원에 닿은 주술사인 자신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온 마음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이 세계가 마지막이어도 괜찮았다.

삶은 유한하나 그 본질은 영원히 이어지니.

이번 생이 안 된다면 다음 생에서, 다음 생 또한 안 된다며 그다음 생에 다시 걸으면 된다.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그를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웃으며 허공에 뜬 골패를 낚아채 허공에 던졌다.

차르르륵-

골패가 허공에서 충돌해 맑은소리를 내고.

휘잉, 휘이잉-

돌연 불어온 돌풍에 붉은 비단이 흩날렸다.

“어쩌면 이 세계에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미소와 함께 붉은 바람을 향해 성큼 걷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북한산의 수호자!]

[뽀미!]

“……!”

벼락같이 몸을 돌리는 순간 보였다.

목소리는 흘러나온 영상!

당장이라도 꺼질 듯 흐릿한 잔류사념에 비치는 두 사람의 모습이!

한 자루 검 같은 여인.

그 옆 깜짝 놀란 얼굴의 청년!

훌쩍 자란 모습과 목소리.

생사필멸로 한번 끊어진 인연.

그러나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아궁이 옆 제일 따뜻한 자리를 양보하던 그 모습.

산처럼 쌓인 장작을 팔고 돌아와 몰래 사탕을 건네주며 환하게 웃던 그 얼굴.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경계를 걸었지만. 그 모습 그 얼굴, 그 웃음과 목소리는 조금도 잊지 않았다.

그가 맞다.

마침내 그가 있는 세계에 도착했다!

혼돈의 경계를 걸으며 수없이 생각했다.

다시 만난다면 반드시 엉엉 울려 주겠다고, 미안하다고 말할 때까지 아프게 때려 주겠다고!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얀 백지가 되어 당장이라도 꺼질 듯이 흔들리는 영상을 홀린 듯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바짝 말라 쩍쩍 갈라진 저수지에 물이 차오르듯, 텅 빈 마음에 감정이 차올랐다.

가득 차오른 감정이 흘러넘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이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보고 있겠죠? 약속했던 대로. 제 명운의 반으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붉은 비단 바람.]

시선은 화면에 고정한 채 손을 뻗어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전화가 연결된 순간 말했다.

“대가는 이미 받았다.”

더는 명운이 필요 없었다.

차원 방벽을 뚫을 필요도, 혼돈의 경계를 걸을 필요도 없었다.

전화를 끊는 즉시 영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수면에 비친 달처럼 잡을 수 없는 영상.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이 세계가 그가 있는 세계다.

방금 전까지 여기서 숨 쉬고 말하고 있었다!

누구도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하늘의 인과처럼.

자신을 이 세계에 붙들어 놓은 이상한 꼬맹이가 자신을 그에게 인도했다.

입고 있던 붉은 비단옷에서 적(赤).

온 대지에 뾰죡뾰족 나는 새싹에서 예(芮).

자신에게 적예라는 이름을 지어 준 그에게로.

적예는 아득한 시간 동안 혼돈의 경계를 걸으면서도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한 이름을 불렀다.

“돌멩이.”

*   *   *

“알바! 누가 알바 부른 거 같은데?”

평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특급 헌터가 귀를 쫑긋했다.

“누가 날 불렀다고?”

천문석은 주위를 돌아봤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주상복합 최상층 펜트하우스 베란다 정원이었다.

몸 아래에는 방금 상을 치운 평상이.

평상 앞에는 타일이 깔린 커다란 연못이.

연못 주위로는 잘 관리된 잔디와 화초, 나무들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장세린과 장철은 상을 들고 세린이 어머님을 따라갔고.

장민 대표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 중.

평상 위에 있는 사람은 식사를 끝내고 한껏 늘어진 천문석과 한경석.

소중한 한 끼를 고등어 김치찌개에 사용했다고 분노하던 특급 헌터뿐이었다.

천문석은 한경석을 봤다.

“경석이? 네가 불렀어?”

“아닌데?”

바로 고개를 돌려 특급 헌터를 봤다.

“잘못 들은 거 아냐?”

“아냐! 분명 알바를 불렀어! ‘돌멩이!’라고! 당장 아프게 때려 줄 듯! 꼭 안고 호- 해 줄 듯 불렀다니까!”

