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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1227화 (1,228/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1227화>

‘지금? 이렇게 돌아간다고?!’

마혁진은 허공에 손을 뻗은 채로 굳어 버렸다.

반짝이던 마력 회로, 가득 차오른 수면, 수면 안으로 침잠하던 이세기와 장철까지 모든 게 사라졌다.

남겨진 건 시야를 가득 메운 수천수만 개의 물방울과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이세기의 마지막 입 모양뿐이었다.

[염동! 할 수 있다!]

[우리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원래 끝이 좋으면 다 좋은…….]

“좋은 법이라고? 새꺄! 그게 네가 할 말이냐?! 이세기 미친놈아 당장 돌아와!”

절절한 분노를 담은 외침을 터트리며 던전 출구가 열렸던 공간에 역장을 뻗었다.

텅 빈 허공에는 물방울만 흩날릴 뿐 출구는 흔적도 없었다!

“신동대문 시청 공고문……!”

절절한 분노를 토할 때 마혁진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어, 내가 왜 분노하지?”

‘시청 공고문 도난 사건의 범인 이세기…….’

대답하듯 마음에서 속삭임이 들려올 때.

마혁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걸로 분노하는 건 말이 안 돼!”

짙은 안개가 낀 듯 뿌옇던 머리가 맑아지고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공고문 도난 사건 범인이 이세기란 건. 끊어진 한강 다리를 이었을 때 이미 알았으니까!”

그렇다! 자신은 이미 이세기가 범인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자신은 마치 처음 깨달은 것처럼 이세기를 추궁했다!

“왜? 아니 어떻게 이걸 잊었지? 이미 알고 있던 걸 어떻게……?!”

순간 머릿속에 파팟- 불꽃이 튀고 장면이 떠올랐다.

이세기가 웃음기가 사라진 진지한 얼굴로 질문하던 모습!

‘염동. 따라 해 봐. 검은 동전.’

‘그 동전 무슨 색깔?’

‘검은색 동전을 두 글자로 말하면?’

질문을 듣는 순간 쾅! 벼락이 떨어진 듯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단 하나의 문장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신동대문 시청 공고문 도난 사건!’

이미 청담대교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 기억은 까맣게 잊은 채, 처음 안 것처럼 이세기를 몰아붙였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내가 홀렸다고?!’

생각과 동시에 이세기의 마지막 외침이 떠올랐다.

‘잠깐! 내가 전부 설명할 수……!’

던전 출구에서 튀어나온 물기둥에 삼켜져 끝까지 이어지지 않은 외침!

당연히 뒤에 이어질 말은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변명’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전하려는 무언가가 있었다면?!

“……!”

이세기가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으면서도 뻐금뻐금 입 모양으로 전한 뜻!

‘염동! 할 수 있다!’

‘우리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원래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마치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앞둔 사람을 위로하는 듯한 모습!

‘변명’이라면 마지막 외침과 입 모양으로 전한 뜻이 연결되지 않는다!

‘이세기는 변명이 아닌 ‘무언가’를 자신에게 전하려 했다!’

깨달음의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전율이 전신을 달렸다.

그 ‘무언가’가 자신의 기억을 왜곡했다!

“……!”

마혁진은 하늘과 땅, 숲과 능선! 주위의 모든 곳을 향해 역장을 뻗었다.

각성력의 태양.

동심원을 그리는 빛의 고리.

붉은 노을이 드리워진 숲과 능선.

담요 위에 누운 청년 마혁진뿐 주위 어디에도 걸리는 건 없었다.

하지만 마혁진은 실망하지 않았다.

아직 확인하지 않은 곳이 있었으니까.

밖에 없다면 당연히 안을 찾아야 한다!

바로 자신!

온 정신을 집중해 전신을 훑기도 전에 보였다.

이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물건!

마혁진은 부르르 떨리는 손을 활짝 펼쳤다.

칼로리바 포장지!

이세기가 ‘운명’이라며 자신에게 건네준 칼로리바 포장지!

‘이거다!’

마혁진은 칼로리바 포장지를 샅샅이 훑었고 곧 발견했다.

[염동]

구겨진 포장지에 써진 글자!

다급히 포장지를 펼쳐 샅샅이 살피자 미처 보지 못했던 글자가 보였다.

[1 - 염동 대협]

그리고 그 아래 깨알같이 작은 글자로 새겨진 내용!

-안전 장갑을 만든 사람을 찾아라. 네 동료가 될 거다.

-강북의 모든 하천이 한강과 하나로 연결된다. 그 물길을 이동할 수 있는 바지선을 만들어라.

……

‘이게 뭐야?!’

칼로리바 포장지 안쪽에는 미래의 일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이 순간 마혁진은 깨달았다.

