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50화>
‘나는 꿈을 꾸고 있다.’
장철은 자각과 동시에 자신이 언제,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2000년 1월 2일 게이트가 열려 난장판이 된 서울.
세린이 가족과 함께 오리배로 한강을 건너, 세린이 엄마가 있는 서울 중앙 병원에 도착했을 때다.
문득 고개를 들자 군인과 경찰, 피난민으로 뒤엉킨 서울 중앙 병원 주차장에 선 미래의 장철과 과거의 장철이 보이고 꿈이 시작됐다.
장철은 과거의 자신에게 오리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며 몇 번이나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뭐가 우선인지 잊지 마라. 반드시 가족을 지켜야 한다.”
“네. 반드시 가족을 지키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젊은 장철, 과거의 자신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빠는 걱정 마세요. 그리고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염동 대협.”
빙그레 웃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중학생 장민.
“고모, 아빠! 빨리! 엄마 기다려!”
당장이라도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달려갈 듯 들썩이는 세린이.
“세린아 제대로 감사 인사해야지.”
장민은 세린이를 번쩍 들어 장철 앞으로 데려왔다.
“곰 아저씨!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손을 배에 모으고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하는 세린이.
장철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에 손을 뻗다 멈칫했다.
“…….”
세린이의 솜털 같은 머리카락에 바위처럼 거칠어진 손을 차마 뻗을 수 없었다.
순간 손을 감싸 오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아요.”
빙그레 웃으며 거친 손을 당겨 세린이의 머리카락 위에 놓는 장민.
“곰 아저씨 손 완전 딱딱해! 우와 시원해!”
환한 얼굴로 등을 쓱쓱 문지르고 작은 손으로 감싸고 호- 따뜻한 입김을 불어 넣는 세린이.
이 작은 온기가 얼어붙은 손과 심장을 단숨에 녹였다.
장철은 마주 웃었다.
“세린아 언제나 건강하고 씩씩해야 한다.”
“당연하지! 난 언제나 씩씩해! 난 우유도 딸기 우유 아니라 흰 우유 먹고 있어! 키 엄청 클 거거든. 곰 아저씨 잘 가! 난 엄마 만나러 갈게! 안녕안녕!”
장세린은 빙글 몸을 돌려 병원으로 달렸다.
“세린아! 사람 많아! 뛰면 위험해!”
젊은 장철이 한달음에 쫓아가고.
장민이 다급히 외치며 잡으려 했다.
“세린아! 기다려 조금 더……!”
장철은 장민 앞에 팔을 뻗어 막았다.
“…….”
“…….”
시선이 마주치고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장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괜찮겠어?”
오빠에게 말하듯 가벼운 말투.
장민. 언제나 비범했던 동생은 자신이 전해 준 몇 가지 정보만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이제 세린이는 걱정할 게 없었다.
실수하지 않은 아빠.
스스로를 탓하지 않을 엄마.
미래의 정보를 가진 현명한 고모가 있었으니까.
“충분해. 고맙고 부탁한다.”
장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멀어지는 아이를 바라봤다.
아빠에게 안겨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는 세린이.
이제 곧 세린이는 엄마를 만나 환호성을 지르며 안길 거다.
아빠, 엄마와 함께 웃는 세린이.
그토록 바라던 결과. 20년 동안 세기말 대한민국을 재현하는 던전을 찾으며 기원하던 바람이 마침내 이뤄졌다.
세린이의 몸을 안아 준 건 자신이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아니 자신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모든 실수가 잊히고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실수는 영원히 기억에 남아 몸과 마음을 태운다.
무엇이 중요한지 몰랐던 멍청한 자신, 아이를 지키지 못한 아빠가 세린이를 안아 줄 수는 없었다.
환한 웃음과 함께 아빠 품에 안긴 채 엄마에게 달려가는 세린이는 자신이 잃어버린 별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엄마, 아빠, 고모.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세린이가 웃는 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자신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회사원 장철과 좋은 엄마, 언제나 현명한 장민이 세린이를 지켜 줄 테니까.
“그럼 잘 가라. 장민.”
장철은 작별 인사와 함께 한강을 다시 건넜다.
그리고 모든 것이 기억 그대로 이어졌다.
천문석, 마혁진 동료들과 함께 몬스터를 끌고 북한산으로 이동했다.
정신없는 난장판 끝에 마력 폭풍을 일으키고 던전을 빠져나갈 출구를 열었다.
그러나 마력 폭풍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천문석, 마혁진, 자신 셋 중 한 사람이 세기말 대한민국 남아야 했다.
