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33화>
그런 아침이 있다.
기상 알림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지는 날아갈 듯 몸이 가벼운 아침이!
지금 천문석이 그랬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 걸쳐진 정신에 느껴지는 감각!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
몸을 덮은 부드러운 담요의 포근함.
등과 허리를 탄탄하게 받치는 의자까지.
푸저우시, 남일도, 던전을 거치며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구르던 몸에 호사스럽기까지 한 편안함이 깃들었다.
일찍 눈을 뜬 토요일 아침 같은 이 나른함과 무료함, 포근함과 편안함이 미칠 듯이 좋았다!
그래서 천문석은 눈을 뜨지 않고, 꿈과 현실에 반쯤 걸친 정신을 꿈 쪽으로 쓱 밀었다.
‘그동안 너무 고생했어. 난 좀 쉬어야 해…….’
다시 한번 꿈으로 빠져드는 순간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카캌- 허술한 녀석들.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들다니! 멋진 선물을 주마!”
‘워커? 선물? 뭐 알아서 하겠지…….’
애써 신경을 끊고 꿈으로 빠져들 때, 연이어 소리가 들려왔다.
“쓰윽- 잘 보이는 안경이다!”
“싸아악- 넌 멋진 콧수염이다!”
“쓱슥, 쓰윽- 임시 리더 표식이다!”
……
앞, 뒤! 왼쪽, 오른쪽!
종횡무진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나 천문석은 눈을 뜨지 않았다.
정신없이 구른 남일도 던전에서도 멀쩡했다.
그러나 지구로 돌아오고 2시간도 지나지 않아 3번이나 정신줄을 놓았다.
-워커 실트의 최루 가루.
-이상한 아이의 리클레 가루 원액.
-타는 듯한 매움에 단숨에 들이켠 포션 쇼크까지.
셋 모두 워커 실트와 직간접적으로 엮여서 일어났다.
‘오지 마, 제발 오지 마…… 아무것도 안 들린다…… 나는 잠에 빠져든다…….’
천문석은 눈을 감은 채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말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소리 없이 달려와 굳게 감긴 눈앞에서 휙, 휙- 손을 흔드는 워커 실트!
“야, 이세기 잠들었냐? 진짜 잠들었어? 너 수학여행 국룰 알지? 먼저 잠들면 당하는 거야. 흐히헤헷-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뽕-
뚜껑 여는 소리와 함께.
쓰으윽-
무언가 얼굴로 서서히 다가왔다.
워커 실트의 긴장, 흥분, 격동이 담긴 뜨거운 숨이 훅훅 날아왔다.
‘워커, 이 녀석 진심이다!’
번쩍 눈을 뜨는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앞 좌석 등받이 너머로 길게 몸을 내밀 워커 실트와!
자신의 얼굴 앞, 워커 실트의 쭉 뻗은 손에 들린 유성 매직이!
“……너 뭐 하냐?”
“…….”
워커 실트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깰 때가 된 거 같아서 기내식 먹으라고…….”
“기내식?”
생각지 못한 단어에 자동으로 고개가 움직이고 보였다.
널찍한 좌석과 눕듯이 쭉 뻗은 팔다리.
넓은 통로 너머 점점이 흩어진 좌석에 죽은 듯이 잠든 동료들.
비행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넓은 공간에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여기가 비행기라고?”
등받이 위로 몸을 내민 워커 실트는 즉시 대답했다.
“맞아. 한국행 비행기 안이다.”
“뭔 좌석이 이렇게 넓어?”
“일등석 통째로 다 샀어. 로롤로 카드로 긁었다.”
“일등석?!”
자신도 모르게 몸이 일어나고 주위로 시선이 움직였다.
워커 실트의 말대로였다.
점점이 흩어진 좌석은 텅텅 비어 있고 승객은 동료들뿐이다!
그리고 통로 앞쪽에 있는 제복 차림의 승무원과 눈이 마주쳤다.
빙그레 웃으며 빠르게 다가와 고개 숙이는 승무원.
“손님.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난 토카이 귀부 와인! 얘는 정신이 번쩍 드는 얼음물 한잔!”
워커 실트의 당당한 요구에 승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손님. 우유랑 얼음물 한잔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와인이라니까! 귀부 와인! 혀가 녹아내릴 정도로 단 토카이 와슈라고!”
“네. 알겠습니다. 어린이 손님!”
승무원은 가볍게 고개 숙여 대답하고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 곧 다시 돌아왔다.
“자 키가 쑥쑥 자라는 우유하고 시원한 얼음물입니다!”
싱긋 웃으며 워커 실트에게 우유를, 자신에게 얼음 물을 건네는 승무원.
“젠장! 젠장! 꼬맹이 아니라니까!”
워커 실트가 우유를 들이켤 때.
천문석은 단숨에 얼음물을 마셨다.
찬물에 멍한 정신이 번쩍 깨어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진짜 인천행 비행기인가요?!”