아프게 때려 줄 듯?

꼭 안고 호 해 줄 듯?

아니 이게 뭔 소리야?!

이 녀석 고등어 김치찌개에 충격을 받았나?!

특급 헌터의 진지한 모습에 어이없어 하기도 잠시.

갑자기 조카와 놀아 주는 삼촌의 사악한 지혜가 번뜩였다!

“아 설마!”

천문석은 깜짝 놀란 얼굴로 하늘을 바라봤다.

“알바! 촉이 움직였어? 감이 왔어?!”

“혹시 하늘에서 천명을 내리려고 날 부른 거 아닐까?”

“천명! 하늘에서 천명을 내리려고 알바를 불렀다고?! 방금 그 목소리가 천명! 천명이었구나!”

특급 헌터는 연신 탄성을 터트리다 반문했다.

“그런데 천명이 뭔데?”

“뭐야? 특급 헌터. 너 천명 몰라?!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대의, 운명, 숙명! 전설급 퀘스트 몰라?!”

“대의, 운명, 숙명? 전설급 퀘스트?! 완전 멋지잖아! 천명 어떻게 받는 건데?! 나도 나도 천명 받을래!!”

고등어 김치찌개에 좌절했던 특급 헌터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천명을 받는 건 아무리 특급 헌터라도 쉽지 않아. 엄청난 시련을 이겨 내야 해.”

“나 노력할게! 시련 이겨 낼게!”

“보통 시련이 아냐. 너도 들어 봤지? 동굴 속에서 100일 동안 쑥과 마늘만 먹은 곰과 호랑이 이야기!”

“앗! 아앗! 사람 된 이야기!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설마 그게?!”

“맞아! 그게 바로 천명을 받기 위한 시련이야!”

“당장 쑥이랑 마늘 가져올까?!”

“아니 그건 오래전이고 요즘은 하늘님 트렌드가 변했어.”

“……!!”

초집중 상태로 귀를 쫑긋 세운 특급 헌터.

순진한 조카는 사악한 삼촌에서 완전히 낚였다!

천문석은 한없이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로 입을 뗐다.

“하늘은 사람을 크게 쓰기 전에 큰 시련을 내려 주시니. 고…….”

힐끗 시선을 주자 ‘고’ 한 글자만으로 경악으로 굳어가는 특급 헌터의 얼굴이 보였다.

천문석은 잽싸게 말을 바꿨다.

“고난과 시련! 예를 들어 완전 맛없는 음식 앞에서 도망치지 말고 먹어서 이겨 내야 해!”

“알바! 진짜야?! 완전 맛없는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천명을 받는다고? 전설급 퀘스트 준다고?!”

특급 헌터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확인했다.

천문석은 일대종사의 권위를 담아 대답했다.

“맞아.”

“천명을 받는 게 특급 헌터의 목표야!”

이 순간 특급 헌터 앞에 놓이는 쟁반.

“천명? 새로 나온 장난감이야? 야, 꼬맹이 내가 만든 특제 야채 주스부터 마시고 천명 받아. 크크큽“

특급 헌터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알바 말대로 하늘이 고난과 시련을 내려 주셨어!”

“고난, 시련? 그렇지! 내 특제 야채 주스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네! 꼬맹이 이 야채 주스를 마실 수 있겠냐?”

장세린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특급 헌터는 주저하지 않고 쟁반에 손을 뻗었다.

“특급 헌터는 두렵지 않다!”

흑갈색의 무언가! 장세린의 특제 야채 주스가 담긴 컵을 들어 꿀꺽꿀꺽 단숨에 마셨다.

“훌륭하다! 특급 헌터!”

그리고 탄성을 터트리는 천문석에게 야채 주스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이건 왜……?”

“특급 헌터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알바! 같이 천명 받아야지!”

초롱초롱 한 점의 의심도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특급 헌터.

그리고 그 옆 흥미진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

한경석과 장세린!

“…….”

사악한 삼촌은 순진한 조카가 건네주는 야채 주스를 떨리는 손으로 받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장세린에게 물었다.

“……이 야채 주스. 뭐로 만든 거냐?”

“몸에 좋은 당근, 양배추, 파프리카, 무, 양파, 대파, 쑥, 마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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