장철은 이 순간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세린이 옆에 가족처럼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던전은 허상, 하룻밤 꿈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영원히 깨지 않을 꿈이라면 그건 현실과 마찬가지 아닐까?
자신을 기다릴 장민, 특급 헌터 생각에 망설였지만, 곧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천문석이 남을 사람을 정하기 위해 동전을 던지고 다수결 투표를 하는 모습을 봤으니까.
처음 동전을 던졌을 때, 종이에 이름을 적는 순간 입가에 맺힌 장난스런 웃음.
이 웃음을 보는 순간 천문석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동전을 던지고 투표를 한 건, 남을 사람을 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떠날 사람이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천문석은 처음부터 자신이 남을 생각이었다.
이 순간 장철은 결심했다.
누군가 남아서 희생해야 한다면 그건 자신이어야 했다.
그렇기에 천문석이 2표를 받고 남는 게 결정되는 순간 종이를 바스러트리고 확신을 담아 말했다.
“여기에 내 딸이 있다. 당연히 내가 남아야지. 세기말 대한민국에는 내가 남겠다.”
그리고 마혁진의 외침이 들려왔다.
“영화 찍냐 새끼들아?! 둘 다 꺼져라! 내가 남는다!”
황당함에 멍하니 마혁진을 바라볼 때 쾅- 거대한 섬광이 머릿속에서 터지고 번쩍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빠! 빨리 일어나! 오늘 학교 처음 가는 날이야!”
잠옷 위에 책가방을 메고 외치는 세린이.
“세린아. 아직 해도 안 떴어. 조금만 더 자고 해 뜨면 일어나자.”
책가방을 벗기고 세린이를 침대로 잡아끄는 아내.
“오빠 벌써 일어난 거야? 난 여사님 만나러 갈게. 그럼 이따 세린이 입학식에서 봐.”
가볍게 손을 흔들며 집을 나서는 장민.
멍하니 이 모습을 보는 순간 뿌옇게 흐린 머릿속 기억이 선명해졌다.
게이트가 열린 지 벌써 1년이 훌쩍 지났고 자신은 각성 헌터가 됐다.
지금 이곳은 임옥분 여사님의 도움으로 구한 안전지대 제주도 집이고.
자신은 세린이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맞춰 마경이 된 서울에서 제주도에 내려온 상태였다.
‘설마 또 꿈인가?!’
초등학교 입학식을 앞둔 세린이.
등을 쓱쓱 문질러 아이를 재우는 아내.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고 집을 나서는 동생.
그러나 모두의 모습은 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했다!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세린이, 아내, 장민과 함께 제주도로 떠난 젊은 장철이 돼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과는 다른 날들이 시작됐다.
세린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아내는 임옥분 여사님과 같이 일했다.
장민은 고등학교에 다니며 사업을 시작했고.
장철 자신은 기억을 되짚어 마경이 된 서울과 던전, 균열을 클리어했다.
달라진 것도 같은 것도 있었다.
칠성파 보스 조폭 마혁진은 염동 대협 헌터 마혁진이 됐고.
장민이 세운 장강 유통은 일본, 동남아와의 유통망을 확보해 더 빠르게 성장했다.
이태성은 이번에도 서울 거점을 만들고 지켜 냈고.
자신은 마경이 된 서울의 한 건물에서 특급 헌터를 찾았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갓난아이 모습 그대로 조금도 변하지 않는 특급 헌터와 함께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1년, 2년, 3년…….
서울 수복 작전의 성공으로 5개의 게이트 안정화 장치가 동시에 작동해 수도 서울은 안전지대가 됐다.
이 순간 불쑥불쑥 생겨나는 던전과 균열로 전후방의 개념이 없던 게이트 전쟁의 패러다임이 변했다.
서울에 2전선이 생겨나고 염동 대협이 끝까지 지켜 낸 경부 고속도로로 낙동강 전선과 연결됐다.
서울과 부산.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축을 중심으로 게이트 안정화 장치가 설치되고 거미줄처럼 연결되기 시작했다.
게이트 전쟁의 전황은 눈에 보일 정도로 좋아지기 시작했고.
무언가에 쫓기듯 던전을 클리어하고 전투에 나서던 자신은 가족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아빠, 아빠, 아빠…….
세린이가 자신을 부를 때마다 마음에서 퍼져 나가는 간질거림.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아이는 자라나고 삶은 앞으로 나아간다.
웃으며 세린이의 머리를 땋아주는 아내.
