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41화>
쿵쿵, 쿵쿵쿵-
강철 군화가 단단한 판석을 북처럼 두들기는 순간 울려 퍼지는 광기 어린 외침!
“친절!”, “봉사!!”
“친절!”, “봉사!!”
조금도 친절해 보이지 않는 수백의 기동대원들이 밀려왔다.
맛이 간 것 같은 외침과 달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동대원들에게선 하나로 합쳐진 기세와 각성력이 느껴졌다.
염동 광장에 가득한 헌터들은 그대로 얼어붙었고.
천문석은 보는 순간 깨달았다.
전원 대인전으로 단련된 베테랑 각성자들이다!
“각성자 기동대! 0201, 0203, 0204기동대……! 몇 개 중대나 동원한 거야?!”
김태희 대령의 경악한 외침이 터져 나오는 순간 얼어붙었던 각성자들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기동대가 왜 광장에…….”
“전광판! 이세기는 또 누구야?!”
“염동 길드가 엮였다!”
“우선 튀자! 얽히면 안 돼!”
“반대쪽! 광장 서쪽은 안 막혔다!”
“며칠 전에는 국가헌병대가 지랄하더니! 빌어먹을!”
……
광장에 가득한 헌터와 호객꾼, 상인들은 다급히 몸을 돌려 달렸다.
“우리도 얼른 튀자! 야, 일어나! 막히기 전에 얼른 튀어야 해! 서쪽으로…….”
김태희 대령은 넋이 나간 한경석을 일으키고 앞장섰다.
“잠깐, 거기 아냐!”
천문석이 외치는 순간 헌터들이 몰려간 광장 반대쪽에서도 울림과 함성이 터져 나왔다.
두두, 두두둥-
“안전!”, “진압!!”
“안전!”, “진압!!”
“타격대다!”
“서쪽도 막혔다!”
“미친! 타격대까지 나온다고?!”
……
순간 우뚝 멈춰 선 김태희 대령과 눈이 마주쳤다.
“전광판! 플랜 Z! 이거 전부 너 때문이지?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기동대에 타격대 전부 동원하려면 1세대 헌터라도 절대 쉽지……!”
과연 국가헌병대의 미친 치와와!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이 난장판은 2000년에서 2020년으로 시간 여행하는 가장 쉬운 방법 ‘플랜Z’ 때문이다.
플랜Z, ZonBer!
세기말 대한민국 20년 존버 계획!
20년 동안 원한을 곱씹은 염동 대협 마혁진이 분노를 터트렸다!
“플랜 Z! 20년 존버 덕분에 초대박을 터트렸는데 분노라니! 고마워해야지!”
“20년 존버? 초대박? 무슨 말이야?! 제대로 설명해!”
“나중에! 지금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라 계획대로 안전하게 튀는 거다!”
“야! 광장이 포위됐는데 어디로 튄다고……?”
김태희 대령이 반문하는 순간 확성기 외침이 울려 퍼졌다.
[헌터 여러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신원 확인만 하고 바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염동 길드에서 ‘이세기’ 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시 본인이나 주위에 ‘이세기’ 님 계시면 바로 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확성기 외침이 끝나자마자 2인 1조 경찰들이 신분증 검사를 시작했다.
“모두 질서를 지켜 주세요!”
“헌터 라이선스, 게이트 지대 출입증…… 마력 스캐너 확인 가능한 신분증 준비 부탁드립니다!”
“……!”
김태희 대령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순간.
천문석은 담담한 말투로 다시 한번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나한테 계획 있어.”
“너 힘으로 뚫으려고? 태성 빌딩 섬광탄! 그 기술 쓰려는 거지?!”
“그거 아냐.”
“아앗! 내 신분! 안 돼! 나 지금 신분 못 밝혀! 지금 신분 밝히면 바로 부대로 끌려가!”
“하, 어쩐지 일주일 후에 만나게 해 달라더니! 그거도 아냐! 날 믿어라. 우리는 광화문 게이트 방향으로 간다. 경석아, 바로 움직이자!”