이세기가 칼로리바 쪽지의 비밀을 말해 주지 못한 이유를!

이곳 2000년 세기말 대한민국에 남는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칼로리바 포장지!

자신이 남겠다고 말하기도 전에 준비된 이 쪽지가 증거였다!

마혁진은 재빨리 다른 쪽지를 모두 펼쳤다.

[2 – 안전 장갑]

[3 – 귀인]

[4 - 이세기]

쪽지에 적힌 이름을 보는 순간 첫 번째 쪽지로 시선이 움직였다.

[1 - 염동 대협]

쪽지를 받을 사람의 이름이다!

‘안전 장갑, 1번 쪽지에서 찾으라는 동료다! 귀인? 귀인이 누구야?! 아니지 지금 당장 확인할 건 4번 쪽지다!’

이세기!

“2020년으로 돌아갔는데? 이건 왜 준 거야? 20년 후에 전하라고?!”

4번 쪽지를 펼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게 뭐야?!”

마혁진은 정신없이 쪽지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마음속에 경악이 쌓였다.

쪽지를 끝까지 읽는 순간 깨달았다.

남중국 푸저우에서 시작한 이 모든 사건, 재앙, 난장판의 원인을!

‘이세기! 이세기가 원인이다!’

“야, 이 씹! 이 새끼 너 다 알고 있었으면서! 으아아아악-”

진실을 깨닫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괴성을 들어야 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이세기는 장철과 함께 2020년으로 돌아갔으니까!

아니, 3달 후 서초구 한 빌딩에 이세기, 장철, 마혁진 과거의 자신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들과 만날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는 서초구 빌딩에서 미래의 자신과 만난 기억은 없었으니까!

이세기는 진짜 미친놈이 맞았다!

과거, 현재, 미래를 정교하게 이어붙인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웠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린, 모든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장대한 계획을!

그리고 그 장대한 계획을 어이없게도 칼로리바 포장지에 새겨 자신에게 넘겼다!

재앙의 화신 이세기는 사라졌지만, 이세기의 계획은 끝나지 않았다.

칼로리바 포장지에 새겨진 수많은 할 일들이 있었으니까!

“……!”

지금이라도 칼로리바 포장지를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 포장지에는 게이트 전쟁 승리를 위한 이세기의 계획이 새겨져 있었다.

이세기 녀석의 외침은 구라가 아닌 진실이었다.

이 칼로리바 포장지는 ‘운명’이었다!

게이트 전쟁에서 승리하는 운명!

자신이 개같이 구르는 운명!

“빌어먹을 처음부터 엮이지 않는 건데! 아니지.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생각과 동시에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한밤중인데도 붉은 노을에 환하게 밝혀진 북한산!

거대한 빛의 고리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고 있다.

아득한 천공에 뜬 각성력의 태양은 확연히 작아졌지만, 여전히 맥동하고 있다.

마력 폭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세계에 각성자가 탄생하기 위해선 마력 폭풍이 끝날 때까지 보안키를 가지고 이 암반 위에 있어야 한다!

카캬카카카캌-

이세기 녀석의 사람을 빡치게 만드는 웃음소리가 천지사방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운명의 올가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지금 마혁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세기! 20년 후에 반드시 갚아 준다!”

20년 후를 기약하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토해 내는 것!

염동 대협 마혁진의 절절한 외침이 고요한 북한산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마혁진의 바람이 이뤄질 가능성은 없었다.

이름도 없이, 석(石), 돌멩이라 불린 어린 시절 절친을 만난 후.

전생의 뒷골목 양아치에서 현생의 염동 대협 마혁진까지.

돌멩이, 천문석에게 당한 수많은 사람이 그러하듯이!

이번에도 인과가 빗겨나가고 있었다.

마혁진의 절절한 분노는 ‘이세기’에게 향했으니까.

그렇다. 마혁진은 애초에 이름부터 잘못 알고 있었다.

“이세기! 반드시 복수한다!”

대상을 찾지 못한 외침은 듣는 사람 하나 없이 허공을 떠돌다 흩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마혁진의 손에는 업을 삼켜 기원을 이뤄주는 검은 동전, 흑전이 있었다.

마혁진이 분노를 담아 맹세할 때마다.

흑전은 깜빡, 깜빡 소리 없이 반짝였다.

마치 주문 접수를 알리는 벨처럼!

그리고 북한산의 한 봉우리에 마혁진의 메아리가 닿았다.

일렁이는 아지랑이에 가려진 암반 위.

검은 로브를 담요처럼 덮고 잠든 7살 남짓 꼬맹이가 있었다.

“아아, 안 돼. 엮이면 안 돼…….”