예전보다 더 큰 규모로 장강 유통을 키워 낸 장민.
긴 잠에서 깨어나 쑥쑥 자라 사고뭉치 꼬맹이가 된 특급 헌터.
자신은 가질 수 없었던 삶.
만약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행복한 날들이 이어졌다.
가끔 알 수 없는 외침이 울려 퍼지는 어둠 속에 떨어지는 악몽을 꿨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장철 헌터님! 장철 헌터님! 긴급 상황입니다! 일어나세요!’
‘삼촌 일어나! 초특급 대사건이야! 어서 일어나! 가짜 누나 나타났어!’
‘누가 이렇게 인과를 꼬아 놓은 거야?! 하! 가는 곳마다 이 모양이네!’
……
악몽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자신 옆에는 세린이가 있었으니까.
장철은 생각했다.
이 모든 게 꿈이라도 상관없었다.
현실이 아닌 허상일 뿐이라도 괜찮았다.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이라면 현실과 다를 것이 없었으니까.
세린이와 아내, 장민과 특급 헌터.
가족 모두가 있는 이곳은 자신이 차마 바라지도 못한 이상향이었으니까.
어느 날 훌쩍 자라 헌터가 세린이가 어린 시절처럼 침대 맡에 섰다.
“아빠. 얼른 일어나.”
그리고 찰싹- 어깨를 때리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나 결혼할 사람 데려왔어.”
* * *
“……!”
머릿속에 쾅- 섬광이 터지고 번쩍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긴 꿈이 물거품처럼 꺼지고 장철은 애써 외면했던 진실을 깨달았다.
‘모든 게 꿈이었구나…….’
세린이와 아내, 장민과 특급 헌터.
가족 모두와 함께하는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행복한 꿈을 꿨다.
그러나 긴 꿈은 끝났고 이제 현실을 마주 볼 순간이 찾아왔다.
세린이가 없는 현실을…….
장철은 눈을 떴다.
빙그레 미소 짓는 장민.
반쯤 든 손을 흔드는 한경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천문석.
너무나 익숙한 얼굴들 앞에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표정이 보였다.
[@ㅁ@??]
이모티콘을 그대로 옮긴 듯한 특급 헌터의 경악한 표정!
“아, 아, 아아아?!”
부릅뜬 눈과 한껏 벌린 입!
목에 외침이 컥- 걸려 있는 모습!
이 모습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하하- 이번엔 뭐냐? 누가 앙꼬 사탕 몰래 핥기라도 했냐?”
으아악-
이 순간 괴성과 함께 특급 헌터의 말문이 터졌다.
“삼촌 지금 일어나면 어떡해?!”
“망했어! 우리 완전히 망했어!”
“내가 하늘 이을 때! 그때 일어났어야지!”
“초특급 대사건! 가짜 누나! 내가 말했잖아!”
으아, 으아악-
정신없이 말을 쏟아 내고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특급 헌터.
“초특급 대사건? 가짜 누나? 야, 삼촌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넌 여전하구나?”
하하하-
장철은 가슴이 뻥 뚫릴 듯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세린이와 가족 모두와 함께 하는 꿈.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꿈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째선지 알 수 있었으니까.
자신의 꾼 너무나 생생한 꿈은 평범한 꿈이 아닌 자신 구한 던전 속 장철과 세린이 가족의 겪을 미래의 일이라는 것을.
세린이는 아빠, 엄마, 고모, 동생. 가족과 주위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날 테니까.
그 작은 몸을 안아 줄 수도, 함께 팥빙수를 먹고, 옷을 사줄 수도, 손을 잡고 입학식에 갈 수도 없겠지만 괜찮았다.
세린이의 행복한 모습이 담긴 생생한 꿈은 자신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앞에는 장민과 특급 헌터, 천문석과 한경석. 자신을 기다려 준 가족과 동료들이 있었다.
자신의 오랜 바람은 이뤄졌다.
장철은 지게에서 내려오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세린아 꼭 행복해야 한다.”
순간 등 뒤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뭐야? 갑자기 간지럽게?”
“……!”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옷장에 삐딱하게 기대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170이 훌쩍 넘는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
강화 전투복에 헌터용 재킷을 걸친 20대 초반의 여성 헌터.
은연중 흘러나오는 기세와 각성력!
이태성과 같은 오러 각성자다!
그것도 0.7 이태성급의 강자!
장철은 경악했다.
그 힘이 아니라 얼굴에!
“장세린?! 세린이 네가 왜 여기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