순간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던 한경석의 말문이 터졌다.
“친구! 이럴 때가 아냐! 우리 잘못된 곳으로 돌아왔나 봐! 염동 광장! 염동 대협! 처음 듣는단 말이야! 얼른 남일도 던전으로 돌아…… 앗, 아앗- 던전 입구 없어졌지! 어떡해?! 우리 미아 됐어! 으으윽-.”
딱, 따닥-
천문석은 머리를 부여잡은 한경석 눈앞에 손가락을 튕겨 시선을 끌고 확신을 담아 말했다.
“걱정할 거 없다! 염동 광장, 염동 대협 모두 내 계획대로다!”
“……이게 전부 친구 계획이라고?!”
“당연하지! 너 내가 계획 없이 움직이는 거 봤냐?!”
한경석의 혼란스럽던 얼굴이 찰나의 순간 활짝 펴졌다.
“……없던 거 같아! 친구는 항상 뭔가 계획이 있었어!”
“그렇지! 네가 날 잘 아는구나! 당연히 이번에도 계획 있어! 날 믿어! 바로 움직이자!”
천문석은 광장 북쪽으로 성큼성큼 걸었고, 한경석과 김태희 대령은 그 뒤로 잽싸게 따라붙었다.
“야, 북쪽은 광화문 게이트 있는 방향이잖아?! 저기 헌터 부대 주둔하고 있어! 절대 힘으로 못 빠져나가! 마력 스캐너만 훑으면 고유마력 패턴 바로 확인돼! 100% 잡혀!”
“괜찮아! 나한테 계획 있어! 나만 믿어라!”
“그러니까 그 계획이 뭐냐니까?!”
천문석은 대답 대신 지게를 짊어지고 뒤를 따르는 한경석에게 질문했다.
“경석아, 나 믿냐?”
“난 친구 믿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대답!
“좋아! 꼭 해 줄 일이 있다! 내가 신호하면…….”
천문석은 한경석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고, 김태희 대령을 똑바로 바라봤다.
“봤지? 내 계획에는 믿음이 꼭 필요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날 믿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냐?”
두 눈에 타오르는 확신!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지만, 마찬가지로 해결한 것도 이세기다!
김태희 대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다! 널 믿을게!”
“좋아! 그럼 둘 다 내 뒤로 바짝 붙어라!”
천문석은 난장판으로 변한 염동 광장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 * *
김태희 대령은 힐끗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신분증 좀 확인하겠습니다.”
“내가 누군 줄 알아?!”
“실랑이할 필요 없다!”
“신분증 확인 안 된 헌터는 따로 분류한다!”
……
사방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고성과 주먹다짐이 오갔다.
염동 광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해 갔다.
그러나 아무리 각성 헌터여도 상대는 대 각성자 임무의 베테랑, 기동대와 타격대다!
게다가 이곳은 염동 빌딩이 보이는 염동 광장, 확성기에서는 대놓고 염동 대협을 언급하기까지 했다.
공권력이 그냥 대형 길드도 아닌 1세대 헌터의 대표, 0세대 헌터로까지 불리는 염동 대협의 염동 길드를 등에 업었다!
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공권력 + 대형 길드의 힘!
광장에 흩어져 있던 각성자와 헌터 업계 사람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신원 확인이 이뤄지고 신분증이 없는 사람들이 분류되기 시작했다.
삑삑, 삑삑삑-
2인 1조 경찰관이 마력 스캐너로 헌터들의 마력 패턴을 확인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헌터를 마력 스캔을 해도 그 정보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다.
헌터를 스캔한 정보와 메인 서버에 저장된 정보, 신분증에 암호화된 정보 셋을 교차 검증한 결과를 확인할 뿐이다.
이것만으로도 본인 확인은 충분하다.
가짜 이름을 밝히는 순간 100% 걸린다!
김태희 대령은 지게를 짊어지고 주저하지 않고 걷는 이세기를 봤다.
‘뭔가 생각이 있겠지? 있을 거야. 당연히 있지! 이세기 이 녀석 잔머리가 상상을 초월하니까!’