꼬맹이는 지독한 악몽을 꾸는 듯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걔가 범인이라고 철을 가져간 석. 돌멩이 그놈이 강철을 날름한 범인이라고…….”

그러나 아무리 잠꼬대로 외쳐도 현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돌철 황제는 이미 명운을 태운 절멸의 빛으로 인과를 잇고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힘과 기억에 치명타를 입은 채로, 게이트가 열려 마경이 된 미래의 서울로!

그리고 그건 지금 암반 위에 잠든 꼬맹이, 김철수의 미래였다.

마혁진.

칼로리바 포장지, 흑전.

명운을 태워 힘과 기억에 치명타를 입은 초월자 김철수.

마혁진은 염동 대협이 되어 게이트 전쟁에 던져졌고.

돌철 황제는 명운을 태워 세계의 나무에 실리는 부하가 확 줄어들었다.

끊어진 인과가 이어지고, 중간이 텅 빈 도미노가 연결됐다.

빛을 가리던 큰 나무의 가지가 잘려 나가고 작은 나무에 햇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문석이 의도한 것과 의도하지 않은 모든 인과가 이어지며 2차 세기말 대한민국 사건은 마무리됐다.

*   *   *

빛도 소리도 없다.

느껴지는 감각은 아찔한 부유감뿐!

천문석은 방향감각을 잃은 채 끝없이 가라앉으며 방금 전 일어난 일들을 되짚고 있었다.

자신이 진실을 밝히려는 순간 일어난 일들!

마혁진은 공고문 도난 사건을 외칠 때.

틱- 회중시계 초침은 12시에 도착했고.

파아앙- 마력 회로에서 치솟은 물기둥이 자신을 삼켰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모두 예상했던 일이니까.

하지만 디테일을 살피면 모든게 잘못됐다!

회중시계 초침은 예상보다 ‘빨리’ 12시에 도착했고.

마력 회로에서 치솟은 물기둥은 ‘노린 것처럼’ 자신과 장철만 낚아챘다.

그리고 마혁진은 이미 알고 있던 공고문 도난 사건을 ‘처음 안 것처럼’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세 개나 겹쳤다!

범인은 업을 삼키는 마물, 흑전!

흑전은 마혁진을 홀리고, 회중시계 초침을 빨리 움직이고, 마력 회로에서 물기둥이 치솟게 만들었다!

목적은 자신의 입을 막기 위해서다!

‘정체가 뭐야?!’

흑전의 목적은 감을 잡았다.

그러나 인과를 비트는 정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어지간한 초월자도 이렇게 쉽게 인과를 비틀지는 못한다.

겉모습만 동전일 뿐 흑전은 마불 이상의 마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흑전이 2000년에 홀로 남은 염동 대협 마혁진에게 달라붙었다!

지금까지 겪은 사건, 재앙, 난장판을 마혁진 혼자서 헤쳐나가야 한다!

‘염동 녀석 잘할 수 있을까?! 있겠지! 그래 잘할 수 있을 거야!!’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행복회로를 돌릴 때 돌연 느껴지는 게 있었다.

따뜻함!

번쩍 눈을 뜨자 정면에 수직으로 일어선 빛의 벽이 보였다.

‘수면이다!’

천문석은 수면을 향해 헤엄쳤다.

내력은 바닥났는데 몸에는 곰 같은 장철 헌터에 무기까지 주렁주렁 매달린 상태!

‘할 수 있다! 으아악-’

모든 힘을 끌어모아도 몸은 느릿느릿, 천천히 나아갔다.

이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저 수면 밖이 목적지가 아니라면?’

선택의 여지는 없다!

무조건 나가야 한다!

천문석은 안간힘을 다해 헤엄쳤고 곧 수면 너머가 보였다.

콘크리트 기둥과 벽이 그대로 드러난 공사 중인 공간.

곳곳에 의자와 테이블, 컴퓨터가 나뒹굴고 있는 낯익은 모습!

워커 실트와 만났던 건물.

던전 입구가 열렸던 그때 그 장소다!

엉뚱한 시공간으로 연결되는 일은 없었다.

제대로 돌아왔다!

천문석은 확신과 동시에 손을 뻗었다.

수면까지 10여 미터!

손끝에서 출발한 자동 줄자 몸체가 물을 가로질러 수면을 향해 나아갔다.

자동 줄자 몸체가 수면에 닿는 순간 수면은 유리처럼 와작- 깨져나가고 물이 쏟아졌다.

촤아아아-

천문석과 장철은 물살에 휩쓸려 단숨에 깨진 수면 너머로 던져졌다.

파아앗-

막힌 숨이 터지고, 뜨거운 공기가 폐에 담기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남일도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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