승문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창문을 가리켰다.
“이제 곧 제주도가 보이겠네요.”
승무원의 말대로였다. 창문 너머 멀리 푸른 섬 제주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
철수 신부님, 영희 수녀님.
칠성파 보스 마혁진.
검은 폭풍 이세영 선생님.
바이크 라이더 리더 임수경.
국정원 최 팀장과 김 대리.
초월자 김철수.
염동 대협 마혁진.
……
2004년 부산에서 시작해 2000년 세기말 대한민국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과거를 변화시켰다.
최선을 다해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득한 하늘의 인과는 그 누구도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법!
남일도 던전에서 행했던 수많은 일의 결과를 확인할 때가 왔다!
“…….”
시선이 빙글 돌아가 한 곳에서 멈췄다.
던전에 입장할 때처럼 기절한 채 좌석에 널브러진 장철 헌터.
장철 헌터의 오랜 바람의 결과가 서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철 헌터의 딸, 장세린!
‘장민 대표에게 미리 전화해 볼까?’
생각과 동시에 고개가 저어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더는 끼어들 수도 끼어들어서도 안 된다.
서울에서 확인하게 될 결과, 모든 기쁨과 슬픔은 오롯이 세린이 아빠, 장철 헌터의 것이니까.
그러나 천문석은 확신할 수 있었다.
모두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질 거라는 것을!
‘장철 헌터님. 곧 만날 겁니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을 때.
워커 실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제 우리는 일 이야기하자! 우선 소리 좀 차단하고.”
워커 실트는 공구 벨트에서 구슬을 꺼내 휙 던졌다.
파삭-
구슬이 깨지는 순간 거미줄 같은 빛의 선이 퍼져 나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야기? 아, 미안 깜빡했다. 이거 돌려줄게.”
천문석은 잽싸게 잡낭에서 워커 실트의 회중시계와 줄자를 꺼내 넘겼다.
“앗! 내 시계! 내 현철 줄자! 무사히 돌아왔구나!”
회중시계와 줄자를 받은 워커는 희희낙락 웃다가 돌연 고개를 저었다.
“이게 아니라 일 이야기! 기동 병참 도시 이야기하자고!”
“기동 병참 도시? 차원 좌표 추적기 넘겨줬잖아?”
“차원 좌표 추적기 받았지! 하지만 기동 병참 도시로 게이트를 열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하다! 이세기, 내가 널 고용하겠다!”
“날 고용한다고?”
“그래! 엄청난 대가를 줄게!”
‘워커 실트와 함께 일을 한다면?!’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사람 사이에는 호불호와는 다른 상성이 있었다.
던전에서 나와 워커 실트를 만나고 2시간도 걸리지 않아 3번 기절했다!
자신과 워커 실트의 상성은 최악이다!
같이 움직이는 순간 시너지가 아닌 마이너스 시너지 발생한다!
감이, 촉이, 경험이 말했다.
워커 실트와 일하는 순간 남일도 던전 이상의 개고생을 하게 된다고!
“아쉽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안 돼.”
천문석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워커 실트는 손가락을 하나 세워 내밀었다.
“일당으로 큰 거 한 장! 하루에 백만씩 줄게.”
“큰 거 한 장? 백만 원?”
천문석은 피식 웃었다.
일당 100만 원.
예전의 자신, 알바 천문석이라면 눈이 돌아갈 엄청난 금액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마업을 벗었고, 초절정의 벽을 한번 무너뜨렸다.
무한동력 천마신공이 사라지고, 내력마저 바닥나 지금 당장 초절정의 무위를 펼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마업을 벗은 이상 기경팔맥에 내력만 채워 넣으면 초절정의 무위를 펼치는 건 시간문제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는 순간 1년이면 자신의 오랜 꿈 건물주를 이룰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다.
즉, 일당 100만 원으로 사고뭉치 워커 실트와 엮이는 건 전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가면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야, 됐어. 나 너무 고생해서 일주일 아니 한 달쯤 쉬어야…….”
불쑥 튀어나온 워커 실트의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100만 달러.”
“일당이 아니라 연봉이었냐?”
“일당 맞아. 하루 100만 달러.”
“어? 100만 달러? 12억! 일당이 12억이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황당함에 외치는 순간 깨달았다.
‘자리!’
지금 자신과 동료들이 앉은 ‘자리’는 전부 일등석이다!
게다가 일등석의 다른 좌석은 모두 텅 비어 있다.
천문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확인했다.
“너 혹시 부자냐?”
워커 실트는 말없이 공구 벨트에 걸린 스패너를 등받이 너머로 내밀었다.
“…….”
부자냐는 질문에 튀어나온 스패너.
멍하니 스패너를 볼 때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지금 이곳은 비행기 안이다!
“잠깐 너 비행기에 스패너는 어떻게 들고 탄 거야?! 엇! 내 무기, 퐁퐁이, 용용이는 어디 있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는 순간 등받이를 밟고 올라 탁탁- 짐칸을 두들기는 워커 실트.