김태희 대령은 치솟는 불안을 삼키며 한경석 옆에 바짝 붙어 커다란 무장 박스를 끌었다.
세 사람은 주위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난장판이 된 광장을 빠르게 걸었다.
순식간에 광장을 가로질러 광화문 게이트 지역 앞에 도착하는 순간 오른쪽으로 90도 회전 광장 동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염동 광장 주위 도로에는 장갑 버스로 차 벽이 만들어진 상태.
광장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출구인 횡단보도에는 바리케이드를 세운 기동대원과 경찰이 모든 헌터의 신원을 확인하고 있었다.
불과 20여 미터!
이세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횡단 보도앞 경찰을 향해 걸어갔다!
“야, 무작정 다가가면 어떡해?!”
“날 믿어. 계획대로다!”
똑같은 대답과 함께 빠르게 걷는 이세기!
쿵쿵, 쿵쿵쿵-
김태희 대령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정면으로 부딪친다고? 이게 계획이라고?!’
그 자신이 게이트 전쟁을 경험하고 국가헌병대 대령까지 올라왔기에 너무나 잘 알았다.
게이트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꿨다!
당연했다. 서울과 국토 대부분을 잃고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백만의 피가 뿌려졌으니까!
대한민국은 더 이상 범죄자에게 반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범죄자가 안전한 교도소에서 교화, 갱생되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사회적 파장, 경제적 영향을 고려해 집행유예를 선고하지도 사면해 주지도 않는다.
그런 구형을 하던 검사, 선고하던 판사는 모두 사라졌다.
아니, 판검사만이 아니라 해외로, 제주도로 도망쳤던 정치, 재계, 법조, 교육계의 사회 지도층은 박살 났다.
게이트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은 ‘의무’를 행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특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건 역으로 말하면, ‘큰 의무’를 행한 사람에게는 ‘큰 특권’을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이게 바로 이유였다.
1세대 헌터, 인간재해 이태성이 정치인, 재벌 2세, 조폭 헌터들을 쥐어패고 다녀도 제대로 기소조차 할 수 없는 이유!
지금 이세기가 다가가는 경찰, 기동대, 타격대를 움직인 건 염동 대협 마혁진이다!
염동 길드는 특임 소장님의 공훈을 은근슬쩍 훔치는 도둑놈들이다.
하지만 염동 길드 길드장, 자칭 0세대 헌터 염동 대협 마혁진은 진짜였다!
끊어진 한강 다리를 연결해 피난민 수십만을 구하고.
마경이 된 서울과 낙동강 전선을 잇는 경부 고속도로, 한국의 대동맥을 끝까지 지켜 냈다!
순간 이동과 역장의 폭풍으로 서울 수복 작전의 인명 피해를 반 이상 줄이고.
복수에 미친 사람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마수와 몬스터, 거대 괴수와 싸웠다!
자신은 지금 그 결과물 위에 있었다.
염동 광장과 그 위에 우뚝 서 있는 염동 대협의 동상!
큰 의무를 행한 사람이 큰 특권을 가지는 건 21세기 대한민국의 상식!
염동 대협이란 이름 앞에 어지간한 인맥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런데 이세기는 신원을 확인하는 경찰에게 정면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마력 스캔 후 신분증만 검사해도 자신이 ‘이세기’란 게 걸리는데 말이다!
‘진짜 계획 있는 거 맞아?! 설마 마력 섬광탄 터트리고 도망치는 거 아냐?!’
그러나 지금 있는 장소는 광화문 게이트 지역 바로 앞이다.
슬쩍 고개만 돌려도 보였다.
광화문 게이트를 둘러싼 수십 미터 높이의 장벽과 그 위에 설치된 중화기와 개틀링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최정예 헌터 부대원들이!
‘앗! 설마?!’
순간 벼락 치듯,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국가헌병대 김태희 대령의 보증이면 이세기를 빼낼 수 있다!
그러나 국가헌병대 대령이란 직위를 밝히는 순간 분노한 헌병이 출동한다!
그럼에도 자신은 직위를 밝히고 이세기를 빼줄 수밖에 없었다.
이세기는 검은 폭풍, 특임 소장님과 연결된 유일한 줄이니까!
‘외통수에 걸렸다!’
“잠깐! 야, 잠깐만!”
다급히 외치는 순간 우뚝 발걸음이 멈추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터님 잠시만 신원 확인 좀 하겠습니다.”
이미 늦었다!
어느새 횡단보도 앞! 2인 1조, 경찰 둘이 성큼 다가왔다!
“신분증 부탁드립니다.”
“당연하죠! 잠시만, 동료 둘이 탈진해서. 경석아 지게 내리자.”
지게가 내려지고 바로 신원 확인이 시작됐다.
삑, 삑, 삐삑-
한경석과 김태희.
무아지경에 빠진 파티마, 기절한 장철 헌터까지.
일사천리로 모두의 신분증과 마력 스캐너값을 대조했다.
남은 사람은 잡낭을 뒤적이는 이세기뿐!
“헌터 라이선스가 어디 갔지? 분명히 이 안에 넣어 뒀는데…….”
‘아니지? 내가 생각하는 방법은 아니지?! 제발제발제발!’
김태희 대령이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원할 때.
경찰은 기동대원들에게 슬쩍 눈짓하고 한 걸음 다가왔다.
“헌터님. 신분증 없으시면 잠시 저희랑…….”
“앗! 여기 있었네! 헌터 라이선스 찾았습니다!”
이세기는 헌터 라이선스를 내밀었고.
경찰은 헌터 라이선스를 꽂은 마력 스캐너로 이세기의 손을 훑었다.
삐-
기계음이 울리는 순간.
김태희 대령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헌터 라이선스는 위조할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히는 메인 서버에 저장된 고유 마력 패턴의 위조가 불가능하다!
마력 스캐너가 서버에서 판독 값을 내려받아 신분증과 대조하는데 걸리는 평균 시간, 3초!
3초면 자신들 앞에 있는 헌터가, 염동 대협이 찾는 ‘이세기’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모든 게 밝혀지기 직전인데도 여전히 담담한 이세기의 얼굴!
김태희 대령의 머릿속에서는 폭풍이 몰아쳤다!
예상대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세기는 이 모든 걸 예상하고 자신에게 약속을 받았다.
여기서 이세기가 끌려가면 특임 소장님과의 재회는 불가능하다!
자신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국가헌병대 대령이란 신분으로 이세기를 보증하고 추적을 당하는 것!
절로 분통이 터졌지만 어떻게든 이세기가 끌려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1초, 2초, 3초!
영원 같은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기계음과 함께 질문이 들려왔다.
삐삣-
“확인됐습니다. 헌터님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순간 이세기와 눈이 마주쳤다.
‘약속. 믿어라.’
입 모양으로 두 단어가 전해지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문석입니다.”
예상대로 대놓고 가짜 이름을 댔다!
이제 자신이 나설 차례다.
‘시바시바개시바……!’
김태희 대령이 분노를 안으로 삼키며 국가헌병대 신분증을 꺼낼 때.
경찰은 마력 스캐너에 꽂은 헌터 라이선스를 내밀며 말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천문석 헌터님.”
그리고 횡단보도를 막은 바리케이드가 열렸다.
“……어?”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몸이 굳을 때 등을 미는 손길이 느껴졌다.
“야, 뭐 해? 얼른 가자. 우리 미팅 시간 간당간당해! 빨리 움직여야 해!”
이세기. 아니 스스로를 천문석이라 밝힌 헌터의 손길이!
“…….”
김태희 대령은 떠밀리듯 횡단보도로 발을 내디디며 생각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 모든 헌터의 마력 패턴이 보관된 메인 서버가 해킹됐다.
둘. 자신이 처음부터 이세기, 아니 천문석에게 감쪽같이 속았다.
“…….”
문득 고개를 돌려 이세기를 보는 순간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
“약속! 방금 믿는다고 약속한 거 기억하지?!”
무엇이 진실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횡단보도 중앙.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야, 이 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