“여기 무장박스 안에 전부 있다!”
“무장박스를 객실에 실었다고? 그게 되는 거야?!”
“난 당연히 되지! 이게 있거든! 카카캌-”
기다렸다는 듯이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내미는 워커 실트.
“……!”
종이를 낚아채 펼치자 날개와 양발을 활짝 펼친 독수리와 글자가 보였다.
[UNITED STATES OF AMERICA]
[DEPARTMENT OF STATE]
“미국 국무부 문서? 이걸 네가 왜?!”
“나 외교관이거든.”
“……뭐?”
“나 미국 외교관이라고.”
“외교관? 미국 외교관이라고?! 어떻게?!”
워커 실트의 손은 다시 한번 공구 벨트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거 붙이면 어디든 무사통과라서 미국 외교관 하기로 했어.”
워커 실트의 손에는 스티커가 있었다.
[미국 외교 행랑]
한글로 적힌 스티커가!
“잠깐! 외교관이 하고 싶다고 된다고?! 스티커는 왜 한글인데? 전부 구라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그게 먹힌다고?!”
“당연히 먹히지! 여기 외교관 임명 문서 안 보여? 안 먹히면 내가 이걸 차고 비행기에 못 탔지!”
워커 실트는 스패너와 공구가 줄줄이 달린 공구 벨트를 탁탁 두들겼다.
[미국 외교 행랑]
한글 스티커가 붙은 공구 벨트를!
공구 벨트, 스티커, 미 국무부 문서를 빠르게 오가던 시선이 워커 실트에게 멈췄다.
‘이 녀석 정체가 뭐야?!’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지만, 답은 나오지 않고 의문만 눈덩이처럼 커졌다.
“너 정체가 뭐야?!”
“그 답은 여기에 있다!”
자신도 모르게 외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스패너를 내미는 워커 실트.
“…….”
전생에서 현생까지 수많은 적과 동료를 만났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워커 실트가 최고였다.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보긴 뭘 봐? 볼트 조이는 스패너잖아!”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을 보라고 본질을!”
“설마 마도구?!”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스패너를 잡고 내력을 밀어 넣는 순간 느껴졌다.
반도체 집적 회로처럼 끝없이 이어진 마법 회로와 찰나의 순간 스패너 끝에 도달한 내력!
내력 전도율이 그동안 만져 본 그 어떤 금속보다 빠르다!
“이 전도율! 이 스패너 설마?!”
“맞다! 더럽게 비싼 정제 마력 금속 중에서도 나이트 아머 코어에 들어가는 마력 금속만 모아서 만든 특제 스패너다!”
“나이트 아머 코어? 전술 등급 마도구, 돈 있어서도 못사는 그 나이트 아머?!”
“그래 이 스패너에는 나이트 아머 3대분의 마력 금속이 들어 있다!”
나이트 아머 3대를 포기하고 스패너를 만들었다고?!
“미친! 당연히 나이트 아머를 만들어야지! 볼트 조이는 스패너를 왜 만들어?!”
“이건 그냥 스패너가 아니라니까! 본질을 보라니까! 본질을!”
“그러니까 그 본질이 뭔데? 더럽게 비싼 스패너?! 허허허-”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워커 실트는 스패너 구석을 가리켰다.
“여기를 뭐라고! 여기! 내가 커다랗게 새겨놨잖아!”
[W. S. industry.]
“W. S. 인더스트리…… 미친! 나이트 아머 제작사에서 이런 뻘짓을 했다고?! 와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다더니…….”
깡-
워커 실트는 스패너를 두들겨 말을 끊고 툭 질문했다.
“야, 내 이름이 뭐냐?”
“워커 실트…….”
대답하는 순간 쾅- 머릿속에 벼락이 떨어졌다.
천문석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스패너를 봤다.
[W. S. industry.]
스패너에 새겨진 상표!
의자 등받이 위로 상체를 내민 꼬맹이의 이름.
‘워커 실트!’
“설마? 아니지! 하긴 그냥 재벌 그룹도 아니고 초거대기업인데 그럴 리가 없지! 잠든 사람 얼굴에 낙서하는 꼬맹이가? 야, 방금 농담은 재밌었다! 하하하-”
천문석은 웃음을 터트렸다.
“…….”
그러나 워커 실트는 웃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를 드리운 채 나이트 아머 3대분 자원으로 만든 스패너로 툭툭 어깨만 두들겼다.
하, 하하-
천문석의 웃음이 어느새 멈췄을 때.
워커 실트는 씩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궁금한 거 있지? 물어봐.”
천문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초거대기업 W. S. 인더스트리. 이니셜 W. S. 혹시 워커 실트?”
등받이 위로 올라온 얼굴이 가볍게 위아래로 까닥이고, 길가에 방치된 자전거 주인을 밝히듯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 맞아. 워커 실트 인더스트리. 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